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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화 마침표가 없는 방(2)

Penulis: 유리구슬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6-22 12:36:34

"젠장."

그는 다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아까 피운 담배 냄새가 아직 서재에 남아 있었다.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못했다.

모니터의 빈 문서와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번갈아 보던 도진은, 끝내 담배를 재떨이 위에 내려놓았다.

도망치듯 같은 행동을 반복해 봐야 한 문장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만 선명해졌다.

그는 편집장에게서 와 있던 미확인 메시지 알림을 내려다보다가, 끝내 내용을 열지 않은 채 키보드 앞으로 몸을 숙였다.

이번에는 한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왜 3년째 쓰지 못하는지를 적어보기로 했다.

'이제는 진짜다. 무조건 써야 해.'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몇 줄을 이어가기도 전에 손이 멎었다.

아까 지웠던 문장과 다를 게 없었다.

도진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야. 나는 사기꾼이야.'

잠시 뒤, 그는 다시 서랍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쓰지 못할 때마다 도망치듯 손을 뻗던 익숙한 곳이었다.

도진의 손은 서랍 손잡이에 닿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안쪽에는 담배 한 갑과 라이터, 몇 달 전 출판사에서 보내온 계약 변경 서류가 뒤섞여 있었다. 그는 담배 대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잠금 화면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세 개 떠 있었다. 모두 김 편집장이 보낸 것이었다.

[선생님, 이번 주 안에는 1차 원고 방향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분량은 상관없습니다. 한 장이면 됩니다.]

[답장만 부탁드립니다.]

한 장이면 된다는 말이 더 잔인했다. 한 장조차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 분량을 배려하는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확인서였다.

도진은 답장 창을 열었다.

‘오늘 중으로 보내겠습니다.’

문장을 적었다가 지웠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그것도 지웠다.

결국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한 채 화면을 껐다. 검게 변한 액정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독자들이 사진으로 기억하는 강도진은 없었다. 피곤한 눈과 굳은 입술을 가진 마흔 언저리의 남자만 남아 있었다.

그는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가장 눈에 잘 띄는 칸에 자신의 책들이 초판부터 개정판까지 나란히 꽂혀 있었다. 한때는 그것들이 자랑이었다. 지금은 묘비처럼 보였다.

도진은 맨 왼쪽의 첫 소설을 꺼냈다. 표지를 넘기자 젊은 시절의 사인이 보였다. 초판 출간 기념으로 스스로 남긴 문장이었다.

‘끝까지 쓰는 사람만이 소설가다.’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잔인하네."

책을 덮는 소리가 서재 안에서 크게 울렸다.

도진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빈 문서를 바라보다가 파일 탐색기를 열었다. 지난 3년 동안 만들었다 버린 폴더들이 날짜별로 정렬되어 있었다. ‘신작_1’, ‘신작_최종’, ‘신작_진짜최종’, ‘새기획’, ‘다시’. 우스울 정도로 필사적인 이름들이었다.

가장 최근 파일을 열었다. 열두 페이지. 그중 살아남은 문장은 한 페이지도 되지 않았다. 주인공은 매번 다른 이름을 가졌고, 배경은 서울이었다가 제주였다가 외국의 이름 없는 도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모두 같은 곳에서 멈춰 있었다. 인물이 안전한 선택을 버리려는 순간, 도진의 손이 먼저 멈췄다.

그는 자신이 결말을 잃은 게 아니라 위험을 잃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예전에는 타인의 선택을 잔인할 만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인물이 무너지면 무너지는 대로, 사랑이 파국이라면 파국인 대로 써 내려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모든 사람에게 그럴듯한 출구를 만들어 주었다. 독자에게 미움받지 않을 만큼, 평론가에게 공격받지 않을 만큼, 자신도 상처 입지 않을 만큼.

안전한 문장은 죽어 있었다.

도진은 새 문서를 하나 열었다.

제목을 쓰지 않았다.

대신 첫 줄에 질문을 적었다.

‘나는 왜 쓰지 못하는가.’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가 움직였다.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도진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소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세 해 동안 쓴 어떤 문장보다 솔직했다.

그는 두 번째 줄을 적었다.

‘그러면 타인이 잃는 것은 볼 수 있는가.’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책상 옆 재떨이에는 아까 피운 담배의 필터가 하나뿐이었다. 도진은 새 담배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지만 불을 붙이지 않았다.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는 담배를 내려놓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몇 분 뒤 문서는 세 문단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소설은 아니었다. 문장은 거칠었고, 자신을 향한 변명과 조롱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화면에 글자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자 가슴 어디선가 아주 미세한 열이 생겼다.

도진은 그 열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문밖에서 청소기의 낮은 진동음이 들렸다. 잠시 후 소리가 멀어졌다. 집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도진은 서아와의 아침 식사를 떠올렸다. 정확한 시간, 정확한 온도의 커피, 정확한 표정. 자신의 결혼도 방금 전까지 쓰려던 문장처럼 지나치게 안전했다.

그는 생각을 지우려다 멈췄다.

‘안전한 건 죽어 있다.’

방금 자신이 적은 문장과 너무 잘 맞았다.

도진은 무심코 서아의 빈 의자를 떠올렸다. 그녀가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화를 낸 적도, 질투한 적도, 크게 웃은 적도 드물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싸우지 않는 대신 흔들리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는 대신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도진은 그 생각을 문서 아래에 적었다.

‘완벽한 관계는 갈등이 없는 관계가 아니라, 갈등을 보이지 않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화면 오른쪽 아래 시계가 오전 9시를 넘겼다. 김 편집장의 메시지에는 여전히 답하지 못했다. 도진은 새 문서를 저장했다. 파일명은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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