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아침이 되자 서연은 가장 먼저 변호사 사무실을 검색했다.
밤새 거의 잠을 자지 못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맑았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믿기지 않았던 일들이 아침이 되자 선명해졌다. 도현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더 확인할 것도, 더 물을 것도 없었다. 서연은 상담 예약을 잡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때 침실 문이 열렸다. 도현이었다. 밤새 소파에서 잔 건지 셔츠는 구겨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연은 아무 말 없이 옷장을 열었다. 출근할 옷을 꺼내는 손길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도현을 불편하게 만드는 듯했다. “어제 한 말.” 서연의 손이 멈췄다. “무슨 말.” “이혼하자는 말.” “응.” “진심이야?” 서연은 그제야 돌아봤다. “내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할 사람처럼 보여?”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하룻밤 사이에 결정할 일이 아니잖아.” “하룻밤 사이에 알게 된 일은 맞지.” “서연아.” “나는 충분히 생각했어.” 도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잘못한 건 알아.”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너무 늦게 나온 사과라서였을까. 아니면 그조차도 감정이 빠진 문장처럼 느껴져서였을까. 서연은 옷걸이를 다시 걸어두었다. “그래?” “그래.” “그럼 더 쉬워졌네.” “뭐가.” “이혼.” 도현의 시선이 단번에 차가워졌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그 말에 서연은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 “모른 척하고 계속 살아?”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무슨 뜻인데.”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연은 그 모습이 우스웠다. 결혼 생활 내내 그는 언제나 확신에 찬 사람이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했고, 감정에 흔들리는 법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처음으로 말문이 막혀 있었다. “민채원이랑 언제부터 만났어?” 도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야.” “나한테는 중요해.” “정리할 거야.” “언제부터였냐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 달.”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달. 그 기간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도현이 야근한다고 하면 믿었고, 출장이라고 하면 캐리어를 싸 줬다. 늦게 들어오면 피곤할까 봐 식사를 데워 두기도 했다. 그런 자신이 한순간 바보처럼 느껴졌다. “세 달이나 됐네.” “서연아.” “근데 나는 정말 하나도 몰랐어.” 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당신을 너무 믿었나 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왜?” “내가 전부 거짓말한 사람처럼 들리니까.” 이번에는 서연이 정말 웃었다. “아니야?” 도현의 턱이 굳었다. “내가 너한테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야.”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찔렀다. 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게 더 싫어.” “뭐?” “마음이 있었는데도 다른 여자를 만난 거면 더 최악이잖아.” 도현의 입이 닫혔다. 서연은 가방을 들었다. “오늘 변호사 만나러 갈 거야.” “벌써?” “미룰 이유가 없어서.” “서연아.” 도현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조금만 시간 줘.” 그 말에 서연이 멈췄다. “무슨 시간.” “생각할 시간.” “누가?”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은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 이미 세 달이나 생각했잖아.” “……” “나는 이제 내 생각 좀 할게.” 그 말을 남기고 서연은 집을 나왔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도현은 따라오지 않았다. ⸻ 상담은 생각보다 짧았다. 외도 증거가 명확하다면 이혼 절차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는 설명을 들었다. 재산분할과 위자료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지만 서연은 거의 듣지 않았다. 돈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그보다 더 빨리 끝내고 싶었다. “배우자분께서는 이혼 의사가 있으신가요?” 변호사의 질문에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어제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반대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 질문에 서연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도현이라면 오히려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자신에게 애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아침의 도현은 이상했다.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서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안해서였을까. 체면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이혼은 원하지 않는 걸까. 생각이 복잡해지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도현이었다. 서연은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 전화를 받았다. “왜.” — 어디야? “변호사 사무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 진짜 갔어? “응.” — 지금 나와. 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 얘기하자. “집에서 이미 했잖아.” — 그건 얘기한 게 아니야.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서연은 어쩐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결혼한 뒤 도현이 이렇게 먼저 자신을 붙잡은 적이 있었나. 기억나지 않았다. “저녁에 들어가서 얘기해.” — 몇 시. “몰라.” — 끝나면 연락해. “도현아.” — 왜. “이렇게 하지 마.”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갑자기 남편 노릇 하는 것처럼 굴지 마.” 그리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 저녁 여덟 시가 넘어 집에 들어갔을 때 도현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아직 회사에 있을 시간이었다. 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신발을 벗었다. “오늘 일찍 왔네.” “기다렸어.” 익숙하지 않은 말이었다.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바라봤다. “그게 뭐야.” “이혼 관련 서류.” 그 한마디에 그의 표정이 굳었다. 서연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일단 협의 이혼으로 하고 싶어.” “싫어.” 