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교통경찰의 말을 듣고 허진강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허경빈은 얼른 앞으로 나섰다.“그럼 지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초범이고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벌금이 부과되고 면허는 취소됩니다.”교통경찰은 송지아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그녀가 방을 나가자 허씨 부자만 남았다. 허진강은 방금까지 아들을 몰아세운 게 민망했지만, 허경빈은 그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아빠, 이제 아시겠죠? 제가 운전한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웃음이 나와? 지아가 그렇게 달리는데 옆에서 왜 안 말렸어? 얌전하던 애가 갑자기 과속을 하겠냐. 네가 잘못 가르친 게 분명해.”“아빠 눈에는 제가 그렇게 한심해 보여요?”“그래.”허경빈은 수술한 자리까지 더 아픈 것 같았다.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자기 탓이었다. 아버지 눈에는 숨만 쉬어도 못마땅할 모양이었다.조사를 마치고 나온 송지아는 부모님과 오빠가 모두 와 있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 하채린의 일은 허경빈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허경빈은 자신이 곁에서 말렸어야 했다며 잘못을 인정했지만, 송지아도 운전한 책임을 그에게 떠넘길 생각은 없었다.송씨 가족은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요즘 마음고생이 컸다는 걸 알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위험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을 뿐이었다.*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송지아는 가족을 놀라게 한 게 미안해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송윤재는 그런 동생을 보고도 빈정거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우리 얌전한 지아가 과속 운전까지 할 줄은 몰랐네. 경찰관님한테 직접 듣지 않았으면 안 믿었을 거야.”“넌 좀 조용히 해.”송현근이 아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아버지, 이번 일은 지아 편만 드시면 안 돼요.”“나도 위험했다는 건 알아. 지아야,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집에 돌아온 송현근은 딸을 앉혀 놓고 제법 ‘엄하게’ 타일렀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송지아는 새벽녘에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어머니가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들고
하채린 때문에 자신의 삶이 달라졌다. 그런데도 허경빈은 떠나지 않고 곁에 있었다. 송지아로서는 그 마음에 사랑 말고도 미안함이 섞여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었다.“미안한 마음이 있는 건 맞아.”허경빈은 부정하지 않았다. 흥분한 탓에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나 때문에 네가 이런 일을 겪은 것 같아서. 내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그는 양손을 허리에 짚고 숨을 골랐다. 송지아는 수술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게 걱정됐다.“경빈아, 진정해. 너 수술한 지 얼마 안 됐잖아. 너무 흥분하면 안 돼.”“지금 나보고 진정하라고? 어떻게 진정해!”허경빈은 한동안 삼켰던 말을 쏟아 냈다.“다른 건 다 의심해도 돼. 하지만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까지 의심하면 안 되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걸 동정이나 죄책감이라고 생각했어?”송지아는 눈만 깜빡였다. 허경빈은 그 얼굴을 보고 더욱 억울해졌다.“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보지 마. 나 지금 화났어. 쉽게 안 풀릴 거야.”그는 코웃음을 치고 말을 이었다.“동정해서 너랑 결혼까지 하겠다는 사람이 어딨어? 사랑하지도 않는데 평생을 함께하고 싶겠어? 나를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야? 미안하다는 이유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할 사람 같아? 너 아니면 안 되니까 아픈 척까지 한 거잖아. 송지아, 너 정말 너무해!”말이 한꺼번에 쏟아져 송지아는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그가 겨우 입을 다물었을 때도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왜 아무 말도 안 해? 할 말이 없어?”“네가 말할 틈을 안 줬잖아.”송지아가 겨우 대꾸했다.“그냥 마음에 걸려서 물어본 거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흥.”허경빈은 아직도 서운한 얼굴이었다.“내가 널 너무 사랑하니까 무슨 말을 해도 받아 줄 줄 알았지? 그래서 내 진심을 그렇게 막 의심한 거고.”“그런 뜻 아니야.”송지아도 묻지 않고 넘길 수는 없었다. 마음에 생긴 의문을 그대로 두면, 앞으로도 두고두
