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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답장

작가: 루니
last update 게시일: 2026-10-11 06:09:53

“강이준, 너한테 용서한다는 말은 못 하겠어.”

윤서하는 12장의 편지지를 앞에 놓고 첫 번째 봉투를 열었다.

3년 전,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던 날에 쓰인 편지였다.

오늘 나는 네가 나를 미워하게 만들었다.

그 문장을 다시 읽자 오래전의 분노가 되살아났다.

정하린과의 가짜 약혼.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사진.

끝내 설명조차 듣지 못했던 이별.

서하는 펜을 들었다.

처음에는 욕설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한 줄밖에 쓰지 않겠다고 정했으니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골라야 했다.

첫 번째 답장지에 적었다.

네가 나를 살리고 싶었다고 해서 나를 망가뜨릴 권리까지 가진 건 아니었어.

서하는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이준이 죽었다고 해서 자신이 겪었던 고통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두 번째 편지에는 자신이 이식 대기 등록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날을 떠올렸다.

병원 복도에 앉아 대기 절차를 설명받으면서도 끝까지 망설였던 자신.

살고 싶다는 마음보다 이준을 미워하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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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스만 하기로 했잖아 유부녀씨   제127화. 답장

    “강이준, 너한테 용서한다는 말은 못 하겠어.”윤서하는 12장의 편지지를 앞에 놓고 첫 번째 봉투를 열었다.3년 전,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던 날에 쓰인 편지였다.오늘 나는 네가 나를 미워하게 만들었다.그 문장을 다시 읽자 오래전의 분노가 되살아났다.정하린과의 가짜 약혼.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사진.끝내 설명조차 듣지 못했던 이별.서하는 펜을 들었다.처음에는 욕설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한 줄밖에 쓰지 않겠다고 정했으니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골라야 했다.첫 번째 답장지에 적었다.네가 나를 살리고 싶었다고 해서 나를 망가뜨릴 권리까지 가진 건 아니었어.서하는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이준이 죽었다고 해서 자신이 겪었던 고통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두 번째 편지에는 자신이 이식 대기 등록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내용이 있었다.그날을 떠올렸다.병원 복도에 앉아 대기 절차를 설명받으면서도 끝까지 망설였던 자신.살고 싶다는 마음보다 이준을 미워하는 마음이 더 선명했던 시절.두 번째 답장은 짧았다.그날 내가 치료받기로 결정한 건 결국 내 선택이었어.서하는 종이를 옆으로 밀었다.세 번째 편지를 펼쳤다.하린에게 가짜 약혼을 부탁했던 과정이 적혀 있었다.이준은 사진이 기사로 나갈 것까지 계산했다.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을지도 알고 있었다.서하는 이를 악물었다.“진짜 못된 놈.”눈물이 나기보다 화가 났다.세 번째 답장에는 이렇게 적었다.내가 울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는 건 아직도 용서할 수 없어.네 번째 편지는 이준이 언젠가 돌아와 사과하겠다고 쓴 편지였다.새 작업실 계약서와 사고 하루 전 열쇠고리 메모가 떠올랐다.문이 열리지 않으면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던 사람.그는 결국 오지 못했다.서하는 손가락으로 편지 모서리를 눌렀다.네 번째 답장.정말 돌아왔다면 문 앞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지 보고 싶었어.잠시 펜을 내려놓았다.4장의 편지지를 나란히 놓자 감정이 제각각이었다.분노.인정.원망.그리움.

  • 키스만 하기로 했잖아 유부녀씨   35화. 이 손, 너 아니야?

