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후가 되자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낯선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단정한 넥타이, 광이 나는 구두, 무릎 위에 딱 맞게 접힌 두툼한 서류철. 마치 로펌에서 갓 나온 변호사처럼 말끔한 인상이었다.
"김혁수 님 되시죠?"
나는 침대 머리를 살짝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네, 맞습니다."
그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태양 손해보험 이승안 과장입니다."
악수를 나누는 순간, 손끝에서 전해지는 촉감이 매끄러웠다. 오랫동안 사무실에서 서류만 만져온 사람의 손이었다. 그는 명함 케이스를 닫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네, 괜찮습니다. 사고 덕분에 오랜만에 푹 쉬었어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돌려 보였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사실··· 저희도 이번 일에 꽤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왜요?"
그는 서류철을 조심스레 펴며 말끝을 잠깐 망설였다.
"이번 사고를 낸 가해자 분이··· 조금, 특별한 분이시거든요."
눈치를 살피듯 내 반응을 살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하다는 게··· 어떤 의미죠?"
그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저희그룹 회장님 딸입니다."
"···태양그룹요!?"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태양그룹. 국내 재계 서열 5위 안에 드는 대기업. 건설, 금융, 유통, 미디어까지 손을 뻗은 그 그룹의 딸이, 나를 친 것이었다.
아침에 병실을 다녀간 그 여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정한 트렌치코트, 말간 눈빛, 조심스러운 걸음. 재벌가 딸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그 평범함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고 직후 바로 그룹 측에서 최고 수준의 대처를 지시했고, 저희에게도 특별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절대 피해자분이 불쾌한 일이 없도록 하라고요."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1인 병실, 부족함 없이 제공되던 각종 치료. 이상하리만치 매끄러웠던 일 처리에 대한 의문이 한꺼번에 해소되었다.
"그럼··· 합의가 빨리 진행되는 건가요?"
"네. 물론 선택은 혁수 님께 있습니다."
그는 서류를 앞으로 밀며 정중하게 덧붙였다.
"저희가 제안드리는 합의금은··· 3,000만 원입니다."
"···삼천이요?"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숫자를 세 번쯤 다시 머릿속에서 굴려봤다. 삼천만 원. 과외 알바를 몇 년을 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게 지금 이 서류 한 장 위에 적혀 있었다.
"혹시 부족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히 말씀하십시요."
"아닙니다. 바로 합의하겠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안도한 듯 고개를 숙이며 서류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펜을 들어 서명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단지 사고의 피해자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마치 세상 밖에 있던 권력의 그늘을 스쳐 지나간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사고 하나에 3,000만 원을 서류 한 장으로 처리하는 세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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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퇴원을 했다.
문을 나서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어쩐지 조금 더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무심코 꺼내든 화면엔 한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입금 30,000,000원 – 태양손해보험 / 합의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세 번, 네 번쯤 다시 확인했다.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정말, 들어왔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천천히 발을 들였다. 창밖 풍경은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스쳐 갔지만, 나는 조금 달라진 사람이 되어 그 길을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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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앞에 도착했을 땐 해가 기울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민호가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너 방에도 안들어오고 어디 갔었어?"
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힘없이 웃었다.
"좀··· 병원에 있었어."
"뭐? 병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쳤어?"
"지금은 괜찮아."
나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에서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잠시 눈을 피한 뒤, 내가 먼저 물었다.
"근데··· 저녁은 먹었어?"
민호는 배를 슬쩍 문지르며 말했다.
"아직."
"그럼 나가자. 오늘은 내가 살게."
그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뭐야. 병원 갔다 오더니 돈이라도 생겼냐? 갑자기 밥을 다 산다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너한테 하도 많이 얻어먹은 게 생각나서."
"좋아. 삼겹살에 소주한잔 하자."
우리는 그렇게 기숙사 골목길 끝 고깃집으로 향했다. 지글지글 익는 고기, 부딪히는 소주잔. 그리고 오랜만에 느껴지는 따뜻한 말들. 나는 민호의 장난기 섞인 농담에 웃었고, 그 웃음 속에서 조금씩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날 밤, 말하지 못한 삼천만 원은 주머니 속 계좌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엔, 트렌치코트를 입고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던 그녀의 얼굴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차갑고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수술실은 예상보다 컸다. 중앙에 놓인 수술대 위에 회장님이 누워 계셨다. 의료진들이 그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계음과 지시 소리들이 공간을 채웠다. 나는 회장님을 바라봤다. 처음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저렇게 누워 계신 모습이 낯설었다. 언제나 단단하고 권위로 가득했던 그 사람이 지금 생명을 의료진에게 온전히 맡긴 채 누워 계셨다. 산소 호흡기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여러 줄의 관이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두려움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회장님 옆에 놓인 보조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가 내 팔에 굵은 바늘을 꽂으며 말했다. "통증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참아주세요." "괜찮습니다." 큰 바늘이 들어오는 순간 뻐근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붉은 피가 관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관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눈으로 따라갔다. 회장님의 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 피가 지금 저 사람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피.'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관을 타고 흘러나가는 피의 감각이 팔 안쪽에서 느껴졌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내 온기가 저 사람에게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실감됐다. 한참이 지나서야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충분히 채혈됐습니다." 의료진 중 한 명이 말했다. "활력징후 안정되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수술실 안의 긴장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회장님을 바라봤다. 창백했던 얼굴에 아주 미세하게 혈색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 내 피가 그를 살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내 팔에서 바늘을 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고
