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아, 이 남자 귀신인가. 뭘 다 알아챈 거지.’
난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경비하시는 분들 기다리게 할 셈이야?”
차준호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경호원도 경비원도 제발 협조해 달라는 눈치로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 과장님, 오늘 야근 신청 안 하셨죠?”
“다음부터 퇴근 시각 이후에는 ID 카드를 사무실 입구에 다시 태그하고 일해 주시기 바랍니다.”아, 그런 절차가 있었던가. 내가 지금 폐를 끼친 거였다.
“아, 네.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졸지에 기세등등하던 나는 모두를 향해 사과를 한 뒤, 서둘러 보고서를 최기범 실장에게 전송하고 컴퓨터를 껐다. 오늘 오후부터 최 실장이 출장을 간 탓에 미뤄둔 중간 보고를 급하게 처리
수화기 너머로 명확하게 스며드는 두 남자의 음성에 나는 숨을 턱 멈췄다. 너무 놀라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만나는 여자? 내가? 설마······.’차진철 회장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순간, 온몸의 피가 역류하듯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당혹감에 휩싸인 가슴이 세차게 요동쳤다.자신은 지금 차준호와 그 어떤 사적인 관계도 아니었다.아무리 내가 연애에 무지하고 남녀 사이의 묘한 기류에 미숙하다 한들, 그와 나의 관계가 연인 따위가 아니라는 것쯤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명확했다. 그 남자는 그저 오만한 상사였고, 나는 그 아래서 일하는 비서일 뿐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화기 너머로 번지는 그 묵직한 '여자'라는 단어 하나에 목덜미부터 붉은 열기가 열병처럼 터져 올랐다.차준호가 내 머릿속에 남겨둔 그 사밀하고 다정한 행동과 나를 내려다보던 짙은 눈빛의 잔상이 아찔하게 뇌리를 스쳤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나는 수화기 너머 그 남자의 반응만을 숨조차 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버지, 그냥 제 비서예요. 일요일에 여길 뭐 하러 불러요?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차준호의 음성은 지독하리만치 차분하고 서늘했다. 마치 단 한 치의 여지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냉정하게 선을 긋는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귓가에 차갑게 내려앉았다.그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감이 허무하게 무너지며 맥이 탁 풀려버렸다.그럼 그렇지.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와 나 사이에 무슨 특별할 게 있다고.기대한 적도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 남자의 명확하고 서늘한 거절에 가슴 한구석이 시원섭섭하게 정리되는 기분
다음날 아침, 햇살이 이아준의 70층 잠실 레지던스 통창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지난밤의 소동으로 어지러웠다.나는 졸지에 세종동 터전을 잠시 떠나 이아준의 집으로 피신하듯 오게 되었다. 어제저녁, 예고도 없이 경찰차 여러 대가 붉은 사이렌 불빛을 번쩍이며 집 앞마당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신고자의 인적 사항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상습적인 강력 범죄 가능성이 있다며 경찰관들이 호들갑에 가까운 신속함으로 움직여 준 탓에 얼떨결에 짐을 싸야 했다.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집 담벼락에 흉측한 낙서나 혐오스러운 문구가 칠해지는 일은 내게 거의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매번 속으로 씁쓸함을 삼키며 페인트로 덮거나 친구들에게 위로받는 것이 전부였는데, 갑자기 형사들까지 현장 보존에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신하늘 씨, 상습적인 악의적 테러 및 신변 위협 건으로 즉시 수사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범인이 잡히고 현장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안전한 장소로 피신하시는 게 좋겠습니다.]경찰관이 건넨 단호한 말이 아직도 가에 맴돌았다. 그리하여 최소한의 짐만 챙겨 들고 경찰서까지 다녀와 진술서까지 작성해야 했다.그때 이아준의 비서이자 변호사 출신인 김정규와, 산전수전 다 겪은 도국의 매니저 이동근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경찰서에 동행한 순간부터 수사는 막힘없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나는 철저하게 보호받는 피해자가 되어 따뜻한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법적인 보호 절차를 꼼꼼히 체크해 주라고 지시한 이아준도 고마웠고, 거주지 이동 및 동선 보안에 앞장서며 자신의 전담 경호원까지 붙여준 도국의 과분한 배려에는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하지만 아무리 화려하고 근사한 펜트하우스라 해도 내 집만큼 편할 수는 없었다. 황당한 하루의 시작이었다.“하늘아, 잘 잤어?”이아준이 머리를 부스
어르신이 모두 돌아가고 쓰레기 정리까지 마친 나는, 멍하니 냉풍기 앞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눈을 감고 있었다.“하, 이게 행복이지.”큰 일을 마친 후련함과 해야 하는 의무를 마친 뿌듯함이 밀려와 몸은 나른해져갔다.냉풍기와 천막과 의자를 거두러 올 업자를 기다리던 그때.어수선한 소리가 들려 눈을 뜨고 보니, 텅 빈 운동장 저편에서 친구들이 오고 있었다.오늘 바쁘다고 했는데, 어떻게 시간을 낸 걸까.“아준아! 도국아!”작렬하는 태양 아래, 숨이 차오르는지 이글거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둘을 발견한 순간, 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하늘아! 많이 기다렸지? 수고했어!”“늦어서 미안하다, 신하늘!”나는 어린 시절 이 운동장을 누비던 그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양손을 크게 흔들었다.가장 먼저 달려온 이아준은 이 폭염 속에서도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린넨 슈트 차림이었다. 오늘은 무테안경을 쓰고 재벌가 막내 도련님 특유의 세련되고 고귀한 아우라를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었다.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은 듯 깔끔한 얼굴로 다가온 이아준이 안도감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도닥도닥 토닥여 주었다.“혼자 고생하게 해서 마음이 계속 안 좋았어. 괜찮아? 지쳐 보여.”이어 도착한 도국은 그야말로 어디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받아 막 데뷔한 풋풋한 신인 아이돌 같은 차림새였다. 깊게 눌러쓴 검은색 볼캡 모자 아래로 조각 같은 턱선이 드러났고, 탄탄한 체형을 매력적으로 드러내는 검은 반팔 티셔츠에 스타일리시하게 찢어진 청바지를 걸친 기럭지가 감탄을 자아냈다.도국은 무심한 듯 다정한 얼굴로 길쭉한 손을 뻗