    “그래서 나도 못 지우게 해요?”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서하는 그 문장이 지나치게 가까웠다는 걸 깨달았다.낡은 직원 숙소에는 오후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있었다. 비가 그친 뒤라 창틀은 아직 축축했고, 오래된 장롱과 종이상자에서는 눅눅한 나무 냄새가 났다. 테이블 위에는 조금 전 찾아낸 단체사진이 투명 보관지 안에 들어가 있었고, 한 사람만 도려내진 빈자리가 유난히 희게 보였다.이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서하를 보다가, 아주 천천히 사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건 네가 지울지 말지 정하는 거고.”평소 같으면 능글맞게 받아쳤을 텐데 의외로 담백했다. 그래서 서하는 더 민망해졌다. 괜히 장갑 낀 손으로 상자 가장자리의 먼지를 털었다.“말 잘하네.”“요즘 교육 잘 받잖아.”“누구한테.”“유부녀 씨한테.”그 한마디에 익숙한 장난기가 조금 돌아왔고, 서하는 그제야 숨을 편하게 쉬었다.촬영팀이 다른 방으로 이동한 뒤, 이준은 숙소에 남아 발견된 자료들을 한 장씩 기록했다. 서하는 창가 선반을 닦다가 카메라 셔터 소리가 반복되는 걸 들었다. 낡은 열쇠, 바랜 작업표, 이름 없는 앞치마까지 하나씩 찍히는 것을 보며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셔터 소리가 멈췄다.돌아보니 렌즈가 자기 쪽을 향하고 있었다.서하가 바로 걸레를 내려놓았다.“찍지 마요.”“얼굴 안 찍어.”“그럼 뭘 찍게.”이준은 카메라를 조금 내렸다.“손.”서하는 고무장갑을 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오른손에는 젖은 걸레가 들려 있었고, 왼손 약지 위로 결혼반지의 둥근 윤곽이 장갑 아래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이게 뭐가 볼 게 있다고.”“박물관에 사람 얼굴만 필요한 건 아니잖아.”이준은 테이블 위의 낡은 직원 사진을 한번 봤다.“누가 여기서 어떻게 일했는지도 남겨야지. 지금 이 집을 닦는 사람 손도.”서하는 선뜻 거절하지 못했다. 그 말이 조금 전 잘려나간 사진과 이어져 들렸기 때문이다.“얼굴은 진짜 안 나와요?”“응.”“이름도.”“원하면

  • 키스만 하기로 했잖아 유부녀씨   34화. 지워진 사람

    “누가 잘라냈어.”차이준의 말이 떨어진 뒤, 낡은 직원 숙소 안에서는 창틀이 바람에 떠는 소리만 오래 남았다. 윤서하는 사진을 다시 내려다봤다. 열댓 명이 나란히 서 있는 단체사진 한쪽, 사람 하나가 있었을 자리만 칼끝으로 정교하게 파낸 듯 비어 있었다. 종이가 오래되어 누렇게 삭았는데도 잘린 가장자리는 이상하리만큼 매끈했다. 우연히 찢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 시간을 들여 없앤 흔적이었다.이준은 사진을 손끝으로만 집어 들었다. 평소라면 이런 순간에도 쓸데없는 농담 하나쯤 끼워 넣었을 텐데, 이번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창가로 가서 사진을 빛에 비추고, 각도를 바꾸고, 뒤집어 날짜와 메모를 확인하는 동작이 지나치게 차분했다. 서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처음으로 이준이 웃지 않을 때의 얼굴을 오래 보게 됐다.“아는 사람이에요?”이준은 대답 대신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본채에서 촬영해 둔 옛 가족사진들을 빠르게 넘기던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화면에는 젊은 여자 둘이 별장 현관 앞에 서 있는 사진이 떠 있었다. 한 사람은 단정한 원피스를 입었고, 다른 한 사람은 직원용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이준이 화면을 확대했다.“이쪽.”서하는 사진첩 속 단체사진과 화면을 번갈아 봤다. 도려낸 자리 옆에 남아 있는 어깨선, 머리카락 끝, 옷의 색이 태블릿 속 직원과 맞아떨어졌다.“같은 사람이네.”“응.”“옆에 있는 사람은요?”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우리 엄마.”서하는 무심코 이준 쪽을 봤다. 그가 자기 가족 이야기를 이렇게 직접 꺼낸 건 거의 처음이었다. 늘 집안 얘기가 나오면 비꼬거나 웃어넘겼고, 가족사진조차 기록물처럼 다뤘다. 그런데 화면 속 젊은 어머니와 이름 없는 직원이 나란히 웃고 있는 사진 앞에서는 그 익숙한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사진 속 두 사람은 주인과 직원처럼 서 있지 않았다. 어깨가 가까웠고, 한쪽은 다른 쪽 팔에 손까지 얹고 있었다. 격식 있게 찍은 기념사진이라기보다 누군가 지나가다 웃는 순간을 붙잡은 것에 가

