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
"지루해……."
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
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
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 이 안 ]
"이안……? 성도 없이 이름만 달랑?"
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성의 없는 포장에 기가 찼다. 이런 식으로 지원 서류를 보내는 인간은 볼 것도 없이 탈락이었다. 기본조차 안 되어 있는 아마추어니까.
쓰레기통에 바로 던져버리려던 찰나,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너무 완벽하게 정돈된 서류들 사이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구겨져 있는 그 봉투가 묘하게 시선을 끌어당겼다.
"얼마나 대단한 천재 길래 이런 식으로 포트폴리오를 내."
서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봉투의 입구를 뜯었다.
투박하게 스테이플러로 찍힌 A4 용지 뭉치가 튀어나왔다. 자기소개서나 작업 노트 같은 건 없었다. 오직 그림을 찍은 사진들만이 날것 그대로 인쇄되어 있었다.
서아는 첫 번째 장을 넘겼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
순간, 갤러리의 차가운 공기가 일순간 증발해 버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인쇄된 종이일 뿐인데, 그림에서 지독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사진은 거대한 캔버스를 가득 채운 인물화였다. 아니, 인물화라고 부르기엔 형태가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둡고 탁한 배경 위로,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과 심연 같은 검은색이 폭력적으로 엉켜 있었다. 붓으로 그렸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물감이 두껍게 짓이겨져 있었고, 마치 누군가가 손톱으로 캔버스를 할퀴어 낸 듯한 거칠고 파괴적인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고통, 혹은 욕정, 아니면 그 두 가지가 뒤섞인 어떤 짐승의 절규 같았다.
"이게…… 뭐지."
서아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다음 장을 넘겼다.
타다닥. 종이 넘어가는 소리조차 신경을 긁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진 인간의 신체, 폭발하듯 흩뿌려진 색채, 금기시되는 감정들을 가감 없이 발가벗겨 놓은 듯한 노골적인 구도.
그것은 서아가 지금껏 갤러리에 걸어왔던 그 어떤 '안전한' 예술과도 달랐다.
우아하지도, 교양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천박하고, 기괴하며, 노골적이었다. 도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제되지 않은 천박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
서아는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심장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귓가에 자신의 맥박 소리가 소음처럼 울렸다.
그림 속의 붉은 물감이 마치 진짜 피처럼 일렁이는 것 같았다. 종이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끈적한 물감의 촉감과 진동하는 살냄새가 묻어날 것만 같은 지독한 생동감.
"미쳤어……."
그것은 이안이라는 작가의 그림을 향한 욕인지, 아니면 그림을 보며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향한 욕인지 알 수 없었다.
서아는 무의식적으로 실크 블라우스의 첫 번째 단추를 풀었다.
완벽하게 세팅된 에어컨 온도에도 불구하고 목덜미에 뜨거운 땀이 맺히고 있었다. 숨이 가빴다.
지금껏 수천 점의 그림을 봐왔지만,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머리로는 '불쾌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토록 폭력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그림은 아르테 갤러리의 고상한 벽면에 걸릴 자격이 없다고. 상류층 컬렉터들은 이런 날것의 감정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하지만 본능은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갈증.
건조하게 말라비틀어진 채 박제되어 있던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 미친 듯한 갈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림 속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저 붉은 색채가, 위선과 교양으로 꽁꽁 싸매어둔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심장을 쥐어흔드는 것 같았다.
"이안."
서아는 다시 한번 그 이름을 입술 위로 굴려 보았다.
이번에는 비웃음이 아니었다. 일종의 경외, 혹은 두려움이 섞인 떨림이었다.
이름 석 자 외에는 어떤 정보도 없는 남자.
어떤 삶을 살았기에, 어떤 지옥을 뒹굴었기에 이토록 처절하고 관능적인 붓을 휘두를 수 있는 걸까.
서아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혹은 어둠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의 뒷모습. 거친 나이프 자국이 남자의 척추를 따라 붉게 파여 있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서아는 알 수 없는 압도감에 휩싸여 종이를 쥔 손을 잘게 떨었다.
