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연화전은 약 냄새보다 꽃향기가 짙었다.
창가에는 철을 잊게 하는 흰 꽃이 놓였고, 화로 위 은주전자에서는 물이 잔잔하게 끓었다. 서련은 그 온기를 밟고 들어갔다. 어젯밤 단비와 나누었던 차가운 밤 한 알이 혀끝에 되살아났다.
윤소하는 비단 이불을 허리까지 덮고 있었다. 얼굴에는 창백한 분을 발랐고 입술만 옅게 붉었다. 그녀가 손을 뻗자 상궁 금옥이 재빨리 팔을 받쳤다.
“언니.”
서련이 멈췄다.
귀비는 황제가 없는 곳에서 처음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다정함은 관객이 있을 때 가장 알맞게 꺼내졌다. 명선의 시종이 문가에 서고 정온이 탁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호칭은 서씨면 됩니다. 폐위 조서가 이미 내려왔으니까요.”
윤소하의 손이 이불 위로 내려갔다.
“제가 폐하께 몇 번이나 청했어요. 언니께서 그런 무서운 마음을 품으실 분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 말씀을 글로 주시겠습니까.”
“예?”
“재심에 필요합니다. 귀비께서 제 결백을 믿으신다는 말씀.”
윤소하가 금옥을 보았다. 금옥은 아무 말 없이 찻잔을 옮겼다. 서련은 앉으라는 말이 없었지만 빈 의자를 당겼다. 상궁의 눈썹이 꿈틀했으나 명선의 시종 앞에서 의자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믿고 싶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알겠습니다. 믿는다는 말과는 다르군요.”
서련은 정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녀가 가져온 문서를 펼쳤다. 귀비가 마셨던 석류청 항아리를 확인하고 남은 내용물을 보존해 달라는 명선의 요청이었다.
금옥이 앞으로 나섰다.
“병중이신 마마 앞에서 꼭 이러셔야겠습니까?”
“그래서 병세를 묻지 않고 항아리를 찾습니다.”
서련의 대답에 윤소하가 작게 기침했다. 금옥은 곧바로 물을 올렸다. 서련은 그 물을 받는 귀비의 손을 보았다. 떨림은 있었으나 잔의 손잡이를 찾는 동작은 정확했다. 그것만으로 거짓 병을 밝힐 수는 없었다. 서련은 관찰한 것을 마음속에 넣고 입을 다물었다.
“항아리는 버렸어요. 그런 흉한 물건을 곁에 둘 수 없어서.”
금옥이 너무 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정온이 조용히 말했다.
“귀비마마, 연화전의 약 담당에게는 봉한 채 보관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방 안의 꽃향기가 갑자기 답답해졌다.
윤소하는 기침을 멈췄다.
“제가 정신이 없어 잘못 알았나 봅니다. 금옥아, 가져오렴.”
금옥이 나간 동안 서련은 귀비의 침상 머리에 놓인 작은 향낭을 보았다. 자신이 지난해 하사한 것이었다. 귀비가 향에 취약하다 하여 향을 빼고 마른 꽃잎만 넣었던 물건. 이제 그 주변에는 강한 향이 가득했다.
“향이 불편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윤소하가 웃었다.
“몸이 달라지니 취향도 달라지나 봅니다.”
그녀는 배 위에 손을 올렸다. 황실의 혈통이라는 말이 조서에 적힌 까닭이었다. 서련은 그 손을 보며 분노보다 피로를 느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방패 삼는 사람 앞에서, 자신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증명하고 있었다.
정온은 귀비의 배를 보지 않았다. 심리에 청구된 것은 독살 미수였고, 지금 그녀에게 허락된 일도 항아리를 살피는 것뿐이었다.
금옥이 항아리를 안고 돌아왔다. 입구에는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 서련은 중궁에서 보낸 봉인의 매듭과 달라진 위치를 짚었다.
“이것은 연화전에서 다시 묶은 것이군요.”
“개봉해 드셨으니 당연합니다.”
“그 이후 누가 만졌는지 적어 주십시오.”