  • 키스만 하기로 했잖아 유부녀씨   33화. 누가 잘라냈어

    [오늘은 진짜 안 건드림. 잘 자.]윤서하는 메모를 읽은 채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별장 복도는 이미 조용해져 있었다. 낮 동안 사람들 발에 밟히던 마룻바닥도, 장비를 옮기며 연달아 열리고 닫히던 방문도 모두 잠잠했고, 멀리 바닷바람이 창틀을 밀어내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 비는 새벽이 되면서 잦아들었지만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규칙적으로 돌계단을 두드렸다.서하는 손잡이를 잡았다가 결국 열지 않았다.나가서 뭘 할 건데.‘왜 안 건드려요?’그렇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자기가 먼저 붙지 말라고 했다. 건드리지 말라고도 했고, 도현이 바로 곁에 있는 별장에서는 정신 차리자고 말한 것도 자기였다. 그러니 이준이 그대로 해주는 게 맞았다.맞는데.메모 한 장이 괜히 얄미웠다.서하는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졌다가, 잠시 뒤 다시 주워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버릴 이유가 없어서였다.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다음 날 오전, 폭우가 걷힌 별장은 전날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바다가 다시 푸르게 드러났고, 젖은 정원석과 소나무에서는 비 냄새가 올라왔다. 촬영팀은 밀린 일정을 따라잡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움직였으며, 서하는 김미자의 지시에 따라 별장 뒤편의 낡은 직원 숙소를 정리하게 됐다.직원 숙소는 본채와 달리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은 곳이었다.문을 여는 순간 묵은 먼지 냄새와 눅눅한 목재 냄새가 섞여 나왔다. 벽지는 군데군데 떠 있었고, 오래된 장롱 위에는 천으로 덮어놓은 상자들이 여러 겹 쌓여 있었다. 창문은 바닷바람 탓인지 제대로 닫히지 않았고, 틈으로 들어온 빛 속에서 먼지가 천천히 떠다녔다.서하는 장갑을 끼고 가장 위 상자부터 내렸다.“이런 데까지 청소해야 돼요?”등 뒤에서 이준 목소리가 들렸다.서하는 돌아보지 않았다.“누가 따라오랬어요.”“촬영 장소라서.”“어제는 잘도 안 건드리더니.”말이 먼저 나갔다.서하 손이 바로 멈췄다.뒤늦게 자기 입을 때리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이