그 뒷모습은 마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쓰고 있는 그 완벽한 가면을 벗겨주겠어.'
덜컥.
그녀가 5년 동안 단 한 번도 금이 간 적 없던 완벽한 유리성에, 처음으로 치명적인 균열이 가는 소리였다.
"수석님."
갑자기 열린 문 틈으로 윤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아는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포트폴리오를 뒤집어 엎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 될 은밀한 불륜의 증거라도 감추듯이.
"왜요? 무슨 일이죠?"
서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높아져 있었다. 스스로도 당황할 만큼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윤지수는 흠칫 놀라며 문가에 멈춰 섰다.
"아, 그…… 서류가 하나 누락된 게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얼굴이 너무 붉으신데요."
"아니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온도가 좀 높아서요. 서류는 거기 두고 나가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윤지수가 서류를 내려놓고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서아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떨리는 손으로 뒤집어 놓았던 크라프트지 봉투를 다시 가져왔다.
자신의 삶은 김도진이라는 남자가 만들어 놓은 정교하고 우아한 소설 같았다. 그 안에서 자신은 오차 없이 움직이는 완벽한 아내이자, 지성적인 큐레이터라는 배역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불쾌하고 통제 불능인 포트폴리오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마땅했다. 그것이 이 갤러리의 룰이었고, 서아의 룰이었다.
하지만 서아의 손은 쓰레기통이 아닌, 포트폴리오의 겉면으로 향했다.
사각, 사각.
펜촉이 거친 크라프트지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서재의 정적을 갈랐다.
그녀는 '이안'이라는 이름 옆에, 붉은색 잉크로 선명하고 커다란 동그라미를 쳤다. 합격을 의미하는 기호였다.
"만나봐야겠어."
서아는 붉은 동그라미가 쳐진 이름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만졌다.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다.
이 지독한 그림을 그린 자가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자신의 이 고상하고 죽어있는 세계를 뒤흔든 이 붉은 물감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것이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첫 번째 단추라는 사실을, 서아는 그 순간 전혀 알지 못했다.
완벽하게 박제되어 있던 일상에, 치명적인 불씨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제18화 얄팍한 방어기제(2)"말조심해!"서아의 평정심에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그녀는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경고했다."여기는 내 직장이고, 내 구역이야. 어젯밤 일은…… 당신이 술에 취해 벌인 저급한 실수로 치부하고 덮어주기로 했어. 내 커리어에 오점 남기기 싫어서. 그러니까 당신도 주제 파악하고 내가 깔아준 판 위에서 얌전히 그림이나 쳐 그려. 쓸데없는 환상 품지 말고."독사처럼 쏟아내는 서아의 경고.그것은 이안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세뇌시키기 위한 방어기제이기도 했다.하지만 이안의 눈에는 그 앙칼진 저항이 그저 우습고 가소롭게 보일 뿐이었다."덮어준다고?"이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그의 큰 체구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서아를 압박했다. 이안은 테이블을 돌아 서아가 앉아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오지 마. 거기 앉아."서아가 본능적으로 의자 등받이 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방금 전까지 세워두었던 날 선 권위가, 그가 다가오는 발걸음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이안은 서아의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짚었다.완벽하게 퇴로가 차단되었다.가까워진 거리.오늘 아침 서아가 들이부었던 짙은 향수 냄새가 이안의 코끝을 찔렀다."독하네."이안이 서아의 목덜미 근처로 얼굴을 슬쩍 들이밀며 중얼거렸다."뭐가…….""향수 냄새. 평소에 뿌리던 무화과 향이 아니잖아.""……!""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우고 싶었어? 아니면, 뭘 감추고 싶었던 건가."서아는 숨을 들이켜는 것
