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와 선우현을 보던 강진욱 박사가 지친 기색으로 마스크를 내려 쓰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중환자실 앞에서 나를 위해 배려하듯 잠시 기다려 주었다.
선우현이 다급하지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차진철 회장의 상태를 확인하듯 유리벽을 슬쩍 훑어보았다. 이내 나를 향해 진중하고 다급한 눈빛을 보내며 주변을 살폈다.
“······먼저 박사님부터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휠체어를 탄 차준호의 손을 꼭 잡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선우현의 눈빛에는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차진철 회장의 상태가 우선이었다. 내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양해를 구했다.
“네, 선우현 보좌관님. 감사합니다.”
선우현은 입을 다물고 진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나와 선우현을 보던 강진욱 박사가 지친 기색으로 마스크를 내려 쓰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중환자실 앞에서 나를 위해 배려하듯 잠시 기다려 주었다.선우현이 다급하지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차진철 회장의 상태를 확인하듯 유리벽을 슬쩍 훑어보았다. 이내 나를 향해 진중하고 다급한 눈빛을 보내며 주변을 살폈다.“······먼저 박사님부터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나는 휠체어를 탄 차준호의 손을 꼭 잡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선우현의 눈빛에는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차진철 회장의 상태가 우선이었다. 내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양해를 구했다.“네, 선우현 보좌관님. 감사합니다.”선우현은 입을 다물고 진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우리의 시선이 일제히 강진욱 박사에게로 쏠렸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깊게 패인 눈빛은 차마 말로 다할 수 없는 피로감과 정적에 잠겨 있었다. 강진욱은 모두를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어제 수술방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두 번째입니다.”세상에, 차진철은 심정지가 이미 왔던 건가.강진욱의 목소리는 건조했으나, 그 안에 담긴 경고는 서늘하도록 무거웠다. 복도 전체가 순식간에 숨조차 쉴 수 없는 정적으로 얼어붙었다.“심장이 버텨낼 수 있는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어쩌면······ 다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발성 장기부전(Multiple Organ Failure)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이 고비입니다.”그 말이 남기고
중환자실 앞에 머무는 공기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늘 그러하듯, 지나치게 소독되어 있어 오히려 비현실적인 악취를 풍겼다.분명 차진철 회장이 무사히 눈을 떴다는 희망적인 소식이 들릴 줄 알았는데.막상 도착해 마주한 현장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못해 서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나와 차준호는 모든 사고(思考)가 정지된 백색의 공간 속에 툭 던져진 것만 같았다. 그저 서로의 손뼈가 불거질 만큼 강하게 맞잡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투명한 유리벽 너머, 한 시대를 호령했던 거물 차진철은 더 이상 위엄 있는 경영자의 모습이 아니었다.그는 수많은 투명 호스와 전선에 온몸을 포박당한 채, 수분기가 다 빠져나가 생명을 잃어가는 고목(古木)처럼 무력하게 누워 있었다.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그의 가느다란 숨통을 강제로 붙들고 있었고, 인공호흡기가 규칙적으로 내뱉는 기계적인 마찰음만이 그가 아직 이승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위태롭게 증명하고 있었다.“회장님, 안 돼요, 제발······!”고미주 여사가 유리벽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절규했다.차진아는 이미 넋이 나간 얼굴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그저 제 아버지이지만 ‘회장님’만 연신 부르며 목놓아 울부짖고 있었다.그때, 바이탈 모니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붉은빛으로 요동치더니, 이내 극도로 위태로운 빈맥(Tachycardia) 신호를 내뿜기 시작했다.“어레스트(심정지) 임박! V-fib(심실세동)입니다!”어떻게 이런 일이.외침과 동시에 의료진이 흉부 압박에 들어갔고, 에피네프린 투여 지시가 빗발쳤다.급박한 의료진의 움직임으로 중환자실 내부가 순간
아침이 한참 지났음에도 병원 휴게실은 적막했다.창문 너머로 맑은 햇살이 스며들었지만, 형광등 불빛만 무기력하게 가득 찬 휴게실 내부 바깥의 소란과는 단절된 고요한 섬처럼 사람을 짓눌렀다.자판기 옆 낡은 소파 끝자락에 차진아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이아준은 그런 차진아의 모습이 내내 눈에 거슬려 선뜻 문을 열고 나가지 못했다.차준호가 무사히 깨어났고 신하늘도 무탈하다니 이제 그만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사경을 헤매는 아버지를 둔 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그 작은 체구가 애처로워서일까.아니면 차진아에게서 마치 벌을 받고 있던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 겹쳐 보여서였을까차진아의 손에는 다 식어버린 믹스 커피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눈물은 이미 뺨을 타고 흘러내릴 힘조차 없는지, 눈가에 위태롭게 맺힌 채 불안하게 반짝였다.이아준은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마시던 캔커피를 들고 차진아의 옆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바라본 차진아는 열아홉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훨씬 더 작고 어린아이 같았다.“진아 양, 식사는 해야지. 뭐라도 좀 사다 줄까?”“······저는 괜찮아요.”낮고 메마른 음성. 슬픔이나 투정조차 사치라는 듯 단념이 깔린 말투였다.“이따가 고 여사님이 좋은 소식 가지고 오실 거야. 그때 견디려면 지금 뭐라도 좀 먹어둬야지.”차진아는 이아준의 느닷없는 다정함이 생경했는지, 쭈뼛거리며 작게 어깨를 움츠렸다.“······고맙습니다, 이아준
