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
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또각, 또각.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
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수석님,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과 그것을 비추는 핀 조명의 각도를 향해 있었다.
"윤 큐레이터."
서아가 걸음을 멈추고 낮게 불렀다. 뒤따르던 후배 윤지수가 황급히 다가왔다.
"네, 수석님."
"2관 메인 벽면에 걸린 저 추상화. 조명 각도가 어제랑 다른 것 같은데요."
"아, 오늘 아침에 램프를 교체하면서 기사님이 조금 건드리신 것 같습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작품의 질감은 빛이 결정해요. 1도의 각도 차이가 캔버스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꿉니다. 관람객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인데 이런 실수를 하면 안 되죠."
"죄송합니다. 꼼꼼히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실내 온도가 어제보다 0.5도 높네요. 공조기 세팅 다시 확인하세요. 작품에 미세한 균열이라도 가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서아는 완벽주의자였다. 아니, 완벽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녀의 갤러리에서는 먼지 한 톨, 빛 한 줄기, 심지어 공기의 온도조차 통제되어야 했다. 그것은 그녀의 집, 그녀의 결혼 생활, 그리고 그녀의 남편 김도진과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완벽하게 통제된 상태로 존재해야만 그녀는 안심할 수 있었다.
서아는 윤 큐레이터를 뒤로하고 수석 큐레이터실로 향했다.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자, 시그니처 향인 무화과와 시더우드가 섞인 고급스러운 디퓨저 향이 훅 끼쳤다. 투명한 통유리로 된 책상 위에는 서류와 태블릿 PC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직각을 이루며 놓여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그 완벽한 책상 위를 점령한 이질적인 물건들이 있었다.
바로 산처럼 쌓인 서류 봉투와 포트폴리오 파일들이었다.
"하아……."
서아는 미간을 가볍게 짚으며 의자에 앉았다.
다음 달로 예정된 ‘아르테 신진 작가 공모전’의 1차 심사 자료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콧대 높기로 유명한 아르테 갤러리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이었다. 당선만 되면 상류층 컬렉터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것은 물론, 미술계의 주류로 단번에 편입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연히 전국에서 수많은 지망생과 무명 작가들이 목숨을 걸고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윤지수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수석님, 이번 공모전 지원자가 작년 대비 30퍼센트나 늘었습니다. 총 600명이 넘어요."
"알아요. 책상 꼴을 보니 안 봐도 알겠네요."
"1차로 스크리닝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보셔야 할 포트폴리오가 100개가 넘습니다. 오늘 다 보실 수 있겠어요?"
서아는 윤지수가 내려놓은 에스프레소 잔을 들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봐야죠. 내 이름 걸고 기획하는 전시인데."
"대단하세요, 정말. 저는 어제 스크리닝 하느라 눈이 다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서아는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신 뒤, 맨 위에 올려진 검은색 가죽 바인더를 펼쳤다.
"어디 봅시다. 올해는 건질 만한 원석이 있는지."
바인더 안에는 깔끔하게 인쇄된 작품 사진들과 작가의 노트가 정갈하게 철해져 있었다. 서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사진들을 훑어 내려갔다.
"이 작가는……."
"아, 홍대 미대 대학원 출신입니다. 최근에 트렌드인 극사실주의 화풍을 따르고 있고요. 색감도 꽤 대중적이라 컬렉터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올렸습니다."
서아는 픽 웃었다.
"테크닉은 좋네요. 붓 터치도 깔끔하고. 그런데 영혼이 없어요."
"네?"
"어디서 본 듯한 화풍이잖아요. 유명한 해외 작가 레퍼런스 몇 개 섞어서 그럴싸하게 포장한 느낌. 상업성은 있겠지만, 우리 아르테 메인 홀에 걸기엔 너무 얄팍해요. 기각."
서아는 망설임 없이 바인더를 덮어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윤지수는 흠칫 놀라며 다음 파일을 넘겼다.
