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아직 머리는 멍했고, 발걸음은 낯설 만큼 무거웠다. 마치 내가 아닌 누군가의 몸을 빌려 걷는 기분이었다. 병실 문을 나서는 순간, 형광등 불빛이 눈에 날카롭게 꽂혔다. 눈을 가늘게 뜨며 적응하는 데만도 몇 초가 걸렸다. 몸이 이 정도라면, 내가 얼마나 오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걸까.
원무과 창구에 다다르자, 투명한 유리 너머로 환한 얼굴의 직원이 나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뜻밖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따스했다. 이곳의 공기보다도, 약 봉투보다도 더 포근하게 다가왔다.
"저... 병원비 좀 확인하고 싶은데요."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물었다. 몇 번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녀가 화면을 확인한 뒤 고개를 들었다.
"김혁수 씨 맞으시죠?"
미소가 담긴 눈빛이 나를 스쳤다.
"병원비는 보험 처리가 되서, 내실 비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 말이 가슴 한가운데 가라앉은 불안을 스르르 풀어냈다. 어깨가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지금은 편히 쉬시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녀의 다정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고개를 숙이고 창구를 떠났다. 이상하게도, 아까보다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병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액정은 금이 가 있었고, 그 위로 부재중 전화 수십 통이 떠 있었다. 과외 아르바이트 사모님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나는 천천히 메시지를 열었다.
"연락이 안 되네요. 지금까지 수업한 만큼 계좌로 보내드릴게요. 다음 수업부터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문장이 짧고 담백할수록, 그 속에 담긴 온도는 더욱 차가웠다. 잘렸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혁수 씨 맞으시죠? 보험사입니다. 몸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내일 직접 찾아뵙고, 필요한 서류랑 절차 설명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나는 조심스레 침대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눈꺼풀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고요한 시간. 쌓여 있던 피로가 눈 녹듯 서서히 사라졌다. 사고는 분명 불행이었다. 하지만 이 고요한 휴식만큼은···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뜻밖의 선물인지도 몰랐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 속으로 다시 천천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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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병실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한 여자가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깔끔한 트렌치코트, 그리고 어딘가 조심스러운 걸음. 그녀는 병상마다 붙은 이름표를 차례로 살펴보다가 내 쪽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 순간, 나는 알아챘다.
사고 직전 나를 향해 달려오던 그 여학생이었다. 놀랍도록 맑은 눈빛, 그리고 그 안에 가득 담긴 미안함. 어제는 흐릿하게만 남아 있던 얼굴이, 지금은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사고를 낸 당사자 입니다..."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어제 어둠 속에서 붙잡고 있던 바로 그 목소리라는 걸,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의 눈에는 미안함이 겹쳐 있었다.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감정.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시선을 먼저 떼기가 어려웠다.
내 반응이 너무 굼떠서였을까, 그녀가 살피듯 조심스레 물었다.
"아직···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나는 헛기침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뭐, 휴대폰 액정은 깨지고··· 알바는 잘렸지만요."
반쯤 농담이었지만, 스스로도 놀랄 만큼 투정처럼 나왔다. 그녀는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그런 일이···"
작게 떨리는 목소리.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이 오히려 내가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쪽은 이상하게 묵직해졌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도 나는 그녀의 손끝이, 바구니 손잡이를 꼭 쥐었다 풀었다 하는 걸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그녀였다.
"혹시··· 한국대 다니세요?"
"네. 법학과 학생입니다."
그녀는 작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조금 전까지의 미안함과는 다른, 순간적으로 밝아지는 표정.
"사실 저도 같은 학교 다녀요. 마케팅 전공이에요."
짧은 공감이 오간 그 순간, 묘하게 병실의 긴장감이 풀렸다. 말간 미소 하나에 어색했던 공기가 부드러워졌다. 같은 학교라는 사실 하나가, 낯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금 좁혀줬다.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조금 빨리 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바구니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후쯤 보험사에서 연락 올 거예요. 혹시 아프시거나 손해 보신 건 꼭 말씀하세요."
말투는 최대한 담담하려는 듯했지만, 눈빛은 계속 내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나는 괜히 딴 곳을 보는 척했다.
그녀는 시계를 힐끔 보더니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한데… 오전 수업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요. 퇴원하시면··· 학교에서 꼭 뵈요."
마지막까지 고개를 조심스레 숙이며 병실을 나섰다.
병실 문이 조용히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남긴 향기와 말들이 여운처럼 병실 안에 오래 맴돌았다.
어쩐지, 그녀가 떠난 자리에 바람이 지난 것처럼 허전함이 스며들었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는 잘 몰랐다. 그냥, 이상하게 그 자리가 비어 보였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방금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한참이나 눈으로 되짚었다.
'학교에서 꼭 뵈요.'
