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따라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
합의금이 통장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숨을 제대로 쉬는 기분이었다. 당장 이번 달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고, 과외를 잃은 빈자리를 메울 시간도 충분히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단순한 존재인가 싶기도 했다. 돈 걱정이 사라지자, 그제야 캠퍼스가 눈에 들어왔다. 봄이 오고 있었다. 교정 곳곳에 연두색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고, 바람은 차갑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뒤, 민호에게 말했다.
"나 이번 MT 참석할께."
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민호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진짜? 아르바이트는 어쩌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짤렸어. 내가 원해서 그런 건 아니고··· 뭐, 결과적으론 잘 된 거지."
민호는 진심 어린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애들 너 온다고 하면 진짜 좋아할 거야."
그의 눈빛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한 환영이 담겨 있었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나도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민호는 흐뭇한 듯 웃으며 덧붙였다.
"너,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많은 거 알지? 너랑 한잔하고 싶다는 애들, 진짜 많아."
사실 민호 말처럼, 학교에 들어온 후 몇몇 여학생들이 밥을 같이 먹자고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웃으며 거절했다. 밥 한 끼 먹을 여유도,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처음으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밥 살게. 어제는 네가 샀잖아."
민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우리는 나란히 교정을 벗어났다. 캠퍼스 곳곳엔 저녁 햇살이 그림자처럼 내려앉았고,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웃음꽃을 피웠다. 가볍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 그 속엔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여유와 따뜻함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오빠!"
민호와 나는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난 건 그녀였다.
트렌치코트 대신 가벼운 봄 재킷을 걸친 그녀는, 햇살 속에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병실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미안함으로 가득했던 그 눈빛 대신, 지금은 환하고 가벼운 웃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박혔다.
"수아야!"
민호가 먼저 반가움 가득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얼굴엔 잃어버렸던 조각을 찾은 듯한 기쁨이 번졌고, 그녀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잘 지냈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따뜻했다. 오랜 친구처럼 자연스럽고, 서로의 시간을 꿰뚫고 있는 듯한 친밀함이 묻어났다.
나는 그 자리에 굳은 채 그들을 바라봤다.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간질거렸고, 심장은 이유 없이 빠르게 뛰었다. 낯선 감각이었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때, 민호가 나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혁수야, 여긴 어릴 때부터 친했던 동생, 수아."
나는 어정쩡한 미소만 지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수아는 부드럽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뵙게 돼서 반가워요."
말투엔 어색함이 없었고, 오히려 다정했다. 그 따뜻한 인사에 내 안의 경계가 조금 무너졌다.
민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수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내가 학교 앞에서 차 사고를 내서··· 이 분이 병원에 입원하셨거든요."
민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병원에 입원했던 게 교통사고 때문이었어?"
나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나무랐다.
"너 면허 딴 지 얼마 안 됐잖아! 조심 좀 하지!"
수아는 볼을 살짝 부풀리며 입을 삐죽였다.
"잔소리는 그만.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장난스러운 표정엔 묘한 힘이 있었다. 아까까지 내가 병실에서 봤던 그 조심스럽고 미안해하던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이게 그녀의 진짜 모습인 것 같았다.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길이야?"
수아가 묻자, 민호가 말했다.
"저녁 먹으러. 같이 갈래?"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좋아!"
민호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혁수도 괜찮지?"
나는 수아의 얼굴을 스치듯 바라보았다. 내 안에서 뭔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자."
가볍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셋이서 나란히 걸었다.
거리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노란 가로등 아래 수아는 경쾌하게 팔을 흔들며 걸었다. 민호는 그녀와 나눈 예전 이야기들을 풀어놓았고, 수아는 그 모든 기억에 눈을 반짝이며 반응했다. 어릴 때 민호네 집에 몰래 들어가 냉장고를 털었다는 이야기, 학원 버스에서 함께 숙제를 베꼈다는 이야기. 소소하고 따뜻한 기억들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나는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씩, 정말 아주 조금씩, 이 낯선 인연이 내 안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느꼈다. 가볍고도 묘한 설렘이, 가슴 깊은 어딘가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차갑고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수술실은 예상보다 컸다. 중앙에 놓인 수술대 위에 회장님이 누워 계셨다. 의료진들이 그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계음과 지시 소리들이 공간을 채웠다. 나는 회장님을 바라봤다. 처음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저렇게 누워 계신 모습이 낯설었다. 언제나 단단하고 권위로 가득했던 그 사람이 지금 생명을 의료진에게 온전히 맡긴 채 누워 계셨다. 산소 호흡기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여러 줄의 관이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두려움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회장님 옆에 놓인 보조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가 내 팔에 굵은 바늘을 꽂으며 말했다. "통증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참아주세요." "괜찮습니다." 큰 바늘이 들어오는 순간 뻐근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붉은 피가 관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관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눈으로 따라갔다. 회장님의 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 피가 지금 저 사람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피.'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관을 타고 흘러나가는 피의 감각이 팔 안쪽에서 느껴졌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내 온기가 저 사람에게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실감됐다. 한참이 지나서야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충분히 채혈됐습니다." 의료진 중 한 명이 말했다. "활력징후 안정되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수술실 안의 긴장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회장님을 바라봤다. 창백했던 얼굴에 아주 미세하게 혈색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 내 피가 그를 살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내 팔에서 바늘을 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고