너무 즉각적인 대답이었다. 서연이 얼굴을 들어 도현을 쳐다 봤다. “뭐?” “이혼 안 해.” 이번에는 서연이 말문을 잃었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채원 정리할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 있지.” “나는 이미 끝났는데.” “나는 안 끝났어.” 서연은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먼저 끝냈잖아.” 도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여자 때문에 이혼하려는 거 아니야.” “그럼 뭐 때문인데.” “당신이 나한테 한 행동 때문에.” 서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나는 당신한테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어.” 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게 말했다. “그럼 다시 만들면 되잖아.” 서연은 그를 바라봤다. “뭘.” “기대할 수 있게.” 이번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바람을 피운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왜 이제 와서 이런 표정을 짓는지.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 도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가 그래.” “내가.” 짧은 대답이었다. 그날 밤 서연은 처음으로 도현과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다. 게스트룸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웠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오래된 연락처들이 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아래로 내리던 손가락이 어느 이름 앞에서 멈췄다. 윤재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통화 목록과 메신저를 잔뜩 채웠던 그 이름. 세월이 지난 만큼 그의 흔적은 휴대전화에선 사라진 지 오래다.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지우지 않고 남겨 둔, 번호만 있을 뿐. 서연은 한참 동안 그 번호를 바라봤다. 전화할 생각은 없었다.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그저 그 이름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그때 화면 위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서연아.] 심장이 순간 멎는 듯했다. 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나 재하야.] 서연의 손끝이 굳었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던 사람이, 하필 모든 게 끝나려는 지금, 다시 나타났다.서연은 호텔로 돌아가지 않았다. 택시 안에서 목적지를 묻는 기사의 말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익숙한 주소를 말했다. 도현과 살던 집. 정확히는 아직 법적으로 자신의 집이기도 한 곳. 가는 내내 재하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게 나도 아직 모르는 부분이야.’ 도현은 자신을 알고 있었다. 전시회에서 만나기 전부터. 재하와 헤어지기 전부터. 심지어 자신의 사진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도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마치 그녀가 돌아올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서연을 발견한 순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있었어?”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도현이 한 걸음 다가왔다. “전화는 왜 안 받아.” “물어볼 게 있어.” 그제야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서연은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그를 바라봤다. “나 언제 처음 봤어?”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도현의 시선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서연은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이 나를 처음 본 게 언제냐고.”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반응만으로 이미 어느 정도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전시회 아니지?” “서연아.” “맞아, 아니야.” “……” “도현아.” 서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번에도 거짓말하면 정말 끝이야.” 도현의 턱이 굳었다. “이미 끝내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더 숨길 이유도 없잖아.” 그 말에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 뒤, 그가 천천히 소파 쪽으로 돌아섰다. “앉아서 얘기하자.” “난 여기서 들을게.” 도현은 잠시 서연을 바라보다 결국 말했다. “사진으로 처음 봤어.” 예상했던 대답인데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언제?” “윤재하가 한국 떠나기 전.” 서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재하 지갑에 있던 사진?” “그래.” “
“그 사람, 차도현 씨를 만났어요.” 서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페 안의 소음이 갑자기 멀어진 것 같았다. “언제라고 했죠?” “윤재하 씨가 서연 씨한테 헤어지자고 하기 전날이요.” 민채원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서연은 다시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봤다. [윤재하, 이번 주 안으로 출국한답니다.] [알아.] [서연 씨한테는요?] [모르게 해.] 몇 줄 되지 않는 대화였다. 그런데 그 안에 자신이 모르고 살았던 시간이 들어 있었다. “이게 정말 도현이 대화라는 걸 어떻게 믿죠?” 채원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게 물으실 줄 알았어요.” 그녀가 화면을 넘겼다. 같은 대화창의 다른 캡처들이 이어졌다. 회사 이야기. 일정. 그리고 중간중간 차도현이라는 이름이 명확하게 적힌 메시지. 서연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정말 몰라요?” “네.”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난 건 어떻게 알아요?” 채원이 잠시 망설였다. “그날 대화가 더 있었어요.” 화면을 한 번 더 넘겼다. [윤재하 만나러 갑니다.] 그 아래 짧은 답. [직접 가세요?] [내가 해야 할 얘기야.] 서연은 손끝을 세게 말아쥐었다. “무슨 얘기였는지는요?” “몰라요.” “정말?” “그건 진짜예요.” 채원이 서연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도 궁금했으니까요.” 서연은 휴대전화를 밀어놓았다. 머리가 아팠다. 재하와 헤어진 날을 몇 년 동안 수도 없이 떠올렸다. 무슨 신호를 놓쳤는지. 언제부터 마음이 변했는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런데 바로 전날 재하는 도현을 만났다. 그리고 도현은 재하가 떠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왜 이제 말하는 거예요?” 서연이 물었다. 채원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도현 씨가 절 버렸으니까.”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좋은 의도로 온 척하고 싶진 않아요.” 채원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화났어요. 세 달 동
