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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مؤلف: 곤원
태자의 목소리에 황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이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이었다.

연정은 부친의 눈에서도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다만 연정을 돌아보는 황제의 시선은 다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조금 전의 미묘한 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옷을 잘 챙겨 입거라.”

황제는 그 말만 남긴 채 밖으로 나가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연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황제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녀를 취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을 태자의 측비로 보내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연정은 천천히 옷을 입으며 나무 창문을 살짝 열어 틈을 만들었다. 그러자 대들보에 있던 참새들이 그 틈으로 날아올랐다.

*

한편, 황제가 막 문을 닫고 나왔을 때였다. 태자가 약간 흐트러진 걸음걸이로 그곳에 들어섰다.

그의 걸음을 따라 밀폐된 공간 안으로 술 냄새가 물씬 밀려들었다.

도황후는 굳은 얼굴로, 옆으로 물러섰다.

“소자,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뵈옵니다.”

태자가 먼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고는 다급히 물었다.

“아바마마의 몸은 좀 어떠하신지요? 모두 집안 단속을 허술하게 한 제 탓이옵니다. 부디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태자는 황제가 여인과 뒤엉켜 있다는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누군가의 계략이라고 여겼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기에, 제 혼례 날 여인과 어울려 체면을 깎을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태자의 걱정 어린 눈빛과 진심 어린 사죄를 마주하자, 황제의 마음도 따뜻해졌다. 아들이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불현듯 떠오른 방 안의 여인 때문에 갑자기 양심에 찔렸다.

“괜찮다. 짐이 사람을 보내 조사할 것이니, 너는 먼저 돌아가거라.”

태자는 멀쩡한 황제의 모습에 한시름 덜었다.

자리에서 물러나려던 태자는 측비 문제를 떠올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갑작스레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연회에서 측비를 공표하지 못했사옵니다. 아바마마께서 성지를 내려 혼사를 허락해 주시길 청하옵니다.”

태자의 얼굴에 간절함과 약간의 쑥스러움이 스쳤다.

“명주를 태자비로 맞이하면서 연정과의 옛정을 저버렸사옵니다. 다시 정실 자리를 되찾아 줄 순 없지만, 정실의 예우로 그녀를 대하고 싶사옵니다.”

순간,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도황후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녀는 이제야 도명주가 왜 그토록 악랄한 수단으로 연정의 정절을 훼손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태자는 연정 때문에 정실의 체면을 깎아 먹는 짓까지 서슴지 않고 있었다.

황제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태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말을 잇기도 전에 태자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임을 알고 있으나, 그 아이를 향한 제 진심만은 알아주소서.”

태자의 말에 방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방 안에서 옷을 입던 연정의 손길도 멈췄다.

잠시 후,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긴 속눈썹을 낮게 드리워 눈동자를 감춘 채,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태자와 십 년을 함께하며 마음을 나눈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여인 때문에 그녀를 모욕했다. 그 순간, 오랜 세월 쌓아온 정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한때 그녀는 첩이 되지 않겠노라 말했었다. 그러나 태자는 그들의 정을 운운하며 그녀의 원칙을 깨려 했다. 심지어 황권을 이용해 강제로 그녀를 첩으로 들이려 했다.

잠시 후, 문밖에서 대화 소리가 이어졌다.

“도명주와 혼례를 치를 때, 짐은 분명히 태사의 여식과 태부의 여식 중 하나만 택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낮게 깔린 황제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단호한 황제의 말에 태자는 흠칫 놀라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신분이 고귀한 규수들에게 제 행동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한 달 전 아바마마께서 연정을 측비로 맞이해도 된다고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태자는 황제의 결정을 거역하거나 의심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렇게 반박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황제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살기마저 느껴질 정도였고,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게 했다.

“태자! 술이 과했구나.”

도황후가 나서서 꾸짖었다.

태자는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태자를 위해 그녀는 자신의 친자식조차 두지 않았고, 태자를 남은 생의 의지처로 삼았다.

