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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비단 아래의 청구서

Author: POT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9 11:25:44

기환은 태기가 확정되기 보름 전에 태자 처소의 물품을 주문했다.

“태자 처소요?”

“마마께서 그리 부르셨습니다. 황자도 아직 없는데 태자라고요.”

수선방 행랑의 뒷방이었다. 등불은 하나. 서진이 문 옆에 앉아 등잔을 들고 있었다. 누이 혼자 밤손님을 받게 둘 수 없다고 우겨서였다. 단비는 뒷문에 등을 대고 서 있었다.

“무엇을 주문했습니까.”

“요람. 유모 방에 걸 발. 침구 두 벌. 그리고… 이름 없는 것들이요.”

“이름 없는 것.”

“태자 처소 준비 물품이라고만 적으라 하셨습니다. 무엇을 사는지는 적지 말라고요.”

“요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유모 방에요. 아무도 눕지 않은 채로.”

“누가 적지 말라 했습니까.”

“매향 상궁이요. 마마의 말씀이라고.”

서련은 붓을 들지 않고 있었다. 기환의 눈이 자꾸 그 붓으로 갔다.

“보름 전이면 유익의 보고가 올라오기도 전입니다. 확정이라는 말도 없었을 때인데요.”

“마마께서는 확정될 거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미리 하라고요.”

“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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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위된 황후가 새 황제를 고른다   제116화. 황제의 체면값

    황제는 평복으로 왔고 신발에 흙이 묻어 있었다.뒤뜰을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큰길로 오면 등불이 따르고, 등불이 따르면 사람이 안다. 단비가 문을 열고 그대로 굳었다. 서련은 사무방에 등불을 하나 더 켰다.“어디로 모실까요.”“사무방.”“…방이 아니라요?”“방은 내 것이고 사무방은 일하는 곳이야. 폐하는 일로 오신 거야.”자기 방이 아니라 사무방이었다. 그것부터가 답이었다.“짐이 온 것을 아무도 모른다.”“신발이 압니다.”이겸이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앉았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섯 해 동안 이렇게 마주 앉은 적은 없었다. 그때는 늘 그가 위에 있었다.“돈은 짐이 돌려놓겠다.”그가 바로 말했다. 준비해 온 말이었다.“태기는 불분명한 일로 끝내자. 황실 체면이다.”“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지난가을 폐하께서 어디 계셨는지.”“안다. 남쪽에 있었다.”이겸의 손이 탁자 위에서 한 번 쥐어졌다.“그래서 짐이 끝내겠다는 거다. 짐이 아는 것을 온 궁이 알 필요는 없다.”“폐하의 거짓말을 정리해 드릴 의무는 없습니다.”서련은 등불 너머로 그를 보았다.“여섯 해 동안은 했습니다.”“그때는 아내였지.”“그때도 아니었어야 했습니다.”등불이 흔들렸다. 단비가 문밖에서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언제까지 그 말을 할 셈이냐.”“기억하셔야 할 때마다요. 그리 말씀드렸습니다.”이겸이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수선방의 품삯표를 보는 눈이었다. 읽는 눈은 아니었다.“네가 여기 있는 동안 진왕이 몇 번 왔느냐.”“세지 않았습니다.”“너는 다 세는 사람이다.”“품삯은 셉니다. 사람은 안 셉니다.”이겸의 턱이 굳었다. 그가 그 말을 삼키는 데 시간이 걸렸다.“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자리냐. 돈이냐.”“소월의 두 달 품삯이요. 유모로 뽑혀 기다린 아낙 둘의 품삯이요. 그리고 그 돈을 누가 안 줬는지 적힌 종이요.”“그런 것들 때문에 짐의 체면을—”“체면은 폐하께서 지키십시오. 저는 품삯을 지킵니