호텔에 도착한 뒤에도 도현에게서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서연은 받지 않았다.[어디야.][전화 받아.][서연아.]마지막 메시지는 한참 뒤에 도착했다.[적어도 어디 있는지는 알려줘.]서연은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어디에 있는지조차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우연이라고 믿었던 첫 만남부터 거짓이었다.도현은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재하와 어떤 사이였는지도 알고 있었다.그 사실을 숨긴 채 자신에게 다가왔고, 결국 결혼까지 했다.그런데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도현이 왜 자신을 찾아 봤는지.재하가 떠나는 데 그의 집안이 얼마나 깊이 관련돼 있었는지.그리고 그 모든 걸 알면서 왜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지.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잠시 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재하였다.[괜찮아?]서연은 한참 고민하다 짧게 답했다.[응.]곧 답장이 왔다.[거짓말.]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예전에도 재하는 그랬다.괜찮다고 하면 가장 먼저 거짓말이라고 알아채던 사람.서연은 답하지 않았다.오늘만큼은 누구에게도 기대고 싶지 않았다.⸻다음 날 오전.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한서연 님, 1층에 방문객이 와 계십니다.]서연은 미간을 좁혔다.약속된 미팅은 없었다.[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우연 아니었을 수도 있어.”서연은 한동안 재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도현이가 나한테 일부러 접근했다는 거야?”재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서연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확실한 거야?”“그럴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야.”재하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나도 최근에 알게 된 게 있어.”“뭔데.”“내가 한국 떠난 뒤에 도현이가 너에 대해 물어봤대.”서연의 미간이 좁아졌다.“누구한테?”“나랑 같이 일했던 형이 있었어. 우리 집 일 터지고 나서 정리 도와주던 사람.”재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도현이가 그 사람한테 연락했었대.”“뭐라고.”“네가 잘 지내는지. 어디서 일하는지.”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등 뒤로 서늘한 감각이 지나갔다.“언제?”“내가 떠나고 몇 달 뒤.”몇 달 뒤.그리고 서연이 도현을 처음 만난 것도 그때쯤이었다.그 기억이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다.친구의 부탁으로 참석했던 작은 전시회 오프닝.사람들 사이에서 실수로 와인을 쏟았고, 가장 먼저 냅킨을 건넨 사람이 도현이었다.그게 첫 만남이었다.그 후 같은 카페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세 번째는 지인의 식사 자리였다.당시에는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말도 안 돼.”서연이 낮게 중얼거렸다.“뭐가?”“나 도현이 처음 만났
[이번에는 피하지 않을게.]서연은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몇 년 전이었다면 저 말 하나만으로도 바로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왜 떠났는지.왜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는지.자신을 정말 사랑하기는 했는지.그토록 묻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다.그런데 지금 서연이 가장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도현이랑 아는 사이야?]메시지를 보내자 읽음 표시가 금세 떴다.잠시 후 답장이 왔다.[응.]서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역시.[언제부터?]이번에는 답이 늦었다.[너 만나기 전부터.]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도현과 똑같은 대답이었다.둘은 자신과 상관없이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그 사실을 자신만 몰랐다.서연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재하는 한 번의 신호음 만에 받았다.— 서연아.“지금 만날 수 있어?”재하는 잠시 침묵했다.— 어디야?⸻두 사람이 다시 만난 곳은 지난번 카페가 아니었다.서연이 일부러 다른 장소를 골랐다.조용한 호텔 라운지 한쪽.사람은 적었고 자리 사이 간격도 넓었다.재하는 먼저 와 있었다.서연이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앉아.”서연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주문조차 하기 전에 물었다.“도현이랑 무슨 사이야?”재하가 예상했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예전에 알
이혼 관련 서류는 그날 저녁 도현에게 전달됐다. 서연이 집에 돌아왔을 때, 봉투는 이미 뜯긴 채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도현은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연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봤어?” “응.” “변호사 연락처도 적혀 있어.” 그제야 도현이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꼭 여기까지 해야겠어?” 서연은 대답 대신 그를 바라봤다. 며칠째 같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대답도 달라질 게 없었다. “응.” “민채원은 정리했어.” “잘했네.” “그게 끝이야?” “뭘 더 말해야 해?”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네가 원했던 거잖아.” “내가 원한 건 당신이 그 여자랑 헤어지는 게 아니야.” 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 결혼 생활에서 나오는 거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도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 같았다면 저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가 화가 났는지, 실망했는지 눈치를 살폈을 테고 결국 자신이 먼저 말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서연이 먼저 몸을 돌렸다. “할 말 없으면 들어갈게.” “윤재하.” 걸음이 멈췄다. 서연이 천천히 돌아봤다. 도현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또 만날 거야?” “그 얘기가 왜 나와?” “대답해.” 서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당신이 물어볼 자격 없다고 했잖아.” “그 사람이니까 묻는 거야.” 그 말이 이상했다. 서연은 몇 초간 도현을 바라봤다. “그 사람이라니?” 도현의 입이 다물렸다. “재하가 왜?” “……” “당신 며칠 전부터 이상해.” 서연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사진 한 번 보고 이름을 기억했다고 했지.” “맞아.” “내가 술 마시고 헤어진 얘기까지 했다고도 했고.” “그래.” “근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