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요 며칠 자신도 신하늘의 선거 운동을 따라다니고, 병원을 들락날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은 밀렸고, 수십 조가 오가는 사업을 결정하고 쇄신하는 브리핑이 이어지자 뒷골이 당겨와 쓰러질 것만 같았다.
통유리창 너머 한강의 물결은 봄햇살을 받아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임원단들과 L그룹의 각종 지표가 띄워진 대형 모니터 화면은 전부 퍼렇게 내리막만 꽂아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니터를 띄워 놓고도 이아준의 노트북 옆쪽에는 작은 헤드라인으로 정치 뉴스가 실시간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임신’ 사실 숨긴 채 총선 레이스를 완주한 신하늘, 득표율 압승으로 국회 입성]
[임신을 무기로 삼지 않은 그녀, 오직 공약과 정책으로 승부한 신하늘 당선인의 저력은 K정치의 새 지표를 열다]
[외신
그날 오후.회진을 돌던 의료진이 VIP병실로 와서 나와 차준호에게 단단히 경고를 내리고 떠났다.[차 대표님, 대수술을 받은 지 겨우 사흘째입니다. 아무리 휠체어로 이동하시더라도 복부에 힘이 들어가면 봉합한 수술 부위가 터질 수 있어요.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신하늘 님도 수액이 다 들어가기 전까진 안정을 취하셔야 하고요.]하지만 정작 우리 중 그 누구도 제 몸 하나 가눌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었다.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입맛이 전혀 없었지만, 어떻게든 견뎌내기 위해 억지로 미음 몇 숟가락을 삼키고 자리를 옮겼다.강진욱이 마지막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서늘한 선고를 내린 직후라, 중환자실 앞 복도에 앉아 있던 차진아와 고미주 여사의 눈은 이미 붉게 퉁퉁 부어 있었다.중환자실의 육중한 자동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차가운 복도 너머로 누군가의 삶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오열과 둔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차준호를 시작으로 고미주 여사, 그리고 차진아까지⋯. 각자의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무균병동 문턱을 넘었던 이들이 하나둘 돌아왔을 때,그들의 눈동자는 이미 삶의 의지나 초점을 완전히 잃어버린 납빛이었다.그리고 마침내, 내가 그 문턱을 넘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서늘한 멸균 비닐 무균복을 덧입고, 마스크와 위생 장갑, 헤어캡까지 꼼꼼히 갖추었다.전신을 감싸는 알코올 소독액의 서늘하고 찌릿한 감각을 두른 채, 나는 마침내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처럼 느껴지는 그 이질적인 공간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중환자실 무균병동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삭막했다.천장을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수많은 기계 배선과 낮게 가라앉은 차가운 공기,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규칙적이지만 위태롭게 울리는 전자음들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L그룹 회장 취임식을 단 며칠 앞둔 이아준의 회장실은 상당히 분주했다.요 며칠 자신도 신하늘의 선거 운동을 따라다니고, 병원을 들락날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그러다 보니 일은 밀렸고, 수십 조가 오가는 사업을 결정하고 쇄신하는 브리핑이 이어지자 뒷골이 당겨와 쓰러질 것만 같았다.통유리창 너머 한강의 물결은 봄햇살을 받아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임원단들과 L그룹의 각종 지표가 띄워진 대형 모니터 화면은 전부 퍼렇게 내리막만 꽂아대고 있었다.하지만 그 모니터를 띄워 놓고도 이아준의 노트북 옆쪽에는 작은 헤드라인으로 정치 뉴스가 실시간으로 깜빡이고 있었다.[‘임신’ 사실 숨긴 채 총선 레이스를 완주한 신하늘, 득표율 압승으로 국회 입성][임신을 무기로 삼지 않은 그녀, 오직 공약과 정책으로 승부한 신하늘 당선인의 저력은 K정치의 새 지표를 열다][외신도 주목한 신하늘의 행보⋯ 한국 정치가 나아갈 새로운 지평이 되다][차준호 CH컴퍼니 대표, 아내의 곁에서 묵묵한 외조 후 탈진, 온 가족이 입원 중으로 알려져]기사의 댓글 창에는 그녀를 향한 전 세계적 갈채와 찬사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기존 정치인들처럼 동정표를 구하거나 네거티브 프레임도 거부한 신하늘이었다. 특히 개인의 신상 이슈를 프레임으로 활용하지 않고, 오롯이 정직하게 정면 돌파해 낸 신하늘의 행보에 사람들은 환호했다.화면을 천천히 시선으로 쓸어내리던 이아준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승전가와 신화에 열광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 화려한 가면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아는 그로서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아려왔다.‘하늘아⋯ 아이를 갖고도 그 지옥 같은 선거판을 버텨내다니. 게다가 차준호에게 이식까지 하려 한 건 너무했잖아. 대체⋯ 얼마나
나와 선우현을 보던 강진욱 박사가 지친 기색으로 마스크를 내려 쓰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중환자실 앞에서 나를 위해 배려하듯 잠시 기다려 주었다.선우현이 다급하지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차진철 회장의 상태를 확인하듯 유리벽을 슬쩍 훑어보았다. 이내 나를 향해 진중하고 다급한 눈빛을 보내며 주변을 살폈다.“······먼저 박사님부터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나는 휠체어를 탄 차준호의 손을 꼭 잡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선우현의 눈빛에는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차진철 회장의 상태가 우선이었다. 내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양해를 구했다.“네, 선우현 보좌관님. 감사합니다.”선우현은 입을 다물고 진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우리의 시선이 일제히 강진욱 박사에게로 쏠렸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깊게 패인 눈빛은 차마 말로 다할 수 없는 피로감과 정적에 잠겨 있었다. 강진욱은 모두를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어제 수술방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두 번째입니다.”세상에, 차진철은 심정지가 이미 왔던 건가.강진욱의 목소리는 건조했으나, 그 안에 담긴 경고는 서늘하도록 무거웠다. 복도 전체가 순식간에 숨조차 쉴 수 없는 정적으로 얼어붙었다.“심장이 버텨낼 수 있는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어쩌면······ 다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발성 장기부전(Multiple Organ Failure)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이 고비입니다.”그 말이 남기고
