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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각자 계산하면서 살아가잖아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6 12:05:04

차준호의 손가락이 내 턱 끝을 스치더니 목덜미를 따라 스르륵 미끄러졌다. 그가 내뱉은 말은 경고처럼 차가웠지만, 닿은 손끝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나는 잠시 그 말의 진위를 짚어보며 슬그머니 몸을 움찔거렸다.

한남동을 그것도 명절에 차진철 회장을 만나자고 하다니.

그는 정교한 덫을 쳐놓고 내가 걸려들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저 깊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좋아요, 같이 가요.”

차준호는 내 목덜미에 입술을 잠시 묻었다가 떼더니, 왼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대범하네. 무슨 선전포고냐고 안 물어보는 건가?”

역시 이 남자. 내가 왜 한남동에 가서 회장님을 만나야 하느냐며 발끈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가 아무리 열정적으로 구애한다 한들, 내 마음은 빙산의 일각처럼 아주 조그만 조각만 그의 영역에 띄워두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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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층에서 25층, 익숙한 비서실을 지나 대표실로 향하는 길.“대표님, 참 가지가지 대단도 하시네요.”어느새 나는 차준호의 단단한 손에 이끌려 조용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게임 개발실이 위치한 층을 벗어나자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았다.명절 직후의 주말인 데다 다른 부서 직원들은 연차를 몰아 쓴 덕에 사옥 안은 적막했다.“지난주에 대표실을 좀 리모델링했거든.”비서실을 지나자, 허기찬 대신 서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요청하신 자료는 메신저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전 이만 퇴근하겠습니다.”“그래, 고생했어.”나를 대신해 정식 비서 자리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총무과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나은 대우를 해주겠지. 그래도 여자 비서가 아니라 다행스러워하는 나 자신에게 허무한 콧웃음이 흘러나왔다.차준호가 나를 이끌고 들어간 곳은 대표실 안쪽 프라이빗 공간이었다.예전에 무심코 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확연히 달랐다.은은하게 깔린 간접 조명 아래, 세련된 소파와 미니바가 보였고, 그 옆으로 널찍한 킹사이즈 침대가 자리했다.원래 한남동 저택이나 호텔 스위트룸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인 데다가 서재 같던 공간이 원룸처럼 꾸며져 있어 색다른 기류가 흘렀다.설마 나 때문에 호텔로 돌아가지 못하는 날이면 이곳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이 판을 짜둔 걸까.황당함에 말을 잊은 나를 보며, 그가 입꼬리를 짓궂게 올려 세웠다.“차나 한잔할까. 내가 이제야 건강 좀 챙겨볼까 하고 술은 좀 줄였거든.”어느새 차준호는 미니바 앞에서 익숙하게 찻주전자를 꺼냈다. 나는 묘한 기분에 할 말을 잃은 채 털썩 소파에 몸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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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89. 슬픔 따위 짓밟고 나아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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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188. 맛있게 매운 맛을 터트리다

    차준호가 나를 위해 공식적인 연인이라 선언을 한다고?늘 내 뒤를 묵묵히 받쳐주고, 나를 품어 안을 때나, 심지어 차진철 회장 앞에서도 애매모호한 여지를 남기던 그였다.하지만 미래까지 함께할 수는 없다며 단단한 벽을 치던 남자가 이제 와서 나를 자신의 여자라고 세상에 밝히겠다니.나는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직시하며 크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대표님은 이 회사의 명운을 짊어진 분입니다. 굳이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그러자 차준호가 한 발짝 바짝 다가서며 낮게 읊조렸다.“이대로 혼자 달려 나가다 멈춰 섰을 때, 내 여자라는 태그를 달아놓아야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결국 이것 때문이었나.내가 또다시 홀로 남아 처참하게 짓밟힐까 봐. 판을 흔든 뒤 감당해야 할 그다음까지 그가 미리 걱정해 주는 건가.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길은 고마웠고, 모든 것을 걸고 지켜주려는 그의 중후한 헌신에 가슴이 울컥거릴 만큼 감격스러웠지만······.“너무 늦었네요, 대표님.”말을 마친 나는 서늘하게 돌아설 준비를 하였다.어차피 나를 온전히 안아줄 마음이었다면, 지난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확실히 내 옆에 서 주었어야 했다. 이미 다 지나버린 일이었다.내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차준호가 전격적으로 일어서며 내 손목을 강하게 쥐어잡았다.“그래, 지독하게 늦었다는 거 알아.”억센 악력 뒤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미세하게 떨려왔다.“그러니 내가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일단 식사라도 제대로 마치고 가.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9. 빌런을 좋아한 건가. 이런 망할.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8. 내가 미쳤지.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7. 완벽한 타인의 숨결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6. 천하의 나쁜 남자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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