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형. 여자 있었어?”
정시온의 목소리가 현관에 떨어진 순간, 세 사람 사이의 시간이 완벽하게 멎었다. 민유리는 정태준의 단단한 가슴에 손바닥을 댄 채였고, 정태준의 팔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급하게 붙잡은 탓에 손가락이 얇은 잠옷 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정태준의 몸에 걸쳐진 것이 허리의 수건 한 장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넘어질 뻔한 사람을 구해 준 자세였는데, 현관에서 바라보면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 은밀했다. “문부터 닫아.” 먼저 정신을 차린 태준이 낮게 말했다. “아, 응.” 시온은 순순히 문을 닫았다. 하지만 손은 도어록에, 시선은 두 사람에게 고정한 채였다. 무대 위에서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져도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아이돌답지 않게 두 눈이 커다랗게 뜨여 있었다. “놓, 놓아 주세요.” 유리가 속삭이자 태준이 팔을 풀었다. 그러나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비틀거리는 유리의 어깨를 한 번 더 붙든 뒤 균형이 잡힌 것을 확인하고서야 손을 거뒀다. “괜찮습니까?” “네. 아주 괜찮으니까 옷부터 좀…….” 유리는 차마 아래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얼굴이 뜨거워진 정도가 아니었다. 귀와 목덜미까지 모조리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김이 날 것 같았다. 반면 태준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는 소파 위에 벗어 두었던 셔츠를 집어 들었다. 유리는 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시야 한쪽으로 움직임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넓은 등 위에서 물방울이 미끄러지고, 셔츠가 단단한 어깨를 덮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단추를 하나씩 채울 때마다 조금 전 손바닥 아래에서 느꼈던 체온이 되살아났다. ‘미쳤어. 그걸 왜 기억해.’ 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설명해 봐.” 시온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뭘.” “형이 아침부터 반쯤 벗은 채로 여자를 안고 있었던 이유.” “넘어질 뻔해서 붙잡은 거야.” “그 앞부분 말고. 왜 형 집에 잠옷 입은 여자가 있느냐고.” “사건 관계자다.” “사건 관계자는 원래 형 집에서 자?” 시온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곤란한 상황인데도 형을 놀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 밤새도록 아주 밀착해서 보호해야 하는 사건인가 보네.” “정시온.” 태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 변호사님.” “입 다물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얼굴은 왜 빨개요?” 시온이 유리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유리는 두 손으로 뺨을 가리고 싶었으나 그러면 더 수상해 보일 것 같아 겨우 참았다. “그게, 오해하실 만한 상황이긴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네.” “형이 아쉬워할 대답 같은데.” “정시온.” 이번에는 확실한 경고였다. 시온은 웃음을 삼키며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그만할게.” 그제야 유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 정시온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화면 속에서 수도 없이 보았고, 렌즈 너머로 몇만 장이나 담았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대 조명도, 세심하게 고른 의상도 없이 후드 티셔츠에 모자를 눌러쓴 시온은 훨씬 어려 보였다. 친형의 집에 예고 없이 들렀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평범한 동생의 얼굴이었다. 문제는 그 평범한 동생이 유리가 칠 년 동안 쫓아다닌 최애라는 점이었다. 시온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시온이에요.” “알고…….” 유리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다가 멈칫했다. “알고 있습니다.” “역시 알아보시네요.” “대한민국에서 정시온 씨를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지 않을까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지만 심장이 갈비뼈를 마구 두드렸다. 콘서트 하이터치회도, 팬 사인회도 가지 않았기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시온과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유리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구겨진 잠옷 차림이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인사하는 장소가 최애 형의 집이고, 상황은 거의 간통 현장이야.’ 팬 활동을 하며 온갖 상상을 다 해 봤지만 이 정도로 끔찍한 첫 만남은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다. “민유리 씨입니다.” 