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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1)
오전 6시 50분.
정확히 조율된 스위스제 벽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거실의 공기를 갈랐다.
서아는 눈을 떴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미세한 아침 햇살이 정돈된 침대 위에 일정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시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도진은 언제나 자신보다 20분 먼저 일어났고, 그가 머물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눕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크 가운의 끈을 단정하게 묶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이 거울처럼 투명하고 얼룩 하나 없기를 바랐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유지해 왔다.
주방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차가운 대리석이었다.
서아는 매일 아침 가사도우미가 오기 전, 남편의 아침 식사를 직접 준비했다. 그것은 이 집안의 가장 중요한 규칙이자, 두 사람이 외부 세계에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부부의 품격 중 하나였다.
탁, 탁.
도마 위에 정갈하게 썰려 나가는 아보카도와 훈제 연어의 마찰음이 일정한 리듬을 만들었다.
오늘의 메뉴는 호밀빵 토스트와 수란을 얹은 아보카도 샐러드, 그리고 가볍게 구운 아스파라거스. 원두는 도진이 좋아하는 케냐 AA 블렌딩이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작동하며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짙은 커피 향이 주방 가득 퍼져나갔다.
서아는 하얀 도자기 접시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접시의 가장자리와 리넨 매트의 간격은 정확히 3센티미터. 나이프와 포크의 각도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평행을 이루었다.
그때,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내려오는 도진의 모습은 방금 잡지 화보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단정했다. 집 안이었음에도 그는 가벼운 셔츠와 슬랙스 차림이었다. 구김 하나 없는 칼칼한 리넨의 질감이 그의 차분한 분위기를 돋보이게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도진 씨."
서아가 먼저 미소를 지으며 잔에 커피를 따랐다.
"좋은 아침입니다, 서아 씨. 오늘도 고생이 많군요."
도진은 의자를 뒤로 빼며 정중하게 목례를 했다. 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정제되어 있었고, 과도한 감정의 고저가 없었다. 마치 잘 훈련된 아나운서의 나레이션을 듣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커피 향이 아주 좋습니다. 로스팅 정도가 딱 적당하군요."
"도진 씨 입맛에 맞았다니 다행이에요. 요즘 원두 보관 상태에 신경을 좀 썼거든요."
"서아 씨의 손길이 닿은 곳은 어디든 완벽하니까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진은 나이프를 들어 토스트를 부드럽게 잘라냈다. 바삭하는 파열음이 침묵을 깨뜨렸다. 서아 역시 포크를 움직여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두 사람의 식사는 소리 없이 우아하게 진행되었다. 접시와 포크가 부딪치는 쨍한 금속음조차 이 식탁 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소음이었다.
"참, 이번 주 토요일에 있는 서 회장님 장녀 출판 기념회 말이에요."
도진이 티시용 나프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훔치며 말을 건넸다.
"네, 기억하고 있어요. 스케줄은 이미 비워두었답니다."
"같이 참석해 주었으면 합니다. 서 회장님이 서아 씨의 갤러리 기획전에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이번 기회에 인사를 나누는 게 서로에게 유익할 겁니다."
"당연히 가야죠. 당신의 신작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 텐데, 아내로서 자리를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서아는 눈을 휘어트리며 생긋 웃었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주고받는 완벽한 대화였다.
"당신이 곁에 있어 준다면 내 체면이 살죠. 늘 대외적인 자리에서 서아 씨는 빛이 나니까."
"과찬이세요. 도진 씨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뿐인걸요."
말은 부드럽게 오갔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의 눈동자 깊은 곳까지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가볍게 부딪쳤다 떨어졌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은 훌륭했고, 채광은 아름다웠으며, 부부의 대화는 교양의 극치를 달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안에는 온기가 없었다. 온도가 사라진 박제된 정물화 같은 풍경이었다.
"요즘 갤러리 일은 어떤가요? 신진 작가 공모전 준비로 바쁘다고 들었습니다만."
도진이 흘러가는 투로 질문을 던졌다.
"네, 포트폴리오 접수가 시작되어서 매일 정신이 없네요. 올해는 유독 개성 강한 지원자들이 많아서 심사가 까다로울 것 같아요."
"개성이라……."
도진이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예술가에게 개성은 양날의 검이죠. 통제되지 않는 날것의 에너지는 때로 천박함으로 흐르기 쉬우니까요. 정제되고 다듬어진 미학이야말로 오래 살아남는 법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요, 도진 씨."
서아가 잔을 내려놓으며 도진을 바라보았다.
"틀을 깨부수는 파격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기도 하잖아요. 당신의 초기 작작들처럼요."
순간, 도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서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도진의 눈매가 아주 조금 서늘해졌다. 그러나 이내 그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과거의 미숙함을 그렇게 포장해 주니 부끄럽군요. 그때는 어려서 정제되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지금 보면 부끄러운 문장들이 많아요."
