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전 5시 47분.
나는 병원 화장실 거울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오늘 퇴사할까. 아니, 잠깐. 퇴사만은 안 된다. 전문의 자격증은 따야지. 그래. 딱 일 년만 더 버티자. …아니, 아직 일 년이나 남았네.’
“…씨발.”
세수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 여자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대충 묶었고,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흰 가운 아래로 드러난 손목은 유난히 가늘었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다. 흉부외과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자고, 피부과도 다니고, 필라테스도 꾸준히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밥 먹다가 콜 받는 건 기본이고, 화장실에서 양치하다가도 호출을 받았다. 잠을 자다가 깨는 횟수를 세는 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이 과에는 사람이 없었다. 정확히는, 사람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1년 차 때 함께 들어온 동기는 둘이었다. 한 명은 수련을 시작한 지 넉 달 만에 사직했다. 이유는 강태혁. 나머지 한 명은 1년 차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이유는 역시 강태혁.
2년 차가 되었을 때는 다른 연차 선배 한 명이 수련을 포기했고, 그다음 해에는 전공의 한 명이 휴직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한국대학교병원 흉부외과 레지던트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교수는 수술실에서 살고, 펠로우는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오가고, 레지던트는 그 사이를 뛰어다녔다. 그중에서도 레지던트 4년 차인 나는 사실상 과의 인간 방패였다.
응급실에서 연락이 오면 내가 받았다. 중환자실에서 문제가 생기면 내가 갔다. 신규 환자가 입원하면 내가 확인했다. 수술이 잡히면 수술 준비를 했다. 후배가 모르는 게 있으면 알려 줬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최종 결재권자는.
“한채이!”
화장실 밖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침 5시 51분. 내가 오늘 퇴사할 가능성이 98퍼센트에서 99퍼센트로 상승하는 순간이었다.
“넵!”
“어디야!”
“화장실입니다!”
“당장 나와!”
“교수님, 저도 생리 현상이라는 게 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
‘아. 망했다.’
나는 세면대에 손을 짚었다.
강태혁은 환자에게는 냉정하고, 동료 의사에게는 가차 없으며, 레지던트에게는 인권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지워 버린 남자였다. 그런데 하필 내가 그 인간에게 말대꾸하는 유일한 레지던트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친개 밑에서 4년을 버티다 보니 무서운 게 없어졌다.
죽기 아니면 살기. 물론 실제로 죽을 수는 없으니 일단 개겨 보는 것이다.
나는 가운을 여미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복도 끝에서 나를 노려보는 강태혁과 눈이 마주쳤다.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화장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앞에는?”
“생리 현상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채이.”
“네.”
“너는 내가 우습지?”
“아니요. 전혀요.”
“그런데 왜 자꾸 기어올라?”
나는 잠시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쯤 되니 나도 궁금했다.
“교수님께서 너무 낮은 곳에 계셔서요.”
정적. 복도에서 차트를 들고 지나가던 펠로우가 그대로 멈췄다. 뒤따라오던 3년 차 레지던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내 장례식 날짜를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강태혁은... 웃었다. 아주 천천히.
“그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차트를 내게 내밀었다.
“오늘 네가 맡을 환자야.”
나는 차트를 받았다.
“오전 회진 끝나고 응급 수술 하나, 오후 수술 두 개. 중환자실 환자 열두 명 상태 확인하고, 오후 다섯 시까지 수술 기록 정리해서 가져와.”
“…네?”
“왜. 못 하겠어?”
“교수님, 혹시 제가 세 명으로 보이십니까?”
“아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 명이면 더 잘하겠지.”
“그럼 교수님은 몇 명이십니까?”
“뭐?”
“교수님은 한 분이신데 왜 저한테 세 사람 몫을 시키십니까?”
옆에서 펠로우가 작게 헛기침했다.
물론 강태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네가 그만큼 할 수 있으니까.”
“…….”
“네가 못 하면 다른 사람 시키면 되는데, 이 과에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네만큼 할 사람이 없잖아.”
순간 할 말이 막혔다. 이 인간은 꼭 이런 식이었다. 칭찬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고는, 상대가 그걸 곱씹을 틈도 주지 않았다.
나는 차트를 내려다봤다. 환자 목록이 빼곡했다. 정말로 사람이 없었다. 이 정도면 흉부외과가 아니라 한채이 개인병원이었다. 물론 물주이자 건물주는 저 미친개, 강태혁.
“알겠습니다.”
“그리고.”
역시 끝이 아니었다.
