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
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
부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하얀 모니터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며 깨어났다.
화면 중앙에는 마침표 하나 없는 빈 문서가, 마치 조롱하듯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키보드 위에 양손을 가볍게 올렸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 시작해보자.'
도진은 눈을 감고, 소설 속 첫 장면을 그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머릿속은 마치 거대한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어떤 이미지도,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타닥, 타다닥, 타닥.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는 이내 'Back Space' 키를 연타했다.
투투투투툭.
비? 너무 진부해. 창밖을 바라보며? 소설의 시작치고는 너무 나약해.
도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
투투투투툭.
견딜 수 없었다? 무엇을?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3년이다. 3년 동안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한 거지?'
도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대한민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 중 한 명이었다. 첫 소설부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세 번째 소설이 출간된 이후, 그의 글은 멈춰버렸다.
처음에는 그냥 잠시 쉬어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빈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고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이름이 박힌 소설들이 빛바랜 종이 위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가장 처음에 출간했던 소설을 집어 들었다.
표지는 빛바래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는 소설의 첫 장을 넘겼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은...]
그는 책을 거칠게 덮고 다시 책장에 꽂아 넣었다.
과거의 영광은 지금의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부담감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빌어먹을."
도진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모니터는 여전히 켜져 있었다. 빈 문서는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키보드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진짜다. 무조건 써야 해.'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닥치는 대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타다닥, 타다닥, 타닥, 타다닥.
[어둠 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짐승의 소리도, 인간의 소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는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손가락이 아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타다닥, 타다닥, 타닥.
어느새 화면의 절반이 글자들로 가득 찼다.
도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아. 나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쓴 글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짐승의 소리도, 인간의 소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는 이내 또다시 'Back Space' 키를 연타했다.
투투투투툭, 투투투투툭.
이게 무슨 글이야? 이딴 건 초등학생도 쓸 수 있겠어.
도진은 키보드를 거칠게 밀어버렸다.
모니터 화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절망감이 그의 온몸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야. 나는 사기꾼이야.'
도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자신을 믿어주는 편집장과, 자신의 소설을 기다리는 독자들을 생각했다.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고, 그의 영감은 메말라버렸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담배 한 갑과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그는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자, 작은 불꽃이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알싸한 니코틴이 그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는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연기가 모니터 화면 위로 퍼져나가며 빈 문서를 가렸다.