  • 폐위된 황후가 새 황제를 고른다   제115화. 먼저 쓴 답

    유익은 두 번 거짓을 썼다. 첫 사건 이전에 한 번, 이번에 한 번.“첫 번째는 지난 섣달이었습니다. 마마께서 태기가 있는 것 같다 하셨고, 저는 의심이라 썼습니다. 그런데 올라간 보고에는 확정이라 적혀 있었습니다.”“의원께서 고치셨습니까.”“아닙니다. 고쳐진 것을 보고도 아무 말 안 했습니다. 그게 제 값이었습니다.”“두 번째는.”“그믐밤입니다. 마마께서 유산이라 쓰라 하셨습니다. 저는 휘장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들어가지도 않고 소견을 썼단 말이오.”명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유익은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예.”“상궁은 그날 밤 어디 있었소.”“마마 곁에요.”“그럼 의원이 휘장 안에 못 들어간 것도 보았겠군.”매향이 대답 대신 웃었다. 그리고 그 틈에 들어왔다.“전 황후께서는 이제 의원을 믿으시는군요. 아까까지는 서른 냥에 산 사람이라더니.”“믿지 않습니다.”서련이 말했다.“서른 냥에 쓴 사람은 마흔 냥에 다시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원의 말 하나로 닫지 않겠습니다. 종이를 보지요.”유익의 어깨가 움찔했다. 서련은 그를 보지 않았다.명선이 눈짓하자 시종이 함을 들고 들어왔다. 어약방에 보관된 보고의 원본이었다. 서련이 그 종이를 펴서 대청 한가운데 놓았다.태기 의심. 의심이라는 두 글자 위에 먹으로 줄이 그어져 있고, 그 옆에 확정이라 적혀 있었다. 둥글고 예쁜 글씨였다. 유익의 글씨가 아니었다.서련이 소매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지난겨울 귀비께서 비단 세 필과 함께 보내신 치수표입니다. 옷은 짓지 않았지만 종이는 두었지요.”두 장이 나란히 놓였다. 확정이라는 글자와 소매 길이를 적은 글자. 같은 손이었다.“같은 손이오.”명선이 말했다. 매향의 눈이 두 종이 사이를 오갔다.“치수표는 시녀가 썼을 수도 있습니다.”“그럼 그 시녀가 어약방 보고도 고쳤겠군요. 그 시녀를 부르지요. 붉은 천을 안고 나온 사람 말입니다.”매향이 입을 다물었다. 서련은 세 번째 종이를 놓았다. 기환의 장부에서 뜬 사

  • 폐위된 황후가 새 황제를 고른다   제114화. 붉은 천을 걷는 손

    아이를 잃기 이틀 전에 상복을 주문한 사람이 있었다.“연화전 인장이 찍힌 전갈이었습니다. 급하다 하여 침방이 아니라 바깥 공방에 맡겼고요.”물품 담당 궁인은 서른쯤 된 여자였다. 명선의 대청 한가운데 서서 자기 장부를 읽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 이유가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발을 내렸는데도 대청이 더웠다. 올해 첫 더위였다. 태후전에서 온 늙은 상궁은 부채질을 멈추는 법이 없었고, 정온은 당사자라 자리에 없었다. 서련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앉으라고 서련이 정했다.“침방에 맡기면 침방이 압니다. 그래서 밖으로 보낸 겁니다.”“전갈을 가져온 사람은.”명선이 물었다.“매향 상궁의 아이였습니다.”매향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대청 끝 휘장 쪽으로 한 번 갔다가 돌아왔다. 휘장 뒤에는 의자에 앉은 윤소하가 있었다. 몸이 성치 않아도 제 이름이 걸린 자리에는 오겠다고 우겨서 온 것이었다.“아랫사람의 도리지요. 마마께서 위태로우시다니 미리 준비한 겁니다.”“누가 위태롭다 했소.”“의원이요.”유익이 무릎 위에서 손을 쥐었다. 서련이 장부의 다른 줄을 짚었다.“위태롭다는 말이 나왔다는 날과 상복을 주문한 날 사이에 이틀이 있습니다. 그 이틀 동안 어의는 한 번도 불리지 않았습니다.”“마마께서 어의를 싫어하셔서요.”“싫어하시는 어의 대신 공방에 상복을 맡기셨군요.”명선이 장부를 덮었다.“위태로운 사람을 두고 옷부터 짓는 집은 내 처소에서는 못 봤소.”태후전 상궁은 부채를 천천히 부치고 있었다.“그보다 공주마마.”매향이 말머리를 돌렸다.“소월이라는 아이가 백연전에 있다지요. 붉은 천을 들고 갔다고요. 내놓으시지요. 마마의 피가 묻은 천을 구경거리로 삼으시려는 게 아니라면요.”서련은 앞에 놓인 종이를 펴지 않았다.“천을 보여 드리진 않겠습니다. 날짜만 보여 드리지요. 날짜는 물들지 않으니까요.”“천이 없으면 소월의 말은 소문입니다.”“소월의 말은 소월의 이름으로 적혀 있습니다. 천은 소월이 아니라 시녀가 안고 나왔지요