“오늘부터 네 당직표 바꿨어.”
“…왜요?”
“내가 바꿨으니까.”
“아니,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응급 수술이 많아질 거야.”
“그건 당직표를 바꿀 이유가 아니라 인력을 충원할 이유죠.”
강태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인력 충원은 내가 결정하는 일이 아니야.”
“그럼 제 당직표도 교수님이 결정하시면 안 되죠.”
“내가 네 지도교수야.”
“그게 만능 열쇠는 아니거든요?”
이번에는 정말로 주변 사람들이 숨을 멈췄다. 강태혁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오전 6시 30분. 회의실.”
“네.”
“늦으면 네가 직접 사유서 써.”
“네.”
“아주 길게.”
“네.”
“내가 읽다가 잠들 정도로.”
“그럼 교수님 수면 부족도 해결되고 좋겠네요.”
“…….”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돌아섰다. 등 뒤에서 강태혁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한채이!”
“네!”
“뛰어!”
“넵!”
나는 뛰었다. 오늘도 살아야 하니까.
**
그렇게 오전 회의를 마치고 나온 시각은 7시 20분.
나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바스락거리는 종이가 잡혔다. 사직서. 어젯밤 당직실에서 작성한 다섯 번째 사직서였다. 이번만큼은 정말 제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채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종이를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네, 교수님.”
강태혁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너 뭐 숨겼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꺼내 봐.”
“사생활입니다.”
“한채이.”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어차피 언젠가는 말해야 할 일이었다.
“저, 진짜로 그만둘 겁니다.”
강태혁의 표정이 굳었다.
“뭐?”
“이번에는 농담 아닙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사직서를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저 좀 보내주십시오.”
그가 종이를 내려다봤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싫어.”
“...네?”
“안 된다고.”
“아니, 교수님이 제 보호자세요?”
강태혁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보내기 싫다는데, 내가 무슨 이유까지 설명해야 해?”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인간이 진짜 미쳤나? 아니. 설마 나한테 무슨 감정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점심시간. 한채이는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고 있었다.“한 선생님.”윤도윤이 손을 흔들었다.“여기 자리 있어요.”“아, 선생님. 안녕하세요.”채이는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도윤은 그녀의 식판을 보고 웃었다.“오늘은 제대로 드시네요.”“어제 누가 밥 안 먹으면 혼난다고 협박해서요.”“누가요?”“제 인생 최대의 적이요.”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강 교수님?”“쉿. 병원 안에서 그 이름 함부로 말하면 나타나세요.”“하하. 무슨 게임 속 보스도 아니고.”“보스는 패턴이라도 있죠. 그분은 매번 새로워요.”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웃었다. 도윤은 오전 회의 이야기를 꺼냈다.“발표 잘하셨던데요. 특히 한계를 인정한 부분이 좋았어요. 학회에서 질문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 보완할 게 많아요.”“그건 누구나 그렇죠. 필요하면 제가 발표 연습도 봐 드릴게요. 다른 병원에서 비슷한 증례를 다룬 적이 있어서요.”“정말요? 그럼 자료 좀 여쭤봐도 될까요?”“물론이죠.”도윤은 휴대폰을 꺼내 관련 논문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때였다.“윤도윤 선생.”익숙하고 불길한 목소리. 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강태혁이었다. 그는 식판도 없이 두 사람의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도윤이 먼저 인사했다.“안녕하세요, 교수님. 식사하셨어요?”“아직.”“여기 앉으시겠어요?”도윤이 빈자리를 가리켰다. 태혁은 그 자리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채이를 봤다. 채이는 숟가락을 든 채 눈을 반짝였다.‘앉으세요. 제발 앉으세요. 지금 이 상황에서 교수님이 무슨 말을 할지 너무 궁금하니까요.’하지만 태혁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윤 선생, 오후 수술 준비 자료 확인했나?”“네. 방금 마쳤습니다.”“그럼 내 연구실로 가져와.”“지금요?”“지금.”도윤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알겠습니다. 채이 선생님, 아까 말씀드린 논문은 보내 드릴게요.”“네. 감사합니다.”도윤이 떠난 뒤, 채이는
흉부외과 회의실에는 교수들과 전임의들이 모여 있었다. 한채이는 스크린 앞에 서서 발표 자료를 넘겼다.“이번 증례에서 저희가 중점적으로 검토한 부분은 승모판막의 구조적 변화와 수술 전 영상에서 확인된 역류 양상의 불일치입니다.”첫 슬라이드부터 질문이 들어왔다.“영상에서 그렇게 판단했다면, 수술 중 예상과 다른 소견이 나왔을 때는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었습니까?”다른 과 교수의 질문이었다. 채이는 준비해 둔 답변을 꺼냈다.“우선 환자의 혈역학적 상태와 경식도 심초음파 소견을 재확인하고, 병변의 범위를 다시 평가하겠습니다. 수술 전 계획을 유지하는 것보다 실제 확인된 해부학적 소견과 환자 상태를 우선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그건 원론적인 답변이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으로 수술 방식을 바꾸겠다는 겁니까?”질문이 날카로워졌다. 채이는 잠깐 숨을 골랐다. 이 부분은 발표 자료에도 한계가 명시되어 있었다. 