그 말 한마디가, 어쩐지 약속처럼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사고를 당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머릿속은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트렌치코트 자락이 스치던 소리, 바구니를 조심스레 내려놓던 손짓, 웃을 때 살짝 올라가던 눈꼬리. 별것 아닌 장면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 눈앞에 어른거렸다.
'바보같이 왜 자꾸 생각나는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봄볕을 바라보며 조금 전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다시 눈으로 좇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딱 한 번, 십 분 남짓 마주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어딘가가 낯설게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다음 날 오후.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는데, 복도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수아였다.손에는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오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그녀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나는 순간 멈칫했다."어떻게 여기를···""민호 오빠한테 강의 시간표 물어봤어. 미리 알려줬으면 됐는데, 오빠가 거절할까 봐"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거절할까 봐 미리 알아왔다는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걸렸다.그녀는 쇼핑백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이거."안을 들여다보니 반짝이는 최신형 휴대폰이 박스째 들어 있었다. 귀여운 미키마우스 케이스까지 함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스테이크 전문 레스토랑이었다.문을 여는 순간, 따뜻한 나무 결이 살아 있는 인테리어에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져 마치 포근한 담요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장 식당의 형광등, 편의점 도시락, 고깃집 플라스틱 의자. 내가 익숙한 공간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기죽지는 않았다. 여기 있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자리에 앉자마자 검정 앞치마를 맨 웨이터가 다가왔다."주문하시겠습니까?"민호가 능숙하게 말을 건넸다."오늘 추천 메뉴는 뭐예요?""블랙라벨 스테이크와 블루밍 어니언이 가장 인기 많습니다."민호가 우리를 보며 물었다."뭐 먹을래?""나는 이런 곳 처음이라··· 알아서 시켜줘."
오늘따라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합의금이 통장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숨을 제대로 쉬는 기분이었다. 당장 이번 달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고, 과외를 잃은 빈자리를 메울 시간도 충분히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단순한 존재인가 싶기도 했다. 돈 걱정이 사라지자, 그제야 캠퍼스가 눈에 들어왔다. 봄이 오고 있었다. 교정 곳곳에 연두색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고, 바람은 차갑지 않았다.수업이 끝난 뒤, 민호에게 말했다."나 이번 MT 참석할께."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민호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물었다."진짜? 아르바이트는 어쩌고?"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짤렸어. 내가 원해서 그런 건 아니고··· 뭐, 결과적으론 잘 된 거지."민호는 진심 어린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가 되자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낯선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단정한 넥타이, 광이 나는 구두, 무릎 위에 딱 맞게 접힌 두툼한 서류철. 마치 로펌에서 갓 나온 변호사처럼 말끔한 인상이었다."김혁수 님 되시죠?"나는 침대 머리를 살짝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네, 맞습니다."그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태양 손해보험 이승안 과장입니다."악수를 나누는 순간, 손끝에서 전해지는 촉감이 매끄러웠다. 오랫동안 사무실에서 서류만 만져온 사람의 손이었다. 그는 명함 케이스를 닫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몸은 괜찮으신지요?""네, 괜찮습니다. 사고 덕분에 오랜만에 푹 쉬었어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나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아직 머리는 멍했고, 발걸음은 낯설 만큼 무거웠다. 마치 내가 아닌 누군가의 몸을 빌려 걷는 기분이었다. 병실 문을 나서는 순간, 형광등 불빛이 눈에 날카롭게 꽂혔다. 눈을 가늘게 뜨며 적응하는 데만도 몇 초가 걸렸다. 몸이 이 정도라면, 내가 얼마나 오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걸까.원무과 창구에 다다르자, 투명한 유리 너머로 환한 얼굴의 직원이 나를 바라보았다."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뜻밖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따스했다. 이곳의 공기보다도, 약 봉투보다도 더 포근하게 다가왔다."저... 병원비 좀 확인하고 싶은데요."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물었다. 몇 번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녀가 화면을 확인한 뒤 고개를 들었다."김혁수 씨 맞으시죠?"미소가 담긴 눈빛이 나를 스쳤다."
교문 밖을 나서자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머릿속은 다른 열기로 가득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욱신거렸다."편하게 학교 다니는 너희가 뭘 알아···"속으로 중얼이며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신호등이 빨간불이었다. 분노는 이미 선을 넘고 있었지만, 발은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언제부터였을까. 빨간불이 초록으로 바뀐 줄도 모르고, 나는 생각에 잠긴 채 멍하니 서 있었다.파란불이 깜빡이는 걸 본 건,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내밀며 뛰어들려는 찰나,"퍽!"무언가가 내 몸을 강하게 밀쳐냈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 세상이 한 프레임씩 끊어지듯 천천히 움직였다.하늘, 간판, 건물, 도로, 그리고 아스팔트.몸이 몇 바퀴를 굴렀다. 등과 머리가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숨이 튀어나왔다. 차가운 아스팔트가 온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