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큰 절차들이 정리되기까지 10개월이 넘게 걸렸다.
가정법원은 허위 친족자료와 친생부모 은폐를 확인하고, 우진의 가족관계등록을 실제 친생관계에 맞게 바로잡았다. 아이의 거처는 아동전문가 의견에 따라 정재국의 집으로 정해졌다.
재국은 우진의 학교와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했다. 가장 먼저 아이 방을 꾸미고, 지안이 적어 준 약 복용표를 냉장고에 붙였다.
지안은 이사 전날까지 우진과 함께 있었다.
옷을 계절별로 나누고, 병원 예약일과 알레르기 음식, 악몽을 꿀 때 켜 두는 수면등 밝기까지 적었다. 마지막 상자에는 공룡 장난감이 들어갔다.
이삿날 우진은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티라노는 엄마 집에 두면 안 돼?”
“두고 싶어?”
“응. 나중에 찾으러 오게.”
지안은 초록색 티라노 한 마리를 책장 위에 남겼다.
“찾으러 와도 돼?”
출국 전날, 서지안은 집을 정리했다.결혼사진은 액자에서 꺼내 폐기 봉투에 넣었다. 정태성과 함께 고른 식기와 기념일마다 받은 선물도 필요한 사람에게 보냈다.어머니에게 상속받은 건물은 팔지 않았다.태성이 남긴 흔적 때문에 처분한다면 그것도 그의 선택에 끌려가는 일 같았다. 지안은 전문 관리회사와 새 계약을 맺고 임대수익과 유지보수를 맡겼다.소유자란에는 서지안 한 사람의 이름만 적혔다.침실 서랍을 비우던 중 작은 카드가 나왔다.[엄마 사랑해]우진이 다섯 살 때 처음 쓴 글씨였다. ‘사’와 ‘랑’의 크기가 제각각이고, 하트는 한쪽이 찌그러져 있었다.지안은 카드를 버리지 않았다.결혼사진과 아이의 카드를 같은 봉투에 넣을 이유는 없었다. 거짓말로 시작된 가족 안에서도 자신이 우진을 안고 웃었던 순간만큼은 진짜였다.책장 위에는 초록색 티라노가 남아 있었다.정재국에게서 사진이 도착했다. 우진은 정기검사를 마친 뒤 병원 앞에서 웃고 있었다. 손에는 같은 모양의 공룡 인형이 들려 있었다.[우진이는 치료 잘 받고 있다. 새 학교에도 적응 중이야. 네가 건강하길 바란다고 전해 달란다.]지안은 답장을 보냈다.[저도 우진이가 건강하길 바랍니다. 약 복용표가 바뀌면 알려 주세요.]잠시 망설이다 한 문장을 덧붙였다.[사랑한다고 전해 주세요.]공항으로 가기 전, 지안은 빈집을 마지막으로 둘러봤다. 태성과 함께 고른 소파가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고, 책장에는 우진의 티라노만 남았다.관리인에게 아이가 찾으러 오면 보관함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다음 날 지안은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처음 사는 도시, 새로운 조직,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집.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두려움과 자유는 함께
정태성의 회사는 결국 회생절차에 들어갔다.명의도용 대출금이 투자금으로 위장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주요 거래처가 계약을 끊었다. 태성의 대표 권한은 박탈됐고, 남은 지분에는 피해 회복을 위한 압류가 걸렸다.그는 마지막까지 서지안 탓을 했다.“고소만 취하했으면 회사를 살릴 수 있었다.”하지만 회계감사보고서에는 회사 자금을 한세라의 주거비와 개인 여행, 허위 컨설팅 비용으로 쓴 내역이 빼곡했다. 15억이 들어오기 전부터 회사는 자본잠식 상태였다.회사를 무너뜨린 것은 고소장이 아니라 태성의 장부였다.세라도 더는 ‘아빠 회사 이모’로 우진 곁을 맴돌 수 없었다. 법원은 친생모로서 치료비와 생활비를 분담하고, 양육 교육과 상담에 참여하라고 명했다.“저는 돈이 없어요.”세라가 주장하자 태성은 오피스텔 보증금이 세라 몫이라고 맞섰다. 세라는 태성이 약속한 대가라고 했고, 태성은 범죄수익이라며 자신과 무관하다고 했다.두 사람은 우진의 정기검사비와 상담비를 누가 더 부담할지를 놓고 매번 다퉜다. 지안에게 떠넘길 때는 가족을 위한 당연한 지출이라던 돈이었다.김명숙은 그렇게 원하던 친손자를 얻었다.그러나 아이는 상속재산을 가져오는 이름이 아니었다. 정기검사 날짜를 외워야 했고, 밤에 악몽을 꾸면 누군가 곁에 앉아 있어야 했다. 상담가는 명숙이 아이 앞에서 지안과 세라를 험담한 사실을 확인한 뒤 단독 보호에 반대했다.결국 정재국이 주 보호자가 됐다. 그는 우진에게 누구도 욕하지 않았고, 지안과 연락하고 싶다는 아이의 뜻도 존중했다.첫 면접교섭 날, 태성과 세라는 복도에서부터 다퉜다.“내가 먼저 안을 거야. 내가 엄마니까.”“3년 동안 숨어 있던 사람이 이제 와서?”우진은 상담실 안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상담가는 면접을 즉시 중
