“바쁘시면 저는 먼저 가 볼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여진 씨 연락처라도 알 수 있을까요? 나중에 혹시라도 제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도울 일 있으면 제가...”주먹을 꽉 쥔 박진성의 손등에 핏줄이 울퉁불퉁 불거졌다. 보아하니 남자는 아직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계속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러내며 차갑게 민여진을 노려보았다.민여진은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셨다. 점점 커지는 압박감에 호흡을 가다듬고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죄송하지만, 저는 그럴 생각이 없어서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진호영은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는 것 같았다.“제가 나이가 좀 많죠? 여진 씨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 저도 가 볼게요.”진호연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레스토랑을 나섰다. 아마도 자존심에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민여진의 표정이 점점 복잡미묘해졌다. 박진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얘기해야 한다는 게 씁쓸했다.“왜? 미련 남았어?”박진성은 어딘가 착잡해 보이는 민여진의 표정을 보는 순간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민여진, 네가 아무리 눈이 멀었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을 상대로 흔들려? 넌 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려는 거야?”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박진성 씨, 제발 다른 사람 외모 갖고 비하 좀 하지 마!”“외모 비하라고?”박진성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억센 손길로 민여진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만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벌써 저 인간부터 감싸고 돌아? 네가 일하러 온 거지, 남자 꼬시러 온 거야?”민여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박진성의 막말은 언제나 민여진에게만 거침없이 쏟아졌다.익숙해질 때가 됐지만 저절로 붉어지는 눈시울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나타나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애썼다.박진성이 손아귀에 힘을 주며 무어라 더
저택 마당에 도착하자 서원은 민여진을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다시 차를 끌고 떠났다.민여진은 소파가 있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2층에서 불이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2층을 쳐다보았다.그 위에 있는 인물이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곧이어, 엄청난 압박감이 밀려와 민여진의 온몸을 짓누르듯 감쌌다.“올라와.”박진성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이미 방문을 열어둔 채 민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여진의 몸이 위기를 감지한 듯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방에 도착하자마자 민여진은 박진성에 의해 속절없이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 곧이어 남자가 그녀의 몸 위 올라왔다. 싸늘한 눈빛에는 서슬 퍼런 분노가 서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보였다.“민여진, 내가 그동안 너한테 너무 잘해줬나 봐. 이제는 대놓고 기어오르네?”박진성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민여진의 웃는 얼굴이 계속 떠올라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난 이미 너한테 충분한 자유를 줬고, 네가 뭘 하든 최대한 참아준 것 같은데. 그 보답이 고작 이거야? 만난 지 30분 동안 된 남자나 감싸고 돌아? 넌 도대체 어디까지 바닥을 칠 생각이야? 방현수는 그렇다 쳐도, 저 남자는 도대체 뭔데?”박진성의 말이 점점 심해졌다.“네 얼굴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든 매력발산 해보고 싶었어? 그래서 기를 쓰고 남자들 꼬시려고 드는 거야?”그 순간, 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박진성의 조롱으로 생긴 수치심과 불신이 뒤엉켜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너 미쳤어?”그녀는 박진성을 힘껏 밀쳐냈다. 너무 화가 나 폐까지 아팠다.“난 얼굴을 망친 거지, 적어도 일하는 곳에서 남자 꼬시는 미친년은 아니야! 네가 더럽다고 나까지 더럽게 생각하지 마. 모든 사람들이 다 너처럼 추악한 건 아니야!”“내가 더러워?”박진성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기어오르는 걸 그냥 오랫동안 모른 척해줬더니 이제는 이빨까지 세우고 있었다.“좋아. 진짜 더러운 게 뭔지 제대로 보여
매니저는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여진 씨, 나도 여진 씨 업무능력은 정말 높게 평가해요. 그러니까 다시는 나 실망시키지 마요.”민여진은 멍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왔다. 직원 공간으로 돌아오자 청소 아주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다급히 다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여진아, 어떻게 된 일이야? 호연이는 너 마음에 든다고 했는데 네가 거절했다며? 지금 네 꼴을 봐, 너도 멀쩡한 여자가 아닌데, 도대체 뭘 가려? 평생 애도 못 낳고 혼자 살 작정이야?”불만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날카롭게 때려 박혔다. 민여진은 듣기 거북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아주머니, 저는 그냥 만나보겠다고만 했지, 한 번 만나본다고 꼭 사귀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얘가 정말!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 너 같은 애를 호연이 말고 누가 받아줄 것 같은데? 걔는 워낙 어릴 때부터 남 챙기는 게 익숙한 애라 네가 못생긴 장님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여 주는 거야. 그만한 사람이 어디 흔한 줄 아니? 