금옥은 마지못해 이름들을 불렀다. 정온이 받아 적는 동안 서련은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귀비께서는 청을 드시기 전에도 약을 드셨습니까?”
윤소하의 손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제가 원래 몸이 약한 것은 언니도 아시잖아요.”
“약을 드셨다는 뜻으로 기록하겠습니다.”
“저를 심문하러 오셨군요.”
귀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냐.”
이겸이었다.
서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은 꿇지 않았다. 황제의 시선이 그녀의 흰 머리끈에 멈췄다가 탁자 위 항아리로 내려갔다.
“병자를 몰아세울 만큼 여유가 있는 모양이구나.”
“사흘을 주셨으니 서둘러야 합니다.”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윤소하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았다. 서련은 그 익숙한 순서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자주 사과했는지 기억했다. 황제가 지친 날이니까. 귀비가 어린 사람이니까. 황후인 자신이 참아야 모두 편하니까.
오늘은 사과하지 않았다.
이겸이 정온을 보았다.
“가져가라. 다시는 이런 일로 귀비를 귀찮게 하지 말고.”
서련은 항아리를 든 정온에게 먼저 나가라 했다. 얻어야 할 것은 얻었다. 그러나 돌아서는 그녀를 황제가 불렀다.
“서련. 너는 짐에게 할 말이 없느냐.”
그녀는 문턱에서 돌아보았다.
“있습니다. 제 청원은 읽으셨습니까?”
윤소하의 숨소리까지 멎었다.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련은 그 침묵을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았다.
“내일은 읽고 오십시오. 제가 드릴 말씀은 거기 있습니다.”
혼인을 끝내는 조서는 이튿날 아침에 왔다.서련은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직접 읽었다. 황후의 폐위는 이미 시행되었고, 이제 황제 이겸과 서련의 혼인 관계도 종료되었다. 독살 미수의 무죄 판정과 사형 취소는 전날 조서를 그대로 따랐다. 지참 재산과 확인된 사유재산을 반환하고 거처를 스스로 정하도록 했다.이름 아래에는 황제의 서명이 있었다.서련은 종이를 접지 못하고 한동안 펴 놓았다. 결혼할 때는 여러 사람이 옷을 입혀 주고 머리를 올려 주었다. 끝날 때는 앉아서 자기 이름을 읽는 일만 남았다.단비가 작게 물었다.“슬프십니까?”“조금.”서련은 숨기지 않았다.“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았던 날들이 여기 이렇게 적혀서 끝나는 것이.”단비는 옆에 앉았다. 위로할 말을 찾느라 애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침 햇살이 문서의 붉은 도장 위로 옮겨갈 때까지 함께 있었다.최 내관과 금옥에 대한 처분도 전해졌다. 최 내관은 직에서 쫓겨나 허위보고와 인장 관리 책임으로 감금되어 후속 심문을 받게 되었다. 금옥은 황후의 인장을 도용한 허위 주문서 작성 책임이 인정되어 궁중 직책을 잃고 수감되었다. 강압 심문과 서진의 이송 방해는 관련 관리들을 따로 조사하기로 했다.윤소하는 귀비의 지위를 유지했다. 조태후의 비호 아래 약을 둘러싼 오해와 하인 감독의 잘못으로 처분이 줄었다. 다만 재심 과정에서 새로 드러난 사실을 이유로 지급되는 하사품과 처소 운영비 일부가 중단되었다.단비는 그 부분을 읽고 입술을 깨물었다.서련은 문서를 함 안에 넣었다. 귀비의 지위가 남은 것도, 자신에게 씌운 죄가 거짓으로 판정된 것도 함께 사실이었다. 한쪽이 미진하다고 다른 쪽의 성과까지 버리지 않을 것이다.“짐을 싸자.”돌려받은 물건은 생각보다 많았다. 옥비녀와 금장식, 의례 때 쓰던 향갑, 누군가 황후에게 어울린다며 보낸 색색의 비단. 서련은 소유가 확인된 물건들을 목록에 남기게 하고 필요한 것부터 골랐다.흰 혼례비단에 쓴 청원은 직접 접었다. 먹이 번진 곳과 명선의 손
