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같은 날 오후 3시.
갤러리 ‘도아’의 오후는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 굽의 또각거리는 소리.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
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관장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과 그것을 비추는 핀 조명의 각도를 향해 있었다.
"윤 큐레이터."
서아가 걸음을 멈추고 낮게 불렀다. 뒤따르던 후배 윤지수가 황급히 다가왔다.
"네, 관장님."
"2관 메인 벽면에 걸린 저 추상화. 조명 각도가 어제랑 다른 것 같은데요."
"아, 오늘 아침에 램프를 교체하면서 기사님이 조금 건드리신 것 같습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작품의 질감은 빛이 결정해요. 1도의 각도 차이가 캔버스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꿉니다. 관람객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인데 이런 실수를 하면 안 되죠."
"죄송합니다. 꼼꼼히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실내 온도가 어제보다 0.5도 높네요. 공조기 세팅 다시 확인하세요. 작품에 미세한 균열이라도 가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서아는 완벽주의자였다. 아니, 완벽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녀의 갤러리에서는 먼지 한 톨, 빛 한 줄기, 심지어 공기의 온도조차 통제되어야 했다. 그것은 그녀의 집, 그녀의 결혼 생활, 그리고 그녀의 남편 강도진과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완벽하게 통제된 상태로 존재해야만 그녀는 안심할 수 있었다.
서아는 윤 큐레이터를 뒤로하고 관장실로 향했다.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자, 시그니처 향인 무화과와 시더우드가 섞인 고급스러운 디퓨저 향이 훅 끼쳤다. 투명한 통유리로 된 책상 위에는 서류와 태블릿 PC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직각을 이루며 놓여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그 완벽한 책상 위를 점령한 이질적인 물건들이 있었다.
바로 산처럼 쌓인 서류 봉투와 포트폴리오 파일들이었다.
"하아……."
서아는 미간을 가볍게 짚으며 의자에 앉았다.
다음 달로 예정된 ‘도아 신진 작가 공모전’의 1차 심사 자료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콧대 높기로 유명한 갤러리 도아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이었다. 당선만 되면 상류층 컬렉터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것은 물론, 미술계의 주류로 단번에 편입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연히 전국에서 수많은 지망생과 무명 작가들이 목숨을 걸고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윤지수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관장님, 이번 공모전 지원자가 작년 대비 30퍼센트나 늘었습니다. 총 600명이 넘어요."
"알아요. 책상 꼴을 보니 안 봐도 알겠네요."
"1차로 스크리닝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보셔야 할 포트폴리오가 100개가 넘습니다. 오늘 다 보실 수 있겠어요?"
서아는 윤지수가 내려놓은 에스프레소 잔을 들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봐야죠. 내 이름 걸고 기획하는 전시인데."
"대단하세요, 정말. 저는 어제 스크리닝 하느라 눈이 다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서아는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신 뒤, 맨 위에 올려진 검은색 가죽 바인더를 펼쳤다.
"어디 봅시다. 올해는 건질 만한 원석이 있는지."
바인더 안에는 깔끔하게 인쇄된 작품 사진들과 작가의 노트가 정갈하게 철해져 있었다. 서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사진들을 훑어 내려갔다.
"이 작가는……."
"아, 홍대 미대 대학원 출신입니다. 최근에 트렌드인 극사실주의 화풍을 따르고 있고요. 색감도 꽤 대중적이라 컬렉터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올렸습니다."
서아는 픽 웃었다.
"테크닉은 좋네요. 붓 터치도 깔끔하고. 그런데 영혼이 없어요."
"네?"
"어디서 본 듯한 화풍이잖아요. 유명한 해외 작가 레퍼런스 몇 개 섞어서 그럴싸하게 포장한 느낌. 상업성은 있겠지만, 우리 도아 메인 홀에 걸기엔 너무 얄팍해요. 기각."
서아는 망설임 없이 바인더를 덮어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윤지수는 흠칫 놀라며 다음 파일을 넘겼다.