"하아…."침실 문이 닫히자마자, 서아는 문에 등을 기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입가에 걸려 있던 우아한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가슴이 벅차올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나의 영원하고도 완벽한 뮤즈, 서아에게.'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양장본 소설책을 내려다보았다.도진의 단정한 만년필 글씨가 조명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세상 모든 사람이 열광하는 천재 작가. 그 작가를 무릎 꿇게 만든 단 하나의 영감이자 뮤즈가 바로 자신이었다."이안… 네가 그 더러운 지하실에서 아무리 발악해 봤자, 결국 승자는 나야."서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화장대로 다가간 그녀는 목에 걸려 있던 수천만 원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풀어 보석함에 넣었다. 샴페인 골드 컬러의 실크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최고급 실크 슬립으로 갈아입었다.와인 셀러에서 아껴두었던 빈티지 레드 와인을 한 병 꺼내 잔에 따랐다.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 완벽한 밤, 남편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썼다는 위대한 걸작을 감상하는 것만큼 황홀한 마무리는 없을 것이다.서아는 와인잔과 책을 들고 푹신한 킹사이즈 침대 위로 올라갔다.은은한 수면등 하나만 남겨둔 채, 그녀는 쿠션에 등을 기대고 우아한 자태로 다리를 꼬았다."어디 한 번 볼까. 도대체 나를 어떻게 그려놨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는지."서아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고, 두꺼운 가죽 표지를 넘겼다.프롤로그.그리고 제1장.서아의 시선이 첫 문장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차희수는 완벽한 여자였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대형 갤러리의 관장이자, 문단의 제왕이라 불리는 남편을 둔 여자. 그녀의 걸음걸이에서는 언제나 은은한 재스민 향기
디자이너가 흥미롭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서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불륜? 도진 씨가 그런 삼류 소재를 썼다고?'뭔가 기분이 찜찜했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어차피 천재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픽션에 대중이 열광하는 것일 테니,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다 됐습니다, 사모님. 오늘 정말 최고로 아름다우세요."자리에서 일어난 서아는 카드를 내밀어 수백만 원어치의 결제를 시원하게 긁었다.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오늘 밤은 내가 주인공이야. 모두가 나를 부러워하겠지.'오후 7시.서아가 관장으로 있는 청담동 갤러리 도아.갤러리 1층은 전시된 미술품들 사이로 화려한 케이터링 뷔페가 차려져 있었고, 대한민국 정재계와 문화 예술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샴페인 잔을 들고 모여들었다.오늘의 표면적인 이유는 갤러리의 봄 기획전 오프닝이었지만, 사실상 강도진의 신작 출간을 축하하는 부부의 화려한 사교 파티나 다름없었다."어머, 서아 관장님! 오늘 너무 아름다워요.""강 작가님 책 대박 난 거 축하해요! 두 분 정말 부러워 죽겠어."서아는 밀려드는 축하 인사에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잔을 부딪쳤다."감사해요. 도진 씨가 워낙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저는 옆에서 챙겨준 것밖에 없는걸요."그녀는 완벽한 현모양처의 얼굴로 가식을 떨었다.딸깍, 쿵.그때 갤러리 입구의 육중한 유리문이 열리고, 도진이 들어섰다.그가 등장하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사람들은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비켜주며 박수를 쳤다."도진 씨!"서아가 한 마리의 우아한 백조처럼 미끄러지듯 다가가 도진의 팔짱을 꼈다.도진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서아
도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곧바로 인터넷 기사로 쏟아져 내렸고,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부터 5위까지는 온통 '강도진', '타인의 뮤즈', '차희수' 등의 키워드로 도배되었다.간담회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온 도진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었다.벌컥.출판사 대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강 작가! 대박이야, 대박! 지금 교보랑 예스24 서버 또 터졌어! 2쇄 10만 부 추가로 발주 넣었고, 당장 다음 주부터 전국 서점 매대 싹 다 도배될 거야!""수고하셨습니다, 대표님."도진이 가볍게 목례를 하자, 대표는 도진의 두 손을 덥석 부여잡으며 호들갑을 떨었다."내가 진짜 소설 원고 처음 받았을 때, 그 자리에서 바지에 지릴 뻔했다니까? 도대체 지난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옛날 그 건조하고 관념적이던 문체는 싹 사라지고, 그냥 칼로 생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날카롭고 끈적해졌어. 특히 그 화가 놈 작업실 묘사! 그 테레빈유 냄새랑 여자의 땀 냄새가 섞이는 묘사는, 진짜 눈앞에서 불륜 현장을 훔쳐보는 것 같아서 내 심장이 다 벌렁거리더라고!""과찬이십니다.""과찬은 무슨! 이 책은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 될 거야. 벌써 영화사 세 곳에서 판권 달라고 백지수표 내밀고, 해외 출판사에서도 번역 판권 문의가 쏟아지고 있어."출판사 대표가 침을 튀기며 떠드는 동안, 도진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화면에는 '사랑하는 아내'라는 발신자 이름이 떠 있었다.[도진 씨, 간담회 잘 마쳤어요? 기사 쏟아지는 거 보고 있어요. 내 남편이지만 너무 자랑스러워. 이따 저녁에 갤러리 파티에서 봐요. 사랑해♡]도진은 화면 속 서아의 애교 섞인 메시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하."도진의 입술 사이로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그날 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던 마포구 망원동 낡은 상가 건물 지하 작업실의 화염은 거짓말처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젊고 전도유망했던 천재 화가 이안.그가 스스로 불을 지르고 양팔과 손의 신경이 크게 손상된 채 영원히 붓을 놓게 되었다는 충격적인 뉴스는, 하루 이틀 대중의 가십거리가 되더니 이내 새로운 연예계 스캔들과 정치판의 비리 뉴스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다.타인의 비극은 대중에게 그저 씹다 버리는 껌보다 못한 유희거리에 불과했다.화재로 작업실에 남아 있던 나머지 누드화 원본과 작업용 저장 장치가 전소되자, 이사회가 확보한 CCTV 캡처본과 일부 문자만으로는 편집 여부와 전체 맥락을 확정하기 어려워졌다. 도진은 외부에 서아가 집착적인 화가에게 스토킹과 협박을 당한 피해자라는 입장을 조용히 흘렸다. 법무팀이 원본 파일과 메타데이터의 부재를 문제 삼으면서 해임안은 보류되었고, 서아는 여섯 주 뒤 대외활동 제한을 조건으로 관장직에 복귀했다.