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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말린땅콩
생일 파티의 소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손목에서 팔찌가 사라진 별아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원래 이렇게, 자신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을 버리는 게 이렇게나 후련한 거였구나.

‘잘 버렸어.’

별아는 스스로 다행이라 여겼다.

바람이 불어왔다.

마당에 걸린 얇은 커튼들이 흔들리며 펄럭거렸다.

별아는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는 이 광란 속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였을까? 아니면 발을 잘못 디뎌서였을까?

별아의 몸이 순간 휘청거리면서 그대로 샴페인 타워에 부딪혔다.

샴페인 타워가 기울어지며 옆에 있던 사람에게 와르르 쏟아졌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시정의 몸 위로 샴페인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쏟아졌다. 피가 번져 나왔다.

이건 별아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시정은 피웅덩이에 쓰러졌다.

시정의 눈빛이 별아를 향했다. 이해할 수 없는 듯, 서운한 듯,

“별아 언니... 언니...”

소리를 듣고 달려온 강준이 사람들을 밀치며 시정을 안아 올렸다.

“야! 미쳤어? 불만 있으면 나한테 풀어! 왜 이런 비열한 짓을 해? 내가 괜히 철든 줄 알았네. 다 거짓말이었어. 이건 정말 악질이야.”

강준의 목소리는 미쳐 날뛰듯 날카로웠다.

별아는 그 자리에 굳어 선 채, 새하얀 얼굴로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누가 지금 그걸 들어주겠어.’

강준의 눈에는 별아의 상처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분노로 별아를 몰아붙였다.

“시정이 생일이야. 이렇게 중요한 날에 네가 한 짓을 어떻게 생각해? 시정이가 무사하길 기도해라. 아니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강준은 시정을 안은 채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별아를 향해 날카롭게 돌아섰다.

“내가 널 괜히 착하게 본 거야. 넌... 넌 정말 나한테 큰 실망이야.”

“강준아, 별아 씨도 다쳤잖아, 안 보여?”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강준은 잠시 멈칫했다.

시선을 돌리자, 별아의 손끝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강준의 심장이 순간 움켜쥐어진 듯 죄어왔다.

그가 무언가 하려는 순간, 시정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빠... 오빠는 별아 언니 먼저 챙겨주세요. 저는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뭐가 괜찮아, 이렇게 피투성이인데?”

강준은 옆에서 말한 남자를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네가 별아 좀 봐줘. 난 시정이부터 병원에 데려가야 돼.”

강준은 시정을 안은 채 성큼성큼 사라졌다.

별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숨을 고르듯 피곤한 얼굴을 했다.

‘역시... 사랑받지 못한다는 건 그 자체로 죄구나.’

강준이 결국 시정을 선택할 걸 알면서도, 별아의 가슴은 쓰라렸다.

“손을 다치셨네요. 먼저 치료하셔야 해요.”

누군가가 손수건을 건네며 다가왔다.

별아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유이겸이었다.

이겸은 강준의 오랜 친구였지만, 별아가 강준을 만나 결혼하기까지 사실상 그와 마주친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약혼식 한 번, 결혼식 한 번.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였다.

“감사합니다.”

별아는 이겸이 내민 손수건을 받아 들며 상처 난 손가락을 꼭 감쌌다.

“새 손수건 사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손수건 하나인데요, 뭘요.”

이겸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상처가 덧나면 곤란하잖아요.”

하지만 별아는 아직 정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이 정도 작은 상처는 그냥 둬도 괜찮아.’

별아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주변의 하객들은 이미 별아와 강준 사이의 불편한 기류를 눈치채고 있었다.

무엇보다 강준이 시정을 얼마나 아끼는지 여실히 드러난 방금 전의 장면 때문에, 많은 이들은 오히려 강준이 안아 나갔어야 할 사람이 별아가 아니냐는 듯 수군거렸다.

별아는 마이크를 들었다.

순간, 시끄럽던 웅성거림이 뚝 끊겼다.

“여러분, 소시정 씨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병원에 옮겨졌습니다. 제대로 대접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오늘 자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준비한 답례품이 있으니 돌아가실 때 꼭 챙겨 가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하객들은 대부분 강준의 체면을 생각해 온 이들이라, 더 이상 따지거나 캐묻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정원에는 금세 별아와 어지럽혀진 풍경만 남았다.

별아의 눈빛은 공허했고, 얼굴은 무덤덤했다.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별아 씨, 제가 병원까지 모셔 드리겠습니다. 상처 치료부터 하셔야죠.”