"그, 그럼 이 작가는 어떠신가요? 설치 미술 쪽인데 메시지가 꽤 강렬합니다."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 좋죠. 근데 이걸 굳이 캔버스로 가져올 필요가 있나요? 그냥 기사로 쓰면 될 걸. 시각적인 충격이 없잖아요. 예술이 아니라 선언문일 뿐이에요. 이것도 기각."
서아의 평가는 냉혹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녀의 손을 거친 포트폴리오들이 속속 '기각' 더미로 쌓여갔다.
1시간. 2시간. 시간이 지날수록 서아의 얼굴에는 깊은 권태가 피어올랐다.
정돈된 선, 계산된 색채, 대중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타협한 흔적들. 모두가 하나같이 완벽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런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일상처럼.
"관장님, 잠시 쉬었다가 하실까요? 벌써 세 시간째 꼼짝도 안 하셨어요."
눈치를 보던 윤지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아는 뻐근한 목을 양옆으로 가볍게 꺾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흐름 끊기는 거 싫으니까 계속할게요. 지수 씨는 나가서 다른 업무 봐요. 남은 건 내가 혼자 천천히 볼 테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부르세요."
윤지수가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공간에는 깊은 정적만이 남았다.
서아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안전한 그림들. 적당히 교양 있고, 적당히 철학적인 척하는 가짜들.
문득 오늘 아침 도진과 나누었던 식탁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이안은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두 팔을 벌리고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길 속에서 녹아내리는 백서아의 얼굴들을 보며 지독한 희열을 느꼈다.파지직! 찌지직!캔버스 천이 타들어 가는 소리.유화 물감이 끓어오르며 터지는 소리.그것은 마치 이안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 같았다.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이젤이 불타고, 소파가 불타고, 바닥에 흩뿌려진 기름길을 따라 작업실 전체가 시뻘건 화염에 휩싸였다.순식간에 짙고 검은 유독가스가 천장으로 차올랐다."콜록! 콜록!"희열은 짧았다.유독가스가 폐부로 밀려들어 오자, 이안은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커헉… 콜록…!"이안은 본능적으로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사방이 꽉 막힌 지하실. 출구인 철문은 저 불길 너머에 있었다.'나가야 해.'이안은 비틀거리며 철문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바닥에 흩뿌려진 기름 탓에, 온통 불바다였다. 발을 디딜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뜨거워… 윽!"바지 밑단에 불이 붙을 뻔한 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뒷걸음질을 쳤다.그때였다.자신이 불을 질렀던 가장 거대한 캔버스 더미 너머로, 미처 타지 않은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자신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 백서아라는 여자에 미치기 전, 오직 그림에 대한 열정만으로 밤을 새워가며 그렸던 '자화상'이었다.불길이 그 그림의 가장자리를 핥아먹으려 하고 있었다."안 돼…."순간, 이안의 머
텅 빈 작업실.도진이 떠난 지 한참이 지났다.이안은 찢어진 캔버스와 부러진 붓, 터진 물감 사이에 주저앉은 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닥치는 대로 그림을 뜯고 짓밟았던 탓에 손등과 손가락 마디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손톱 밑에는 물감과 캔버스 섬유가 뒤엉켜 있었고, 바닥에는 자신이 그토록 귀하게 다뤘던 작품의 조각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흩어져 있었다.더 부술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이안을 진정시키지 못했다.오히려 모든 것이 망가진 뒤에야 작업실의 적막이 더 또렷해졌다. 그림을 찢을 때는 소리라도 있었다. 이젤이 넘어지고 나무틀이 부러지고 유리병이 깨지는 동안에는 분노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소리마저 끝났다.이안은 한참 동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이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이 손으로 서아를 붙잡았고, 자신이 그녀를 지배했다고 믿었다.