  • 폐위된 황후가 새 황제를 고른다   제113화. 살아서 받을 품삯

    소월은 두 달째 품삯을 못 받았다. 그래서 거짓말을 요구받았다.“찍으면 밀린 걸 준다고 했어요. 안 찍으면 없는 거라고요.”자정이 가까웠다. 소월은 채운의 침방 겉옷을 걸치고 이불 보따리를 안은 채로 왔다. 밤에 이불을 나르는 침방 궁인을 세우는 사람은 없었다. 강무가 열 걸음 뒤에서 걸었고, 담 안으로 들어온 뒤에는 보이지 않았다.“전하께서 보내신 거지요? 청하지도 않았는데.”단비가 속삭였다.“청하지 않은 걸 아는 사람이야.”“종이를 가져왔어요. 찍지는 않았어요.”서련이 받았다. 연화전 궁인 소월은 그믐밤 백연전 의녀 정온이 약상 안의 약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그 아래 손도장 자리가 비어 있었다.정온이 어깨 너머로 읽었다.“그날 밤 저는 약상 뚜껑을 열고 약 이름만 읽었습니다. 어의 두 분이 옆에 계셨고요.”“그건 나중에 어의가 말할 겁니다. 지금은 소월의 말만 듣지요.”소월은 열여덟이었다. 손이 떨려서 단비가 준 물그릇을 두 손으로 잡았다.“저를 지켜 주실 수 있어요?”“지켜 준다는 말은 못 합니다.”소월의 얼굴이 무너졌다. 서련은 말을 끊지 않았다.“오늘 밤 잘 곳과 내일 아침밥은 됩니다. 그리고 당신 말은 제 손으로 적습니다.”“…그게 다예요?”“그게 답니다. 더 약속하는 사람은 더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시녀가 새벽까지라고 했어요. 새벽에 안 돌아가면…”“돌아가지 않습니다. 청원이 접수되면 부르는 쪽은 접수처입니다. 연화전이 아니라.”소월이 물을 마셨다. 그릇이 이에 부딪혀 소리가 났다.“품삯이 먼저입니다. 두 달이라 했지요.”“마마께서 연화전 돈이 모자란다고 하셨어요. 황손 준비에 다 들어갔다고요.”“황손 준비에 들어간 돈은 따로 세고 있습니다. 당신 품삯은 그 안에 없어요.”서련이 종이를 한 장 새로 폈다. 공주마마께 올리는 품삯 청원. 소월의 이름 자리를 비워 두고 붓을 건넸다.“이름을 적으십시오. 당신 손으로.”“제가요?”“손도장은 남이 시켜서도 찍습니다. 이름은 아는 사람만 씁니다.”소월