그곳은 이미 붉은 경광등과 사이렌 소리로 뒤덮여 있었다.어둠을 뚫고 번쩍이는 불빛이 사람들의 불안한 얼굴을 차례로 스쳐 갔다. 나는 깨진 차창 사이로 흘러드는 빗물을 맞으며 회장님을 바라봤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빗물과 뒤섞여 시트 위로 번지고 있었다.구급대원이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괜찮으십니까? 움직일 수 있으세요?"나는 그 손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둔하게 쑤셨지만 그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회장님부터요."구급대원들이 회장님을 들것에 옮기는 동안 수아가 조수석에서 빠져나왔다. 이마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그녀가 달려가려는 순간 구급대원이 막아섰다."응급환자분 치료가 우선입니다. 비켜주세요.""아빠······ 제발······."수아의 목소리가 빗속으로 번지며 사라졌다."환자 의식 없음! 맥박 약합니다!"구급대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강인하고 흔들림 없던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들것 위에 누운 회장님은 산소 마스크를 낀 채 미동도 없었다.나는 수아의 팔을 잡았다."같이 가자."앰뷸런스 문이 닫히고 사이렌이 다시 울려 퍼졌다. 차 안은 긴박한 지시와 기계음으로 가득했고, 구급대원들의 손길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수아는 내 옆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회장님을 바라봤다. 그 손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수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잡은 손에 힘이 들어왔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던 의료진이 들것을 끌어내렸다."수술실로 바로 이송하세요!"들것이 복도를 따라 빠르게 밀려 들어갔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발걸음이 메아리처럼 이어졌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활짝 열리고 회장님의 몸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붉은색으로 빛나는 수술 중이라는 불빛이 켜졌다.문이 닫히는 순간 수아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녀를 복도 의자에 앉히고 옆에 앉
뜻밖의 질문에 손이 멈췄다. 조심스레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없었습니다, 회장님.""나는 사람을 배경으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네. 그래서 지금껏 자네 가족 이야기를 묻지 않았지. 그런데 오늘 문득 궁금해졌어."그 시선 속에서 가벼운 호기심이 아닌 진심 어린 무게가 느껴졌다. 가슴 깊이 숨겨둔 기억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유흥업소에서 일하시며 저를 키우셨고,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습니다."순간 수아의 젓가락이 멈추며 놀란 시선이 나를 스쳤다. 그 눈길이 가슴에 닿았지만 나는 담담히 이어갔다."사실 아버지는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술에 취하시면 가끔 그러셨습니다. 아버지를 찾으려 하지 말아라. 그러면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서 애초에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회장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소주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며 말씀하셨다.
잠시 후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수아는 무대 옆에서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조명이 자신을 향해 터져 오르는 순간 그녀는 무대로 걸어나갔다."안녕하세요. 태양그룹 부회장 김수아입니다."첫 마디가 공간을 가르며 퍼져나갔다.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꽂혔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고, 앞줄에 앉은 기자들의 펜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오늘 저는 기술을 이야기하러 이 자리에 선 게 아닙니다."예상과 다른 첫 문장에 객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사람을 이야기하러 왔습니다."수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침묵이 공간을 더 단단하게 조였다."지난 3년간 저는 한 가지 질문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기술이 진짜로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는가. 위급한 순간에 가족을 대신해줄 수 있는가."&n
수아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나 오래전부터 회사 물려받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어.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근데 결혼까지 아버지 뜻대로 하라니까, 솔직히 너무 힘들어."체념이 깊게 스며 있었다."내가 뭘 골라본 적이 있나 싶어. 학교도, 전공도, 회사도. 다 정해진 데로 갔어."나는 잔을 내려놓았다."태양그룹 회장으로 산다는 건 다 가질 수 없다는 뜻이잖아. 너도 알잖아.""알아. 아는데."수아가 잠깐 눈길을 피했다가 다시 나를 봤다."오빠. 예전처럼 나한테 가끔씩 사랑을 줄 수 없어? 나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어."그 말이 방 안에 조용히 번졌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시선을 거뒀다.
리허설은 예정보다 길어졌다.수아는 같은 문단에서 세 번 걸렸다. 원고를 외우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원고 때문에 걸리는 걸 나는 본 적이 없었다.네 번째에 겨우 넘어가고 조명이 꺼졌다. 수아가 무대에서 내려왔다."괜찮아?""나 많이 긴장하나 봐."그때 통로 쪽에서 누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삼진그룹 둘째 아들 이준혁. 단정한 수트 차림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수아야."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잠깐 멈췄다가 미소로 번졌다."준혁아. 너도 왔어?""응. 아버지가 경험 좀 쌓아보라고 보내셨어."그가 수아 옆에 서서 전시장을 한 번 둘러봤다. 그러다 다시 수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나 소식 들었어.""뭘.""민호 형이랑 약혼한다며."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수아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 발표하지 않은 일이었다. 양가에서만 오간 이야기였는데 태평양 건너에서 듣고 있었다.수아는 담담하게 웃었다."그렇게 됐어.""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마음대로 결혼 상대를 고르겠어.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하고 살아야지."농담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이 농담만은 아니었다. 이 사람도 어딘가에서 같은 통보를 받았을 것이었다."그래도 민호 형이면 괜찮은 선택이지.""어···""일 잘 마무리하고, 시간 되면 한국에서 보자."그는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며 사라졌다.수아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봤다.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말이 얼굴 위에 오래 남았다.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마음대로 결혼을 고르겠어. 그 한마디가 위로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나는 그 옆모습을 봤다.수아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얹든 이 사람 편을 드는 말이 될 것 같았다.---호텔로 향하는 길, 차 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