그리고 방금 전에는 그 믿음의 증거라고 여겼던 것들을 제 손으로 전부 찢어버렸다.그런데도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가슴속에 박힌 패배감은 그대로였다.도진에게 들은 말도, 서아를 향해 품었던 집착도,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었던 시간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이안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벽에는 못과 액자 자국만 흉하게 남아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누드화들은 더 이상 그림의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붉고 검은 물감이 뒤섞인 바닥은 마치 상처 난 피부처럼 번들거렸다.그는 그 잔해를 보고도 더는 발로 차지 않았다.작품을 망가뜨리는 일은 이미 끝났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이 공간이 남아 있는 한, 자신이 여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도 남는다. 벽과 바닥, 냄새와 얼룩, 부러진 이젤과 찢긴 캔버스까
자신은 강도진의 우아한 세계에 균열을 낸 '치명적인 파괴자'라고 믿었다.백서아를 통해 저 거만한 강도진을 굴복시켰다고 생각했다.이 수많은 그림들이 그 승리의 전리품이라고 여겼다.그런데.그 모든 것이.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강도진이 쳐놓은 거미줄 위에서의 발버둥에 불과했다는 건가?"너는 내 영감을 위해 쓰인 도구였을 뿐이야."도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한 문장.그것은 이안의 척추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는 결정타였다."도구…."이안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그래, 도구. 잉크가 다 떨어져서 이제는 버려야 할, 싸구려 일회용 펜 같은 거."도진이 쓰레기통에 손수건을 툭 던져 넣었다."네가 죽을힘을 다해 그려낸 이 그림들조차, 결국 내 소설의 본편 결말을 장식하기 위해 쓰인 소품에 불과해. 이 누드화들 덕분에 서아가 내 발밑에서 평생 복종을 맹세하는 장면까지 본편에 이미 봉인했지. 본편은 끝났고 편집장에게도 넘겼어. 이제 현실에 남은 건 하나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리고 그 선택을 본 서아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그 마지막 장면이 내 에필로그를 완성해 줄 거야."도진이 이안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악마의 미소였다."고맙다, 이안아. 네 덕분에 출간되는 순간 세상을 뒤흔들 역작의 본편이 완성됐어. 이제 네 선택이 만들어낼 마지막 에필로그만 남았지. 독자들이 열광할 때 네 이름도 아주 잠깐, 마음속으로나마 떠올려주지."도진은 더 이상 이안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깔끔하게 뒤를 돌았다."이, 이 개새끼야… 강도진… 이 악마 새끼야!!"이안이 등 뒤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었지만, 도진의 발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이안이 다시 앉자 도진은 봉투를 테이블 가장자리로 밀어 두었다. 더는 자료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내놓는 말만으로도 남은 빈칸이 충분히 채워지고 있었다."그 첫날 밤부터 짚어보지."도진의 입에서 나온 구체적인 정황에, 이안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너는 서아를 네 작업실로 불렀지. 갤러리 VVIP·프레스 프리뷰 리셉션이 끝난 지 사흘째 되던 가을밤, 서아는 내게 대학 동기 모임이 있다고 거짓말하고 오후 일곱 시에 해방촌 옥탑 작업실로 향했어.""……네, 네가 그걸 어떻게.""그날 넌 서아의 비싼 실크 블라우스를 거칠게 잡아뜯었어. 자개 단추들이 바닥과 캔버스 사이로 사방에 흩어졌지."이안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숨이 턱 막혔다."그리고 새벽 2시 30분. 집에 돌아온 서아는 네 회색 셔츠를 입고 있었어. 와인을 쏟아 혜진이 오빠 옷을 빌렸다고 했지. 하지만 그 셔츠에는 담배와 테레빈유 냄새가 배어 있었고, 오른쪽 귓바퀴 아래엔 붉은 물감 자국까지 남아 있었어."도진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귓바퀴 아래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나는 그 거짓말을 모르는 척 받아줬어. 다음 날 아침엔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처럼 젖은 머리까지 말려주면서 말이야.""