당시 수술 중 소견만으로 특정 방법의 우월성을 단정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해당 증례 하나만으로 특정 수술 방법이 더 우월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판막의 실제 손상 범위와 봉합 후 역류 정도, 환자의 혈역학적 변화를 종합해 판단했습니다. 다만 제가 제시한 자료만으로는 그 기준을 정량적으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질문한 교수가 고개를 기울였다.“그럼 아직 분석이 덜 됐다는 뜻 아닙니까?”채이는 입을 열려 했다. 그때 옆자리에서 강태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닙니다.”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태혁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분석이 덜 된 부분과 자료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부분은 구분해야죠.”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한채이 선생은 이번 증례에서 확인된 사실과 추가 검토가 필요한 부분을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근거가 부족한데도 결론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정확한 판단입니다.”채이는 눈을 깜빡였다.‘지금 나 편들어 준 거야? 그것도 교수님들 다 있는 데서?’태혁은 아
채이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도윤과의 저녁은 즐거웠다. 대화도 잘 통했고, 오랜만에 병원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도 했다. 도윤은 채이의 진로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 줬고, 성형외과로 가든 흉부외과에 남든 응원한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자꾸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문 앞에 서 있던 강태혁. 자신이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다고 말하면서도, 어쩐지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 않던 얼굴. 채이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 진짜.” 휴대폰이 울렸다. [내일 6시 30분.] 채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교수님.] [왜.] [저 오늘 윤도윤 선생님이랑 밥 먹었는데요.] 답장은 없었다. 채이는 웃음을 참으며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교수님 생각보다 질투 많으신 것 같아요.] 이번에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채이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아, 또 무시하시네.’ 그녀가 이불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한채이.] 채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뒤,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내일은 발표 준비만 하자.] 채이는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말이었다. 발표 준비만 하자니. 그럼 오늘은 뭘 했다는 건데? 그녀는 천천히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네, 교수님. 그런데 교수님.] [또 뭐.] [저한테 관심 있으시면 그냥 있다고 하셔도 돼요.] 이번에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채이는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웃었다. 물론 강태혁이 그런 말을 할 리 없었다. 그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오늘만큼은 조금 기대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신경 쓰는 이유가 단순히 제자라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채이는 재빨리 화면을 확인했다. [자.] 채이는 그대로 굳었다. “…뭐?” 다시 읽었다. [자.] 끝이었다. 채이는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인간이 진짜!” 휴대폰을 쥔 채 한참
채이는 병원 정문 앞에서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병원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떨어진 식당이었다. 도윤은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했고, 채이는 휴대폰을 확인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한채이.”채이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아니길.“…네, 교수님.”돌아보니 강태혁이 서 있었다. 그는 퇴근하려는 듯 정장 재킷을 걸친 채였다.“여기서 뭐 해?”“약속 기다리고 있는데요.”“알아.”“…아세요?”“아까 들었잖아.”아. 그랬지. 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 선생님 기다리고 있습니다.”태혁의 입매가 굳었다.“아직 안 왔어?”“네. 조금 늦으신대요.”“그래.”대화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태혁은 가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확인하는 척하면서 정문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채이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교수님.”“왜.”“퇴근 안 하세요?”“할 거야.”“그런데 왜 안 가세요?”“차가 안 와서.”채이는 병원 주차장을 바라봤다. 태혁의 차는 주차장에 있었다.“교수님 차 저기 있잖아요.”“알아.”“그런데 왜 차가 안 왔다고 하세요?”“한채이.”“네.”“너 오늘 정말 한가하구나.”채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아, 진짜! 