도황후는 태자가 여인 하나 때문에 황제와 척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여봐라, 태자를 정원으로 데려가거라.”

도황후의 명이 떨어지자 문밖에 서 있던 장학이 허리를 굽히며 들어와 태자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태자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술기운 탓인지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바마마, 측비로 삼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좋사옵니다.”

도황후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 몸을 휘청였다. 가까스로 옆의 탁자를 붙잡고서야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내막을 아는 궁인들은 모두 땅에 바짝 엎드린 채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잠시 후,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어찌하여 그녀여야만 하는 것이냐?”

태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부드러우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그 아이와 십 년을 알고 지냈습니다.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지요. 명주만 아니었다면, 그 아이를 저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황제가 미간을 살짝 치켜올리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너는 끝내 그녀를 저버렸다. 생각만큼 끔찍이 여기는 것도 아니지.”

태자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더니 나직이 내뱉었다.

“소자는 어릴 적 모친을 여읜 뒤로 태부 가문에 빚진 마음이 커, 명주와의 혼인을 거부할 수 없었사옵니다.”

죽은 선황후 도완아가 언급되자, 황제의 가슴을 채웠던 살기가 잦아들었다.

황제는 그녀를 빼닮은 태자에게 더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어찌 보면 태자 역시 이번 일에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만 돌아가거라.”

황제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장학이 다시 태자를 끌어내려 했고, 태자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먼저 물러가겠사옵니다.”

‘더 파고들었다간 아바마마의 노여움만 사게 될 거다. 거절당하지 않은 이상, 연정을 측비로 맞이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

태자가 춘화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도황후도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폐하…”

도황후가 지금까지 자리를 지킨 것도 황제와 연정의 거취를 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우국사에 보내 비구니로 만들 작정이었다.

도황후가 입을 떼려는 순간, 내전의 문이 열리면서 연정이 걸어 나왔다.

토끼처럼 붉게 부은 두 눈은 그녀의 눈부신 외모 덕에 도리어 교태로운 자태를 뽐내게 했다.

연정은 황제 곁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폐하, 황후마마, 신녀가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부디 우국사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게 윤허하여 주십시오. 아버님께는 제가 혼인을 원치 않는다고 말씀드릴 것이니, 폐하와 태자전하께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연정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덧붙였다.

“태자전하께도 말씀을 올려, 과거의 일들을 잊으시고 더는 집착하지 마시라고 하겠사옵니다.”

태자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연정은 자신이 입궁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태자가 와서, 선황후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 확신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제가 태자의 마음을 헤아려 그녀를 쫓아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도황후는 어떻게든 그녀를 출가시켜 비구니로 만들려 할 것이다.

하지만 연정에게는 막강한 친정이 있었다. 태자가 순순히 그녀를 놓아줄지도 알 수 없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태자가 한밤중에 절까지 찾아간다면, 세간에 두고두고 회자될 또 하나의 추문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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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자가 날 버려? 좋아, 그럼 용상에 올라주지   제30화

    연정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폐하께서 혹 신첩이 가식적으로 군 것이라 여겨지신다면, 기꺼이 순빈에게 사죄하겠사옵니다. 두 분 사이를 이간질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고개를 숙이면서 가느다랗고 하얀 뒷목이 드러났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억울하면서도 쓸쓸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황제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황제가 가냘프고 교태로운 여인을 좋아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일부러 가식적으로 굴었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의심을 받는 것과,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였다. “소태사는 천군만마를 통솔하며 사방을 누비며 적을 수없이 벤 장군이고, 너의 두 오라비 또한 성정이 강직한데, 어찌하여 너는 이토록 유순한 것이냐?”황제는 연정의 귓가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 가려진 얼굴을 드러냈다. 황제의 말은 모호했으나, 연정은 황제가 자신이 애처로워 묻는 것이라 여겼다. “신첩은 집안의 막내딸이기에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오라버니, 언니들의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사옵니다. 세상 물정은 모른 채 컸고, 몸이 허약하여 늘 병치레를 했지요. 집안에서 하도 오냐오냐해주신 탓에 도리어 겁 많고 나약하게 자랐사옵니다. 장군 집안의 여식으로 보여야 할 면모를 보이지 못해 송구할 따름이옵니다.”연정은 부끄러운 기색으로 답했고,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유라면 납득이 갔다. 소태사가 여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여인이 유순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부끄러워할 것 없다. 다만, 궁에서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마라. 소태사가 마음 아파할까 염려되니 말이다.” “예.” 연정이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황제는 연정의 등을 다독이며 계속 말했다. “내가 이미 너를 신빈으로 책봉하고 영수궁을 하사했으니, 가서 둘러보거라.” “예,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인사를 올리고 물러나던 연정은, 도중에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황제가 재빨리 팔을 뻗어 부축한 덕에 넘어지지는