태준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오며 대신 소개했다. “옆집에 살고, 이번 일과 관련해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어.” 시온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변의 위협?” “유포된 사진과 관련이 있어. 자세한 내용은 앉아서 말하지.” 태준은 유리를 돌아봤다. “그 전에 옷부터 갈아입으십시오.” 유리는 그 말이 마치 자신만 계속 잠옷 차림이었다는 지적처럼 들려 괜스레 억울해졌다. “누구 때문에 못 갈아입고 있었는데요.” “제가 잡지 않았으면 바닥에서 아침을 맞을 뻔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심하게 넘어지진 않았을 거예요.” “그럼 다음에는 안 잡겠습니다.” “변호사님은 꼭 말을 그렇게 하세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어젯밤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 말다툼이었다. 잠자코 지켜보던 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둘이 언제부터 알았어요?” “몇 달 전부터.” “어제부터입니다.” 두 사람의 대답이 정확히 겹쳤다. 시온이 고개를 번갈아 돌렸다. “이건 또 무슨 재미있는 상황이지?” “같은 건물에 산다는 사실은 몇 달 전에 알았고, 서로 제대로 이야기한 건 어제부터라는 뜻입니다.” 태준이 정리하자 시온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하루 만에 형 집에서 자고 형 품에 안겨 있었고.” “정시온 씨.” 이번에는 유리가 불렀다. 평소 팬들 사이에서 ‘눈을 접어 웃는 대형견’이라고 불리던 시온이 즉시 입을 다물었다. “계속 놀리시면 저도 정태준 변호사님의 비밀을 하나 말씀드릴 거예요.” “내 비밀이 뭡니까?” 정작 태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유리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냉장고에 먹을 게 하나도 없다는 비밀이요.” “그게 비밀입니까?” “사람이 사는 집에 생수와 탄산수, 커피 캡슐만 있는 건 사회적으로 알려져야 할 문제예요.” 시온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저도 알아요. 형은 대학 때부터 저렇게 살았거든요. 잠깐만요.” 그는 현관 앞에 내려놓았던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아침 사 왔습니다. 연락을 안 받기에 굶어 죽은 줄 알고.” “회의 중이었어.” “새벽 세 시에?” “통화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 옆집의 민유리 씨와?” 태준의 미간이 좁혀지자 시온은 얼른 식탁 쪽으로 도망쳤다. 유리는 태준의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잠옷을 벗으려는데 허리에 남은 감각이 신경 쓰였다. 넘어지는 순간 자신을 붙잡아 세운 힘, 맨살에 닿았던 손바닥, 머리 위에서 들렸던 거친 숨소리까지 너무 생생했다. 손을 대자 체온이 다시 오르는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민유리.” 거울 속 자신에게 낮게 경고한 유리는 어제 입었던 셔츠와 청바지를 다시 걸쳤다. 옷에서 희미하게 태준의 집 냄새가 나는 듯해 괜히 호흡까지 조심스러워졌다. 거실로 나오자 태준은 어느새 완벽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짙은 셔츠에 검은 슬랙스, 흐트러짐 없이 넘긴 머리. 불과 몇 분 전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있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손목은 어떻습니까?” 태준이 의자를 빼 주며 물었다. “어제보다 나아요.” “확인해 보죠.” “괜찮다니까요.” 그는 대답 대신 유리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받친 채 손목을 천천히 돌려 보고, 부어오른 부위를 엄지로 가볍게 눌렀다. 아프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유리는 맞은편에 앉은 시온의 눈이 자신들에게 고정돼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진짜 어제 처음 대화한 사이 맞아요?” “동생분 표정이 왜 저래요?” 유리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태준이 손을 놓으며 무심히 답했다. “원래 쓸데없는 상상을 많이 합니다.” “내 상상력이 아니라 형 행동이 문제 같은데.” 시온은 죽과 샌드위치를 식탁 위에 꺼내 놓았다. 유리는 대화를 피하듯 물을 마셨지만, 시온의 시선은 여전히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런데 사건 관계자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설마 어제 유포된 사진 때문에 위험해진 겁니까?” 장난기가 걷힌 목소리는 진지했다. 태준은 휴대전화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네가 본 사진은 합성에 가깝게 조작된 거야. 원본 촬영자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의도가 있었고.” 유리는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태준은 그녀를 한 번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누군가 촬영자를 미행해서 이 건물까지 따라왔어. 집에 들어가는 모습도 찍었고.” “경찰에는?” “자료부터 확보하고 있어. 건물 CCTV는 관리실과 이야기했고, 차량 블랙박스도 확인할 예정이야. 협박성 연락이 더 오면 바로 신고할 거다.” 시온의 얼굴이 굳었다.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네요.” “네 탓이 아닙니다.” 