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교문 밖을 나서자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머릿속은 다른 열기로 가득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욱신거렸다.
"편하게 학교 다니는 너희가 뭘 알아···"
속으로 중얼이며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신호등이 빨간불이었다. 분노는 이미 선을 넘고 있었지만, 발은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빨간불이 초록으로 바뀐 줄도 모르고, 나는 생각에 잠긴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파란불이 깜빡이는 걸 본 건,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내밀며 뛰어들려는 찰나,
"퍽!"
무언가가 내 몸을 강하게 밀쳐냈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 세상이 한 프레임씩 끊어지듯 천천히 움직였다.
하늘, 간판, 건물, 도로, 그리고 아스팔트.
몸이 몇 바퀴를 굴렀다. 등과 머리가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숨이 튀어나왔다. 차가운 아스팔트가 온몸을 감싸 안았고,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귀에선 윙윙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세상이 점점 안개 속으로 번졌다.
경적 소리, 비명, 달려오는 발소리. 모든 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괜찮으세요?"
가까이서 들려온 목소리.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얼굴엔 놀람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지만, 내 시야는 이미 번져 있었고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고, 머리는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멀어지더니,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나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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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인 건 흰 천장이었다.
매끄럽고 차갑고,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무심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병실의 천장. 이곳이 어딘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머릿속이 하얬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커튼 틈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몸은 무거웠고, 팔다리는 축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눈을 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짧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그렇게, 작게 스며들었다.
링거가 느릿하게 방울을 떨어뜨렸다. 조용한 병실에 생명의 리듬이 또렷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리듬 속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부드럽게 섞였다.
흰 제복의 간호사가 들어왔다.
"이제 정신 좀 드세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바싹 말라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병원이에요.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지금은 안전하니까 걱정 마세요."
교통사고.
그 단어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무언가 덜컥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는 테이블에서 물컵을 들어 내게 건넸다.
"목 마르셨죠? 천천히 드세요."
떨리는 손으로 컵을 받아 들었다. 손끝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했다. 잔을 들어 올리는 그 짧은 동작조차 버거웠다.
"지금은 많이 쉬셔야 해요. 곧 담당 선생님도 오실 거예요."
그녀가 나가고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 가운의 의사가 천천히 들어왔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여기가 어딘지, 본인이 누구신지는 알고 계시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기억이 흐릿할 수 있지만, 의식은 또렷하네요."
그는 차트를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교통사고였습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고, 뇌진탕이나 골절도 없어요. 타박상과 근육통 정도입니다."
잔뜩 조였던 심장이 스르르 풀렸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걸렸다.
"다만··· 꽤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계셨어요. 사고 당시 피로가 심하게 누적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충격과 피로가 겹쳐, 몸이 스스로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요."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그 말을 되뇌었다. 몸이 그렇게 무너졌던 걸까. 스스로도 몰랐던 한계가 그렇게 불쑥 튀어나온 것이었다.
"···퇴원은 언제쯤 가능할까요?"
"의식이 또렷하고 통증이 심하지 않다면 내일도 가능해요. 중요한 건 무리하지 않는 겁니다. 불편한 점 있으면 꼭 말씀해 주세요."
의사가 조용히 나가고 문이 닫혔다. 그 순간, 현실이 밀려왔다. 건강보다 먼저 떠오른 건 알바였다. 날 잘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쌓여갈 병원비 걱정. 평온했던 병실의 고요가 점점 무겁고 현실적인 침묵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다 문득, 사고 직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밀쳐냈던 무언가. 그리고 쓰러지는 나를 향해 달려오던 여학생의 얼굴. 초점이 맞지 않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또렷이 기억났다.
놀라움이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여학생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 답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차갑고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수술실은 예상보다 컸다. 중앙에 놓인 수술대 위에 회장님이 누워 계셨다. 의료진들이 그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계음과 지시 소리들이 공간을 채웠다. 나는 회장님을 바라봤다. 처음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저렇게 누워 계신 모습이 낯설었다. 언제나 단단하고 권위로 가득했던 그 사람이 지금 생명을 의료진에게 온전히 맡긴 채 누워 계셨다. 산소 호흡기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여러 줄의 관이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두려움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회장님 옆에 놓인 보조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가 내 팔에 굵은 바늘을 꽂으며 말했다. "통증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참아주세요." "괜찮습니다." 큰 바늘이 들어오는 순간 뻐근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붉은 피가 관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관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눈으로 따라갔다. 회장님의 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 피가 지금 저 사람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피.'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관을 타고 흘러나가는 피의 감각이 팔 안쪽에서 느껴졌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내 온기가 저 사람에게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실감됐다. 한참이 지나서야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충분히 채혈됐습니다." 의료진 중 한 명이 말했다. "활력징후 안정되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수술실 안의 긴장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회장님을 바라봤다. 창백했던 얼굴에 아주 미세하게 혈색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 내 피가 그를 살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내 팔에서 바늘을 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고