  • 태자가 날 버려? 좋아, 그럼 용상에 올라주지   제29화

    연정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평소 표정을 되찾았다. 연정은 순빈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복경공주의 배동으로 궁에 드나들며 그녀가 황제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게 군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다. 빈 이상의 비빈은 모두 황제의 총애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순빈은 빈 이하의 후궁이 조금이라도 총애를 얻으면 곧장 견제하고, 뒤에서 온갖 시기와 질투를 일삼기로 유명했다. 순빈은 속을 감추지 못했다. 좋고 싫은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황제는 그녀를 꽤 오랫동안 곁에 두었다.연정은 신빈이라는 봉호가 마음에 들었다. 황제가 나름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실리를 챙겼으니, 견제를 좀 받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신첩, 폐하를 뵈옵니다.” 연정이 다가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황제가 손을 들어 보이자,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이어 순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궁에 처음 들어와 모르는 것이 많사옵니다. 순빈께서 환영해 주시니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사옵니다. 부디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길 바랄 뿐이옵니다.” 그녀는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마치 순빈이 자신을 반기지 않을까 봐 겁을 먹은 것처럼 굴었다. 나약한 척, 아둔한 척하는 것은 연정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순빈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굳어졌다. 그녀는 웃는 둥 마는 둥 대꾸했다. “무장 집안 출신이라더니 성품은 참 가냘프고 겁이 많군요. 장군 집안의 딸답지 않사옵니다. 참으로 사랑스러우십니다. 폐하께서 입궁하자마자 빈으로 책봉하신 이유를 알겠사옵니다.” 순빈은 온화한 안색을 꾸며내고 있었으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겉으로는 고상한 척 꾸며대면서도,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는 연정을 비꼬았다. 연정은 붉어진 눈시울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순빈께서 오랫동안 총애를 받으셨으니,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것도 순빈이겠지요.”순빈은 연정이 굴복하며 아첨하는 것에 속으로 흡족했으나, 곧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고는 다시 화가 치밀었다. ‘가식