“이것은 네가 원하던 판정 아니더냐.”명선은 서련이 지운 문장을 다시 보았다. 사형 취소와 황후 복위가 한 문서에 묶여 있었다. 궁에서 억울하게 쫓겨난 사람이 돌아갈 자리를 받는 것은 가장 완전한 보상으로 여겨졌다.서련은 붓을 내려놓았다.“목숨과 혼인을 한 문장에 넣지 말아 주십시오.”“황후가 아니면 네 앞에서 함부로 고개를 들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이미 보았습니다.”“앞으로 네 사람들을 지키기 더 어려울 수도 있다.”“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지킨다는 이유로 제가 돌아가야 합니까?”명선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서련은 공주를 원망하지 않았다. 공주가 아는 권력의 모양은 그 자리 안에서 가장 확실했다. 자신도 며칠 전까지는 다르지 않았다.“제 무죄를 먼저 정해 주십시오. 혼인을 끝내는 일은 따로 요청하겠습니다.”명선은 긴 숨을 내쉬었다.“황제는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제가 살아 있는 것도 그분께는 소란이었습니다.”최종 심리는 다음 날 아침에 열렸다. 서진은 정온의 허락 아래 잠깐 참석했다. 오래 서 있지 않도록 의자가 마련되었고, 이미 남긴 진술의 진위를 확인한 뒤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 상처를 드러내 보이라 하자 명선이 막았다.“몸의 상처는 의녀의 진료로 확인했다. 여기서 구경할 일이 아니다.”서련은 공주에게 눈을 맞추어 감사했다.석류청의 검사 결과, 실제 약의 거래 내역, 빈 종이에 미리 찍은 인장, 금옥의 주문서 작성 시인과 최 내관의 부실보고가 차례로 읽혔다. 처음 청을 만들었던 궁녀의 손도장 진술은 강압과 확인 부족으로 판단의 근거에서 빠졌다.“당사자의 진술을 바꾸게 한 관리도 조사하십시오.”서련이 말했다.“제 무죄만 쓰고 그 궁녀가 거짓말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마십시오.”종친들이 서로 눈을 교환했다. 명선은 그 요청을 판정에 포함했다. 서진에게 씌운 약재 반입 혐의도 근거가 없었고 구금을 해제한다는 문장이 붙었다.황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최종 문서를 오래 보았다.서련의 사형을 취소한다. 독살 미수의 혐의를
금옥은 빈 주문서를 하사품 정리용이라 했다.명선은 종이를 탁자에 펼쳤다. 약재상 표식이 찍힌 것과 황후의 인장이 찍힌 것은 여러 장이었고, 그중 한 장에는 두 표시가 함께 있었다. 글씨를 쓰면 누구의 명령으로 무엇을 구한 것인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종이였다.“하사품에 위해 약의 이름을 쓸 일이 있었느냐.”금옥은 대답하지 않았다.최 내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종이를 보자 금옥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서련은 그가 앉기 전에 물었다.“네가 이 종이에 인장을 찍었느냐.”“몇 장은 제가 찍었습니다. 목록을 나중에 적는다 하여…….”“누가 그렇게 말했지?”최 내관이 금옥을 보았다.상궁이 웃었다. 웃음에는 더는 예의가 없었다.“이제 와 저 혼자 했다고 하시려고요? 함을 들고 와 편하게 정리하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물품 목록인 줄 알았다.”“알고 싶지 않았겠지요.”서련이 손을 들어 둘의 말을 끊었다.“서로의 마음을 짐작하지 말고, 각자 한 일을 말해라.”최 내관은 인장을 먼저 찍은 빈 종이를 금옥에게 남겼다고 시인했다. 정해진 목록을 써 올린다는 말을 믿었다. 서련이 아파 누워 있던 날이었고 황제의 하사품 정리라는 명분이 있었다. 인장함을 다시 닫기 전 다른 종이에 도장을 더 찍었는지는 금옥만 알고 있었다.