깊게 가라앉았던 의식의 수면을 뚫고, 마침내 차준호라는 고요한 섬이 보였다.눈꺼풀 너머로 희미한 햇살이 번져왔고,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귓가를 따라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그동안 꽤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속에는 여전히 흘릴 수분이 남아 있었는지 얼굴이 다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그가 눈앞에 반드시 나타날 거라는 단 하나의 확신으로 버텼던 시간들이 의식 바깥 어딘가에서 거친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아득히 빠져나갔다.“······신하늘은 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 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어. 늘 예상 밖이야.”누가 할 소리. 그 재주는 차준호가 넘버원인 것을.그의 말에 그래도 심장이 일렁거렸다.불과 얼마 전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피 말리는 사투를 벌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얼굴은 해사했고 눈빛은 여전히 형형한 기개를 품고 있었다.온 세상을 발 아래 두고도 지루하다는 듯 오만하게 흘겨보는 그.그 어떤 가혹한 운명도 감히 자신을 꺾을 수 없다고 믿는 특유의 눈빛.다시는 마주하지 못할까 봐 차마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삼켰던 애틋한 존재가, 지금 내 눈앞에 온전한 실체로 존재하고 있었다.“······깨어나주었네요, 정말로······.”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제대로 된 멋진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고작 그 한마디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건강해진 그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홀로 남아 얼마나 아득한 공포에 떨었는지, 그리고 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가장 기쁜 날, 가장 많은 걱정과 슬픔 속에 나는 잠겨 있었다.내가 휴게실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자, 하나둘 사람들이 다가왔다.고미주 여사가 초췌한 안색으로 내 손을 잡았다.“얼굴이 그게 뭐야? 웃어야지. 처음 볼 때부터 남다르다 생각했지만,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을 곁에 두고도 몰라봤어. 신 비서······ 진심으로 축하해.”그녀의 안색은 어두웠지만, 나를 향한 축복만큼은 진실했다. 차진아 역시 분홍빛으로 물든 눈가에 힘을 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정말 축하해요, 언니. 그리고······ 우리 오빠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많이 울어서인지 눈이 붉어진 애처로운 차진아의 얼굴을 보며 위로의 말을 고르던 찰나, 새벽의 정적을 찢는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휴게실 안으로 들려왔다.“······하늘아.”“신하늘.”그곳엔 도국과 이아준이 서 있었다. 휴게실에 내가 보이지 않자 찾아온 모양이었다.나는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억지로 추슬렀던 내 표정은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바쁜데 너희까지 걱정 끼치고. 고마워, 함께 있어줘서. 어서 가.”이아준이 가장 먼저 다가와 내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그 온기 속에서 나조차 몰랐던 몸의 비명이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듯했다.“차 대표는 이
“보호자분······.”그 정적인 음성이 복도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시간의 실타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땀에 절어 검게 변한 수술복 차림의 강진욱 박사가 피로가 가득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뒤늦게 달려온 선우현이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내 망막은 그 어떤 장면도 포착하지 못한 채 하얗게 점멸했다. 오직 강진욱의 입술이 그리는 미세한 떨림과 그 너머에 머무는 진실만이 나의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우선 췌도 이식 수술 자체는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초기 주입 반응도 양호합니다. 다만, 두 분 모두 전신 마취와 수술의 여파가 커 의식을 회복하시기까지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적막을 찢고 들려온 그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의 심장을 울렸다.그토록 갈구하던 기적의 언령이자 희망의 신호가 고막을 때리자, 꼿꼿이 버티고 있던 다리의 신경이 일제히 풀려나갔다.비틀거리는 나를 지탱한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그것은 차마 무너지지 못한 지독한 긴장의 잔여물이자, 아직은 쓰러질 수 없다는 강력한 본능이었다.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안도의 탄식과 깊은 숨소리가 아득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불이 꺼진 수술방의 육중한 문을 멍하니 응시했다.오랫동안 내 영혼을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바위가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강진욱 박사는 무겁게 헛기침을 하며 설명을 이어갔다.“회장님의 췌도 세포가 차 대표님의 간문맥을 통해 성공적으로 주입되었습니다. 회장님의 체력이 다소 우려스럽긴 하나, 수술 자체는 기대 이상으로 잘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