  • 태자가 날 버려? 좋아, 그럼 용상에 올라주지   제28화

    함복궁 주전으로 돌아온 순빈은 화를 참지 못하고 찻잔을 내던졌다. “마마, 노여움을 푸십시오. 몸 상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시중드는 궁녀 청대가 다가와 순빈을 달래며, 어린 궁녀에게 바닥의 사기그릇 조각들을 치우고 차를 새로 올리라고 지시했다. 순빈은 창가 평상에 앉아서도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정비마마께서 마마의 총애를 시기하시는 것이옵니다. 나이 들고 쇠약해진 데다가 폐하의 총애도 없으니 당연히 성격이 나쁠 수밖에요. 일일이 반응할 필요 없사옵니다.” 청대가 다시 다가와 부드럽게 권했다. 순빈은 정육품 태원부 현령의 딸로, 궁에서의 출신은 분명 낮았다. 팔 년 전, 황제가 태원 일대의 민정을 살피러 순시를 나갔다가 우연히 그녀를 발견해 궁으로 데려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진국의 율법상 정오품 이하 관원의 딸인 그녀는 간택에 참여할 자격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순빈은 입궁 초기에 신분 때문에 늘 고개를 들지 못했고, 때로는 궁인들에게 녹봉을 떼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 년간 고생스럽게 보내다 우연한 하룻밤의 행운으로 점차 총애를 얻게 된 것이었다.총애를 얻은 후로 순빈은 겉으로는 여전히 가냘프고 매혹적인 모습을 유지했으나, 실상은 뒤에서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안달하며 경쟁심을 불태웠다. 달래기는 쉽지만, 그만큼 자극을 받으면 금세 발끈하는 성미였다.순빈의 안색이 점차 누그러졌으나, 분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정비는 시야가 너무 좁아서 문제다. 소씨는 예전에 태자와 추문이 났던 여인이지. 그런데 이제 궁에까지 들어와 폐하의 총애까지 받았으니, 결코 얕봐선 안 된다.”“신빈을 견제할 생각은 않고 되려 본궁을 비웃다니! 명백히 본궁의 미천한 가문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더냐!” 순빈은 손에 쥔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내심 어렵게 얻은 총애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 봐 두려웠다. 만약 가문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뒷배가 조금만 더 튼튼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남을 이간질하려 애쓰지는 않았을 것이다.“마

  • 태자가 날 버려? 좋아, 그럼 용상에 올라주지   제27화

    그녀는 근 이 년 동안 황제에게 가장 총애를 받은 순빈이었다. “본궁은 신빈의 출신이 고귀하고 삼공주의 배동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네. 성내는 물론이고 궁중에서도 그 명성이 아주 대단했다지? 본궁은 벌써부터 얼굴을 뵙고 싶어 견딜 수가 없네.”“아쉽게도 본궁은 출신도 미천하고 아이 하나 두지 못했으니… 그랬다면 진작 상서방에 들러 신빈의 고고한 자태를 뵙고 올 수 있었을 텐데.”순빈은 얼굴 가득 공격성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달걀형 얼굴에 둥근 눈을 가진 명랑한 인상이라 더욱 친근하고 진심처럼 보였다. 하지만 많은 이가 그녀의 말에 숨은 비유와 눈빛에 어린 야유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복경공주를 무시하며 연정을 높임으로써 연정과 가비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다. 동시에 은근슬쩍 연정이 상서방에 있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상서방은 공주들이 주로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태자와 황자가 공부하는 곳이었다. 연정과 태자의 옛일을 들춰 도황후를 불쾌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도황후가 신빈을 더 미워하게 말이다. 과연 도황후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반쯤 사라졌고, 순빈을 보는 눈빛도 차가워졌다. 곁에 있던 가비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자기 딸의 배동이었던 아이가 후궁이 되었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저열한 이간질까지 일일이 반응할 수 없어 상덕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다.“순빈마마, 신빈마마께서는 현재 태사 부저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시며, 내일 진시에 황후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실 예정이옵니다.” 상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태연하게 보고하고는 물러났다. 어전의 사람이 봉의궁을 떠나기 무섭게 순빈이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미색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폐하께서 직접 책봉하시는 영광을 누리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게다가 봉호도 신이라니요, 모든 봉호 중에서도 으뜸이라 황후마마의 자리를 겨냥한 것 같기도…”순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황후의 오른팔이었던 정비가 말을 끊었다. “순빈, 출신도 미천하고 학식이 없으면 말