"그, 그럼 이 작가는 어떠신가요? 설치 미술 쪽인데 메시지가 꽤 강렬합니다."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 좋죠. 근데 이걸 굳이 캔버스로 가져올 필요가 있나요? 그냥 기사로 쓰면 될 걸. 시각적인 충격이 없잖아요. 예술이 아니라 선언문일 뿐이에요. 이것도 기각."
서아의 평가는 냉혹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녀의 손을 거친 포트폴리오들이 속속 '기각' 더미로 쌓여갔다.
1시간. 2시간. 시간이 지날수록 서아의 얼굴에는 깊은 권태가 피어올랐다.
정돈된 선, 계산된 색채, 대중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타협한 흔적들. 모두가 하나같이 완벽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런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일상처럼.
"수석님, 잠시 쉬었다가 하실까요? 벌써 세 시간째 꼼짝도 안 하셨어요."
눈치를 보던 윤지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아는 뻐근한 목을 양옆으로 가볍게 꺾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흐름 끊기는 거 싫으니까 계속할게요. 지수 씨는 나가서 다른 업무 봐요. 남은 건 내가 혼자 천천히 볼 테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부르세요."
윤지수가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공간에는 완벽한 정적만이 남았다.
서아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안전한 그림들. 적당히 교양 있고, 적당히 철학적인 척하는 가짜들.
문득 오늘 아침 도진과 나누었던 식탁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통제되지 않는 날것의 에너지는 때로 천박함으로 흐르기 쉬우니까요. 정제되고 다듬어진 미학이야말로 오래 살아남는 법입니다.'
남편의 그 매끄럽고 서늘한 목소리.
서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김도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예술이든 삶이든, 통제되고 다듬어진 것만이 이 상류층의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제22화 낯선 향기, 그리고 관찰자의 시선(2)그리고 거울을 노려보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중얼거렸다."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모델 서준 것뿐이야. 그림을 위해서. 큐레이터로서의 비즈니스라고. 도진 씨도 이해할 거야…… 아니, 알 필요조차 없는 일이야."필사적인 자기합리화.서아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샤워기 아래로 들어갔다.같은 시각.주방에서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있던 도진의 표정은, 방금 전 서아를 향해 짓던 다정한 미소와는 전혀 달랐다.그의 얼굴에는 묘한 활기와 기분 나쁜 흥분감이 서려 있었다.도진은 찬장에서 최고급 다즐링 티백을 꺼내며 낮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거짓말이 제법 늘었네. 우리 완벽한 아내께서.'도진은 서아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의 모든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새로 산 원피스의 구김 없는 질감.평소보다 짙게 바른 립스틱.그리고 무엇보다, 그 코를 찌르는 역겨운 향수 냄새.그 향수는 서아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과하지 않은 은은함을 추구하는 여자였다.그런 여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면서까지 그토록 자극적인 향을 뒤집어쓰고 왔다는 건,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감추고 싶은 악취가 있다는 뜻이었다.테레빈유. 싸구려 유화 물감. 지포 라이터의 기름 냄새.그리고 젊고 거친 수컷의 체취.어젯밤 서아의 코트에서 났던 그 냄새가, 오늘은 훨씬 더 짙고 농밀하게 그녀의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배어 나오고 있었다.'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온 걸까.'주전자에서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도진은 뜨거운 물을 찻잔에 부으며 생각에 잠겼다.상식적인 남편이라면 당연히 분노해야 마땅했다.자신의 완
제21화 낯선 향기, 그리고 관찰자의 시선(1)엘리베이터가 상승하는 내내, 서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살폈다.흐트러진 곳은 없는가.표정에 불안감이 묻어나지는 않는가.그녀는 핸드백에서 새로 산 샤넬 향수병을 꺼냈다. 오늘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충동적으로 결제한, 아주 무겁고 관능적인 일랑일랑과 머스크 베이스의 향수였다.칙, 칙.귀 뒤쪽과 손목 안쪽에 향수를 한 번 더 뿌렸다.평소라면 머리가 아프다며 절대 쓰지 않았을 독한 향이었지만, 지금 서아에게는 이 숨 막히는 향기가 절실했다.'이 정도면…… 가려지겠지.'오후 내내 해방촌의 그 낡은 옥탑방에서 이안의 시선 아래 발가벗겨졌던 시간.그의 작업실에 배어 있던 테레빈유의 매캐한 냄새와, 그의 몸에서 나던 짙은 담배 냄새가 아직도 자신의 피부 밑에 들러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옷은 갈아입었다.아침에 입고 나갔던 네이비색 수트와 블라우스는 갤러리 근처 세탁소에 쑤셔 넣듯 맡겨버렸다. 