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민유리 씨가 혹시, 온리원 님입니까?”
정시온의 질문이 떨어진 뒤 거실은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울 만큼 고요해졌다. 민유리는 입술을 열지 못했다. 아니라고 부정해야 했다. 시온은 파란 별 장식을 본 적이 있을 뿐이고, 자신이 확실한 증거를 보여 준 것도 아니었다. 팬 사인회에 참석한 적도 없으니 얼굴을 기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적당히 둘러대면 아직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시온과 눈이 마주치자 준비했던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없이 찍어 온 사람이었다. 가장 빛나던 순간뿐 아니라 무대 아래에서 지쳐 있던 얼굴도, 다친 발목을 숨기며 끝까지 웃던 모습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려니 묘한 서운함이 가슴 한구석을 찔렀다. 동시에 두려웠다. 유리가 사랑했던 것은 시온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던 적당한 거리였다. 무대 위의 사람과 객석에 있는 팬. 서로의 삶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순간을 나눌 수 있는 거리. 그 선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 같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태준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유리는 넓은 등 뒤에 가려졌고, 시온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차단됐다. “형.” “확인할 필요 없는 일이야.” “하지만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온리원 님이라면 나도 알아야 해.” “네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보다 피해자의 신원을 보호하는 게 먼저다.” “호기심 때문에 묻는 거 아니야.” 시온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온리원 님은 내 데뷔 때부터 사진을 찍어 준 사람이야. 이번 일 때문에 그 사람이 협박받고 있다면 모른 척할 수 없어.” “안다고 해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적어도 사과는 할 수 있잖아.” 태준의 어깨 너머로 시온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태준의 셔츠 자락을 가볍게 잡았다. 그가 즉시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십니까?”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는 겁니까?” “말할게요.” 유리는 태준의 등 뒤에서 한 걸음 옆으로 나왔다. 보호받는 것은 고마웠지만 자신의 정체를 언제, 누구에게 밝힐지는 자신이 결정하고 싶었다. 상대가 오래 좋아해 온 시온이라면 더욱 그랬다. “정시온 씨.” 호흡을 가다듬고 시온을 바라봤다. “맞아요. 제가 온리원이에요.” 시온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어느 정도 확신하고 물었으면서도 실제로 인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유리는 소파 옆으로 다가가 카메라 가방을 열었다. 안쪽 주머니에 넣어 둔 작은 파우치와 메모리 카드 케이스, 예비 배터리 사이로 익숙한 파란 별 장식이 드러났다. 처음 홈마 활동을 시작한 해에 직접 주문 제작한 것이었다. 시온의 공식 색과는 조금 다른 짙은 푸른색이었지만 오랫동안 온리원을 상징해 팬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이건 데뷔 쇼케이스 때부터 달고 다녔어요. 몇 번 떨어뜨려서 다시 만들긴 했지만요.” 시온은 성큼 다가오다가 유리 앞에서 멈췄다. 가까이 다가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듯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정말…… 온리원 님이라고요?” “네.” “제가 아는 그 온리원?” “동명이인 홈마가 또 없다면요.” 유리가 민망함을 감추려 농담했지만 시온은 웃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유리의 얼굴과 카메라 가방을 번갈아 오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다르세요.” “어떻게 생각했는데요?” “일단 남자인 줄 알았어요.” “네?” “형처럼 무뚝뚝한 남자.” 태준의 미간이 단번에 좁아졌다. “왜 하필 나야?” “사진 올릴 때 쓰는 글이 짧고 단호하잖아. 공지 위반하면 바로 차단하고, 양도 사기 계정도 잡아내고. 저번에는 공항에서 밀지 말라고 장문의 공지까지 올렸고.” “그게 왜 나 같은 성격이지?” “형도 말 안 듣는 의뢰인한테 길게 경고하잖아.” “그건 업무고.” “온리원 님에게도 업무였을지 모르지.” 유리는 뜻밖의 대화를 듣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업무는 아니었어요. 돈을 받고 한 일도 아니고요. 