  • 태자가 날 버려? 좋아, 그럼 용상에 올라주지   제26화

    연정은 손을 멈추고 더는 만지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의 몸과 그가 주는 쾌락을 좋아했지만,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황제는 그대로 연정을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친밀하고 행복한 부부처럼 조용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한참 뒤, 황제의 호흡이 서서히 안정되었고, 연정은 이미 그의 품에서 다시 잠들었다. 그는 연정을 조심스럽게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에야 몸을 돌려 나갔다.밖으로 나와 용상에 앉은 황제는 평소의 위엄을 되찾고 직접 책봉 교지를 써 내려갔다. “태사의 적녀 연정을 빈으로 책봉하고, 봉호는 신(宸)으로 하며 영수궁에 거처하게 하라.” “네가 직접 처리하거라.”황제는 관심을 가진 여인에게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상덕은 놀란 티를 감추고 황급히 대답했다. “예, 분부 받들겠사옵니다.”그는 공손히 두 손으로 성지를 받았다. 상덕은 눈치 없이 신빈의 행방을 물을 수 없었다. 그날 밤의 일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인 데다, 오늘 아침 황제를 깨우러 갔을 때 난각 안의 소리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신빈의 입궁은 이미 확정된 일이었다. 번거로운 절차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를 하루빨리 궁에 들이는 일이었다.상덕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궁무사로 가 기록을 남겼다. 옥첩에 올릴 날짜를 택하고 영수궁을 청소하라는 명도 내렸다. 이어 성지를 내리는 내관들을 이끌고 동서 육궁에 두루 알렸다.*상덕이 사람들을 이끌고 봉의궁에 도착했을 때, 육궁의 비빈들은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고 흩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황제는 조서를 내리노라. 태사 소씨의 딸 연정은 성품이 온유하고 품격이 단정하며 용모가 우아하고 현숙하다. 이에 신빈으로 책봉하고 영수궁 주전에 거처하게 하라.”간결 명쾌한 성지는 누가 봐도 황제가 직접 쓴 것이었다. 관례대로 한림원에 초안을 맡겼다면 최소 하루는 걸렸을 터였다. 난해하고 화려한 어구로 천자의 위엄을 드러냈겠지만, 황제가 친히 쓴 조서만큼 무게와 의미가 실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황제가 직

  • 태자가 날 버려? 좋아, 그럼 용상에 올라주지   제25화

    거대한 행렬이 서서히 출발했다. 드높게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등지고 궁문을 나선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높은 말 위에 오른 태자는 뒤따르는 긴 행렬과 물자를 돌아보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에는 그 광경이 그저 눈이 시릴 만큼 따갑게 비칠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손에 든 영락(瓔珞)을 내려다보았다. 연정이 생애 처음으로 만들어 준 선물이었다. ‘이번엔 내 잘못이다. 그 아이를 오해하지 말아야 했다. 그 아이를 내세워 이익을 취하려 해서도 안 됐다. 다행히 연정은 이 모든 사실을 알지 못한다. 공을 세우고 돌아가서 다시 청혼을 시도해야겠다. 정 안 된다면…’ 태자의 표정이 점차 매서워졌다. 그는 영락을 소중히 품에 넣고, 저 높이 떠오른 해를 쳐다보았다. ‘아바마마께서도… 결국 언젠가는 세상을 뜨실 거다.’일행은 서둘러 진주로 향했다.*한편, 백관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황제가 사라진 뒤였다. 황제의 뒷모습을 향한 상덕의 외침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폐하, 거동하시옵소서.” “폐하, 조심히 가시옵소서.”황제는 어서방으로 돌아와 의복을 갈아입고 난각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연정이 잠들어 있었다. 연정은 그가 떠날 때와 같은 자세로 웅크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비단 이불이 허리께까지 흘러내려 둥그스름한 어깨와 가느다란 목덜미가 드러났는데, 그 위에 남은 야릇한 흔적들은 지난밤의 광기 어린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폭포 같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흐드러져 있어 그녀의 작은 얼굴을 더욱 창백하고 투명하게 보이게 했다. 반쯤 가려진 모습이 더 유혹적이었다.황제가 다가가 연정의 얼굴을 덮은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겼다. 불그스레한 그녀의 예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입술은 빗물을 머금은 꽃잎처럼 살짝 부어 있었다. 누군가 꺾어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황제는 잠시 망설였고, 그의 눈에는 욕망이 소용돌이쳤다. 결국 연정은 황제의 입맞춤으로 잠에서 깼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황제의 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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