허경빈의 몸이 굳었다. 송지아는 무슨 대수롭지 않은 일을 묻듯 가볍게 말했지만,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지아야, 그게 무슨 뜻이야?”“궁금한 건 뭐든 물어보라며. 그래서 묻는 거야.”송지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 건 하채린 때문이고, 그 애가 나를 노린 데에는 너와의 일도 얽혀 있잖아. 그래서 나랑 함께 있는 거야? 미안해서, 보상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아서?”허경빈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그의 침묵에 송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괜찮아. 사실대로 말해 줘. 난 네 동정도, 보상도 필요 없어.”“송지아, 너…”허경빈이 말을 잇기도 전에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 순찰차 한 대가 그들 차 앞에 멈춰 섰고, 교통경찰 두 명이 내려 차에서 나오라고 손짓했다.“경찰관님, 잠깐 세워 둔 것뿐입니다.”허경빈은 그제야 차를 세운 곳이 주차 구역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그런데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의 얼굴을 본 교통경찰도 뜻밖이라는 듯 잠시 멈칫했다.“여기 차를 세운 것도 잘못이지만,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닙니다. 이 길에서 과속하며 난폭하게 달리는 차가 있다는 신고를 받았어요. 차가 드문 길이라고 마음대로 달려도 되는 건 아닙니다. 위법 행위인 거 아시죠?”“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허경빈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송지아도 눈을 내리깐 채 작게 말했다.“죄송해요. 그러면 안 됐는데…”교통경찰은 운전석에서 내린 송지아의 눈가가 붉은 것을 보고 두 사람을 번갈아 살폈다.“두 분이 다투셨어요?”그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아무리 화가 나도 목숨을 걸고 운전하면 안 됩니다. 사고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요? 다른 사람을 치기라도 했다면 그 사람은 무슨 죄입니까?”송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은 교통경찰을 따라갔다.*늦은 시간이었지만 교통관리 부서에는 아직 사람들이 있었다. 차를 긁어 서로 이야기
제정신인 사람의 생각도 다 헤아릴 수 없는데, 하물며 미쳐 버린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누군가를 해치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무심코 던진 눈길 하나, 스쳐 지나간 웃음조차 핑계가 될 수 있었다.“지아야, 넌 아무 잘못도 안 했어.”허경빈이 그녀의 눈가에 남은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송지아는 그의 손길을 받으면서도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내가 잘못한 게 없다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했는데?”허경빈은 하채린에 관한 일을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송지아는 이미 진실의 일부를 알았고, 지금 그녀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도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더 숨겼다가는 혼자 무슨 생각을 할지 걱정됐다.결국 그는 설도윤의 어머니와 하채린이 손잡고 꾸민 일부터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송지아는 몇 번이나 말을 잃었다. 설씨 집안까지 얽혀 있었다니. 온유란이 당한 교통사고마저 그 일과 이어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돌이켜 보면 짐작할 만한 순간도 있었다. 도정숙의 장례식에 나타난 하채린이 일부러 자신을 도발했을 때, 그 낯빛과 말투를 그냥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송지아는 송씨 집안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사업을 하면서 비열한 술수와 음해를 겪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이 남을 해치기 위해 이토록 잔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손끝부터 떨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죄는 듯 숨이 막혔고, 서늘한 두려움이 온몸으로 번졌다. 허경빈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이제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다 처리했어. 그 애가 다시 너한테 무슨 짓을 하는 일은 없을 거야.”“그럼…”송지아의 목소리가 떨렸다.“죽었어?”방금 들은 일을 떠올리면 하채린을 갈기갈기 찢어 놓아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허경빈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것만 알아 둬.”“네가… 죽였어?”