상궁은 한참 침묵한 끝에 자신의 손으로 문제의 주문서를 작성했다고 했다.단비의 숨이 크게 들렸다.“황후를 모함하려고?”명선이 물었다.“마마의 잘못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금옥이 고개를 들었다.“중궁은 늘 귀비전의 청을 뒤로 미뤘습니다. 궁인도 물품도 제때 주지 않았고, 마마께서 가시는 자리마다 황후의 이름이 먼저 나왔습니다.”서련은 금옥을 바라보았다. 그 말 안에 섞인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었다. 후궁 처소의 물품 청을 늦춘 날도 있었다. 다만 귀비전만 그런 것이 아니었고, 부족한 비용을 맞추느라 자신의 장신구를 줄인 달도 있었다.“늦어진 물품이 내 사형의 이유가 되느냐.”“그렇게까지 될 줄은…….”“독배를
서진은 죽을 앞에 두고도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서련은 그 옆에 앉아 자기 그릇부터 한 술 먹었다. 밥을 먹어도 된다는 허락을 기다리는 동생에게 괜찮다고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함께 먹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소금이 조금 모자라다.”그녀가 말하자 서진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누나는 늘 짜게 먹었어.”낯익은 투정이었다. 서련은 웃다가 목이 메어 물을 마셨다. 서진은 그제야 숟가락을 들었다. 첫 술을 삼킨 뒤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듯 주위를 보았다.방에는 누이와 정온만 있었다. 단비는 치료받으러 갔고 강무는 길에서 붙잡은 자를 인계했다. 문 앞은 명선의 시종이 지켰다. 누구도 서진에게 당장 증언하라고 하지 않았다.“오늘은 씻고 쉬십시오.”정온이 말했다.서진은 그릇을 내려놓았다.“제가 말하지 않으면 누나가 죽습니까?”서련의 손이 멈췄다.그 질문 속에 감옥의 며칠이 남아 있었다. 누이를 살리고 싶으면 인정하라 했을 것이다. 누이가 너를 버렸으니 혼자라도 살아남으라 했을지도 몰랐다. 서련은 듣지 않은 말을 사실처럼 묻지 않았다.“재심은 이미 열렸다. 네 말 하나에 내 목숨을 매달지 않겠다.”“그래도 알아야 해.”서진이 고개를 들었다.“내가 하지 않은 일을 적으라 했어. 중궁으로 약을 날랐고, 누나의 명을 들었다고. 거절하면 누나가 독을 마실 때 옆에 세워 두겠다고 했어.”정온이 물잔을 가까이 옮겼다. 서련은 동생의 손을 덮으려다가 먼저 물었다.“손을 잡아도 되니?”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손에는 정온이 감은 천의 감촉이 있었다. 서련은 힘을 주지 않고 가만히 놓았다.“네가 무슨 말을 했어도 먼저 살아와야 했어.”서진의 얼굴이 구겨졌다.“아무것도 못 했어.”“돌아왔잖아.”“누나를 지킨 게 아니야.”서련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아버지가 죽은 뒤 동생은 줄곧 제 몫을 해야 한다고 했다. 누이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고, 서씨의 마지막 남자로서 가문을 일으키겠다고. 스무 살의 아이에게 어른들이 얹어 놓은 말이었다
길을 막은 수레에는 곡식이 없었다.강무는 엎어진 자루가 터지는 것을 보고 고삐를 당겼다. 쏟아진 것은 모래였다. 운반꾼 둘이 서둘러 길을 치우는 시늉을 했지만 삽날은 자루가 아니라 서진의 수레 쪽으로 향해 있었다.“문을 닫으십시오.”그가 말하자 정온이 수레 휘장을 당겼다. 단비는 문서함을 무릎 아래 넣고 서진의 어깨를 받쳤다. 동생은 좁은 좌석에 앉아 있었다. 눈썹 안의 흉터는 기억과 같았지만, 그 아래 눈은 한참 다른 사람이었다.“누나가 보낸 사람이 맞습니까?”그가 아까부터 묻던 말을 다시 했다.“예. 제가 단비입니다.”“알아요. 그런데 자꾸 꿈 같아서.”