  • 키스만 하기로 했잖아 유부녀씨   32화. 오늘은 진짜 안 건드림

    “거기 왜 빨개?”도현의 손전등 빛이 목덜미에 머무는 순간, 서하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카락부터 끌어내렸다.손끝이 지나치게 빨랐다.괜히 가리면 더 수상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이미 몸이 먼저 움직였고, 조금 전까지 세탁실에 함께 있던 차이준의 얼굴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실제로 이준의 입술이 목에 닿은 적은 없었다. 젖은 셔츠가 스쳤고, 습기가 찬 세탁실에서 머리카락과 작업복 깃이 피부를 계속 문질렀을 뿐이었다.그런데 그 사실을 설명하려니 오히려 더 이상했다.“세제 때문인가 봐.”서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목을 한번 긁었다.“세제?”“아까 젖은 유니폼 한꺼번에 꺼냈잖아. 새로 들어온 세제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도현은 여전히 목덜미를 바라봤다. 의심해서라기보다는 걱정하는 얼굴이라 서하는 더 불편해졌다.“따가워?”“조금.”“약 있어?”“숙소 가서 씻으면 괜찮아져.”도현은 손전등을 내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재킷 깃을 조금 더 여며줬다. 젖은 머리카락이 피부에 달라붙지 않도록 밖으로 빼주는 손길도 익숙했다. 8년을 같이 살아온 사람의 손이었다.서하는 그 손을 피하지 못했다.아니, 피하면 안 될 것 같았다.“일 너무 무리하지 마.”도현은 그 말만 남기고 세탁실을 먼저 나갔다.문이 닫히자 서하는 그제야 짧게 숨을 내쉬었다.거짓말은 별것 아니었다.세제 알레르기.그 정도면 누구나 한번쯤 둘러댈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별것 아닌 거짓말 하나가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계속 남았다. 도현이 둘러준 재킷은 따뜻했고, 그 안쪽에 몸을 웅크릴수록 자신이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서하는 전기가 돌아오기 시작한 별장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비는 여전히 세찼고, 유리창 너머 바다는 검은 덩어리처럼 일렁였다. 촬영팀 직원들은 정전 때문에 미뤄진 장비 점검을 다시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젖은 신발 밑창 소리가 이어졌다.계단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서하는 걸음을 멈췄다.차이준이 있었다.비상통로를 통해 돌아온 모양

  • 키스만 하기로 했잖아 유부녀씨   31화. 거기 왜 빨개?

    “서하야?”문밖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서하는 온몸의 감각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조금 전까지 입술에 남아 있던 열감도, 바로 앞에 선 차이준의 젖은 셔츠도, 세탁실 안을 가득 채운 눅눅한 공기도 갑자기 지나치게 선명해졌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문과 외벽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보다 문밖의 작은 인기척 하나가 더 크게 들렸다.서하는 거의 반사적으로 이준의 가슴을 밀었다.“나가요.”목소리를 낮추느라 입술만 빠르게 움직였다.이준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문 쪽을 한번 보더니 서하를 내려다봤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 인간의 얼굴에는 아주 미세한 장난기가 남아 있었다.“어디로.”“몰라요. 아무 데로나.”“정문으로 나가면 더 빠른데.”서하는 눈을 크게 떴다.“미쳤어요?”그때 문손잡이가 한번 돌아갔다.잠금장치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오래된 문이 습기를 먹어 뻑뻑해진 탓인지 바로 열리지는 않았다. 도현이 바깥에서 문을 한 번 더 밀었다.“안에 있지?”서하는 급히 대답했다.“어! 잠깐만!”평소보다 조금 높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자기 귀에도 어색했다.서하는 주변을 훑었다. 세탁기 두 대, 벽 쪽에 쌓인 린넨 바구니, 젖은 유니폼, 그리고 낮에 직원에게 들었던 오래된 비상동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별장은 예전에 가족과 직원의 이동 공간을 완전히 나눠 사용했던 곳이라 세탁실 뒤에도 작은 외부 통로가 있다고 했다.서하는 세탁기와 벽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역시나 낡은 문 하나가 있었다.“여기.”이준이 따라와 고개를 숙였다.“저기로 나가라고?”“네.”“너무 좁은데.”“몸 접으면 되잖아요.”“나 차이준인데.”서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돌아봤다.“그래서요?”“태어나서 이런 데로 쫓겨나본 적이 없어서.”“축하해요. 오늘 처음 해보겠네.”이준이 웃음을 참는 동안, 서하는 그의 팔을 잡아 문 쪽으로 밀었다. 젖은 셔츠 너머로 아직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고, 그 감각 때문에 오히려 더 조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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