넌 왜 쓸데없이 눈만 높아? 보이지도 않으면서.”그 말에 민여진은 또 혹시 자기가 너무 버릇없이 구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차분히 고개를 들어 다시 대답했다.“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마음이 안 가면 끝인 거에요. 억지로 이어준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라고요. 제가 좋다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혼자 살게요. 아주머니는 제 일에 굳이 신경 안 쓰셔도 돼요.”말을 마친 민여진이 벽을 더듬으며 휴게실로 향했다. 등 뒤에서는 따가운 청소 아주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목덜미의 키스 마크에 아주머니의 표정이 날카롭게 바뀌더니 외쳤다.“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얌전한 앤 줄 알고 좋은 사람 소개해 줬더니, 이렇게 천박한 짓이나 하고 다니는 거 봐라! 이렇게 천박하게 구니까 호연이 같은 착한 남자가 눈에 안 차겠지.”민여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아주머니를 바라보자 아주머니도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한
그 청소 아주머니는 혹시라도 민여진이 제대로 넘어지지 않을까 봐 걱정되라고 한 듯 일부러 비눗물을 바닥에 뿌려놓았다. 민여진을 제대로 망신시키려던 작정한 게 분명했다.민여진은 이때까지 함께 일해오며 레스토랑의 모든 직원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런 직장에서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결국, 민여진은 누군가에게 미움받고 말았다.“괜찮아요.”민여진은 애써 고통을 삼켜내며 반대쪽 손을 뻗었다.“죄송한데 저 좀 일으켜 주실래요? 옷 갈아입고 오면 바로 연주 시간 될 거예요. 부탁드릴게요.”민여진의 의지에 직원도 뭐라 더 말을 꺼낼 수 없어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연주하는 내내 민여진은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꿈치에서는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계속됐다. 하지만 손님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민여진은 이를 악물고 끝까지 연주를 마쳤다. 연주가 다 끝나자 그녀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퇴근 시간이 되자 서원은 평소처럼 레스토랑 앞에서 민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창백한 얼굴과 어떻게든 뭔가를 참아내려는 그녀의 표정을 마주한 순간, 서원도 적잖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여진 씨, 괜찮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민여진은 힘없이 대답했다.“서원 씨, 일단 아무것도 묻지 말고 병원부터 데려가 줄래요?”병원에서 민여진의 팔꿈치를 처음 보게 된 서원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팔꿈치는 퉁퉁 부어 피고름이 차 있었다.민여진이 치료를 받는 내내 서원의 안색이 어두웠다.“여진 씨, 어떻게 된 일이에요? 누가 괴롭힌 건 아니죠?”“아니에요. 그냥 내가 실수로 넘어진 거예요.”민여진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서원 씨, 오늘 일은 진성 씨한테 얘기하지 말아 줄래요?”“왜요?”“일하다가 다쳤다는 거 알면 진성 씨는 분명 화부터 낼 거예요. 진성 씨 아니어
“민여진, 네가 언제까지 일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박진성은 휴대폰을 꺼내 녹음된 통화 내용을 재생했다.“여진 씨요? 여진 씨라면 9시쯤에 퇴근 했는데요. 그다음부터는 잘 모르겠네요. 피아노 연주 듣고 싶으신 거라면 내일 다시 오시는 걸 권장해 드립니다.”그 순간, 민여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설마설마했는데 박진성은 이미 그녀가 댈 수 있는 모든 핑계를 다 차단해버리고 말았다.그의 눈빛에 차 있던 분노의 농도가 점점 짙어졌다.“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거짓말이야. 왜 자꾸 내 인내심을 시험해보려고 하는 거지? 방현수에 이어서, 이번엔 또 진호연이야?”민여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박진성이 진호연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단단한 손에 턱이 붙잡혔다. 순식간에 욱신거리는 고통이 느껴졌다.민여진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에는 서늘한 분노만이 남아 있었다. 단 하룻밤 만에 둘의 관계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서로를 밀어내고, 경계하고 불신했던 그때로.“레스토랑에서 나온 지 두 시간이 지나도록 어디 있었던 거야?”박진성은 이를 꽉 깨문 채 낮게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민여진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매정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박진성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벗어.”민여진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박진성을 바라보자 박진성이 코웃음을 쳤다.“왜, 못 하겠어? 네 몸에 내가 아닌 다른 남자 흔적이라도 남았나 보지?”민여진이 덜덜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이러지 마...”“네가 날 이렇게 만들잖아!”박진성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민여진을 노려보며 그녀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 침대로 내던졌다. 이윽고 자신의 몸으로 민여진을 아래에 가둔 박진성이 속삭였다.“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난 여기서 네가 오기만 기다렸어. 그런데 넌 뭐야? 왜 매번 내 한계를 넘으려고 하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기회 두 번 안 줘. 네 손으로 직접 벗어. 내가