지금 입고 있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와 원피스는 백화점에서 향수를 사며 급하게 맞춰 입은 새 옷이었다.완벽하다.이성적으로 따져봤을 때, 남편 도진이 자신의 일탈을 의심할 만한 물리적 단서는 단 하나도 없었다.띠- 띠- 띠- 띠.철컥.익숙한 도어락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도진 씨. 나 왔어요."서아는 현관에 들어서며 평소처럼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냈다."……어, 왔어?"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도진이 책을 덮으며 일어났다.늘 그렇듯 단정하게 다려진 면바지에 얇은 니트 차림.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남편의 모습이었다."오늘 좀 늦었네. 갤러리에
제20화 시선이라는 이름의 해체(2)서아는 엉덩이를 떼고 당장이라도 문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이 불결하고 숨 막히는 공간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서늘한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야 맞았다.하지만.스툴에 닿은 그녀의 몸은 마치 납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이안의 시선.도망칠 테면 쳐보라는 저 오만하고 확신에 찬 눈빛.그 눈빛이 서아의 오기를, 아니,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기묘한 피학성을 자극하고 있었다."……빨리 끝내."침묵 끝에 서아의 입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나 시간 많지 않아."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항복 선언.서아는 입술을 짓이기며 핸드백을 무릎 위에 꽉 끌어안았다.이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그는 만족스러운 포식자의 미소를 지으며 이젤 앞에 자리를 잡았다."자세가 너무 굳었어. 어깨에 힘 빼."이안의 지시가 떨어졌다."됐어. 그냥 그려.""내가 그리는 건 정물화가 아니라 인물화야. 그따위로 경직되어 있으면 죽은 사람을 그리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이안이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성큼 다가왔다.그의 커다란 손이 서아의 어깨 위로 툭, 얹혀졌다.서아는 숨을 들이켰다."힘 빼."이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그의 거친 굳은살이 얇은 실크 블라우스 너머로 서아의 쇄골을 지그시 눌렀다.단순히 자세를 교정하기 위한 터치였지만, 서아에게는 그 손길이 벌겋게 달아오른 쇠인두가 살갗에 닿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그녀의 어깨가 저항하듯 뻣뻣해졌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고 그녀의 승모근부터 목덜미까지 느릿하게 쓸어내렸다."하아…&hell
제19화 시선이라는 이름의 해체(1)해방촌의 좁고 가파른 골목길.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오르막길을 오르며, 서아는 거칠어지는 숨을 몰아쉬었다."하아, 하아……."또각, 또각.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는 지미추 힐의 마찰음이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자신의 매끈한 검은색 벤츠는 골목 초입에 간신히 구겨 넣듯 주차해 둔 상태였다. 평소라면 흠집이라도 날까 봐 절대 세워두지 않았을 비좁은 자리였지만, 지금 서아의 머릿속에는 그런 이성적인 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미쳤어. 내가 여길 왜…….'서아는 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같은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발걸음을 저주했다.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의 발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이안이 알려준 낡은 적벽돌 빌라를 향해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다음번엔 핑계 대지 말고, 그냥 작업실로 와.''그때는 진짜로 벗겨줄 테니까.'오전 내내, 아니 갤러리를 빠져나와 이곳으로 향하는 내내 이안의 그 오만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서아는 그 말도 안 되는 도발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온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했다.수석 큐레이터로서, 전시를 코앞에 둔 작가의 작업 진행 상황을 불시 점검하러 온 것뿐이다. 그 건방진 입에서 다시는 그런 천박한 소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자신의 지위와 권력으로 그를 완벽하게 짓눌러버리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빌라의 옥탑방으로 이어지는 철제 계단 앞에 섰을 때, 서아의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녹슨 철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매 순간, 그녀가 겹겹이 껴입은 사회적 체면과 방어기제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끼익
