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요?"
서아가 정중하게 물었다.
"오늘은 별다른 외부 일정은 없습니다. 오전부터 서재에 들어가 글을 좀 정리할 생각입니다."
"그러시군요.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외출할게요. 저는 오늘 오전 중에 갤러리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오늘도 바쁜 하루가 되겠군요. 차 조심해서 가십시오."
"고마워요, 도진 씨."
도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의자를 끝까지 밀어 넣은 뒤, 서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아침도 훌륭했습니다. 매번 고생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군요."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걸요. 신경 쓰지 마세요."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을 가로질러 2층으로 향했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서아는 식탁 위에 남겨진 빈 접시들을 바라보았다.
잔해조차 깨끗했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도진의 습관 덕분에 접시 위에는 소스의 흔적만이 미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서아는 리넨 냅킨을 접어 식탁 위에 놓았다. 냅킨에 배어든 자신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외형적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부부가 있을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젊은 소설가와, 상류층의 신망이 두터운 유명 갤러리의 관장. 자산, 학벌, 외모, 교양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조합이었다. 남들은 그들을 부러워했고, 그들의 삶을 동경했다.
하지만 서아는 알고 있었다.
이 집 안의 모든 것은 잘 만들어진 연극 무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신과 도진은 관객이 없는 무대 위에서조차 배역을 내려놓지 못하는 비참한 배우들이라는 것을.
"완벽해……."
서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가 채운 눈에 보이지 않는 완벽이라는 사슬이, 오늘 아침에도 그녀의 목을 숨 막히게 조여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아는 그 사슬을 풀 생각이 없었다. 이것이 그녀가 평생을 바쳐 구축해 온 삶의 방식이었으므로.
그녀는 차갑게 식어버린 남은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부었다. 검은 액체가 하얀 대리석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려 사라졌다.
서아는 식탁을 떠나기 전에 오늘의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오전 열 시 공모전 심사 회의, 정오 컬렉터와의 오찬, 오후 세 시 신규 작가 포트폴리오 검토가 분 단위로 정렬되어 있었다. 전날 밤 비서가 보낸 변경 요청에는 이미 ‘확인’ 표시가 붙어 있었다. 그녀는 일정표에서 빈칸을 싫어했다. 빈 시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끼어드는 틈이었고, 예상하지 못한 일은 대개 흠집을 남겼다.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서아는 검은색과 아이보리색 재킷 사이에서 잠시 손을 멈췄다. 결국 평소처럼 아이보리를 골랐다. 관장 백서아의 이미지는 계절보다 먼저 정해져 있었다. 과하지 않은 보석, 발등이 매끈하게 드러나는 검은 구두, 손목에는 얇은 시계. 거울 앞에 선 그녀는 귀걸이의 각도까지 맞춘 뒤에야 숨을 내쉬었다.
문밖에서 도진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서재로 향하는 중이었다.
"오늘도 작업해?"
서아가 물었다.
도진은 계단 아래에서 고개만 돌렸다.
"그래야지."
짧고 평온한 대답이었다. 서아는 그 말에 더 묻지 않았다. ‘얼마나 썼어?’라거나 ‘출판사에서 독촉하지 않아?’ 같은 질문은 오래전에 금지된 항목이 되었다. 세 해 전까지만 해도 도진은 식탁에서도 문장을 이야기했다. 산책하다가도 갑자기 멈춰 휴대전화에 메모했고, 새벽 두 시에 원고를 들고 와 한 문단만 읽어 달라고 졸랐다. 지금의 그는 글에 관해서만큼은 정중하게 문을 닫았다.
서아는 그 문을 열어볼 생각이 없었다. 각자 관리해야 할 방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현관 앞에서 가사도우미가 다가와 오늘 저녁 식사 시간을 물었다. 서아는 잠시 도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이층 복도 끝으로 사라진 뒤였다.
"여덟 시. 평소대로 준비해 주세요."
"메뉴도 평소대로 할까요?"
"네. 바꾸지 마세요."