큰 절차들이 정리되기까지 10개월이 넘게 걸렸다.가정법원은 허위 친족자료와 친생부모 은폐를 확인하고, 우진의 가족관계등록을 실제 친생관계에 맞게 바로잡았다. 아이의 거처는 아동전문가 의견에 따라 정재국의 집으로 정해졌다.재국은 우진의 학교와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했다. 가장 먼저 아이 방을 꾸미고, 지안이 적어 준 약 복용표를 냉장고에 붙였다.지안은 이사 전날까지 우진과 함께 있었다.옷을 계절별로 나누고, 병원 예약일과 알레르기 음식, 악몽을 꿀 때 켜 두는 수면등 밝기까지 적었다. 마지막 상자에는 공룡 장난감이 들어갔다.이삿날 우진은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티라노는 엄마 집에 두면 안 돼?”“두고 싶어?”“응. 나중에 찾으러 오게.”지안은 초록색 티라노 한 마리를 책장 위에 남겼다.“찾으러 와도 돼?”“상담 선생님이랑 할아버지하고 약속해서 오자.”“엄마도 약속해야 해.”두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차가 출발하자 우진은 뒷유리에 손바닥을 붙였다. 지안도 차가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현관으로 돌아오자 아이가 벗어 둔 작은 슬리퍼 자국이 바닥에 남아 있었다. 지안은 한참 뒤에야 문을 닫았다.형사재판 1심에서는 정태성과 한세라의 문서위조와 대출 사기 가담이 인정됐다. 허위 입양 자료와 15억 원의 자금 흐름도 판결문에 적혔다. 김명숙 역시 입양과 증여 계획에 관여한 부분으로 별도 책임을 지게 됐다.이혼 판결도 확정됐다.혼인 파탄의 주된 책임은 태성에게 있었다. 불륜뿐 아니라 허위 불임 진단, 친생자 은폐, 거짓 입양, 명의도용 대출이 모두 판단 근거가 됐다.15억 대출에 대해서는 지안의 채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은행은 근저당을 말소했고,
우진은 폭로 뒤에도 한동안 서지안과 살았다.가정법원은 생활환경을 갑자기 바꾸지 말라는 아동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정태성과 한세라의 형사절차가 진행 중이었고, 최소한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익숙한 집과 보호자가 필요했다.지안은 전과 똑같이 아침을 챙기고 학교에 보냈다. 저녁에는 약을 먹였고, 잠들기 전에는 책을 읽어 줬다.달라진 건 아빠가 집에 오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태성의 구두와 침실의 결혼사진이 사라졌다. 세라 이모가 보내던 선물도 끊겼다. 우진은 빈자리를 하나씩 발견하면서도, 지안이 먼저 말할 때까지 참으려는 듯했다.“아빠는 회사 때문에 멀리 갔어?”“아빠가 잘못한 일을 어른들이 확인하고 있어.”“엄마랑 싸웠어?”“응. 하지만 네가 해결할 일은 아니야.”“내가 말 잘 들으면 아빠 와?”지안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네가 착하게 군다고 어른의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네가 떼를 써도 어른이 해야 할 책임은 사라지지 않고.”우진은 알겠다고 했지만 밤마다 이를 갈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친구가 인터넷 기사에서 본 이름을 이야기했다고 했다. 기사에 우진의 이름은 없었지만, 아이는 어른들의 표정만으로 자신과 관련된 일임을 눈치챘다.지안은 아동상담가와 여러 차례 문장을 고쳤다. ‘가짜 엄마’와 ‘진짜 엄마’라는 표현은 쓰지 않기로 했다. 낳아 준 사람과 함께 살아 준 사람이 모두 존재하며, 어른들이 그 관계를 숨긴 방식이 잘못됐다고 설명하기로 했다.토요일 오후, 상담가는 공원 한쪽 벤치에 두 사람과 함께 앉았다. 우진은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지안의 손부터 잡았다.“아빠와 세라 이모는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큰 사실을 숨겼어.”지안은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만 골랐다.“세라 이모가 널 낳은 사람이고, 아