거짓말… 거짓말 마! 네가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고? 네 마누라가 나랑 붙어먹고 온 걸 알면서도?!""모른 척한 게 아니야."도진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고 서늘해졌다."내가 그 무대를 세팅해 준 거지."순간, 작업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이안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도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도진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사방에 널
끼익-.등 뒤로 차가운 철문이 닫히려는 찰나였다."기다려…."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안이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 와 도진의 발목을 덥석 움켜쥐었다.물감과 술, 그리고 자신의 눈물로 범벅이 된 이안의 손이 도진의 바짓단을 구겨 쥐었다. 그 손아귀에는 어떻게든 남자의 그 완벽한 평정심에 흠집을 내겠다는 듯한, 오기와 발악이 담겨 있었다."어딜 가… 이 새끼야.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이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충혈된 두 눈은 독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넌 지금 도망치는 거야. 쿨한 척, 상처받지 않은 척 연기하면서 도망치는 거라고!"도진은 자신의 발목을 잡은 이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쾌한 기색조차 없었다. 그저 길가에 버려진 오물 덩어리를 보는 듯한 무기질적인 시선이었다."도망?""그래, 이 병신아! 네 마누라가 내 밑에서 짐승처럼 헐떡거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어떻게든 나를 깎아내리고 짓밟아야 네 알량한 자존심이 지켜지니까!"이안은 쉰 목소리로 악을 썼다."네가 백날 여기서 내 그림을 쓰레기라고 떠들어대도 진실은 안 바뀌어! 서아는 나를 원했고, 나는 서아를 가졌어! 너는 네 침대에서 네 마누라가 딴 놈을 생각하며 젖어 드는 꼴도 눈치채지 못한 등신 머저리라고!""……."이안의 거친 숨소리만이 작업실의 적막을 채웠다.그는 도진의 눈동자에서 단 한 줌의 분노나 절망이라도 찾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남자의 얼굴이 치욕으로 일그러지기를, 제발 한 대만이라도 좋으니 주먹을 날려주기를 바랐다.하지만 도진은 그저 가만히 이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이안아."도진의 입술이 아주
"거… 거짓말… 서아가 그럴 리가 없어….""거짓말? 네가 백서아라는 여자를 그렇게 몰라? 걔는 자기 명성, 돈, 갤러리, 그리고 '강도진의 아내'라는 타이틀 없이는 숨도 못 쉬는 여자야. 널 사랑해? 아니, 걘 그냥 일탈의 도구로 널 쓴 것뿐이야. 네가 젊고, 짐승 같고, 뒤탈 없을 것 같으니까 가지고 논 거지."도진은 이안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어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네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그려낸 이 그림들. 서아가 이걸 보고 뭐라고 한 줄 알아?""…….""저 쓰레기 같은 거 당장 찢어버리자고 소리치더군. 자기를 이렇게 천박하게 그려놓은 너를 찢어 죽이고 싶다면서 말이야.""아, 아아아아-!!"이안이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두 손으로 제 머리통을 감싸 쥐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아니야! 서아는 나한테… 나한테 분명히 날 원한다고 했어! 네가 모르는 그 여자의 진짜 얼굴은 나만 안다고!""네가 안다고 착각하는 그 얼굴조차, 서아가 너한테 보여주기로 허락한 연극의 일부일 뿐이야."도진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물리적인 폭력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도진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는 이안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메스와 같았다."너는 서아를 가졌다고 생각했겠지만, 결국 너도 서아의 위선에 놀아난 꼭두각시에 불과해. 그리고 지금 네가 싸질러 놓은 이 쓰레기 같은 그림들은, 네가 얼마나 어리석고 통제 불능인 짐승 새끼인지를 증명하는 영수증이고."도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구석에 놓인 이안의 팔레트와 붓들이 담긴 통을 집어 들었다."아, 그리고 한 예술가로서 마지막 조언을 하나 할까 하는데."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