제18화 얄팍한 방어기제(2)"말조심해!"서아의 평정심에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그녀는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경고했다."여기는 내 직장이고, 내 구역이야. 어젯밤 일은…… 당신이 술에 취해 벌인 저급한 실수로 치부하고 덮어주기로 했어. 내 커리어에 오점 남기기 싫어서. 그러니까 당신도 주제 파악하고 내가 깔아준 판 위에서 얌전히 그림이나 쳐 그려. 쓸데없는 환상 품지 말고."독사처럼 쏟아내는 서아의 경고.그것은 이안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세뇌시키기 위한 방어기제이기도 했다.하지만 이안의 눈에는 그 앙칼진 저항이 그저 우습고 가소롭게 보일 뿐이었다."덮어준다고?"이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그의 큰 체구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서아를 압박했다. 이안은 테이블을 돌아 서아가 앉아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오지 마. 거기 앉아."서아가 본능적으로 의자 등받이 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방금 전까지 세워두었던 날 선 권위가, 그가 다가오는 발걸음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이안은 서아의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짚었다.완벽하게 퇴로가 차단되었다.가까워진 거리.오늘 아침 서아가 들이부었던 짙은 향수 냄새가 이안의 코끝을 찔렀다."독하네."이안이 서아의 목덜미 근처로 얼굴을 슬쩍 들이밀며 중얼거렸다."뭐가…….""향수 냄새. 평소에 뿌리던 무화과 향이 아니잖아.""……!""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우고 싶었어? 아니면, 뭘 감추고 싶었던 건가."서아는 숨을 들이켜는 것
제17화 얄팍한 방어기제(1)완벽한 화이트 큐브.먼지 한 톨 없는 갤러리 아르테의 VIP 접견실은 서아에게 있어 일종의 성역이자 요새였다.항온 항습기가 돌아가는 미세한 백색소음.벽에 걸린 수천만 원짜리 단색화.블랙 글래스로 마감된 차가운 테이블.이 공간 안에서 서아는 철저한 지배자였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고, 오만한 작가들의 기를 꺾어 자신의 기획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수석 큐레이터."……하아."하지만 오늘 아침, 서아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은 권위 있는 지시가 아니라 억눌린 한숨이었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차가운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올려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쓴맛이 혀뿌리를 강타했지만,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오른쪽 손목.서아는 무의식적으로 재킷 소매를 끌어내려 손목을 덮었다. 어젯밤 샤워 타월로 피부가 벌겋게 일어날 때까지 문질러 씻었지만, 이안이 남긴 그 끔찍한 악력의 감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당신한테서 낯선 냄새 나.'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어젯밤, 차갑게 돌아누운 채 자신을 밀어내던 남편 도진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결국 서아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도진의 옆에 웅크려 누운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죄인처럼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남편이 출근 준비를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서아는 자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자신이 왜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왜 이토록 끔찍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아니야. 난 잘못한 거 없어.'서아는 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던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눈을 떴다.'그 미친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
제1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1)오전 6시 50분.정확히 조율된 스위스제 벽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거실의 공기를 갈랐다.서아는 눈을 떴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미세한 아침 햇살이 정돈된 침대 위에 일정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시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도진은 언제나 자신보다 20분 먼저 일어났고, 그가 머물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눕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크 가운의 끈을 단정하게 묶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흐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