한세라의 녹음파일이 제출되자 정태성은 목소리가 조작됐다고 주장했다.“요즘 인공지능으로 못 만드는 게 어디 있습니까?”그는 출처가 불분명한 사설 감정서를 내밀었다.하지만 원본 휴대전화와 클라우드 백업 시각, 통신기록이 맞아떨어졌다. 녹음 중간에 들린 차량 안내음은 당시 태성 차량의 이동기록과 일치했고, 파일 몇 개에는 그가 직접 부른 세라의 이름까지 선명했다.디지털 포렌식 결과가 나오자 태성은 말을 바꿨다.“어머니가 우진이를 집안으로 데려오라고 압박했습니다. 저는 반대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김명숙은 아들의 진술서를 받아 들고 곧바로 수사관에게 전화했다.“내가 언제 서류를 위조하랬어요? 세라 애를 밖에 두면 집안 망신이라고 했을 뿐이지!”스피커폰으로 듣고 있던 윤하경이 지안을 바라봤다.명숙은 아들을 살리려다 우진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 버렸다.세라는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를 추가로 제출했다.[명숙: 지안이 마음 약해졌을 때 입양부터 밀어붙여.][명숙: 네가 친모인 건 죽어도 들키면 안 된다.]명숙은 이번에는 세라가 태성을 꼬였다고 주장했고, 세라는 태성이 먼저 결혼 사기를 제안한 녹음을 냈다. 태성은 어머니의 압박을 말했고, 명숙은 아들이 만든 대출 서류를 본 적 없다며 선을 그었다.가족 단체대화방도 하루 만에 증거창고가 됐다. 명숙은 “며느리 재산은 결국 손자 것”이라고 썼고, 태성은 그 문장을 삭제해 달라고 재촉했다. 삭제된 메시지는 이미 친척들의 휴대전화와 서버에 남아 있었다. 서로를 감싸던 사람들이 먼저 캡처본을 수사기관에 냈다.한 사람의 변명이 나오면 다른 사람이 그 거짓말을 깨뜨렸다.회사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이사회에서 태성은 말했다.“가정사로 회사가 공격받고 있
정태성은 모든 책임을 한세라에게 돌렸다.“세라가 지안을 질투했습니다. 우진이를 빼앗길까 봐 입양 서류를 꾸몄고, 대출도 회사 자금을 마련하겠다며 독단적으로 진행한 겁니다.”변호인을 통해 낸 의견서에는 세라가 집착적인 내연녀로 묘사돼 있었다.태성은 그녀를 회사에서 해고했고, 오피스텔도 자신의 돈으로 마련한 게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우진의 양육비는 친자관계 절차가 끝날 때까지 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세라는 그 문서를 읽고 한참 웃었다.“결국 나까지 버리네.”그날 오후 윤하경에게 연락이 왔다.“한세라가 자료를 넘기겠대. 직접 만나고 싶다는데?”“사과는 받을 생각 없어.”“나도 알아. 내 사무실에서 증거만 받자.”세라는 작은 외장 저장장치를 들고 나타났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며칠 사이 수척해져 있었다.“대표님이 약속을 계속 바꿨어요.”지안은 아무 말 없이 저장장치를 바라봤다.“당신 재산을 정리하면 이혼한다고 했어요. 우진이를 데려와 우리 셋이 살 거라고.”세라는 입양 뒤에도 친모라는 사실을 숨기는 대가로 매달 돈을 받았다. 태성은 그 돈을 생활비가 아니라 ‘기다리는 비용’이라고 불렀다.“그래서 녹음했어요?”“처음에는 약속을 잊지 말라고. 나중에는 저까지 버릴 것 같아서요.”저장장치에는 8년에 걸친 통화 녹음과 메시지 백업이 들어 있었다. 세라가 직접 참여한 대화들이었다. 원본 휴대전화도 함께 제출됐다.첫 파일에서 태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안이는 가족에 약해. 내가 불임이라고 하면 나를 못 버려.두 번째 파일.― 우진이를 친척 아이라고 하면 돼. 키우다 보면 재산도 자연스럽게 넘어가.세 번째 파일에는 대출 계획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