그곳은 이미 붉은 경광등과 사이렌 소리로 뒤덮여 있었다.어둠을 뚫고 번쩍이는 불빛이 사람들의 불안한 얼굴을 차례로 스쳐 갔다. 나는 깨진 차창 사이로 흘러드는 빗물을 맞으며 회장님을 바라봤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빗물과 뒤섞여 시트 위로 번지고 있었다.구급대원이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괜찮으십니까? 움직일 수 있으세요?"나는 그 손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둔하게 쑤셨지만 그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회장님부터요."구급대원들이 회장님을 들것에 옮기는 동안 수아가 조수석에서 빠져나왔다. 이마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그녀가 달려가려는 순간 구급대원이 막아섰다."응급환자분 치료가 우선입니다. 비켜주세요.""아빠······ 제발······."수아의 목소리가 빗속으로 번지며 사라졌다."환자 의식 없음! 맥박 약합니다!"구급대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강인하고 흔들림 없던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들것 위에 누운 회장님은 산소 마스크를 낀 채 미동도 없었다.나는 수아의 팔을 잡았다."같이 가자."앰뷸런스 문이 닫히고 사이렌이 다시 울려 퍼졌다. 차 안은 긴박한 지시와 기계음으로 가득했고, 구급대원들의 손길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수아는 내 옆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회장님을 바라봤다. 그 손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수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잡은 손에 힘이 들어왔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던 의료진이 들것을 끌어내렸다."수술실로 바로 이송하세요!"들것이 복도를 따라 빠르게 밀려 들어갔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발걸음이 메아리처럼 이어졌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활짝 열리고 회장님의 몸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붉은색으로 빛나는 수술 중이라는 불빛이 켜졌다.문이 닫히는 순간 수아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녀를 복도 의자에 앉히고 옆에 앉
뜻밖의 질문에 손이 멈췄다. 조심스레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없었습니다, 회장님.""나는 사람을 배경으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네. 그래서 지금껏 자네 가족 이야기를 묻지 않았지. 그런데 오늘 문득 궁금해졌어."그 시선 속에서 가벼운 호기심이 아닌 진심 어린 무게가 느껴졌다. 가슴 깊이 숨겨둔 기억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유흥업소에서 일하시며 저를 키우셨고,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습니다."순간 수아의 젓가락이 멈추며 놀란 시선이 나를 스쳤다. 그 눈길이 가슴에 닿았지만 나는 담담히 이어갔다."사실 아버지는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술에 취하시면 가끔 그러셨습니다. 아버지를 찾으려 하지 말아라. 그러면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서 애초에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회장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소주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며 말씀하셨다.
잠시 후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수아는 무대 옆에서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조명이 자신을 향해 터져 오르는 순간 그녀는 무대로 걸어나갔다."안녕하세요. 태양그룹 부회장 김수아입니다."첫 마디가 공간을 가르며 퍼져나갔다.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꽂혔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고, 앞줄에 앉은 기자들의 펜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오늘 저는 기술을 이야기하러 이 자리에 선 게 아닙니다."예상과 다른 첫 문장에 객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사람을 이야기하러 왔습니다."수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침묵이 공간을 더 단단하게 조였다."지난 3년간 저는 한 가지 질문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기술이 진짜로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는가. 위급한 순간에 가족을 대신해줄 수 있는가."&n
수아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나 오래전부터 회사 물려받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어.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근데 결혼까지 아버지 뜻대로 하라니까, 솔직히 너무 힘들어."체념이 깊게 스며 있었다."내가 뭘 골라본 적이 있나 싶어. 학교도, 전공도, 회사도. 다 정해진 데로 갔어."나는 잔을 내려놓았다."태양그룹 회장으로 산다는 건 다 가질 수 없다는 뜻이잖아. 너도 알잖아.""알아. 아는데."수아가 잠깐 눈길을 피했다가 다시 나를 봤다."오빠. 예전처럼 나한테 가끔씩 사랑을 줄 수 없어? 나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어."그 말이 방 안에 조용히 번졌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시선을 거뒀다.
리허설은 예정보다 길어졌다.수아는 같은 문단에서 세 번 걸렸다. 원고를 외우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원고 때문에 걸리는 걸 나는 본 적이 없었다.네 번째에 겨우 넘어가고 조명이 꺼졌다. 수아가 무대에서 내려왔다."괜찮아?""나 많이 긴장하나 봐."그때 통로 쪽에서 누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삼진그룹 둘째 아들 이준혁. 단정한 수트 차림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수아야."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잠깐 멈췄다가 미소로 번졌다."준혁아. 너도 왔어?""응. 아버지가 경험 좀 쌓아보라고 보내셨어."그가 수아 옆에 서서 전시장을 한 번 둘러봤다. 그러다 다시 수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나 소식 들었어.""뭘.""민호 형이랑 약혼한다며."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수아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 발표하지 않은 일이었다. 양가에서만 오간 이야기였는데 태평양 건너에서 듣고 있었다.수아는 담담하게 웃었다."그렇게 됐어.""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마음대로 결혼 상대를 고르겠어.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하고 살아야지."농담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이 농담만은 아니었다. 이 사람도 어딘가에서 같은 통보를 받았을 것이었다."그래도 민호 형이면 괜찮은 선택이지.""어···""일 잘 마무리하고, 시간 되면 한국에서 보자."그는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며 사라졌다.수아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봤다.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말이 얼굴 위에 오래 남았다.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마음대로 결혼을 고르겠어. 그 한마디가 위로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나는 그 옆모습을 봤다.수아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얹든 이 사람 편을 드는 말이 될 것 같았다.---호텔로 향하는 길, 차 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