유리가 곧바로 말했다. “사진을 조작하고 사람을 따라온 쪽이 잘못한 거예요. 정시온 씨가 책임질 일은 아니에요.” “그래도 저와 관련된 사람이 피해를 보고 있잖아요.” 그 한마디에 유리의 마음이 이상하게 저렸다. 시온은 늘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름 때문에 팬들이 밤을 새우는 것도, 먼 곳에서 오는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다. 공항에서 넘어지는 팬을 보면 걸음을 멈췄고, 비 오는 날 야외 촬영을 기다린 팬들에게 스태프를 통해 우산을 나눠 주기도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었다. 유리는 무심코 평소 팬들에게 하던 말을 꺼냈다. “시온 씨가 잘못한 일이 아니니까 혼자 짊어지지 마세요. 본인이 웃어야 기다리는 사람들도 웃을 수 있어요.” 시온이 죽을 뜨던 손을 멈췄다. “그 말…….” 유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네?” “어디서 들은 적 있는 것 같은데.” 온리원이 몇 년 전 시온의 생일 전시회에 걸었던 문구였다. 정확히는 팬레터에도 여러 번 쓴 문장이었다. “흔한 말이잖아요.” 유리는 태연한 척 죽을 한 숟갈 떠먹었다. 그러나 숟가락 끝이 그릇에 부딪치며 작게 떨렸다. “그런가?” 시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식탁 아래에서 유리의 불안한 손을 보았다. 그가 화제를 돌리려던 순간, 유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서한나였다. “잠깐 전화받고 올게요.” 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태준이 손목을 잡았다. “여기서 받으십시오.” “회사 전화일 수도 있어요.” “서한나 씨잖습니까.” “제 화면을 왜 보세요?” “잘 보이는 곳에 놓으셨으니까요.” 태준은 너무도 당당했다. 유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한나야.” —야, 나 생각난 게 있어. 한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유리는 시온을 의식해 스피커를 켜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붙였다. —그 워터마크 파일 있잖아. 네가 나한테만 줬다고 했지? “응.” —생일 전시회 할 때 인쇄소에도 넘겼어. 내가 포토월이랑 엽서 시안 맡긴 곳. 기억나지? 유리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프린트랩?” —맞아. 파일을 담당자 개인 메일로 보냈던 것 같아. 정확히는 찾아봐야 하는데, 그때 일정이 너무 급해서 공유 링크도 만들었거든.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바꿔 주세요.” “잠깐만. 한나야, 지금 변호사님이 옆에 계셔서 바꿔 줄게.” —옆에? 잠깐, 아침부터? 설마 네가 어제 말한 그 옆집 변호사? “한나야.” —잘생겼는데 성격 나쁘다던 그 사람? 유리는 눈을 감았다. 시온이 주먹으로 입을 막았고, 태준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 무표정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안녕하세요. 성격 나쁜 옆집 변호사 정태준입니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한나의 목소리가 모기만 해졌다. 태준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필요한 사항만 물었다. 파일을 보낸 날짜와 주소, 공유 링크의 접근 권한, 당시 전시 설치에 참여했던 사람, 원본 사진이 들어 있는 저장 장치의 위치. 그의 질문이 이어질수록 유리의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기억도 하나씩 선명해졌다. 전시회 준비 당시 인쇄물에 문제가 생겨 시안을 세 번이나 수정했다. 한나는 회사 일을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유리 역시 촬영 일정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있었다. 결국 프린트랩 직원과 행사 대행 업체 직원이 공유 폴더에 접속할 수 있도록 링크를 열어 뒀다. 누군가 마음만 먹었다면 워터마크 원본을 내려받을 수 있었다. “공유 폴더는 아직 살아 있습니까?” —확인해 볼게요. 아, 그리고 좀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말씀하세요.” —전시 끝난 뒤에 어떤 사람이 메일을 보냈어요. 시온이 팬 프로젝트를 준비한다면서 온리원 님의 원본 사진을 협찬 자료로 쓰고 싶다고요. 당연히 거절했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제 메일 주소를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메일 원본을 전달해 주세요. 첨부파일이나 링크는 열지 마시고, 헤더 정보가 남도록 그대로 전달하십시오.” 통화가 끝나자 식탁 위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온리원?” 시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리의 어깨가 움찔했다. “방금 온리원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태준이 시온을 똑바로 바라봤다. “들은 내용은 전부 잊어.” “왜?” “수사와 법적 대응에 필요한 비공개 정보니까.” “형.” “네가 끼어들수록 상대가 원하는 대로 돼. 지금은 모르는 척해.” 시온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시선이 유리의 손목과 카메라 가방을 천천히 훑었다. 소파 옆에 놓인 검은 가방 지퍼 사이로 파란 별 모양 장식이 반쯤 삐져나와 있었다. 유리는 그것을 발견한 순간 숨이 멎었다. 시온의 눈길도 같은 곳에서 멈췄다. “저거…….” 유리가 급히 가방을 잡으려 했지만 태준이 먼저 일어났다. 