제17화 얄팍한 방어기제(1)완벽한 화이트 큐브.먼지 한 톨 없는 갤러리 아르테의 VIP 접견실은 서아에게 있어 일종의 성역이자 요새였다.항온 항습기가 돌아가는 미세한 백색소음.벽에 걸린 수천만 원짜리 단색화.블랙 글래스로 마감된 차가운 테이블.이 공간 안에서 서아는 철저한 지배자였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고, 오만한 작가들의 기를 꺾어 자신의 기획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수석 큐레이터."……하아."하지만 오늘 아침, 서아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은 권위 있는 지시가 아니라 억눌린 한숨이었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차가운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올려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쓴맛이 혀뿌리를 강타했지만,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오른쪽 손목.서아는 무의식적으로 재킷 소매를 끌어내려 손목을 덮었다. 어젯밤 샤워 타월로 피부가 벌겋게 일어날 때까지 문질러 씻었지만, 이안이 남긴 그 끔찍한 악력의 감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당신한테서 낯선 냄새 나.'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어젯밤, 차갑게 돌아누운 채 자신을 밀어내던 남편 도진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결국 서아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도진의 옆에 웅크려 누운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죄인처럼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남편이 출근 준비를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서아는 자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자신이 왜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왜 이토록 끔찍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아니야. 난 잘못한 거 없어.'서아는 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던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눈을 떴다.'그 미친
제16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완벽한 고립(2)"도진 씨?"거실을 향해 작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서재의 불은 꺼져 있었고, 침실 문틈으로만 옅은 무드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벌써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서아는 현관에서 트렌치코트를 벗어 미친 듯이 털어냈다. 혹시라도 그 천박한 담배 냄새가 이 완벽한 공간에 단 한 방울이라도 떨어질까 봐 두려웠다.코트를 스타일러 안에 쑤셔 넣듯 걸어둔 서아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철컥, 문을 잠그고 세면대 앞에 섰다.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평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올림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아이라인은 미세하게 번져 있었다. 무엇보다 눈동자. 항상 차갑고 이성적이던 그 눈동자 안에, 낯선 정욕과 공포가 뒤엉켜 일렁이고 있었다.서아는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렸다.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그녀는 펌프형 핸드워시를 두 번, 세 번 거칠게 눌러 손바닥에 듬뿍 짰다. 그리고 이안이 잡았던 오른쪽 손목을 미친 듯이 문지르기 시작했다.거품이 일어나고,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지워져라. 제발…… 지워져."손톱으로 긁어대듯 피부를 문지르다 보니 옅은 생채기마저 생겼다.하지만 씻어내면 씻어낼수록, 그의 손에 잡혔을 때의 그 끔찍하게 뜨거웠던 감각은 뇌리에 더욱 선명하게 달라붙었다.'내 말이 틀려?'턱을 쥐고 강제로 시선을 맞추던 그의 눈."악!"서아는 신경질적으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세면대를 양손으로 짚었다. 숨이 거칠었다.안 되겠다.도진이 필요했다. 남편의 확인이 필요했다.나는 사랑받는 아내이고, 이 견고하고 우아한 세계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남편의 몸을
제15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완벽한 고립(1)"하아, 하아……."차 문이 닫히는 순간, 서아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손님. 목적지 연남동 자이 아파트 맞으십니까?""네. 맞아요.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대답했다.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릴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대리기사가 엑셀을 밟고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하는 그 순간까지도, 서아는 창문 너머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을 그 남자의 시선이 제 목덜미를 꿰뚫는 것만 같아 소름이 돋았다.'