대답은 반사적으로 나왔다. 서아는 그제야 자신이 어제도, 그제도, 지난주에도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반복은 안정이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사람이 같은 자리에 앉는 것. 그것이 무너지지 않는 한 자신들의 결혼 역시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 서아는 습관처럼 집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석재와 유리로 완성된 저택은 잡지 화보처럼 반듯했다. 그 안에서 도진은 혼자 서재 문을 닫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그 장면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이 안 풀리면 말하겠지.’
말하지 않는다는 건 아직 견딜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서아는 편리하게 결론 내렸다.
한강변 도로에 올라서자 차창 밖으로 출근 차량이 길게 늘어섰다. 운전기사가 정체를 피해 우회하겠다고 보고했다. 서아는 도착 예정 시간을 계산했다. 우회하면 8분이 줄었다. 그녀는 곧바로 허락했다. 오늘도 모든 것이 계산 가능한 범위 안에 있었다.
갤러리 도아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8시 47분이었다. 직원 출근 시간보다 십삼 분 빨랐다. 서아는 아무도 없는 로비의 조명을 직접 켰다. 흰 벽들이 차례로 밝아졌다. 작품들은 제 위치에 있었고, 어제 퇴근 전에 지적했던 안내판의 각도도 바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첫 전시실을 천천히 걸었다. 작품과 작품 사이 간격, 바닥의 반사, 조명의 중심점. 손댈 필요가 없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무엇이 어디 있어야 하는지 자신이 알고 있고, 실제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 그 단순한 일치가 삶 전체를 지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무실 문을 열자 책상 위에 공모전 심사 자료가 놓여 있었다. 수십 명의 작가 이름과 작품 이미지가 정리된 두꺼운 파일이었다. 서아는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고 맨 위 서류를 펼쳤다.
이안은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두 팔을 벌리고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길 속에서 녹아내리는 백서아의 얼굴들을 보며 지독한 희열을 느꼈다.파지직! 찌지직!캔버스 천이 타들어 가는 소리.유화 물감이 끓어오르며 터지는 소리.그것은 마치 이안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 같았다.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이젤이 불타고, 소파가 불타고, 바닥에 흩뿌려진 기름길을 따라 작업실 전체가 시뻘건 화염에 휩싸였다.순식간에 짙고 검은 유독가스가 천장으로 차올랐다."콜록! 콜록!"희열은 짧았다.유독가스가 폐부로 밀려들어 오자, 이안은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커헉… 콜록…!"이안은 본능적으로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사방이 꽉 막힌 지하실. 출구인 철문은 저 불길 너머에 있었다.'나가야 해.'이안은 비틀거리며 철문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바닥에 흩뿌려진 기름 탓에, 온통 불바다였다. 발을 디딜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뜨거워… 윽!"바지 밑단에 불이 붙을 뻔한 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뒷걸음질을 쳤다.그때였다.자신이 불을 질렀던 가장 거대한 캔버스 더미 너머로, 미처 타지 않은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자신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 백서아라는 여자에 미치기 전, 오직 그림에 대한 열정만으로 밤을 새워가며 그렸던 '자화상'이었다.불길이 그 그림의 가장자리를 핥아먹으려 하고 있었다."안 돼…."순간, 이안의 머
텅 빈 작업실.도진이 떠난 지 한참이 지났다.이안은 찢어진 캔버스와 부러진 붓, 터진 물감 사이에 주저앉은 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닥치는 대로 그림을 뜯고 짓밟았던 탓에 손등과 손가락 마디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손톱 밑에는 물감과 캔버스 섬유가 뒤엉켜 있었고, 바닥에는 자신이 그토록 귀하게 다뤘던 작품의 조각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흩어져 있었다.더 부술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이안을 진정시키지 못했다.오히려 모든 것이 망가진 뒤에야 작업실의 적막이 더 또렷해졌다. 그림을 찢을 때는 소리라도 있었다. 