긴 다리로 두 걸음 만에 소파 앞에 도착한 그는 가방을 들어 자신의 등 뒤로 옮겼다. “왜.” “그 장식, 어디서 본 것 같아서.” “흔한 별 모양이야.” “아니, 저 색이랑 모양이 정확히…….” 그 순간 유리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도착한 메시지였다. 유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태준이 즉시 다가왔다. “보여 주세요.” 화면에는 사진 한 장이 첨부돼 있었다. 어젯밤, 태준의 집으로 들어가는 유리의 뒷모습이었다. 태준이 카메라 가방을 들고 있었고, 유리는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사진이 찍힌 각도로 보아 촬영자는 같은 층 비상계단 문틈에 숨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사진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옆집이면 안전할 줄 알았어요? 휴대전화가 유리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태준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낚아챘다. 그의 얼굴에서 마지막 온기마저 사라졌다. “이 사진, 언제 찍힌 겁니까?” “어제…… 변호사님 집에 들어올 때요.” “형.” 시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람, 지금 우리가 여기 있는 것도 아는 거 아니야?” 태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곧바로 현관으로 향해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도어록 기록과 보조 잠금쇠를 살핀 뒤 인터폰 화면으로 복도를 비췄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지나치게 고요해서 오히려 누군가 카메라 바깥에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해당 층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 CCTV를 즉시 보존하라고 요구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턱 근육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통화를 끝낸 태준이 유리에게 돌아왔다. “오늘 출근하지 마십시오.” “안 돼요. 오전에 마감 회의가 있어요.” “회의보다 안전이 먼저입니다.” “갑자기 쉬면 회사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이미 집까지 알아냈는데 직장까지 쫓아오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고요. 계속 숨는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유리는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일상을 전부 내놓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지도 몰랐다. 온리원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을 끌어내고, 겁에 질린 얼굴을 지켜보는 것. “저, 출근할 거예요.” 태준이 한 걸음 다가왔다. “고집부릴 상황이 아닙니다.” “고집이 아니라 제 생활이에요.” “그 생활을 지키려면 우선 본인이 안전해야 합니다.” “저도 알아요. 그래도 아무것도 못 하게 가둬 두는 건 보호가 아니잖아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유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태준의 검은 눈에 걱정과 분노, 그리고 그가 애써 감추고 있는 다른 감정이 얽혀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태준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출근하십시오.” 의외의 허락에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대신 제가 데려다주고, 퇴근할 때도 데리러 갑니다. 이동할 때는 위치 공유를 켜고, 모르는 번호는 받지 마십시오. 혼자 화장실에 가는 것까지 보고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건물 밖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연락하고요.”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다.” 태준은 유리의 휴대전화를 들어 자신의 번호로 위치 공유를 설정했다. 건네받는 순간 두 사람의 손가락이 맞닿았다. 유리가 본능적으로 손을 움츠리자 태준이 휴대전화를 쥔 그녀의 손까지 함께 감쌌다. “민유리 씨.”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상대는 어젯밤 이 문 앞까지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과민하다고 생각해도 좋으니 제 말대로 해요.” “…….” “적어도 범인을 찾을 때까지는 나한테서 한 발도 떨어지지 마십시오.” 명령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런데도 손을 감싼 온도가 너무 뜨거워 유리는 대꾸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포로 차가워졌던 손끝이 그의 체온에 붙잡혀 서서히 녹고 있었다. 시온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형, 방금 말은 좀 고백 같았어.” 유리가 화들짝 손을 빼냈다. 태준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너는 이제 그만 가.” “왜? 나도 관계자잖아.” “가.”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표정으로 하고 있어.” 시온은 억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소파 옆의 카메라 가방을 바라봤다. 