7월도 어느덧 셋째 주, 지열이 아스팔트를 타고 흐물흐물 이지러질 만큼 매서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토요일이었다.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점심 봉사의 날이다. 지난주 내내 쏟아지던 비로 한 주 연기되는 바람에, 하필 본격적인 폭염과 딱 맞아떨어지고 말았다.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였지만, 나는 커다란 솥에 얼음을 수북하게 채워 넣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면 육수를 부어 부지런히 저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속까지 뻥 뚫리는 살얼음 띄운 냉면을 부지런히 그릇에 채웠다.열기가 그득하게 들어찬 야외 천막 안이었지만, 그나마 이아준이 내 봉사 일정에 맞춰 부랴부랴 마련해 준 대형 냉풍기 덕분에 천막 안 공기는 제법 서늘함을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던 도국이도, 아준이도 각자 바쁜 스케줄 탓에 오늘은 나 혼자 이 넓은 자리를 감당해야 했다.냉면 그릇을 두 손으로 가득 받아 든 한 할머니가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하늘아, 이 지독한 더위에 혼자 고생이 너무 많다.”“에이, 할머니. 한 달에 딱 한 번인데요, 전혀 안 힘들어요.”내가 가슴을 펴며 짐짓 활짝 웃어 보이자, 옆에서 냉면을 받아 들던 다른 할아버지가 미안함이 서린 표정으로 거들었다.“네가 땅 파서 돈 버는 것도 아닌데, 매번 이렇게 퍼주면 대체 뭐가 남냐. 젊은 애가 고생이 너무 많아.”“이게 뭐가 고생이에요.”그러자 구석 벤치에 앉아 냉면을 드시던 다른 할아버지 한 분이 젓가락을 살포시 내려놓으시며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얹으셨다.“매번 이렇게 대접만 받아먹기도 미안해서 원······.”몸이
차준호는 기가 차다 못해 황당하다는 얼굴로 강소희를 노려보았다.자신을 살리겠다고, 여배우가 제 몸에 칼을 대는 수술 따위를 운운하다니. 이식 수술이라는 게 말처럼 쉬울 리 없었다.매끄러운 몸에 지워지지 않을 커다란 흉터가 남을 것이며, 빡빡한 스케줄 역시 수개월간 엉망으로 비틀어질 게 뻔했다.설사 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후유증이 심각할 것이고, 실패하면 일상은 파국으로 치닫게 될 터였다.“강소희, 너 진짜 왜 이러는 거야?”차준호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강소희는 억울한 듯 입술을 경련하듯 삐죽이며 눈을 깜빡였다. 이미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붉게 물기가 들어차고 있었다.“너 잃기 싫으니까 그렇지! 나 진짜 너 하나만 바라보면서 내 청춘도, 인생도 전부 다 바쳤단 말이야!”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울분을 토해내는 강소희를 바라보며, 차준호는 그녀의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 줄까 하다가 그 마음을 거두었다. 섣부른 다정함은 더 큰 독이 될 뿐이었다.“······네 감정 나한테 강요하지 마.”차갑고 냉정하게 칼같이 잘라내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부딪쳐 오는 그녀의 지독한 순정이 아주 가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무엇보다 철없던 어린 시절부터 오직 '차준호'라는 이름 세 글자만 바라보고 쫓아다닌 오랜 친구였기에, 남은 양심상 그 이상 함부로 짓밟기엔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오랫동안 곁에서 널 진심으로 사랑해 줄 좋은 남자 만나. 주원형 같은 사람으로.”그 나지막하고 아득한 단념의 말을 끝으로, 차준호는 미련 없이 대표실 문고리를 훤히 열어젖혔다.“너
7월 중순.본격적인 한여름이 시작되면서 남들은 다들 휴가다, 여행이다 하여 한껏 들떠 있는 시기가 돌아왔다.나 역시 그들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크게 웃을 일 없었던 내 인생에서도 제법 들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해외 출장이라니. 차준호와 복잡 미묘한 사이라고는 해도, 별개로 일본 방문은 생애 처음이라 마냥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때 외근에서 돌아온 허기찬 실장이 나를 보며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슬쩍 말을 건넸다.“완전 좋겠다, 신 비서. 아주 제대로 호강하겠어. 오늘 인트라넷 공지 떴던 걸?”국내에서도 차준호와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고, 좋은 공연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는데. 나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 비행기 이번에 태어나서 처음 타봐요.”그 말에 허기찬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진짜? 거짓말! 그럼 학창 시절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도 안 가봤어?”“사정상 못 갔어요.”이런 게 뭐라고. 막상 말을 하려니 좀 부끄러웠다. 하지만 안 가본 걸 가봤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머쓱하게 고개를 숙이자, 때마침 대표실 문이 열리며 차준호가 걸어 나왔다.“허 실장, 신 비서 괴롭힌 거야? 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지?”갑작스러운 차준호의 등장에 허기찬은 당황해서 싱겁게 하하 웃으며 얼버무렸다.“아, 아닙니다! 괴롭히긴요! 신 비서가 비행기를 처음 타봤다고 하길래 그냥 놀라서요.”내 말을 들은 차준호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허기찬을 다시 찌릿 노려보았다.“허 실장이 제주도도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