관심 어린 목소리에 별아의 공허한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별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아직 안 가셨군요.”

이겸조차 왜 자리에 남았는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아마도 강준이 별아를 챙겨 달라고 했던 말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별아에 대한 어딘가 모를 연민 때문일 수도 있었다.

“강준이가...”

별아는 이겸이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일찍 들어가세요. 전 괜찮습니다. 다들 지치셨을 텐데...”

이겸의 얼굴에 잠시 망설임이 스쳤다.

“오늘 별아 씨가 너무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강준이가... 정말 그러면 안 됐는데...”

별아는 고개를 들어 이겸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미간은 깊게 찡그려져 있었고, 마치 별아의 억울함을 대신 감당하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별아는 그 어떤 위로도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참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이건 그저 이혼을 준비하는 과정일 뿐이야.’

사실 오늘 일을 계기로 강준이 먼저 이혼을 꺼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잘 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불필요한 잡음 없이, 송씨 가문의 이익 또한 지켜낼 수 있을 테니까.

별아는 담담하게 입술을 열었다.

“하강준 씨는 본인의 선택을 하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전생에서 이미 충분히 상관했던 만큼, 그 대가도 치렀어.’

‘이번 생에 다시 그 고통을 반복할 이유는 없어.’

‘단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강준이라는 남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강준이도 그냥 잠시 판단을 잘못한 겁니다.”

이겸은 어떻게든 친구 편을 들어주고 싶은 듯했다.

별아는 웃음을 지었다.

강준이 시정을 감싸는 건 사랑의 본능이었다.

별아는 누구보다 잘 안다. 강준이 사랑에 빠지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예전에도 별아가 정원에 있던 장미 가시에 손을 베이자, 강준은 정원 가득 핀 장미를 단 하루 만에 다 뽑아 버렸다.

강준은 사랑에 빠지면 미쳐버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광기 어린 사랑은, 사실 어떤 여자에게든 똑같이 쏟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전생의 나는 그걸 몰랐어.’

강준이 시정을 사랑하는 걸 보면서, 별아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래서 안간힘을 다해 강준을 붙잡으려 했다.

마음은 붙잡을 수 없어도, 사람만이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그때 조금만 더 빨리 인정했더라면...’

‘하강준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더라면...’

‘나는 결국 산후에 그토록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하강준은 철저한 거짓말쟁이였다.

그 거짓으로, 송별아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남자였다.

...

별아는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집 안으로 발을 옮겼다.

잔디밭에는 이겸만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멍하니 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단독주택의 밤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별아는 거실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때 집사 노숙현이 우유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

“사모님, 우유 한 잔 드시고 마음 좀 진정하세요. 대표님은 아마 병원에 계실 겁니다.”

“소시정 씨 일 때문에 오늘은 안 들어오실 수도 있으니, 괜히 기다리지 마시고 편히 쉬시는 게 나으실 거예요.”

노숙현조차도, 강준이 시정을 얼마나 챙기는지 눈치챘다는 사실이 별아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집사님도 알잖아요. 하 대표가 소시정 씨를 대하는 게 남들과는 다르다는 거...”

별아의 말에 노숙현은 난감한 얼굴을 지었다.

차마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분명 오늘 강준이 시정에게 보인 태도는 도를 넘은 것이었으니까.

아내가 다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정만 챙겼다.

“아마 대표님께서... 소시정 씨가 좀 안쓰럽게 보이셔서, 신경을 더 쓰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집사님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별아는 고개를 저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집에는 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히 말씀하셔도 돼요.”

전생에서 노숙현은 별아에게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강준이 화를 내며 물건을 던졌을 때도, 몇 번이고 대신 막아줬다.

솔직하고 바른 성격이라, 강준의 불공평한 행동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번에도, 별아의 말에 노숙현은 결국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제가 보기엔... 사모님께서 직접 말씀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께 소시정 씨를 멀리하시라고요.”

“안 그러면, 사모님과 대표님 사이에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손해가 더 클 겁니다.”

별아는 조용히 웃었다.

“혹시... 소시정 씨가 진짜 하 대표의 사랑이라면요? 전 남의 인연을 억지로 끊을 마음은 없어요.”

노숙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결혼한 사람이 무슨 진짜 사랑을 또 찾는답니까? 그건 다 핑계예요. 결국은... 남자의 아랫도리가 흔들린 거죠.”

“노래 가사에도 있잖아요. ‘못 가진 게 늘 설레는 법’이라고. 사모님, 대표님을 더 단단히 붙잡으셔야 합니다. 괜히 다른 여자에게 휘둘리면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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