서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단비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정온이 먼저 허락을 구하고 갈아 감아 준 천 아래로 손목이 가늘었다.바깥에서 나무가 부딪혔다.수레 바퀴를 노리고 던진 장대가 길을 가로질렀다. 강무는 칼을 뽑지 않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날붙이를 먼저 드러내면 황명을 수행하던 인원이 길에서 행인을 베었다는 말이 남을 수 있었다. 공주의 시종이 이송 명령을 높이 펼쳤다.“황명으로 관련인을 옮기는 중이다. 길을 열어라!”운반꾼 하나가 달아났다. 다른 하나가 수레 옆으로 붙었다. 손에 숨겼던 짧은 칼이 빛났다. 강무가 그의 손목을 장대에 눌러 바닥으로 꺾었다. 칼이 돌바닥에 떨어졌다.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불길이 올랐다.엎어진 자루 밑 마른 짚에 붙은 불이었다. 길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수레 밖으로 몰아내려는 일이었다. 정온은 젖은 천으로 서진의 입과 코를 가리게 했다.“뒤 문으로 내립니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몸을 접었다. 발목에 힘을 주자 숨을 삼켰다.“못 걸으셔도 괜찮습니다. 들어 옮기면 됩니다.”정온의 말에 그가 천천히 팔을 내밀었다. 단비는 문서함을 집으려다 멈췄다. 함 안에는 신원 확인서와 이송 명령 사본이 있었다. 궁에 남긴 원본이 또 있었다.그녀는 함을 버리고 서진의 팔을 어깨에 걸었다.문서함 모서리가 바닥
황제의 서명은 자정이 넘어서 도착했다.북문 밖 옛 군량창에 수용된 서진을 명선공주가 지정한 별실로 이송하라. 담당 관리와 종친 측 입회인이 함께 신원을 확인하고, 이동 중 건강을 살피라는 내용이었다.이현이 사람과 수레를 마련하려 하자 서련이 명을 다시 읽었다.“강무가 동행할 수 있습니까?”“공주가 입회인으로 지명하면 가능하오. 수용소 안의 지휘권은 원래 관리에게 있고.”“그 부분까지 써 주십시오. 문 앞에서 다투는 동안 또 사람이 사라지면 안 됩니다.”명선은 피곤한 얼굴로 붓을 들었다. 강무를 입회인으로, 정온을 진료 담당으로 적었다. 공주의 시종이 문서를 두 벌 베껴 하나는 궁에 남겼다. 이현은 궁문까지 배웅할 수 있었지만 사병을 붙일 수는 없었다.서련은 동행하겠다고 했다.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명선이 먼저 반대했다.“네가 궁 밖으로 나가면 도주를 핑계 삼을 것이다.”“신원을 확인할 사람이 필요합니다.”“서진을 아는 사람은 네 시녀도 있다.”단비가 앞으로 나섰다. 손목은 천으로 감겨 있었다. 서련은 그 손을 보며 이번에는 자신이 말릴 차례라는 것을 알았다.“어제 다쳤다.”“걸을 수 있습니다. 대감님 얼굴도 압니다.”“무서운 일이 있을 수 있어.”“여기도 있었습니다.”서련은 더 말하지 못했다. 자신의 기다림을 덜려고 아이의 선택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그래도 보내기 싫다는 마음이 한꺼번에 올라왔다.단비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저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위험하면 정온 의녀의 말을 듣고 물러나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약속은 못 드립니다. 알아보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드립니다.”서련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 약속이면 된다.”그녀는 동생의 특징을 적었다. 왼쪽 눈썹 안의 작은 흉터, 오른손 약지의 오래된 굽음. 누군가 다른 죄인을 서진이라 내보내더라도 이름만 듣고 속지 않도록 했다. 마지막에는 겨울이면 발꿈치가 잘 트니 부드러운 신을 가져가 달라고 썼다.정온이 그 줄을 읽고 약상자 옆에 솜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