다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기준이 필요하니까 조금 엄격하게 굴었던 것뿐이에요.” 시온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럼 첫 음악 방송 때, 팬이 열 명도 안 왔던 날에도 계셨습니까?” “네.” “비가 엄청 왔는데.” “우산이 뒤집혀서 카메라보다 제가 먼저 망가질 뻔했죠.” “그날 사진이 있었어요?” “많이 흔들려서 세 장밖에 못 건졌어요. 그래도 웃는 사진 하나는 올렸고요.” 시온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데뷔 초 루미너스는 주목받지 못했다. 새벽 사전 녹화를 마치고 나와도 기다리는 팬은 손에 꼽혔고, 어느 행사에서는 준비된 좌석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유리는 그때부터 시온을 찍었다. 팬 한 명의 환호에도 환하게 웃고, 무대가 작을수록 더 열심히 노래하던 모습이 좋아서였다. “그 사진 기억해요.” 시온이 조용히 말했다. “그날 숙소에 돌아가서 멤버들이랑 같이 봤어요. 객석이 거의 비어 있어서 다들 티는 안 냈지만 많이 가라앉아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진 속 나는 정말 즐거워 보이더라고요.”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래서 우리끼리 약속했어요. 적어도 저 사진 속 얼굴이 거짓말이 되게 하지는 말자고.”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칠 년 동안 사진을 찍으며 시온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좋아한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사진 한 장이 누군가의 마음을 붙잡았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고마웠습니다.” 시온이 허리를 숙였다. 팬 서비스용으로 적당히 고개를 기울이는 인사가 아니었다. 정중하고 깊은 인사였다. 놀란 유리가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러지 마세요. 제가 좋아서 한 일이에요.”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잖아요.” “시온 씨가 무대에 있어 줬으니까 제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퉁쳐요.” “그게 어떻게 퉁쳐져요. 칠 년인데.” “저도 칠 년 동안 즐거웠으니 됐어요.” 두 사람 사이에 따뜻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온은 팬으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의 눈을 보았고, 유리는 무대가 아닌 곳에서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시온의 얼굴을 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준의 표정만 점점 냉랭해졌다. “언제까지 손을 잡고 있을 겁니까?” 유리는 그제야 시온의 팔을 붙든 채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손을 놓았다. “죄송해요.” “온리원 님이 왜 형한테 사과해요?” 시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게요. 제가 왜 변호사님한테 사과했죠?” 유리도 뒤늦게 고개를 갸웃했다. 태준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신도 왜 거슬렸는지 설명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정체를 알았으면 이제 만족했겠지.” “만족의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럼 더 이상 묻지 마. 밖에서도 아는 척하지 말고.” “당연하지. 이게 알려지면 얼마나 위험한데.” 시온은 곧바로 진지해졌다. “멤버들과 회사에도 말하지 않을게요. 매니저 형이 물어도 모른다고 할 겁니다.” “그리고 당분간 공식 일정 외의 이동은 전부 회사와 공유해. 혼자 다니지 말고.” “형이 내 변호사야, 엄마야?” “둘 다 하기 싫으니까 말 좀 들어.” “우리 엄마도 형처럼 무섭지는 않아.” 형제의 대화에 유리가 작게 웃자 태준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조금 전까지 날카롭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 변화는 짧았다. “갈아입을 옷과 필요한 물건부터 챙기죠.” “어디 가게요?” “민유리 씨 집입니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하잖습니까.” “저 혼자 다녀올게요. 바로 옆인데.” “비상계단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이 아직 건물 안에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태준은 반론을 차단하듯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제가 먼저 복도를 확인할 테니 뒤에 계십시오.” “나도 갈게.” 시온이 따라나서려 하자 태준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넌 여기 있어.” “왜?” “너까지 복도에 나왔다가 CCTV에 찍히면 설명하기 귀찮아져.” “형 집에 동생이 오는 게 왜 설명할 일이야?” “모자부터 제대로 써. 