교수님!”태혁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웃어?”“아니, 너무 티 나시잖아요!”“뭐가.”“질투하는 거요!”“…….”“교수님, 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채이는 한 걸음 다가갔다.“저 성형외과로 가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이랑 밥 먹는 것도 싫으세요?”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이는 그 침묵을 가만히 바라봤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한 소리 들었을 것이다. 미쳤냐, 헛소리하지 마라, 네가 지금 할 일이 뭐냐.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태혁은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이상할 만큼 진지했다. 채이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거뒀다.“…교수님?”그 순간 태혁이 입을 열었다.“네가 누구를 만나든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은
다음 날 오후. 국제학회 발표 준비는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채이는 수술이 끝난 뒤 의국에서 자료를 수정하고 있었다. 태혁은 외래와 회진을 마치고 나서야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후 네 시쯤, 의국 문이 열렸다.“한 선생님?”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낯선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아.”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윤 선생님.”윤도윤. 심장혈관흉부외과에서 전임의 과정을 밟고 있는 의사로, 얼마 전 다른 병원에서 한국대학교병원으로 옮겨 왔다. 채이보다 몇 살 위였고, 인상이 부드러워 전공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오랜만이네요. 요즘 바쁘시죠?”“네. 윤 선생님도요.”도윤은 채이의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바라봤다.“학회 준비하세요?”“네. 다음 달에 국제학회 발표가 있어서요.”“아, 그 증례요? 강 교수님이 한 선생님 발표시킨다고 말씀하셨는데.”채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요.”“그래도 강 교수님이 맡기셨다는 건 기대하신다는 뜻이겠죠.”“…그런가요?”“그럼요. 강 교수님이 아무한테나 중요한 발표를 맡기시는 분은 아니잖아요.”채이는 피식 웃었다.“그건 맞아요. 대신 아무한테나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시기도 하죠.”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한 선생님은 강 교수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세요?”“그럼요.”“대단하시네. 저는 아직도 교수님 앞에만 가면 긴장하는데.”“저도 긴장은 해요.”채이는 진지하게 말했다.“다만 긴장한다고 입이 다물어지진 않더라고요.”도윤은 크게 웃었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도윤이 말했다.“그런데 혹시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채이는 고개를 들었다.“네?”“제가 새로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병원 근처를 잘 모르거든요. 전에 한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식당이 괜찮았던 것 같아서요.”“아, 네. 거기 맛있어요.”“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제가 살게요.”채이는 잠시 망설였다.
오후 8시 17분. 한국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교수실.“다시.”“…교수님.”“다시 하라고.”한채이는 마이크도 없는 손에 쥐어진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다봤다.“저 방금 세 번째 했거든요?”“그래서?”“사람이 세 번이나 발표했으면 칭찬 한 번쯤 해 주실 수 있잖아요.”강태혁은 노트북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세 번 다 별로였어.”“와.”채이는 허탈하게 웃었다.“교수님, 혹시 제가 발표를 잘하면 칭찬해 주실 생각은 있으세요?”“있어.”“언제요?”“잘하면.”저 인간은 정말 말로 사람을 죽이는 데 재능이 있었다.국제학회 발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은 지 나흘째. 채이는 진료와 수술, 회진을 소화하면서 발표 자료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강태혁은 퇴근 직전 그녀를 교수실로 불러 발표 연습을 시켰다.처음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태혁이 짚어 주는 부분은 대부분 정확했고, 자신이 놓친 논리적 허점도 분명히 있었다. 문제는 이 남자가 피드백을 하는 방식이었다.“첫 슬라이드부터 다시 봐. 네가 왜 이 환자를 선택했는지 설명이 부족해.”“선정 이유는 뒤쪽에 있습니다.”“청중이 뒤까지 들어 줄 거라고 생각해?”“…….”“첫 30초 안에 관심을 끌어야지. 네가 지금 발표하는 건 환자 기록 낭독회가 아니야.”채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게 더 열받았다. 틀린 말이면 반박이라도 하지.“그리고 이 부분.”태혁이 화면을 가리켰다.“네 판단의 근거가 뭐야?”“수술 전 영상과 수술 중 확인한 소견을 종합했을 때….”“그건 결과고. 당시 네가 어떤 근거로 판단했는지 설명하라고.”채이는 잠시 생각했다.“위험 요소를 먼저 배제했고, 그다음에 가능한 접근법을 비교했습니다.”“그걸 청중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네.”“다시.”채이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이 인간이 오늘만큼은 인간적으로 굴기를.“교수님.”“말해.”“저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거 아시죠?”“알아.”“내일도 수술이 있는 거 아시죠?”“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