민여진이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박진성이 다시 물었다.“많이 다쳤어?”그 말에 민여진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화 안 나?”당연히 박진성은 화가 나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단 한 순간도 화가 나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특히 오늘 밤 민여진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던 여자가 지금 눈앞에서 극심한 고통을 애써 참아가며 자신의 상처와 약점을 숨기고 있었다. 이런 모습에 박진성은 어느 정도 화가 누그러진 모습을 보였다.민여진이 자신의 부상 사실을 숨긴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부상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 역시 박진성 때문이었다.“처음부터 다쳤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으면 화낼 일도 없었을 거야.”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박진성은 곧장 강태화에게 당장 저택으로 오라는 전화를 걸었다.민여진은 몸도 일으키지 못한 채 침대 위에 누워 다급히 말했다.“아... 아니야! 굳이 강 선생님까지 부르지 마! 시간도 이미 너무 늦었고, 병원도 다녀왔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돈 받으면서 일하는데 뭐 어때. 그리고 난 지금 네가 정확히 어떻게 다쳤는지, 심각한지 아닌지 확인해야겠거든.”민여진이 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별로 안 심해, 맹세할게! 일상생활도 문제없어!”박진성은 민여진의 대답에 코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비웃었다.“고작 일하겠다고 팔 한쪽을 아예 버릴 생각이야?”민여진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네가 일하는 거 허락한 이상, 다시 번복하는 일 없을 테니까. 네가 일을 하든 말든 다 네 자유니까 너무 불안해할 필요 없어.”말을 마친 박진성이 다시 방을 나섰다. 민여진은 여전히 침대 위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이윽고 박진성은 얼음주머니를 들고 돌아와 민여진의 팔 위에 대 주었다. 찌르는 듯한 고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것 같자 그녀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때마침
민여진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강태화는 왜 박진성이 그녀를 막을 수 없었던 건지 알 수 있었다.박진성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였지만 차갑게 식어있던 눈빛은 이미 따뜻하게 변해 있었고 그 속에는 은은한 미소가 보였다.“응, 나도 네가 해낼 것 같아.”분위기를 파악한 강태화가 자리를 떴다. 민여진은 박진성에게서 받은 악보를 찾으려고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맞다, 진성 씨. 나랑 그 진호연이라는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오늘도 그 사람이랑은 안 만났고, 앞으로도 만나는 일 없을 거야.”그 말만을 남긴 후, 민여진은 난간을 따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박진성의 조각 같은 얼굴을 따뜻한 조명을 받아 한층 더 부드러워 보였다.‘그러니까 방금 자기랑 진호연 사이에 대해서 해명한 거지?’예전의 민여진이었다면 박진성에게 절대 말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그녀가 이제는 꽤 귀여워졌다.다음 날, 민여진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나무 악보에 적힌 곡을 손에 익히기 시작했다.피아노도 없는 방 안에서 민여진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악보를 연습하고 있었다. 정수향이 때마침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여진아, 그만 만지작대고 얼른 내려와 봐.”민여진은 정수향의 말에 악보를 덮었지만 손에서 내려놓지는 않았다.“무슨 일이야, 엄마?”“아이고, 서프라이즈 선물인데 말하면 안 되지. 네가 직접 내려와서 확인해.”정수향이 무슨 일인지 알려주지 않자 민여진도 별다른 의심 없이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정수향은 그녀의 손을 잡고 미지근한 무언가의 위에 민여진의 손을 갖다 댔다.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이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물체를 꾹 눌러보았다. 이윽고 안쪽에서 부드러운 선율이 울려 퍼졌다.‘내 손이... 건반 위에 있는 건가?’정수향이 입을 가리며 웃어 보였다.“꽃에 물 주고 있었는데 거실에 이렇게 큰 게 와 있지 뭐니. 깜짝 놀랐다니까. 난 잘 모르긴 하지만, 이거 비싼 거 맞지?”짐을 다 나른 상우가 환
“그래도 미안해서 못 받겠다면, 첫 월급 받아서 밥이나 한 끼 사.”피아노가 3억이 넘어가는데 겨우 한 끼 식사 대접하는 걸로 퉁 칠 수가 있을까?민여진은 도무지 박진성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딱히 거절할 방법도 없었다. 대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월급이라는 단어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민여진은 더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좋아.”전화 통화를 마친 민여진은 피아노 앞에 앉아 나무 악보를 만지며 연주를 시작했다.타고난 재능이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전 내내 연습한 끝에 대부분의 곡에 손이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모든 곡을 완벽하게 숙지한 게 아니었던 탓에 악보를 챙겨 레스토랑으로 출근했다.프런트 직원이 민여진의 손에 들려있는 점자 악보를 보고 놀란 듯 물었다.“이게 뭐예요? 소장 가치가 있어 보이는데.”민여진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친구가 준 거예요.”프런트 직원이 장난스레 말했다.“그럼 보통 친구는 아니겠는데요? 이거 못 해도 최소 1억 5천은 할 것 같은데.”“그렇게 비싼 건 아니에요. 그냥 단순 공예품인걸요.”민여진은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본능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민여진은 다시 피아노 쪽으로 손을 올리며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문채연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웨이터가 급히 다가가 그녀를 안내했다.“채연 씨, 친구분께서는 이미 룸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네.”문채연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던 그녀의 귓가에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끌린 문채연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연주 중인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문채연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시선을 읽은 웨이터가 말을 걸었다.“저 피아니스트는 최근에 새로 들어온 분이세요. 실력은 정말 좋은데 외모가 조금... 그렇죠? 손님도 꽤 놀라신 것 같네요.”문채연의 눈이 점점 가늘게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