창가에도 서지 말고.” 시온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유리가 현관으로 향하자 그가 뒤에서 조용히 불렀다. “온리원 님.” 유리는 걸음을 멈췄다. “앞으로도 그렇게 부를까요?” 잠시 고민한 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는 유리 씨라고 불러 주세요. 온리원은…… 지금 잠깐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시온은 그 말에 담긴 무게를 알아들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유리 씨.” 현관문을 연 태준이 먼저 복도를 살폈다. 평소라면 몇 걸음이면 닿을 옆집까지의 거리가 오늘은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태준은 유리를 자신의 뒤에 세운 채 비상계단과 엘리베이터 표시등을 확인했다.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유리의 현관문 앞에 섰다. “비밀번호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어제 바꾸지 않았어요?” “변경 기록을 보니 지난달에도 같은 숫자를 쓰셨던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번호를 누르는 손의 위치가 닳아 있었습니다.” 유리는 도어록을 내려다봤다. 숫자 버튼 네 개가 다른 곳보다 희미하게 닳아 있었다. “관찰력이 너무 좋은 것도 피곤하겠네요.” “덕분에 먹고삽니다.” 문이 열리자 태준은 유리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과 주방, 침실과 욕실을 차례로 확인했다. 창문 잠금장치까지 살피고 나서야 문 앞에 서 있던 유리에게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자기 집인데도 허락받고 들어가는 상황이 우스웠다. 그러나 태준의 굳은 옆얼굴을 보자 농담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침입 흔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유리는 옷장 앞에 여행용 가방을 펼쳤다. 며칠이나 태준의 집에 머물게 될지 몰라 무엇을 챙겨야 할지도 애매했다. 셔츠와 바지, 속옷을 꺼내다가 문득 뒤에 서 있는 태준을 발견했다. “저기요.” “왜 그러십니까?” “계속 여기 계실 거예요?” “네.” “옷을 챙겨야 하는데요.” “챙기십시오.” “속옷도요.” 태준의 시선이 열린 서랍로 향하려다 멈췄다. 아무렇지 않던 얼굴에 처음으로 미묘한 균열이 생겼다. “그건…… 알아서 챙기면 되잖습니까.” “그러니까 잠깐 나가 계셔 달라고요.” “문은 열어 두십시오.” “제가 여기서 도망이라도 가요?” “창문이 있습니다.” “여기 십칠 층이에요.” “그러니 더 위험하죠.” 결국 태준은 침실 문밖으로 나갔다. 다만 문을 손바닥 하나만큼 열어 두고 서 있었다. 유리는 어이없어 웃다가 서랍에서 필요한 옷을 꺼냈다. 검은색과 살구색 속옷 사이에서 유난히 화려한 자주색 레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하필 이게 맨 위에 있었네.’ 보인 것도 아닌데 괜히 신경 쓰여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러다 문틈 너머로 드리운 태준의 그림자를 의식하고는 얼굴이 다시 뜨거워졌다. 아침에 보았던 그의 맨몸이 떠오른 탓이었다. “변호사님.” “네.” “아까 일은 잊어 주세요.” 문밖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어떤 일 말입니까?” “제가 넘어져서…… 변호사님을 만진 거요.” “어디를 만졌다는 겁니까?” 유리는 옷을 접던 손을 멈췄다.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일부러 묻는 것 같았다. “아시면서 왜 물어요?” “정확히 어디까지 잊어야 하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전부요.” “기억이라는 게 의뢰인이 요구한다고 삭제되는 건 아니라서.” “그럼 모르는 척이라도 해 주세요.” “노력은 해 보죠.” “정말 성격 나빠요.” “이미 친구분께 들었습니다.” 낮은 웃음기가 섞인 대답에 유리는 입술을 삐죽였다. 서둘러 지퍼를 닫고 가방을 끌어당기는데 태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가방 손잡이를 빼앗아 들었다. “제가 들 수 있어요.” “손목이 아픈 사람이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아침에도 괜찮다면서 넘어지셨죠.” “그건 변호사님이 그런 모습으로 갑자기 나오셔서…….”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실수를 깨달았다. 태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수건만…….” “그게 넘어질 만큼 충격적이었습니까?” 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좁은 침실 안에서 둘 사이의 거리가 단숨에 줄었다. 침대 끝에 걸린 유리는 더 물러나지 못하고 손으로 매트리스를 짚었다. “갑자기 보면 누구나 놀라죠.” “누구나 넘어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바닥이 미끄러웠어요.” “우리 집 바닥은 안 미끄럽습니다.” “제가 잠이 덜 깨서 그랬나 보죠.” 