이젤이 넘어지고 나무틀이 부러지고 유리병이 깨지는 동안에는 분노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소리마저 끝났다.이안은 한참 동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이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이 손으로 서아를 붙잡았고, 자신이 그녀를 지배했다고 믿었다.그리고 방금 전에는 그 믿음의 증거라고 여겼던 것들을 제 손으로 전부 찢어버렸다.그런데도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가슴속에 박힌 패배감은 그대로였다.도진에게 들은 말도, 서아를 향해 품었던 집착도,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었던 시간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이안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벽에는 못과 액자 자국만 흉하게 남아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누드화들은 더 이상 그림의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붉고 검은 물감이 뒤섞인 바닥은 마치 상처 난 피부처럼 번들거렸다.그는 그 잔해를 보고도 더는 발로 차지 않았다.작품을 망가뜨리는 일은 이미 끝났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이 공간이 남아 있는 한, 자신이 여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도 남는다. 벽과 바닥, 냄새와 얼룩, 부러진 이젤과 찢긴 캔버스까
자신은 강도진의 우아한 세계에 균열을 낸 '치명적인 파괴자'라고 믿었다.백서아를 통해 저 거만한 강도진을 굴복시켰다고 생각했다.이 수많은 그림들이 그 승리의 전리품이라고 여겼다.그런데.그 모든 것이.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강도진이 쳐놓은 거미줄 위에서의 발버둥에 불과했다는 건가?"너는 내 영감을 위해 쓰인 도구였을 뿐이야."도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한 문장.그것은 이안의 척추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는 결정타였다."도구…."이안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그래, 도구. 잉크가 다 떨어져서 이제는 버려야 할, 싸구려 일회용 펜 같은 거."도진이 쓰레기통에 손수건을 툭 던져 넣었다."네가 죽을힘을 다해 그려낸 이 그림들조차, 결국 내 소설의 본편 결말을 장식하기 위해 쓰인 소품에 불과해. 이 누드화들 덕분에 서아가 내 발밑에서 평생 복종을 맹세하는 장면까지 본편에 이미 봉인했지. 본편은 끝났고 편집장에게도 넘겼어. 이제 현실에 남은 건 하나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리고 그 선택을 본 서아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그 마지막 장면이 내 에필로그를 완성해 줄 거야."도진이 이안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악마의 미소였다."고맙다, 이안아. 네 덕분에 출간되는 순간 세상을 뒤흔들 역작의 본편이 완성됐어. 이제 네 선택이 만들어낼 마지막 에필로그만 남았지. 독자들이 열광할 때 네 이름도 아주 잠깐, 마음속으로나마 떠올려주지."도진은 더 이상 이안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깔끔하게 뒤를 돌았다."이, 이 개새끼야… 강도진… 이 악마 새끼야!!"이안이 등 뒤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었지만, 도진의 발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이안이 다시 앉자 도진은 봉투를 테이블 가장자리로 밀어 두었다. 더는 자료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내놓는 말만으로도 남은 빈칸이 충분히 채워지고 있었다."그 첫날 밤부터 짚어보지."도진의 입에서 나온 구체적인 정황에, 이안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너는 서아를 네 작업실로 불렀지. 갤러리 VVIP·프레스 프리뷰 리셉션이 끝난 지 사흘째 되던 가을밤, 서아는 내게 대학 동기 모임이 있다고 거짓말하고 오후 일곱 시에 해방촌 옥탑 작업실로 향했어.""……네, 네가 그걸 어떻게.""그날 넌 서아의 비싼 실크 블라우스를 거칠게 잡아뜯었어. 자개 단추들이 바닥과 캔버스 사이로 사방에 흩어졌지."이안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숨이 턱 막혔다."그리고 새벽 2시 30분. 집에 돌아온 서아는 네 회색 셔츠를 입고 있었어. 와인을 쏟아 혜진이 오빠 옷을 빌렸다고 했지. 하지만 그 셔츠에는 담배와 테레빈유 냄새가 배어 있었고, 오른쪽 귓바퀴 아래엔 붉은 물감 자국까지 남아 있었어."도진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귓바퀴 아래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나는 그 거짓말을 모르는 척 받아줬어. 