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우리가 도착한 곳은 스테이크 전문 레스토랑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따뜻한 나무 결이 살아 있는 인테리어에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져 마치 포근한 담요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장 식당의 형광등, 편의점 도시락, 고깃집 플라스틱 의자. 내가 익숙한 공간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기죽지는 않았다. 여기 있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검정 앞치마를 맨 웨이터가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민호가 능숙하게 말을 건넸다.
"오늘 추천 메뉴는 뭐예요?"
"블랙라벨 스테이크와 블루밍 어니언이 가장 인기 많습니다."
민호가 우리를 보며 물었다.
"뭐 먹을래?"
"나는 이런 곳 처음이라··· 알아서 시켜줘."
그는 메뉴판을 넘기며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이 선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스테이크 세 개랑 샐러드 하나 주세요. 음료는 콜라 세 잔으로 부탁드릴게요."
주문이 끝나고 웨이터가 조용히 자리를 뜨자, 테이블에 다시 말랑한 공기가 퍼졌다. 조용한 틈 사이, 수아가 내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나 뭐라고 불러야 해?"
눈동자가 흔들렸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안엔 묘한 망설임이 스며 있었다.
"학번은 같고, 민호 오빠랑은 동갑인데··· 선배라고 부르기도 좀 웃기고···"
말끝을 흐리는 수아를 보며 민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땐 그냥 오빠라고 하면 돼. 편하게 불러."
나는 컵에 남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슬쩍 웃었다.
"그래. 다들 처음엔 오빠라고 부르더라. 그 다음엔···"
말을 흐리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나중엔 뭐요?"
"글쎄···"
수아는 한 박자 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작게 중얼거렸다.
"···오빠."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테이블 위 공기가 살짝 바뀌었다. 장난이 아닌, 진심이 담긴 호칭이었다. 그녀도 스스로 그걸 느낀 듯, 말한 뒤 볼이 붉게 물들었다.
"좀 어색하네."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더 가까워진 느낌인데?"
"진짜?"
수아는 웃음 띤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민호가 장단을 맞췄다.
"혁수 오늘 은근히 말 잘하네."
"어디서 배운 거 같은데?"
수아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 웃음엔 이제 조금 더 편안해진 마음이, 그리고 아주 살짝 설렘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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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스테이크가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내려놓아졌고, 고소한 고기 향이 테이블 위에 잔잔히 퍼져나갔다.
나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진한 갈색으로 노릇하게 구워진 겉면, 가장자리는 살짝 바삭해 보였고, 접시 가장자리엔 은은한 소스 자국이 윤기를 더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포크를 들고 칼을 댔다. 예상보다 부드럽게 잘렸다. 단면은 은은한 핑크빛. 따뜻하고 촉촉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나··· 스테이크 처음 먹어봐."
내 말에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이내 웃음이 터졌다.
"진짜?"
민호도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럼 천천히 먹어야지. 맛을 음미하면서."
포크로 고기 한 점을 찍어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멈췄다.
고기의 온기가 입 안을 천천히 채워나갔다. 육즙이 퍼지는 감각과 함께 고소한 풍미가 혀끝을 감싸며 잔잔하게 밀려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아니, 솔직히 말해 믿기 어려울 만큼 맛있었다.
나는 조용히 한참을 씹다 말했다.
"···입 안이, 풍성하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수아가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 표현력, 예상 밖인데?"
우리 셋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웃고 있는 수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쳤고, 나는 쓰러졌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그 사고가 전부 나쁜 일이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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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민호가 툭 던지듯 물었다.
"수아, 어때?"
나는 한 박자 쉬었다가 대답했다.
"···밝아서 좋아."
민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근데 있잖아, 혁수야."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금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수아 평범한 애 아냐. 집안이 그렇기도 하고. 가볍게 보지 마."
"그게 무슨 말이야?"
민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기숙사로 걸어 들어갔다.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되짚었다. 수아의 웃음, 민호의 말, 그리고 처음 먹어본 스테이크의 온기.
평범하지 않는 애.
민호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태양그룹의 딸. 병실에서 고개를 숙이던 그 모습. 그리고 골목에서 팔을 흔들며 걷던 그 뒷모습.