중환자실 앞에 머무는 공기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늘 그러하듯, 지나치게 소독되어 있어 오히려 비현실적인 악취를 풍겼다.분명 차진철 회장이 무사히 눈을 떴다는 희망적인 소식이 들릴 줄 알았는데.막상 도착해 마주한 현장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못해 서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나와 차준호는 모든 사고(思考)가 정지된 백색의 공간 속에 툭 던져진 것만 같았다. 그저 서로의 손뼈가 불거질 만큼 강하게 맞잡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투명한 유리벽 너머, 한 시대를 호령했던 거물 차진철은 더 이상 위엄 있는 경영자의 모습이 아니었다.그는 수많은 투명 호스와 전선에 온몸을 포박당한 채, 수분기가 다 빠져나가 생명을 잃어가는 고목(古木)처럼 무력하게 누워 있었다.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그의 가느다란 숨통을 강제로 붙들고 있었고, 인공호흡기가 규칙적으로 내뱉는 기계적인 마찰음만이 그가 아직 이승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위태롭게 증명하고 있었다.“회장님, 안 돼요, 제발······!”고미주 여사가 유리벽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절규했다.차진아는 이미 넋이 나간 얼굴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그저 제 아버지이지만 ‘회장님’만 연신 부르며 목놓아 울부짖고 있었다.그때, 바이탈 모니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붉은빛으로 요동치더니, 이내 극도로 위태로운 빈맥(Tachycardia) 신호를 내뿜기 시작했다.“어레스트(심정지) 임박! V-fib(심실세동)입니다!”어떻게 이런 일이.외침과 동시에 의료진이 흉부 압박에 들어갔고, 에피네프린 투여 지시가 빗발쳤다.급박한 의료진의 움직임으로 중환자실 내부가 순간
아침이 한참 지났음에도 병원 휴게실은 적막했다.창문 너머로 맑은 햇살이 스며들었지만, 형광등 불빛만 무기력하게 가득 찬 휴게실 내부 바깥의 소란과는 단절된 고요한 섬처럼 사람을 짓눌렀다.자판기 옆 낡은 소파 끝자락에 차진아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이아준은 그런 차진아의 모습이 내내 눈에 거슬려 선뜻 문을 열고 나가지 못했다.차준호가 무사히 깨어났고 신하늘도 무탈하다니 이제 그만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사경을 헤매는 아버지를 둔 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그 작은 체구가 애처로워서일까.아니면 차진아에게서 마치 벌을 받고 있던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 겹쳐 보여서였을까차진아의 손에는 다 식어버린 믹스 커피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눈물은 이미 뺨을 타고 흘러내릴 힘조차 없는지, 눈가에 위태롭게 맺힌 채 불안하게 반짝였다.이아준은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마시던 캔커피를 들고 차진아의 옆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바라본 차진아는 열아홉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훨씬 더 작고 어린아이 같았다.“진아 양, 식사는 해야지. 뭐라도 좀 사다 줄까?”“······저는 괜찮아요.”낮고 메마른 음성. 슬픔이나 투정조차 사치라는 듯 단념이 깔린 말투였다.“이따가 고 여사님이 좋은 소식 가지고 오실 거야. 그때 견디려면 지금 뭐라도 좀 먹어둬야지.”차진아는 이아준의 느닷없는 다정함이 생경했는지, 쭈뼛거리며 작게 어깨를 움츠렸다.“······고맙습니다, 이아준
깊게 가라앉았던 의식의 수면을 뚫고, 마침내 차준호라는 고요한 섬이 보였다.눈꺼풀 너머로 희미한 햇살이 번져왔고,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귓가를 따라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그동안 꽤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속에는 여전히 흘릴 수분이 남아 있었는지 얼굴이 다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그가 눈앞에 반드시 나타날 거라는 단 하나의 확신으로 버텼던 시간들이 의식 바깥 어딘가에서 거친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아득히 빠져나갔다.“······신하늘은 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 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어. 늘 예상 밖이야.”누가 할 소리. 그 재주는 차준호가 넘버원인 것을.그의 말에 그래도 심장이 일렁거렸다.불과 얼마 전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피 말리는 사투를 벌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얼굴은 해사했고 눈빛은 여전히 형형한 기개를 품고 있었다.온 세상을 발 아래 두고도 지루하다는 듯 오만하게 흘겨보는 그.그 어떤 가혹한 운명도 감히 자신을 꺾을 수 없다고 믿는 특유의 눈빛.다시는 마주하지 못할까 봐 차마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삼켰던 애틋한 존재가, 지금 내 눈앞에 온전한 실체로 존재하고 있었다.“······깨어나주었네요, 정말로······.”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제대로 된 멋진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고작 그 한마디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건강해진 그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홀로 남아 얼마나 아득한 공포에 떨었는지, 그리고 다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