태준은 대답하지 않고 유리를 내려다봤다. 짙은 눈동자가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변명을 거듭할수록 스스로 더 수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유리가 시선을 피하자 그가 허리를 조금 숙였다. “정말 놀라기만 한 겁니까?”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가까워진 체온과 옅은 향수 냄새에 유리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럼 또 뭐가 있는데요?” “그건 제가 묻고 있습니다.” “정말 뻔뻔하시네요. 먼저 벗고 나온 건 변호사님이잖아요.” “제 집 욕실에서 나올 때 누가 서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요.” “저도 최애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올 줄은 몰랐고요.” “그런데 지금은 최애보다 제가 벗고 있던 게 더 신경 쓰이는 모양입니다.” 정곡을 찔린 유리의 눈이 커졌다. 태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웃었다기보다는 그녀의 반응을 확인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아니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전혀 신경 안 쓰여요.” “그런데 얼굴은 왜 빨개집니까?” 태준의 손이 유리의 귓가로 다가왔다. 긴 손가락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천천히 걷어 냈다. 손끝이 귓불을 스치는 순간 유리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여기까지.” 그가 붉어진 귀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다 빨개졌는데.” “정태준 변호사님.” “네.” “지금 저 놀리는 거죠?” “확인하는 겁니다.” “뭘요?” 태준의 시선이 유리의 입술에 잠깐 머물렀다. 워낙 짧은 순간이라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귀에 닿은 손끝이 내려오며 목덜미 옆을 스치자 숨이 막혔다. “민유리 씨가 절 얼마나 의식하는지.” 그 순간 거실에서 무언가 요란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동시에 문 쪽을 바라봤다. 태준은 곧바로 유리를 등 뒤로 밀어 넣고 거실로 나갔다. 조금 전의 느슨한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바닥에는 유리의 택배 상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상자 옆에는 시온이 서 있었다. “너 왜 여기 있어?” 태준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계속 기다렸는데 안 오잖아. 문도 열려 있고.” “집에 있으라고 했을 텐데.” “소리가 들려서 와 본 거야. 그런데 이거 이상해.” 시온이 바닥의 상자를 가리켰다. “문 앞에 놓여 있었어. 형이 먼저 들어올 때는 없었던 거 맞지?” 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유리도 침실 밖으로 나왔다. 상자는 손바닥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였고, 겉면에는 다온북스 편집부 민유리 앞으로 적힌 송장이 붙어 있었다. 발송인 이름은 없었다. “만지지 마십시오.” 태준이 낮게 말했다. 그는 휴대전화로 상자의 위치와 송장, 테이프가 붙은 모양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다. “제가 주문한 게 아닐까요?” “오늘 아침에 배송 완료된 물건입니까?” 유리가 배송 앱을 확인했지만 기록은 없었다. 택배 기사에게서 온 문자도 없었다. “아니에요.” “방금 누군가 두고 간 겁니다.”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세 사람이 태준의 집에서 이야기하는 사이, 누군가 유리의 현관 앞까지 다녀갔다는 뜻이었다. 태준은 관리실과 경찰에 차례로 연락했다. 협박 메시지와 미행 사진, 의심스러운 물품이 반복해서 발견된 만큼 더는 신고를 미룰 수 없었다. 통화를 마친 그는 장갑을 끼고 상자를 투명한 비닐 안에 넣었다. 상자를 옮기는 과정에서 바닥에 작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사진이었다. 태준이 주우려는 순간 유리가 먼저 알아봤다. 사진 속에는 조금 전 침실에 있던 두 사람이 담겨 있었다. 태준이 침대 끝에 앉은 유리에게 몸을 숙이고,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던 장면이었다. 열린 방문 틈으로 촬영된 각도였다. 유리가 천천히 시온을 돌아봤다. “저 아니에요.” 시온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가 왔을 때는 두 분이 이미 거실로 나오고 있었어요. 그리고 내 휴대전화는 형 집에 두고 왔어요.” 그렇다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같은 집 안에. 아니면 적어도 조금 전까지 이 집 안에 숨어 있었다. 태준이 즉시 유리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시온에게 눈짓하자 그가 주방에서 묵직한 의자를 들어 올렸다. 세 사람은 등을 맞댄 채 거실과 현관, 닫힌 욕실 문을 바라봤다. 