그때였다.지잉- 지잉-!조수석에 던져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발신자는 갤러리의 최 부관장이었다.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여, 여보세요."[관장님!! 지금 어디십니까!! 연락이 왜 이렇게 안 돼요!]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최 부관장의 목소리는 평소의 깍듯함은 온데간데없고 찢어질 듯 날카로웠다."무슨 일이야. 한밤중에."서아는 애써 침착한 척 목소리를 깔았다. 아직, 아직은 모를 수도 있다. 그저 갤러리에 급한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다음 순간, 서아의 헛된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무슨 일이냐고요?! 관장님 지금 인터넷 안 보셨어요?! 난리가 났다고요!!]"인터넷…? 뭐, 뭔데."[강 작가님 신작이요! 거기 나오는 여자 주인공 '희수' 직업이 갤러리 관장인 건 아시죠? 근데 그 여자가 불륜을 저지르는 묘사들이… 우리 갤러리 상황이랑 너무 똑같잖아요! 심지어 소설 속 전시회 일정, 작품명, 거래처 이름까지 전부 다 관장님 스케줄이랑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다고요!]"……."서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왔다.[지금 미술계 커뮤니티랑 SNS 다 뒤집어졌어요. 강 작가님이 자기 아내 불륜 사실을 소설로 까발린 거 아니냐고. 심지어 소설 속에 나오는 '류'라는 젊은 화가… 그거 지난번에 손 다쳐서 은퇴한 그 '이안' 작가 아니냐고 벌써 실명까지 다 털렸다고요!!]최 부관장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차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관장님! 이거 사실입니까?! 관장님이 정말 그 어린 작가랑… 하아, 미치겠네 진짜. 지금 주요 VIP 클라이언트들한테서 전화가 빗발치고
"하하하하! 하하하하하!"거울 앞에서 미친 듯이 웃어대던 서아의 웃음소리가 어느 순간 뚝, 하고 끊겼다.허공을 찢던 기괴한 폭소가 멈추자, 텅 빈 안방에는 창문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만이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서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온몸은 피와 진물로 엉망이었고, 입가에는 시뻘건 립스틱이 광대뼈까지 번져 있었다. 그 위로 붉은 립스틱으로 갈겨쓴 '희수'라는 두 글자가 흉측하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이대로 있으면.'서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이 집에 계속 있으면, 난 정말 희수가 돼버릴 거야.'소설 속 희수의 결말은 '완벽한 위선자로 다시 태어나 남편의 옆에 기생하는 것'이었다. 껍데기뿐인 우아함을 지키기 위해, 강도진이라는 괴물의 쇼윈도 마네킹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싫어…."서아는 고개를 저었다."그 새끼 무대 위에서 평생 광대 노릇 하라고? 그 새끼가 던져주는 대본대로 살라고? 미쳤어. 내가 왜."본능적인 생존 욕구가 완전히 타버린 줄 알았던 서아의 이성을 간신히 깨웠다.도망쳐야 한다.강도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의 활자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서아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바닥에 박혀 있던 미세한 유리 조각들이 살을 파고들며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드레스룸으로 달려간 서아는 미친 듯이 캐리어를 끌어내렸다.우당탕!수백만 원짜리 에르메스, 샤넬 백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서아는 반사적으로 그 가방들을 주워 담으려다 멈칫했다."이거 다… 강도진 돈으로 산 거잖아."가방뿐만이 아니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보
칼날의 서늘한 은빛이 서아의 눈동자에 반사되었다.'이걸로… 그 새끼가 자고 있을 때 심장을 찌르고… 내 목도 긋는 거야.'그렇게 결심하며 주방을 나서려던 순간.도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가려면, 갈등이 고조되어야 하잖아. 진정한 카타르시스는, 모든 진실이 재가 되어 사라졌을 때 찾아오는 법이거든.]-서아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식칼을 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내가 여기서 강도진을 찌르고 죽으면….'서아의 머릿속에 소름 끼치는 상상 하나가 번뜩였다.'그 새끼는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웃을 거야. 완벽한 비극의 엔딩이 완성되었다고. 아내가 남편을 찌르고 자살하는 치정극의 결말. 그건 강도진이 쓴 소설의 가장 화려한 에필로그가 되겠지.'쟁그랑-!서아는 들고 있던 식칼을 바닥에 내던졌다.소름이 끼쳤다. 구역질이 났다.자신이 죽는 것조차 강도진의 시나리오 안에서 완벽한 피날레로 쓰일 것이라는 공포. 죽음으로도 이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토할 것 같아… 악마 새끼… 넌 진짜 악마야…."서아는 헛구역질을 하며 주방을 빠져나왔다.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강도진의 시선이, 강도진이 쓴 글자들이 피부 밑을 파고들어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었다."씻어야 해… 벗겨내야 해…."서아는 발을 질찍 끌며 1층의 공용 욕실로 들어갔다.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몰골은 처참했다.산발이 된 머리, 피와 눈물로 엉망이 된 화장, 찢기고 베여 핏물이 흐르는 맨살.하지만 서아의 눈에는 그 상처들이 피로 보이지 않았다.