송지아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허경빈은 그 물음에 걸음을 멈췄다. 밤이 됐는데도 바람은 뜨거웠고, 끊이지 않는 매미 울음이 어지러운 마음을 더 들쑤셨다.“경빈아, 내가 누구 얘기하는지 알지?”송지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허경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모르는 척했다.“오늘 왜 그래? 갑자기 죽었느니 어쩌느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너 알잖아.”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송지아가 먼저 웃었다.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졌지만, 허경빈은 그 웃음을 보며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너무 덥다. 우리 이제 집에 가자. 더 늦으면 아버지도 걱정하실 거야. 돌아갈 때는 내가 운전할게.”허경빈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줬다.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라디오에서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왔지만, 차 안에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허경빈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폈다. 송지아가 갑자기 M국을 꺼내고 ‘그 사람’의 죽음을 물었다는 건 무언가 알아냈다는 뜻이었다. 송씨 집안에서 조사한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말해 준 걸까. 무엇보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두려웠다.지난번처럼 송지아가 아무 말 없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차가 번화가를 벗어나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을 때, 그녀가 불쑥 물었다.“이 차, 개조한 거지?”“응. 예전에 주헌이랑 차 몰고 달리곤 했거든. 내 차는 대부분 손을 좀 봤어.”“나도 한번 달려 보고 싶어.”허경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송지아가 가속 페달을 밟았다. 몸이 등받이에 세게 밀착되자 그가 다급히 말했다.“지아야, 너무 빨라. 속도 좀 줄여.”이 속도에서 운전대를 조금만 잘못 꺾어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송지아는 앞을 보며 웃었다.“알아. 잘 앉아 있어. 무리 안 해.”허경빈은 속이 타들어 갔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송지아만 아니었어도 당장 욕부터 나왔을 것이다. 차를 빠르게 몰아 본 적도 없으면서 저게 어떻게 무리하지 않는 운전이란 말인가. 길에 다른 차가 거의
박윤희는 송지아의 눈빛에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고작 스물 몇 살 된 여자애다. 그런 애한테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어요. 내 딸을 돌려주지 않으면 당신들도 편히 못 지낼 거예요.”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에는 아직 흥분이 남아 있었다.“우리 집안이야 경성에서 평판이 좋지 않다지만, 송씨 집안과 허씨 집안은 다르잖아요. 그런 망신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송지아가 낮게 웃었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박윤희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뭐가 우스워요?”“하채린 씨가 왜 그렇게 뻔뻔한지 이제 알겠네요.”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박윤희는 이를 악물었다.“우리 채린이가 아무리 못났어도 적어도 아이는 낳을 수 있어요. 허경빈 씨가 당신과 결혼한다 해도 언젠가는 버릴걸요. 대를 이을 수도 없는데, 집에 장식해 두려고 데려가겠어요?”“박윤희 씨는 여자를 아이 낳는 도구로 보세요?”송지아의 물음에도 박윤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픈 곳을 정확히 알고 찌르듯 차분하게 말했다.“두 사람 다 아직 젊으니까 지금은 아이 없이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아가씨, 충고 하나 할게요. 남자가 아이를 못 가지면 입양이라도 하며 사는 사람이 있지만, 여자가 아이를 못 가지면 대개 이혼으로 끝나요. 언제 헤어지느냐의 차이일 뿐이지.”말끝마다 송지아의 상처를 헤집어 놓고도 박윤희는 멈추지 않았다.“돌아가서 잘 생각해 봐요. 며칠은 기다려 줄게요. 그때까지 내가 원하는 답을 못 들으면, 나중에 원망하지 말고요. 아이도 못 낳는다니 딱해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거예요. 이 정도로 좋게 말해 줄 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예요.”“저는 정말 하채린 씨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송지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윤희는 냉소를 흘렸다.“그럼 찾아봐요. 송씨 집안은 힘도 있고 아는 사람도 많잖아요. 난 답만 들으면 되니까요.”더 말해 봐야 소용없었다. 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