집 안은 고요했다. 냉장고가 작동하는 낮은 소리와 시계 초침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때 유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역시 형을 선택했네요. 곧이어 사진 한 장이 더 전송됐다. 태준의 침실에서 옷을 챙기는 유리의 뒷모습이었다. 완전히 열린 옷장과 침대 사이, 그녀에게서 두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찍힌 사진. 유리는 사진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누군가는 지금 자신이 사는 곳만 아는 게 아니었다. 집 안의 구조와 숨을 수 있는 장소까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 굳게 닫혀 있던 옷장 안쪽에서 아주 작은 진동음이 울렸다.화면 속 321번 사진은 확대할수록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유리온실 뒤편의 좁은 통로, 빗물이 맺힌 유리벽,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커튼 사이에서 오현석은 서한나의 뺨을 감싸고 있었다. 입술이 맞닿은 순간을 찍은 사진이었지만 요란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얼마나 익숙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에 가까웠다. 현석의 다른 손은 한나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팔꿈치 아래를 받치고 있었고, 한나는 놀란 기색 없이 그의 재킷 깃을 붙들고 있었다.“이건 우연히 한 번 입 맞춘 사람들이 아닌데요.”유리의 말에 태준이 화면 오른쪽의 촬영 정보를 확인했다.“결혼식 당일 오후 세 시 사십이 분.”“시간을 묻진 않았어요.”“증거를 볼 때는 기본 정보부터 확인해야지.”“휴가 중인 변호사님 아니었어요?”“친구의 중대한 은폐가 발견됐는데 휴가가 중요해?”유리는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 아래에는 윤혜림이 남긴 작은 표시가 있었다. 공개 갤러리에 포함되지 않으며, 당사자 동의를 확인하기 전까지 다운로드가 제한되는 사진이라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결혼식 전체 사진과 별도로 분류해 둔 모양이었다. 혜림은 우연히 포착한 순간을 신랑 신부에게는 알리되, 사진 속 사람들의 허락 없이 누구도 파일을 가져갈 수 없도록 잠가 두었다.그 표시를 발견하자 유리는 화면을 닫았다.“왜 닫아?”“보면 안 되는 사진이었어요.”“이미 봤는데.”“봤으니까 더 보면 안 되죠. 혜림 작가님도 잠가 뒀고.”태준은 아쉬운 표정으로 노트북을 덮었다. 친구를 추궁할 준비가 이미 끝난 얼굴이었다.“현석이가 결혼식 날 나한테 증인 서명을 두 번 확인했어.”“그게 왜요?”“평소보다 말이 많았지.”“긴장해서 그랬겠죠. 자기도 몰래 연애 중이면서 친구 혼인 신고 증인란에 서명하려니까.”“그러고 보니 구청에서도 한나 씨한테 계속 커피를 건넸어.”“그건 현석 씨가 원래 친절해서…….”말끝이 흐려졌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이상한 장면이 한둘이 아니었다.
공항 체크인 카운터의 저울이 24.7킬로그램을 가리켰다.직원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고, 민유리는 아주 천천히 정태준을 돌아보았다. 태준은 팔짱을 낀 채 문제의 캐리어를 내려다봤다.“내가 카메라는 기내로 들고 타라고 했지.”“카메라는 기내 가방에 있어요.”“그럼 저 안에 뭐가 들었는데.”“렌즈 두 개, 조명 장비, 설치용 장갑, 테이프, 여분 케이블, 프린트 보관함, 옷.”“옷은 마지막이네.”“출장이잖아요.”“신혼여행이기도 하고.”유리는 대답 대신 그의 캐리어를 저울 위로 밀었다. 14.2킬로그램. 어딘지 억울할 만큼 단정한 숫자였다.“정 변호사님 가방에는 뭐가 들었는데요?”“옷, 상비약, 충전기, 네가 놓고 온 멀티어댑터 두 개, 진통제, 위장약, 밴드, 여분 배터리, 우산.”“……내 보호자 가방이에요?”“남편 가방.”태준이 아무렇지 않게 정정했다. 결혼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그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묘하게 능숙했다. 유리는 아직도 ‘남편’이라는 말을 속으로 한 번 굴려 본 다음에야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직원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두 분 짐을 합산하면 허용 범위 안입니다.”“다행이네요.”“신혼여행이세요?”유리와 태준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출장입니다.”“신혼여행입니다.”둘의 말이 정확히 겹쳤다. 직원의 미소가 더 환해졌다.“두 가지 다이시군요.”탑승권을 받아 든 유리가 태준의 팔을 툭 쳤다.“왜 혼자 신혼여행이라고 해요?”“왜 혼자 출장이라고 해.”“싱가포르 다큐멘터리 포럼에 초청받아서 가는 거잖아요.”“결혼식 열이틀 뒤에 같이 비행기를 탔고, 일정 뒤로 사흘을 비워 뒀잖아.”“그건 정 변호사님이 멋대로 연차를 길게 낸 거고요.”“대표한테 결재받았으니까 멋대로는 아니지.”“호텔도 내가 잡은 포럼 숙소 그대로면서.”태준은 잠깐 침묵했다. 그 미세한 틈을 유리는 놓치지 않았다.“왜요?”“방은 바꿨어.”“뭘로?”“도착하면 봐.”그의 시선이 지나치게 태연했다. 유리는 눈을 가늘게
