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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Autor: 선넘음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8-30 18:20:45

오후가 되자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낯선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단정한 넥타이, 광이 나는 구두, 무릎 위에 딱 맞게 접힌 두툼한 서류철. 마치 로펌에서 갓 나온 변호사처럼 말끔한 인상이었다.

"김혁수 님 되시죠?"

나는 침대 머리를 살짝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네, 맞습니다."

그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태양 손해보험 이승안 과장입니다."

악수를 나누는 순간, 손끝에서 전해지는 촉감이 매끄러웠다. 오랫동안 사무실에서 서류만 만져온 사람의 손이었다. 그는 명함 케이스를 닫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네, 괜찮습니다. 사고 덕분에 오랜만에 푹 쉬었어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돌려 보였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사실··· 저희도 이번 일에 꽤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왜요?"

그는 서류철을 조심스레 펴며 말끝을 잠깐 망설였다.

"이번 사고를 낸 가해자 분이··· 조금, 특별한 분이시거든요."

눈치를 살피듯 내 반응을 살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하다는 게··· 어떤 의미죠?"

그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저희그룹 회장님 딸입니다."

"···태양그룹요!?"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태양그룹. 국내 재계 서열 5위 안에 드는 대기업. 건설, 금융, 유통, 미디어까지 손을 뻗은 그 그룹의 딸이, 나를 친 것이었다.

아침에 병실을 다녀간 그 여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정한 트렌치코트, 말간 눈빛, 조심스러운 걸음. 재벌가 딸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그 평범함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고 직후 바로 그룹 측에서 최고 수준의 대처를 지시했고, 저희에게도 특별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절대 피해자분이 불쾌한 일이 없도록 하라고요."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1인 병실, 부족함 없이 제공되던 각종 치료. 이상하리만치 매끄러웠던 일 처리에 대한 의문이 한꺼번에 해소되었다.

"그럼··· 합의가 빨리 진행되는 건가요?"

"네. 물론 선택은 혁수 님께 있습니다."

그는 서류를 앞으로 밀며 정중하게 덧붙였다.

"저희가 제안드리는 합의금은··· 3,000만 원입니다."

"···삼천이요?"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숫자를 세 번쯤 다시 머릿속에서 굴려봤다. 삼천만 원. 과외 알바를 몇 년을 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게 지금 이 서류 한 장 위에 적혀 있었다.

"혹시 부족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히 말씀하십시요."

"아닙니다. 바로 합의하겠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안도한 듯 고개를 숙이며 서류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펜을 들어 서명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단지 사고의 피해자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마치 세상 밖에 있던 권력의 그늘을 스쳐 지나간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사고 하나에 3,000만 원을 서류 한 장으로 처리하는 세계가.

---

다음 날, 나는 퇴원을 했다.

문을 나서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어쩐지 조금 더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무심코 꺼내든 화면엔 한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입금 30,000,000원 – 태양손해보험 / 합의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세 번, 네 번쯤 다시 확인했다.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정말, 들어왔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천천히 발을 들였다. 창밖 풍경은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스쳐 갔지만, 나는 조금 달라진 사람이 되어 그 길을 지나고 있었다.

---

기숙사 앞에 도착했을 땐 해가 기울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민호가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너 방에도 안들어오고 어디 갔었어?"

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힘없이 웃었다.

"좀··· 병원에 있었어."

"뭐? 병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쳤어?"

"지금은 괜찮아."

나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에서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잠시 눈을 피한 뒤, 내가 먼저 물었다.

"근데··· 저녁은 먹었어?"

민호는 배를 슬쩍 문지르며 말했다.

"아직."

"그럼 나가자. 오늘은 내가 살게."

그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뭐야. 병원 갔다 오더니 돈이라도 생겼냐? 갑자기 밥을 다 산다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너한테 하도 많이 얻어먹은 게 생각나서."

"좋아. 삼겹살에 소주한잔 하자."

우리는 그렇게 기숙사 골목길 끝 고깃집으로 향했다. 지글지글 익는 고기, 부딪히는 소주잔. 그리고 오랜만에 느껴지는 따뜻한 말들. 나는 민호의 장난기 섞인 농담에 웃었고, 그 웃음 속에서 조금씩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날 밤, 말하지 못한 삼천만 원은 주머니 속 계좌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엔, 트렌치코트를 입고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던 그녀의 얼굴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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