복귀한 뒤 남은 넉 달여 동안 서아는 후원자들을 다시 붙잡고 스캔들을 덮는 데 매달렸다. 상처 난 평판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강도진의 명성과 피해자 프레임은 그녀가 관장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방패가 되어주었다.그리고 화재로부터 정확히 6개월 후, 다음 해 봄.대한민국 문단과 출판계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폭발적인 이슈로 들끓고 있었다.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수백 명의 기자와 문학 평론가, 그리고 출판계 관계자들이 입추의 여지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플래시 세례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쉴 새 없이 터졌다.찰칵! 찰칵찰칵!그 눈부신 빛의 홍수 중심에, 강도진이 앉아 있었다.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지적인 인상을 주는 은테 안경.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핏의
그녀는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미친 듯한 안도감이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뻗어 나갔다.이안이 화상을 입어 평생 붓을 잡지 못한다는 끔찍한 비극은 더 이상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오직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 자신의 완벽한 인생에 묻을 뻔했던 오물이, 저 불길 속에서 말끔하게 타버려 정화되었다는 사실만이 그녀를 미친 듯한 환희에 젖게 만들었다."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서아는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 위로 엎드리며 낄낄거렸다."증거가 없어… 이제 아무도 날 협박 못 해. 도진 씨도 모를 거야. 나는 영원히 우아하고 고결한 백서아로 남을 수 있어."그녀는 환희에 찬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꺼져가는 TV 화면 속에서, 여전히 시커멓게 불타버린 작업실의 잔해가 비치고 있었다. 그 잔해 속에서 이안이 얼마나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을지, 얼마나 고통스럽게 자신의 손이 타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을지.그 끔찍한 이미지가 다시 한번 서아의 머릿속을 강타했다."……!"그 순간이었다.미친 듯이 웃고 있던 서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오한이 치밀어 올랐다.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명확하게 인지되었다.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남자.나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박살 나고, 양팔과 손에 돌이킬 수 없는 화상을 입은 남자.그 남자의 파멸을 보며, 나는 지금… '안도'하고 있었다고? 내 그림이 타버렸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고?'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서아의 눈동자가 극도의 공포와 혐오감으로 흔들렸다."
'…어?'서아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손에 쥐고 있던 유리컵이 미세하게 떨렸다.[불은 오늘 새벽 2시쯤 지하 작업실 내부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작업실 안에 대량으로 보관되어 있던 시너와 유화 물감 등 인화성 물질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순식간에 화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인명 피해는 어떻습니까?]앵커의 질문에, 기자의 표정이 어둡게 굳어졌다.[네, 안타깝게도 화재 당시 작업실 안에 있던 화가 31세 권 모 씨가 양팔과 손을 중심으로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기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현장의 참혹한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경찰과 소방 당국에 따르면, 권 씨는 탈출 과정에서 쏟아진 인화성 물질을 뒤집어쓰면서 양팔과 손에 심재성 3도 화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특히 손등과 손가락의 근육, 신경, 인대가 광범위하게 손상된 상태입니다.]"……!"서아의 입이 벌어졌다. 숨이 턱 막혔다.[담당 주치의의 소견에 따르면, 권 씨는 앞으로 미세한 손가락 움직임이 불가능하며, 사실상 화가로서 영원히 붓을 놓게 된 것으로 전해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권 씨는 최근 미술계에서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목받던 신진 작가였습니다.]쨍그랑-!서아의 손에서 미끄러진 유리컵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차가운 물과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그녀의 맨발 위로 튀었지만, 서아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양팔과 손에 심재성 3도 화상.''손의 정밀 기능 회복 불가.''영원히 붓을 놓게 된 것으로….'기자의 건조한 목소리가 서아의 고막을 잔인하게 난도질했다."이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
제1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1)오전 6시 50분.정확히 조율된 스위스제 벽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거실의 공기를 갈랐다.서아는 눈을 떴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미세한 아침 햇살이 정돈된 침대 위에 일정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시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도진은 언제나 자신보다 20분 먼저 일어났고, 그가 머물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눕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크 가운의 끈을 단정하게 묶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흐트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