그곳은 이미 붉은 경광등과 사이렌 소리로 뒤덮여 있었다.어둠을 뚫고 번쩍이는 불빛이 사람들의 불안한 얼굴을 차례로 스쳐 갔다. 나는 깨진 차창 사이로 흘러드는 빗물을 맞으며 회장님을 바라봤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빗물과 뒤섞여 시트 위로 번지고 있었다.구급대원이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괜찮으십니까? 움직일 수 있으세요?"나는 그 손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둔하게 쑤셨지만 그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회장님부터요."구급대원들이 회장님을 들것에 옮기는 동안 수아가 조수석에서 빠져나왔다. 이마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그녀가 달려가려는 순간 구급대원이 막아섰다."응급환자분 치료가 우선입니다. 비켜주세요.""아빠······ 제발······."수아의 목소리가 빗속으로 번지며 사라졌다."환자 의식 없음! 맥박 약합니다!"구급대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강인하고 흔들림 없던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들것 위에 누운 회장님은 산소 마스크를 낀 채 미동도 없었다.나는 수아의 팔을 잡았다."같이 가자."앰뷸런스 문이 닫히고 사이렌이 다시 울려 퍼졌다. 차 안은 긴박한 지시와 기계음으로 가득했고, 구급대원들의 손길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수아는 내 옆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회장님을 바라봤다. 그 손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수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잡은 손에 힘이 들어왔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던 의료진이 들것을 끌어내렸다."수술실로 바로 이송하세요!"들것이 복도를 따라 빠르게 밀려 들어갔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발걸음이 메아리처럼 이어졌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활짝 열리고 회장님의 몸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붉은색으로 빛나는 수술 중이라는 불빛이 켜졌다.문이 닫히는 순간 수아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녀를 복도 의자에 앉히고 옆에 앉
뜻밖의 질문에 손이 멈췄다. 조심스레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없었습니다, 회장님.""나는 사람을 배경으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네. 그래서 지금껏 자네 가족 이야기를 묻지 않았지. 그런데 오늘 문득 궁금해졌어."그 시선 속에서 가벼운 호기심이 아닌 진심 어린 무게가 느껴졌다. 가슴 깊이 숨겨둔 기억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유흥업소에서 일하시며 저를 키우셨고,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습니다."순간 수아의 젓가락이 멈추며 놀란 시선이 나를 스쳤다. 그 눈길이 가슴에 닿았지만 나는 담담히 이어갔다."사실 아버지는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술에 취하시면 가끔 그러셨습니다. 아버지를 찾으려 하지 말아라. 그러면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서 애초에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회장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소주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며 말씀하셨다.
잠시 후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수아는 무대 옆에서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조명이 자신을 향해 터져 오르는 순간 그녀는 무대로 걸어나갔다."안녕하세요. 태양그룹 부회장 김수아입니다."첫 마디가 공간을 가르며 퍼져나갔다.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꽂혔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고, 앞줄에 앉은 기자들의 펜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오늘 저는 기술을 이야기하러 이 자리에 선 게 아닙니다."예상과 다른 첫 문장에 객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사람을 이야기하러 왔습니다."수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침묵이 공간을 더 단단하게 조였다."지난 3년간 저는 한 가지 질문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기술이 진짜로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는가. 위급한 순간에 가족을 대신해줄 수 있는가."&n
수아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나 오래전부터 회사 물려받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어.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근데 결혼까지 아버지 뜻대로 하라니까, 솔직히 너무 힘들어."체념이 깊게 스며 있었다."내가 뭘 골라본 적이 있나 싶어. 학교도, 전공도, 회사도. 다 정해진 데로 갔어."나는 잔을 내려놓았다."태양그룹 회장으로 산다는 건 다 가질 수 없다는 뜻이잖아. 너도 알잖아.""알아. 아는데."수아가 잠깐 눈길을 피했다가 다시 나를 봤다."오빠. 예전처럼 나한테 가끔씩 사랑을 줄 수 없어? 나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어."그 말이 방 안에 조용히 번졌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시선을 거뒀다.
리허설은 예정보다 길어졌다.수아는 같은 문단에서 세 번 걸렸다. 원고를 외우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원고 때문에 걸리는 걸 나는 본 적이 없었다.네 번째에 겨우 넘어가고 조명이 꺼졌다. 수아가 무대에서 내려왔다."괜찮아?""나 많이 긴장하나 봐."그때 통로 쪽에서 누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삼진그룹 둘째 아들 이준혁. 단정한 수트 차림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수아야."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잠깐 멈췄다가 미소로 번졌다."준혁아. 너도 왔어?""응. 아버지가 경험 좀 쌓아보라고 보내셨어."그가 수아 옆에 서서 전시장을 한 번 둘러봤다. 그러다 다시 수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나 소식 들었어.""뭘.""민호 형이랑 약혼한다며."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수아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 발표하지 않은 일이었다. 양가에서만 오간 이야기였는데 태평양 건너에서 듣고 있었다.수아는 담담하게 웃었다."그렇게 됐어.""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마음대로 결혼 상대를 고르겠어.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하고 살아야지."농담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이 농담만은 아니었다. 이 사람도 어딘가에서 같은 통보를 받았을 것이었다."그래도 민호 형이면 괜찮은 선택이지.""어···""일 잘 마무리하고, 시간 되면 한국에서 보자."그는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며 사라졌다.수아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봤다.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말이 얼굴 위에 오래 남았다.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마음대로 결혼을 고르겠어. 그 한마디가 위로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나는 그 옆모습을 봤다.수아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얹든 이 사람 편을 드는 말이 될 것 같았다.---호텔로 향하는 길, 차 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