  • 폐위된 황후가 새 황제를 고른다   제112화. 비단 아래의 청구서

    기환은 태기가 확정되기 보름 전에 태자 처소의 물품을 주문했다.“태자 처소요?”“마마께서 그리 부르셨습니다. 황자도 아직 없는데 태자라고요.”수선방 행랑의 뒷방이었다. 등불은 하나. 서진이 문 옆에 앉아 등잔을 들고 있었다. 누이 혼자 밤손님을 받게 둘 수 없다고 우겨서였다. 단비는 뒷문에 등을 대고 서 있었다.“무엇을 주문했습니까.”“요람. 유모 방에 걸 발. 침구 두 벌. 그리고… 이름 없는 것들이요.”“이름 없는 것.”“태자 처소 준비 물품이라고만 적으라 하셨습니다. 무엇을 사는지는 적지 말라고요.”“요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유모 방에요. 아무도 눕지 않은 채로.”“누가 적지 말라 했습니까.”“매향 상궁이요. 마마의 말씀이라고.”서련은 붓을 들지 않고 있었다. 기환의 눈이 자꾸 그 붓으로 갔다.“보름 전이면 유익의 보고가 올라오기도 전입니다. 확정이라는 말도 없었을 때인데요.”“마마께서는 확정될 거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미리 하라고요.”“될 거라는 말로 궁의 돈을 씁니까.”“연화전에서는… 마마의 말이 곧 될 일입니다.”서진이 등잔을 조금 높였다. 기환의 얼굴이 젖은 종이 같았다.“지금부터 두 가지를 따로 말씀하십시오.”서련이 그제야 붓을 들었다.“시켜서 한 일과, 당신이 한 일.”기환이 움찔했다. 서련은 기다렸다. 등잔 기름이 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길게.“…유모 대금이요.”“두 번 배정된 것 말입니까.”“한 번은 마마 것이고, 한 번은… 제 앞으로 돌렸습니다. 마마 것은 아무도 안 세니까요. 그 옆에 하나 더 있어도 아무도 모릅니다.”“당신은 알았지요.”“…예.”서련이 적었다. 두 줄로 나누어. 기환은 그 종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시켜서 한 일은 시킨 사람 이름으로 적습니다. 당신이 한 일은 당신 이름으로요. 섞이면 둘 다 당신 것이 됩니다.”“그래서 제 이름을 나중에…”“면책은 제가 드릴 수 없습니다.”기환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서련은 붓을 놓지 않았다.“제가 약속할 수 있는 건 순

  • 폐위된 황후가 새 황제를 고른다   제111화. 확인하지 못한 것

    흔적이 없다는 말은 아이가 없었다는 말과 다르다. 서련은 그 차이를 알았다.그래서 백연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비가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답을 했다.“그럼 거짓이었던 거지요? 처음부터요?”“의녀가 한 말은 하나야. 최근에 유산한 흔적이 없다.”“그게 그 말 아닙니까?”“다섯 달 전 일은 지금 몸을 봐서는 몰라. 의녀도 그래서 그 말만 한 거고.”정온이 뒤에서 걸음을 맞추며 말했다.“맞습니다. 확인한 것만 말한 겁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그럼 뭘 확인해야 하는데요?”“아이가 있었는지가 아니라, 있었다고 쓴 근거가 뭐였는지.”단비가 입을 다물었다. 밤바람이 미지근했다. 초여름이 담 너머까지 와 있었다.방에 들어서자 서련은 등불부터 켰다. 탁자 위에 유익이 올린 태기 확정 보고의 사본이 있었다. 명선이 진료 협상 자리에서 얻어 준 것이었다.“회임 시작, 시월 스무이렛날 무렵.”정온이 읽고 종이를 내려놓았다.“달거리가 끊긴 날을 귀비가 말했고 유익이 받아 적었겠지요. 의원은 그 날짜를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누굽니까?”“그 무렵 폐하께서 밤마다 어디에 계셨는지 아는 사람.”정온이 서련을 보았다. 단비가 먼저 알아들었다.“거둥 기록요. 중궁에서 적던…”“황후는 폐하께서 어느 처소에 드시는지 매일 밤 적어. 내명부의 차례를 정하려면 그게 있어야 하니까.”“그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중궁을 비울 때 물건은 전부 내수고로 갔어. 그 함도 같이.”“공주마마께 청을 써야겠어. 내명부 기록이니 공주 관할로 열람을 청한다고.”“사사로운 이유는요?”“한 줄도 안 적어. 사사로우면 안 열어 줘.”서련은 그 자리에서 청을 썼다. 붓이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함은 이튿날 해 질 무렵에 왔다.명선의 시종이 내려놓고 간 함은 옻칠이 벗겨져 있었다. 서련이 뚜껑을 열었다.향내가 올라왔다.중궁의 향이었다. 여섯 해 동안 옷과 머리와 종이에 배어 있던 냄새. 서련의 손이 뚜껑 위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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