다음 날 아침엔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처럼 젖은 머리까지 말려주면서 말이야.""거짓말… 거짓말 마! 네가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고? 네 마누라가 나랑 붙어먹고 온 걸 알면서도?!""모른 척한 게 아니야."도진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고 서늘해졌다."내가 그 무대를 세팅해 준 거지."순간, 작업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이안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도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도진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사방에 널
끼익-.등 뒤로 차가운 철문이 닫히려는 찰나였다."기다려…."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안이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 와 도진의 발목을 덥석 움켜쥐었다.물감과 술, 그리고 자신의 눈물로 범벅이 된 이안의 손이 도진의 바짓단을 구겨 쥐었다. 그 손아귀에는 어떻게든 남자의 그 완벽한 평정심에 흠집을 내겠다는 듯한, 오기와 발악이 담겨 있었다."어딜 가… 이 새끼야.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이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충혈된 두 눈은 독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넌 지금 도망치는 거야. 쿨한 척, 상처받지 않은 척 연기하면서 도망치는 거라고!"도진은 자신의 발목을 잡은 이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쾌한 기색조차 없었다. 그저 길가에 버려진 오물 덩어리를 보는 듯한 무기질적인 시선이었다."도망?""그래, 이 병신아! 네 마누라가 내 밑에서 짐승처럼 헐떡거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어떻게든 나를 깎아내리고 짓밟아야 네 알량한 자존심이 지켜지니까!"이안은 쉰 목소리로 악을 썼다."네가 백날 여기서 내 그림을 쓰레기라고 떠들어대도 진실은 안 바뀌어! 서아는 나를 원했고, 나는 서아를 가졌어! 너는 네 침대에서 네 마누라가 딴 놈을 생각하며 젖어 드는 꼴도 눈치채지 못한 등신 머저리라고!""……."이안의 거친 숨소리만이 작업실의 적막을 채웠다.그는 도진의 눈동자에서 단 한 줌의 분노나 절망이라도 찾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남자의 얼굴이 치욕으로 일그러지기를, 제발 한 대만이라도 좋으니 주먹을 날려주기를 바랐다.하지만 도진은 그저 가만히 이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이안아."도진의 입술이 아주
"거… 거짓말… 서아가 그럴 리가 없어….""거짓말? 네가 백서아라는 여자를 그렇게 몰라? 걔는 자기 명성, 돈, 갤러리, 그리고 '강도진의 아내'라는 타이틀 없이는 숨도 못 쉬는 여자야. 널 사랑해? 아니, 걘 그냥 일탈의 도구로 널 쓴 것뿐이야. 네가 젊고, 짐승 같고, 뒤탈 없을 것 같으니까 가지고 논 거지."도진은 이안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어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네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그려낸 이 그림들. 서아가 이걸 보고 뭐라고 한 줄 알아?""…….""저 쓰레기 같은 거 당장 찢어버리자고 소리치더군. 자기를 이렇게 천박하게 그려놓은 너를 찢어 죽이고 싶다면서 말이야.""아, 아아아아-!!"이안이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두 손으로 제 머리통을 감싸 쥐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아니야! 서아는 나한테… 나한테 분명히 날 원한다고 했어! 네가 모르는 그 여자의 진짜 얼굴은 나만 안다고!""네가 안다고 착각하는 그 얼굴조차, 서아가 너한테 보여주기로 허락한 연극의 일부일 뿐이야."도진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물리적인 폭력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도진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는 이안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메스와 같았다."너는 서아를 가졌다고 생각했겠지만, 결국 너도 서아의 위선에 놀아난 꼭두각시에 불과해. 그리고 지금 네가 싸질러 놓은 이 쓰레기 같은 그림들은, 네가 얼마나 어리석고 통제 불능인 짐승 새끼인지를 증명하는 영수증이고."도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구석에 놓인 이안의 팔레트와 붓들이 담긴 통을 집어 들었다."아, 그리고 한 예술가로서 마지막 조언을 하나 할까 하는데."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