나한테, 철저하게 헤집어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머릿속에서 이안의 낮고 진득한 목소리가 무한 번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미친 자식……."서아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분노였다. 명백한 분노여야 했다.자신의 커리어와 사회적 지위를 알면서도 길거리에서 함부로 손목을 낚아채고, 창녀에게나 할 법한 저급한 농담을 지껄인 무례한 예술가에 대한 분노.하지만 서아의 심장 박동은 분노의 궤도를 이탈해, 지독하게 불길하고 낯선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오른쪽 손목이 화끈거렸다.이안이 꽉 움켜쥐었던 자리. 그의 거친 굳은살이 닿았던 피부에서 불이 붙은 것처럼 델 듯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손님, 에어컨 좀 틀어드릴까요?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것 같은데."룸미러로 서아의 상태를 힐끗 살핀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 네. 부탁드릴게요. 조금 춥게 틀어주세요.""밤공기가 제법 쌀쌀한데,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괜찮습니다. 그냥 차멀미가 좀 나서 그래요."서아는 핸드백을 무릎 위에 꽉 끌어안으며 짧게
제14화 선을 넘는 온도(2)"누가 돈 달래?"탁-.이안의 커다란 손이 서아의 핸드백 위를 덮었다."……!"서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턱밑까지 다가와 있었다.그의 큰 체구가 가로등 불빛을 가리며 서아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도망칠 곳이 없었다. 뒤에는 서아의 주차된 차가 막고 있었고, 앞에는 이안이 거대한 벽처럼 버티고 섰다."비켜요."서아가 목소리를 깔며 경고했다.하지만 이안은 비키기는커녕, 상체를 살짝 숙여 서아의 얼굴과 시선을 나란히 맞췄다.그의 까만 눈동자가 서아의 흔들리는 동공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당신, 오늘 회식 내내 나만 보더라.""……뭐라고요?""내가 물잔을 들 때도, 나이프를 쥘 때도. 당신 시선은 계속 내 손끝에 닿아 있었잖아. 안 그래?"정곡을 찔렸다.서아는 회식 내내 이안을 무시하려 애썼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의 거친 손과 핏대 선 팔뚝으로 향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착각하지 마. 나는 당신이 또 무슨 돌발 행동을 해서 분위기를 망칠까 봐 감시한 것뿐이니까.""감시?"이안이 낮게 웃었다. 목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진득한 웃음소리였다."당신은 참 그럴싸한 변명들을 잘 만들어내. 비즈니스, 통제, 감시. 그렇게 그럴듯한 단어들로 당신의 진짜 속내를 칭칭 감아놓고 살지.""헛소리 그만하고 비키라고 했습니다."서아가 이안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하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안은 서아가 밀어낸 손을 그대로 낚아챘다."읏……."이안이 서아의
제13화 선을 넘는 온도(1)청담동의 프라이빗 다이닝 레스토랑.고급스러운 샹들리에 조명 아래, 갤러리 아르테 팀원들의 회식 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최고급 한우 오마카세와 한 병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와인이 세팅된 테이블.평소라면 우아한 예술계의 가십이나 다음 분기 전시 기획에 대한 고상한 대화가 오갔을 자리였다.하지만 오늘따라 프라이빗 룸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원인은 단 한 사람.테이블 가장 끝자리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남자, 이안 때문이었다."……."서아는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신진 작가 발굴 기획전. 서아는 심사위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안의 그림을 메인 홀에 거는 것을 밀어붙였다. 그 기괴하고 폭력적인 붉은 캔버스가 갤러리에 가져올 파격을 확인하고 싶다는, 큐레이터로서의 오만함 혹은 호기심 때문이었다.전시를 앞두고 작가와 실무진이 얼굴을 트는 자리. 서아는 분명 비즈니스 차원에서 그를 이 자리에 불렀다.하지만 이안은 이 정제된 공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이었다."이안 작가님. 고기 더 안 드세요? 입에 안 맞으신가……."옆에 앉은 어시스턴트 윤지수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이안은 턱을 괸 채 제 앞에 놓인 최고급 안심스테이크를 나이프로 대충 쑤적거리고 있었다. 물감이 채 지워지지 않은 손톱 밑이 하얀 접시 위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보였다."됐어. 피 질질 흐르는 고기 씹는 취미 없으니까.""아…… 네에."지수가 멋쩍게 웃으며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이안은 와인잔을 옆으로 밀어내고, 웨이터를 불렀다."여기, 소주 한 병 줘요."웨이터의 얼굴에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