태준이 등 뒤로 감춘 탓에 파란 별 장식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떠오른 듯했다. “민유리 씨.” 시온이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혹시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습니까?” 유리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시온의 눈은 더 이상 장난스럽지 않았다. “그 별 장식도 그렇고, 아까 한 말도 그렇고……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아서요.” 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태준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듯 섰지만 시온의 시선은 그의 어깨 너머로 정확히 유리를 향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민유리 씨가 혹시, 온리원 님입니까?”첫 셔터를 누른 뒤에도 유리의 손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사진이 저장될수록 폐극장에서 들었던 기계적인 셔터음은 조금씩 멀어졌다. 지금 카메라 안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촬영된 일상이 아니었다. 시온은 유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관객들은 사전에 촬영 범위를 안내받았다. 모두가 서로의 존재를 알고 동의한 장소에서 각자의 순간을 나누고 있었다.유리는 뷰파인더 안의 시온을 따라 움직였다. 첫 곡은 루미너스의 데뷔곡을 새롭게 편곡한 노래였다. 일곱 해 전에는 불안하게 흔들리던 목소리가 이제는 공연장을 단단히 채웠다. 시온이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붉은 조명이 그의 어깨와 머리카락 위로 쏟아졌다.찰칵.유리는 시온의 얼굴만 당겨 찍지 않았다. 무대 위로 길게 뻗은 빛과 그 앞에 선 사람, 객석에서 일제히 들리는 응원봉까지 한 장면에 담았다. 오래전 첫 쇼케이스에서 담고 싶었던 것과 같은 구도였다. 다만 그때는 비어 있는 객석을 숨기기 위해 프레임을 좁혔고, 지금은 가득 찬 자리를 보여 주기 위해 렌즈를 넓혔다.시온이 노래하는 동안 관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박자로 응원봉을 흔들었다. 어두운 객석 위로 작은 빛들이 물결처럼 움직였다. 유리는 사전에 촬영 동의한 구역으로 렌즈를 돌렸다. 노래를 따라 부르다 눈물을 닦는 사람, 친구와 손을 맞잡은 사람,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도 옆 사람의 떨어진 응원봉을 주워 주는 사람이 보였다.그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아 보이는 관객이 유리의 출입증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웃었다. 두 손으로 응원봉을 쥔 모습에서 일곱 해 전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유리는 카메라를 들기 전 입 모양으로 물었다.찍어도 될까요?관객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찰칵.셔터가 눌렸다. 사진 안에는 완벽하게 정돈된 얼굴 대신 눈물로 번진 화장과 떨리는 입술, 무대에서 돌아온 사람을 바라보는 안도감이 담겼다.그 순간 유리는 자신이 이 사진 에세이
태준과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아침, 유리는 자신의 머그잔을 찾는 데만 오 분을 썼다. 분명 전날 밤 식기세척기에 넣어 두었는데 찬장에는 같은 모양의 흰 컵만 줄 맞춰 놓여 있었다. 손잡이가 별 모양인 연보라색 머그잔은 어느 칸에도 보이지 않았다.“정태준 씨.”식탁에서 서류를 읽고 있던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출근 준비를 마친 그는 한 손으로 넥타이를 정리하고 있었고, 실밥을 아직 풀지 못한 왼팔은 움직임이 불편해 보였다.“왜요?”“내 컵 어디 있어요?”“오른쪽 위에서 두 번째 칸입니다.”“없는데요.”“안쪽을 보십시오.”유리가 발끝을 들고 찬장 안쪽을 확인하자 흰 컵들 뒤에 연보라색 머그잔이 숨어 있었다. 일부러 가장 손이 닿지 않는 자리에 밀어 넣은 것처럼 보였다.“왜 여기다 뒀어요?”“색이 튀어서요.”“컵은 원래 색이 다를 수도 있죠.”“같은 종류끼리 정리하는 게 효율적입니다.”“그러니까 태준 씨 컵하고 내 컵을 같이 두면 되잖아요.”“색상과 형태가 다릅니다.”유리는 머그잔을 꺼내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나랑 같이 살고 싶은 건 맞아요?”“그 질문과 컵의 배치는 관계가 없습니다.”“있어요. 내 물건이 들어오면 태준 씨 집이 전처럼 완벽하게 정돈될 수는 없잖아요.”그사이 집 안에는 유리의 흔적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현관에는 태준의 검은 구두 옆으로 흰 운동화가 놓였고, 거실 소파에는 보라색 담요가 생겼다. 서재 한편에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원고와 촬영 기획서가 쌓여 있었으며, 욕실 선반에는 태준이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향의 샴푸와 작은 머리끈들이 자리를 잡았다.태준은 정돈된 공간을 좋아했다. 물건의 위치가 바뀌는 것도 싫어했고, 사용한 컵이 식탁 위에 오래 놓여 있는 것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도 유리의 짐이 들어온 뒤 한 번도 치우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말없이 수납장을 비우고 책장을 추가했을 뿐이었다.“불편합니까?”태준이 묻자 유리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조금요.”“제가 컵을 안쪽에 둬서?