민유리가 결혼 다음 날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남편의 얼굴도, 손가락에 돌아온 반지도 아니었다.허리가 움직이는지였다.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던 유리는 아주 천천히 몸을 옆으로 돌렸다. 등과 허리에 묵직한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안도하며 이불을 끌어 올리는 순간, 뒤에서 팔 하나가 허리를 감쌌다.“어디 갑니까?”잠긴 목소리가 목덜미 가까이에서 들렸다. 유리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팔을 손바닥으로 눌렀다.“안 가요. 시간 보려고.”“휴대전화는 반대쪽에 있습니다.”“그러니까 일어나려고 했죠.”“더 자요.”정태준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그녀의 등을 자신의 가슴에 붙였다. 평소라면 먼저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뉴스까지 확인했을 사람이 오늘은 이불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유리는 그의 왼손을 찾아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제 다시 끼워 준 반지가 창문 틈으로 들어온 아침빛을 희미하게 반사했다. 반지 안쪽의 문장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남편.”유리가 시험하듯 부르자 태준의 팔에 바로 힘이 들어갔다.“한 번 더.”“싫어요.”“방금은 왜 불렀습니까?”“잘 자나 확인하려고.”“이제 깼습니다.”“그럼 일어나요.”유리가 몸을 빼려 하자 태준은 허리를 놓는 대신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따뜻한 숨이 피부에 닿고, 어젯밤 그의 입술이 머물렀던 자리에 다시 간지러운 감각이 번졌다.“정태준 씨.”“네.”“아침이에요.”“알고 있습니다.”“어제 결혼식 했어요.”“그것도 알고 있습니다.”“피곤하지 않아요?”“피곤합니다.”“그런데 왜 이래요?”그가 느리게 몸을 일으켜 유리의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잠이 덜 깬 얼굴인데도 시선만은 지나치게 선명했다.“남편이라고 불러 놓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호칭 한 번에 반응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요?”“매번 반응하면서 살겠습니다.”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 순간, 태준의 입술이 다시 닿았다.
결혼식 날 아침, 민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삼 분 전에 눈을 떴다. 특별한 예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옆자리의 정태준이 밤새 세 번이나 뒤척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긴장하지 않았다고 끝까지 주장했지만, 평소라면 한 번도 깨지 않고 자는 사람이 새벽 두 시에는 물을 마시러 나갔고 네 시에는 휴대전화를 확인했으며 여섯 시에는 베개를 바로 놓는 척 유리가 잘 자고 있는지 살폈다.유리는 눈을 감은 채 물었다.“지금도 안 떨려요?”옆에서 움직임이 멈췄다.“깼습니까?”“태준 씨가 계속 깨우잖아요.”“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사람이 옆에서 긴장하면 침대가 알아요.”유리가 눈을 뜨자 태준은 이미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그의 왼손 약지에는 전날까지 끼고 있던 반지가 없었다. 결혼식 때 다시 서로 끼워 주기로 하고 두 사람의 반지를 한 상자에 넣어 윤혜림에게 맡겼기 때문이다.그제야 유리는 자신의 손가락도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과 하룻밤인데도 허전했다. 반지 자리에 남은 옅은 자국을 엄지로 쓸자 태준의 시선이 따라왔다.“잃어버린 것 같아요.”“윤 작가님이 보관하고 있습니다.”“알아요. 그런데 손에 없으니까 이상해요.”태준이 유리의 빈 약지를 잡아 입술에 댔다.“몇 시간 뒤에 다시 끼워 주겠습니다.”“긴장해서 떨어뜨리면요?”“그럴 일 없습니다.”“지금 심장 엄청 빨리 뛰는데.”유리가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올렸다. 얇은 잠옷 아래로 규칙보다 조금 빠른 박동이 느껴졌다. 태준은 손을 치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손을 겹쳤다.“당신도 빠릅니다.”“저는 긴장한다고 인정했잖아요.”“그러면 나도 인정하겠습니다.”“뭘요?”태준은 유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많이 떨립니다.”그 말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유리는 베개 위에서 조금 가까이 다가가 그의 턱 아래에 이마를 기댔다.“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어요?”“아닙니다.”“저는 조금 도망가고 싶어요.”태준의 몸이 굳었다. 유리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결혼식 말고 준비 과정에서요.