어떤 게 진짜 그녀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걸 알고 싶어졌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차갑고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수술실은 예상보다 컸다. 중앙에 놓인 수술대 위에 회장님이 누워 계셨다. 의료진들이 그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계음과 지시 소리들이 공간을 채웠다. 나는 회장님을 바라봤다. 처음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저렇게 누워 계신 모습이 낯설었다. 언제나 단단하고 권위로 가득했던 그 사람이 지금 생명을 의료진에게 온전히 맡긴 채 누워 계셨다. 산소 호흡기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여러 줄의 관이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두려움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회장님 옆에 놓인 보조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가 내 팔에 굵은 바늘을 꽂으며 말했다. "통증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참아주세요." "괜찮습니다." 큰 바늘이 들어오는 순간 뻐근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붉은 피가 관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관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눈으로 따라갔다. 회장님의 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 피가 지금 저 사람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피.'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관을 타고 흘러나가는 피의 감각이 팔 안쪽에서 느껴졌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내 온기가 저 사람에게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실감됐다. 한참이 지나서야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충분히 채혈됐습니다." 의료진 중 한 명이 말했다. "활력징후 안정되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수술실 안의 긴장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회장님을 바라봤다. 창백했던 얼굴에 아주 미세하게 혈색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 내 피가 그를 살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내 팔에서 바늘을 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고
그곳은 이미 붉은 경광등과 사이렌 소리로 뒤덮여 있었다.어둠을 뚫고 번쩍이는 불빛이 사람들의 불안한 얼굴을 차례로 스쳐 갔다. 나는 깨진 차창 사이로 흘러드는 빗물을 맞으며 회장님을 바라봤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빗물과 뒤섞여 시트 위로 번지고 있었다.구급대원이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괜찮으십니까? 움직일 수 있으세요?"나는 그 손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둔하게 쑤셨지만 그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회장님부터요."구급대원들이 회장님을 들것에 옮기는 동안 수아가 조수석에서 빠져나왔다. 이마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그녀가 달려가려는 순간 구급대원이 막아섰다."응급환자분 치료가 우선입니다. 비켜주세요.""아빠······ 제발······."수아의 목소리가 빗속으로 번지며 사라졌다."환자 의식 없음! 맥박 약합니다!"구급대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강인하고 흔들림 없던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들것 위에 누운 회장님은 산소 마스크를 낀 채 미동도 없었다.나는 수아의 팔을 잡았다."같이 가자."앰뷸런스 문이 닫히고 사이렌이 다시 울려 퍼졌다. 차 안은 긴박한 지시와 기계음으로 가득했고, 구급대원들의 손길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수아는 내 옆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회장님을 바라봤다. 그 손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수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잡은 손에 힘이 들어왔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던 의료진이 들것을 끌어내렸다."수술실로 바로 이송하세요!"들것이 복도를 따라 빠르게 밀려 들어갔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발걸음이 메아리처럼 이어졌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활짝 열리고 회장님의 몸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붉은색으로 빛나는 수술 중이라는 불빛이 켜졌다.문이 닫히는 순간 수아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녀를 복도 의자에 앉히고 옆에 앉
뜻밖의 질문에 손이 멈췄다. 조심스레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없었습니다, 회장님.""나는 사람을 배경으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네. 그래서 지금껏 자네 가족 이야기를 묻지 않았지. 그런데 오늘 문득 궁금해졌어."그 시선 속에서 가벼운 호기심이 아닌 진심 어린 무게가 느껴졌다. 가슴 깊이 숨겨둔 기억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유흥업소에서 일하시며 저를 키우셨고,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습니다."순간 수아의 젓가락이 멈추며 놀란 시선이 나를 스쳤다. 그 눈길이 가슴에 닿았지만 나는 담담히 이어갔다."사실 아버지는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술에 취하시면 가끔 그러셨습니다. 아버지를 찾으려 하지 말아라. 그러면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서 애초에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회장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소주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며 말씀하셨다.
잠시 후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수아는 무대 옆에서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조명이 자신을 향해 터져 오르는 순간 그녀는 무대로 걸어나갔다."안녕하세요. 태양그룹 부회장 김수아입니다."첫 마디가 공간을 가르며 퍼져나갔다.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꽂혔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고, 앞줄에 앉은 기자들의 펜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오늘 저는 기술을 이야기하러 이 자리에 선 게 아닙니다."예상과 다른 첫 문장에 객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사람을 이야기하러 왔습니다."수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침묵이 공간을 더 단단하게 조였다."지난 3년간 저는 한 가지 질문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기술이 진짜로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는가. 위급한 순간에 가족을 대신해줄 수 있는가."&n
수아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나 오래전부터 회사 물려받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어.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근데 결혼까지 아버지 뜻대로 하라니까, 솔직히 너무 힘들어."체념이 깊게 스며 있었다."내가 뭘 골라본 적이 있나 싶어. 학교도, 전공도, 회사도. 다 정해진 데로 갔어."나는 잔을 내려놓았다."태양그룹 회장으로 산다는 건 다 가질 수 없다는 뜻이잖아. 너도 알잖아.""알아. 아는데."수아가 잠깐 눈길을 피했다가 다시 나를 봤다."오빠. 예전처럼 나한테 가끔씩 사랑을 줄 수 없어? 나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어."그 말이 방 안에 조용히 번졌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시선을 거뒀다.
리허설은 예정보다 길어졌다.수아는 같은 문단에서 세 번 걸렸다. 원고를 외우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원고 때문에 걸리는 걸 나는 본 적이 없었다.네 번째에 겨우 넘어가고 조명이 꺼졌다. 수아가 무대에서 내려왔다."괜찮아?""나 많이 긴장하나 봐."그때 통로 쪽에서 누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삼진그룹 둘째 아들 이준혁. 단정한 수트 차림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수아야."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잠깐 멈췄다가 미소로 번졌다."준혁아. 너도 왔어?""응. 아버지가 경험 좀 쌓아보라고 보내셨어."그가 수아 옆에 서서 전시장을 한 번 둘러봤다. 그러다 다시 수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나 소식 들었어.""뭘.""민호 형이랑 약혼한다며."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수아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 발표하지 않은 일이었다. 양가에서만 오간 이야기였는데 태평양 건너에서 듣고 있었다.수아는 담담하게 웃었다."그렇게 됐어.""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마음대로 결혼 상대를 고르겠어.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하고 살아야지."농담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이 농담만은 아니었다. 이 사람도 어딘가에서 같은 통보를 받았을 것이었다."그래도 민호 형이면 괜찮은 선택이지.""어···""일 잘 마무리하고, 시간 되면 한국에서 보자."그는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며 사라졌다.수아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봤다.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말이 얼굴 위에 오래 남았다.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마음대로 결혼을 고르겠어. 그 한마디가 위로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나는 그 옆모습을 봤다.수아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얹든 이 사람 편을 드는 말이 될 것 같았다.---호텔로 향하는 길, 차 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