〈다음에는 카메라가 아니라 나를 보게 한다.〉사진 속 문장은 짧았지만 유리는 한동안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일곱 해 전 남기혁이 자신이 잃어버린 별을 주워 들고 그런 문장을 적었다는 사실이 쉽게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유리의 집에 들어오고 위치 추적기를 달기 훨씬 전부터, 유리가 이름조차 모르던 시절부터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릴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태준이 유리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가져갔다. 화면을 끄려 했지만 유리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조금만 더 볼게요.”“계속 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알아요. 그런데 지금 눈을 돌리면 이 문장이 더 무서운 것으로 남을 것 같아요.”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대신 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은 풀지 않았다. 따뜻한 손바닥이 옆구리에 닿아 있었고, 일정한 체온이 지금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저 장식은 어떻게 처리돼요?”“우선 증거물로 보관됩니다. 남기혁의 지문과 디엔에이, 보관 장소, 메모의 작성 시기까지 감정할 겁니다.”“재판이 끝나면요?”“피해품으로 확인되면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유리는 투명한 봉투 안의 작은 별을 바라봤다. 예전에는 카메라가 허전해 보여 별 두 개를 나란히 달았다. 작은 별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아깝다는 생각만 했지, 누군가 그것을 가져가 오랫동안 보관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나는 돌려받고 싶지 않아요.”“그럼 폐기를 요청하면 됩니다.”“남기혁 씨가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무서운 물건이 된 것 같아서요.”“그 사람이 만졌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 사람 물건이었던 건 아닙니다.”태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유리 씨가 직접 고르고 카메라에 달았던 장식입니다. 돌려받을지 버릴지도 남기혁이 아니라 유리 씨가 결정해야 해요. 지금 당장 정하지 않아도 됩니다.”유리는 다시 사진을 바라봤다. 태준의 말이 맞았다. 남기혁은 별을 주워 갔지만 그 별에 담긴 처음의 의미까지 가진 것은 아니었다.
유리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감싸고 있는 팔부터 느꼈다. 허리 위에 놓인 단단한 손과 목덜미에 닿는 고른 숨결, 등 뒤로 밀착된 체온이 밤이 끝났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낯선 침대에서 깨어났는데도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서 아침을 맞았던 것처럼 몸이 자연스럽게 태준에게 기대어 있었다.조심스럽게 몸을 돌리자 잠든 태준의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늘 빈틈없이 정돈돼 있던 머리카락은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었고, 단정한 인상도 잠든 동안에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유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얇은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쇄골과 목덜미에는 자신이 남긴 옅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뒤늦게 얼굴이 뜨거워졌다.어젯밤에는 분명 자신이 먼저 침실로 데려왔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원해서라고 말했고, 태준은 그 말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야 그녀를 안았다. 다친 팔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느라 오히려 유리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했고, 그때마다 태준의 절제된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이상한 만족감까지 느꼈다.유리는 기억을 멈추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허리에 놓인 손에 힘이 들어왔다.“깼습니까?”잠이 묻은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유리가 눈을 뜨자 태준은 이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민유리 씨가 제 얼굴을 구경하기 시작했을 때부터.”“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요.”“흥미로워 보여서 방해하지 않았습니다.”“자는 척한 거예요?”“눈을 감고 있었을 뿐입니다.”유리가 몸을 빼려 하자 태준의 손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다치지 않은 오른팔 하나뿐인데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어디 갑니까?”“일어나려고요.”“아직 이릅니다.”“아침 아홉 시가 넘었어요.”“보호 휴가 중이잖아요.”“태준 씨는 출근해야 하잖아요.”“저도 다쳤습니다.”“어제는 환자 아니라고 했으면서.”“상황에 따라 판단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변호사가 말을 그렇게 쉽게 바꿔도 돼요?”“의뢰인에게