달칵.서재 문이 닫히는 소리는 너무나도 작고 경쾌했다.하지만 바닥에 엎드린 서아에게 그 소리는, 자신의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를 영원히 폐쇄해버리는 거대한 철문의 파열음처럼 들렸다."아… 아아…."서아의 입에서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강도진은 떠났다.자신을 향해 '최고의 뮤즈'라며 비릿한 찬사를 던진 뒤, 피 묻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재를 나갔다. 샤워를 하러 간다고 했다. 피비린내 나는 지옥 한가운데에 아내를 버려두고, 그는 그저 묻은 먼지를 씻어내듯 평온하게 걸어 나갔다."거짓말… 이거 다 거짓말이야…."서아는 바닥에 흩어진 원고지들을 미친 듯이 긁어모았다.피와 잉크가 뒤섞인, 도진의 소설. 아니, 백서아의 관찰 일지.덜덜 떨리는 손으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눈앞으로 끌어당겼다.[희수는 해방촌 옥탑 작업실의 매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테레빈유 향과 거친 먼지가 섞인 그곳에서,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류의 거친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을 때, 희수는 남편의 정갈하고 차가운 서재를 떠올리며 묘한 승리감에 젖었다.]"아아아악-!"서아는 원고지를 갈기갈기 찢어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아니야! 승리감 아니었어! 그냥… 그냥 끌린 것뿐이었어! 네가 뭔데 내 감정을 단정 지어! 네가 뭔데!"허공을 향해 악을 썼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메아리뿐이었다.서아는 피투성이가 된 무릎으로 기어가 다른 원고지를 집어 들었다. 읽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시선은 이미 활자에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희수는 남편이 직접 매어준 아이보리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갤러리로 향했다. 류가 수장고에서 그
“네가 끝까지 갤러리와 체면을 붙들자, 이안이 제 손으로 CCTV 캡처본과 문자 일부를 이사회에 던졌지. 나는 그놈이 그렇게 움직일 걸 알고도 막지 않았고, 네 마지막 성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그대로 이용했어.”도진이 서아의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탁 놓으며 비웃었다.“그렇게 판을 깔아주니까, 네가 아주 완벽한 대사를 쳐주더라.”도진은 서아를 흉내 내듯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말했다.“‘여보, 무서워. 저 미친 스토커가 나를 괴롭혀. 나 좀 살려줘.’ …하하하.”도진의 웃음소리가 서재 안을 울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건조하고 텅 빈 웃음소리였다.“네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눈물을 쥐어짜며 그 대사를 뱉을 때, 나는 속으로 기립박수를 쳤어. 인간의 위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지. 내 상상력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완벽한 예술 그 자체였어.”“아… 아아….”서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모든 것이 강도진의 장기판 위였다.도진은 이안의 자존심을 짓밟아 폭주를 유도했고, 서아가 그를 스토커로 몰아세우도록 침묵으로 길을 열어두었다. 두 사람이 제 욕망과 공포로 내린 선택조차, 결국 저 남자가 예상하고 이용한 장면들이었다.“그럼….”서아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작업실에… 불이 난 것도….”“말했잖아. 소설의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고.”도진이 바닥에 흩어진 원고지 중 한 장을 집어 들며 무심하게
스으윽- 스으윽-턴테이블의 바늘이 빈 레코드판을 긁는 소리만이 기괴하게 서재 안을 맴돌았다.도진의 멱살을 움켜쥔 서아의 두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핏기가 가신 그녀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그 절박한 질문에, 도진의 입가에 서서히 옅은 미소가 번졌다.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 다정함도, 온기도 없는, 그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을 내려다보는 파충류의 서늘한 입꼬리.“처음이라.”도진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서아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차가운 체온에 서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네가 말하는 그 ‘처음’이 언제부터인지 묻고 싶네.”“……!”“네가 갤러리에서 그 애송이의 그림을 처음 본 날? 아니면, 대학 동기 모임을 핑계로 해방촌 옥탑 작업실에 제 발로 들어간 날? 그것도 아니면… 내가 매어준 스카프가 이안의 붉은 물감으로 망가진 날?”도진의 입에서 나오는 적나라한 단어들에 서아의 숨이 턱 막혔다.“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네가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니까.”도진이 서아의 손목을 천천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떼어냈다.“그래. 다 알고 있었어.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쿵.서아의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거, 거짓말….”“거짓말?”도진이 짧게 실소를 터뜨렸다.“서아 야. 넌 거짓말에 너무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