인터뷰가 진행된 곳은 다온갤러리 2층의 작은 회의실이었다. 처음 받은 기획안에서는 호텔 스위트룸과 웨딩드레스를 촬영 장소로 제안했지만, 수정된 기획안에는 민유리의 사진이 걸린 전시장과 작업실만 남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도 결혼 반지를 강조하기 위한 꽃 장식 대신 《좋아한다는 마음을 찍는 법》과 싱가포르 전시에 출품할 작품 목록이 놓였다.유리는 자리에 앉기 전 녹음기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인터뷰를 맡은 기자는 삼십 대 중반의 여자였다. 그녀는 먼저 명함을 건네고, 사전에 합의한 질문 외에는 추가 질문을 최소화하겠다고 약속했다.“그래도 민 작가님께서 불편하시면 언제든 중단하셔도 됩니다.”“네. 저도 질문에 따라 대답하지 않을 수 있고요.”“물론입니다.”기자가 녹음 버튼을 누르기 전 다시 동의를 구했다. 그 작은 절차만으로도 유리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록하는 자리였지만, 오늘은 무엇을 남길지 미리 알고 있었다.첫 질문은 파리에서 찍은 〈기다리는 사람의 자리〉 연작에 관한 것이었다. 유리는 두 개의 커피잔에서 시작한 작업이 어떻게 난민 심사를 기다리는 가족과 이름을 잃은 사진들로 넓어졌는지 설명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불확실함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행동이라고 말했다.“사진집 제목이 《좋아한다는 마음을 찍는 법》인데요. 작가님께 사진은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의 표현인가요?”“네. 다만 예전과는 뜻이 많이 달라졌어요.”“어떻게 달라졌나요?”유리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예전에는 오래 바라보면 잘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오래 바라본다는 이유로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많이 안다고 느끼는 순간, 상대의 뜻을 묻지 않고 넘어가기 쉬워지거든요.”“그 변화에는 과거 팬 사진을 촬영하셨던 경험도 영향을 주었을까요?”사전 질문지에는 없던 문장이었다. 질문 자체가 무례하지는 않았지만, 유리는 대답하기 전에 기자를 바라보았다. 기자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다.“그 질문은 하셔
청첩장 인쇄본이 도착한 날, 민유리는 현관 앞에 놓인 작은 상자를 한동안 열지 못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종이 오십 장뿐이었다. 이미 시안도 여러 번 확인했고 인쇄 직전에는 정태준과 나란히 앉아 이름의 간격과 글자 크기까지 살폈다. 그런데 막상 실물로 도착하고 나니, 그 종이가 두 사람이 정말 결혼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처럼 느껴졌다.유리는 식탁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사진부터 찍었다. 포장된 상태로 한 장, 칼로 테이프를 가른 뒤 한 장, 청첩장의 모서리가 처음 보이는 순간도 한 장.맞은편에 앉아 있던 태준이 물었다.“언제까지 찍을 겁니까?”“기록하는 중이에요.”“조금 전에는 카메라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연습을 한다고 했잖아요.”“결혼식 날 이야기죠. 오늘은 제가 찍어도 돼요.”“청첩장보다 당신이 먼저 보고 싶습니다.”유리가 카메라를 내렸다.“왜요?”“내 표정이 어떤지 궁금하다면서요.”그제야 유리는 렌즈를 태준 쪽으로 돌렸다. 그는 평소처럼 단정한 셔츠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있었지만, 상자 위에 올린 손끝이 아주 조금 굳어 있었다. 유리가 셔터를 누르지 않고 기다리자 태준이 눈썹을 올렸다.“안 찍습니까?”“긴장했어요?”“아닙니다.”“손가락에 힘 들어갔는데.”태준이 상자에서 손을 뗐다.“이제 아닙니다.”“그렇게 숨기면 더 티 나요.”유리는 카메라를 식탁에 내려놓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맨 위에는 인쇄소에서 보호용으로 넣은 얇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걷자 아이보리색 청첩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면에는 온실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작게 인쇄되어 있었다. 유리는 카메라 가방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은 태준과 맞잡고 있었다.청첩장을 펼친 태준이 안쪽의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정태준과 민유리가서로의 가장 평범한 날을 함께 살아가기로 했습니다.그 아래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똑같은 크기로 나란히 적혀 있었다.유리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어때요?”“좋습니다.”“그게 다예요?”“종이를 보고 울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