“안 돼.”태준의 단호한 대답에 시온은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을 가늘게 떴다. 유리에게 건네려던 죽 봉투는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채였고, 태준은 마치 시온이 위험한 계약서라도 내민 것처럼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형이 왜 안 된다고 하는데?”“합리적인 우선순위에 어긋나니까.”“사진 찍는 순서에 합리적인 기준이 어디 있어?”“있어.”“설마 형부터 찍어야 한다는 거야?”태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시온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형, 누나는 내 홈마였어. 나를 찍으면서 유명해진 사람이 나부터 찍는 게 당연하잖아.”“그건 온리원일 때 이야기고, 앞으로는 민유리라는 이름으로 찍을 겁니다.”“그래서? 민유리 누나도 날 좋아하거든?”“좋아했습니다.”“누가 과거형이래?”“정시온.”낮아진 태준의 목소리에 시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두 사람이 또다시 서로를 노려보자 유리는 한 손에는 기획서를, 다른 손에는 죽 봉투를 든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 기자들 앞에서 떨리지 않고 말했던 자신이 우스울 만큼 이 형제를 중재하는 일은 어려웠다.“둘 다 그만해.”유리가 끼어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우선 내가 이 기획을 맡을지부터 결정해야 해. 아직 카메라를 다시 제대로 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시온의 표정이 즉시 누그러졌다.“카메라가 무서워요?”“조금.”유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카메라를 떠올리면 오래 익숙했던 그립의 감촉보다 폐극장에서 울리던 셔터음과 자신의 일상을 몰래 담은 사진들이 먼저 떠올랐다. 셔터를 누르는 행위와 누군가의 사생활을 빼앗는 행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다. 하지만 남기혁이 자신의 사진과 카메라를 이용한 뒤부터는 오래 사랑했던 도구까지 낯설게 느껴졌다.시온은 잠시 망설이다 손에 든 약국 봉투를 태준에게 떠넘겼다.“그럼 나를 찍는 건 나중에 해도 돼요.”태준이 의외라는 듯 동생을 바라봤다.“방금 전까지 네가 먼저라며.”“누나가 무서
다온북스 건물 앞은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출근 시간이 지난 평일 오전인데도 현관과 주차장 입구를 기자들이 에워싸고 있었고, 방송사 차량까지 도로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검은 승용차가 모퉁이를 돌아 건물 가까이 다가가자 몇몇 기자가 번호판을 확인하며 카메라를 들었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유리의 손끝이 굳었다.“아직 차를 발견한 건 아닙니다.”태준이 운전대를 잡은 채 차분하게 말했지만 유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커다란 카메라와 망원렌즈, 누군가를 먼저 발견하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들이 보였다. 자신도 오랫동안 카메라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러나 렌즈가 자신을 향하자 그 무게가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는지 선명하게 느껴졌다.“시온이도 매번 저 사이를 지나갔겠죠?”“그래서 경호원이 붙습니다.”“나는 저 앞을 지나가야 하고요.”“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회사 측에서 차량 번호를 등록해 뒀으니 바로 출입할 수 있어요.”유리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내려다봤다. 태준의 말대로 지하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기자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됐다. 대표와 면담을 마친 뒤에도 다른 출입구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범죄 피해자에게 당연히 허용되어야 할 보호였다.그런데 자신이 숨어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기자들은 회사에 남아 다른 직원들을 붙잡을 것이다. 한나와 편집장,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동료들에게 질문을 쏟아 내며 유리의 생활을 캐물을지도 몰랐다.“정문에서 내려 주세요.”태준의 시선이 곧장 유리에게 향했다.“안 됩니다.”“도망치듯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기자들 앞에 서겠다는 것과 무방비하게 둘러싸이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짧게라도 내가 직접 말하면 동료들을 붙잡고 물어보지는 않을 거예요.”“그들이 그렇게 합리적으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합니까?”“아니요. 그래도 아무 말 없이 피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유리는 창밖을 바라보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폐극장에서는 경찰이 준비한 송신기를 달고 남기혁의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