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최나인은 이번처럼 내금위장이 반가운 적이 없었다.
“나으리!”
“마마, 지난 번 다치신데는 괜찮으신지요?”
“네 급하게 뛰다 한번 뒹굴어서 얼굴에 살짝 생채기가 났을 뿐입니다. 다른데는 괜찮습니다.”
“천만 다행입니다. 나인 쪽은 어떻소? 괜찮으시오?”
내금위장이 최나인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저도 특별히 다친 곳은 없사옵니다.”
“모두들 정말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대사헌 대감이 움직인 거 같습니다. 매우 치밀하고 단호한 자라 정말 위험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도를 찾아야 할 듯 합니다.”
“나으리, 아무래도 아씨가 연산군의 따님이라는 소문이 난 듯 하옵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소. 대사헌 대감이 자객을 보낸 것 같소. 허니 거처를 옮겨야 할 듯 하오. 어서 채비하시오.”
“예? 지금 당장 말씀이시옵니까? 하루 말미를 주시면.....”
“시간이 없소. 본인들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가 눈치 채고 대비하기 전 다시 급습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오. 어차피 세간도 얼마 안 되지 않소? 빨리 짐을 꾸리시오. 말은 준비해 놓았으니 초경에는 출발해야 하오.”
십년의 세월은 강상류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그야말로 순식간에 흘러갔다. 보따리 하나 가지고 들어 왔으나 보따리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이었다. 홀연히 들어왔고 홀연히 떠날 뿐이었다. 십년 전 강보에 싸여 궁녀의 품에 안겨 있었던 영수는 이제 눈매가 초롱초롱하고 가슴도 봉긋한 어엿한 아씨가 되어 있었다. 영수는 조심스럽게 내금위장이 준비해 둔 말에 올랐다. 그 뒤를 최나인이 뒤따랐다.
“여기서부터 한 시 남짓 달리면 미리 일러 둔 주막이 있소. 거기서 묵고 하루 더 가면 정한 곳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오.”
내금위장이 감정의 동요 없이 말했다.
…………………………………………………………………..
“주모! 우리에게 방을 내어 주시오!”
“예 나으리, 제일 안 쪽으로 방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우리는 내일 동이 트기 전 떠날 것이오. 혹시라도 누구를 찾는 낯선 이들이 오면 적당히 둘러 데시오.”
내금위장이 주모에게 동전 꾸러미를 쥐어 주며 말했다.
“예 나으리 걱정 놓으십시오. 그리 하겠습니다!”
“나으리, 어디를 가시려고요?”
방을 나서려 하는 내금위장에게 최나인이 불안한 듯 물었다.
“혹시 몰라 말을 숨겨 놓고 오겠소. 눈 좀 붙이고 계시오. 금방 돌아 오겠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금위장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씨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거에요!”
영수의 불안한 눈빛에 최나인은 안심시키려 했지만 자신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인지도 몰랐고 내금위장이 자신들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몰랐다.
바다 한 가운데 방향도 키도 잃은 뱃사공 같은 처지에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일경(一更) 끝자락이었다. 세 명의 사내가 주막에 들어왔다.
“주모는 나오시오. 손님 받으시오.”
주모가 눈을 비비며 나오는 순간, 세 명 중 키가 제일 큰 한 사내가 주모의 입을 막았다. 옆구리에는 날카로운 쇠붙이의 이물감이 느껴졌다.
"왜 이러십니까."
“오늘 묵는 손님 중 남자 하나와 여자 둘이 함께 온 자들이 있는가? 사실대로 말하라. 만일 거짓을 고하는 순간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것이다.”
“예예 있었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동이 트기 전 떠난 다 하여 제일 안쪽 방을 내주었습니다. 저쪽입니다.”
주모가 벌벌 떨며 대답했다.
“얼른 확인해 보거라.”
여전히 주모를 붙들고 있는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자가 다른 한 사내에게 눈빛을 보냈다.
“예!”
사내가 허둥지둥 돌아왔다.
“나으리 아무도 없습니다. 빈방입니다.”
“아닙니다. 분명 저에게 동트기 전 떠난다고 하였습니다.”
주모가 울듯이 대답했다.
“이미 도망친 듯 하다. 방에 온기가 느껴지고 사람의 발자국도 있다. 멀리 못 갔을 게다. 얼른 쫓아 가자!”
주모를 동댕이치고 난 후,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수하들과 급히 주막을 나섰다.
………………………………………………………………………………
“나으리, 아까는 동이 트기 전에 떠난다 하지 않으셨는지요?”
영수가 물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혹시 몰라 말을 숨기고 오는데 반대 쪽에서 사내 두어 명이 올라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심란하여 빨리 떠나자 한 것입니다. 혹시 우리를 뒤쫒는 자들일 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내금위장의 비장한 목소리에 최나인과 영수는 입을 다물었다. 싸늘한 밤공기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느껴졌다. 일시 가량을 쉬지 않고 달리니 점점 여명이 밝아 왔다. 논밭과 집들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이었다.
“여기서 일각 정도만 가면 됩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드디어 내금위장의 말이 멈춰 섰다. 그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영수와 최나인이 뒤따랐다.
“끼-익”
대문은 꽤 오랜기간 사용을 하지 않았는지 뻑뻑한 느낌이 들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법 너른 앞마당과 대청마루가 보였다. 깨끗하게 쓸어 놓은 마당과 세월의 흔적은 보였으나 제법 잘 보수되어 있는 어엿한 양반집이었다.
최나인의 얼굴에 갑자기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곳이 저희가 지낼 곳인가요? 나으리?”
“그렇소. 사실 전하께서 영수 마마에게 집 한채와 노비 열다섯을 하사하셨소. 아울러 논과 밭을 각각 반 마지기 씩 내리시고 삶에 불편함이 없도록 돌보라 명하셨소. 전하께서 '내 조카를 잘 돌보라' 고 친히 말씀하셨소.
자객의 급습에 시기가 위태로워 미리 알리지 못한 점 송구하오.”
“나으리 여기가 어디쯤 되옵니까?”
“이천 땅이오.”
최나인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궁은 이보다 몇십 배 크고 화려하고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늘 외롭고 긴장되고 고단한 곳이었다.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고 두려움도 가시지 않은 상황에, 임금의 은혜로 이제 어엿한 보금자리에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최나인은 가슴이 벅차 올랐다.
“아씨 감축드립니다. 정말 전하의 아량이 하늘과 같사옵니다. 아니 그렇사옵니까?”
사실 영수는 진성대군(중종의 대군시절)의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늘 자애롭게 대하던 휘신 공주의 모습만 그림자처럼 스쳐 지날 뿐, 그 외의 궁중의 왕실 종친들은 영수의 머리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숙부는 한없이 인자하고 차분한 모습의 용안일 것이라고 상상만 할 뿐이었다.
“아씨께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하늘도 감동했나 봅니다.”
최나인은 입가에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벌써 영수와의 새로운 인생이 머리속에 한 폭의 수묵화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계절이 한 바퀴 돌고, 또 돌았다.동산의 강아지풀은 여전히 바람에 눕고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봉분의 흙은 이제 단단히 굳어 있었다. 비가 내려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그 위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영수는 흐트러져 자란 풀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가려 냈다.귀여운 여자 아이가 짧은 다리로 마당을 토끼처럼 뛰어다녔다.“어머니!”영수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최나인이 속삭였다.“마님, 나으리랑 마님을 어쩜 반반씩 닮았는지요”영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몇 해가 더 흘렀다.아이는 글자를 배운다. “하늘 천, 따 지…”서툰 손으로 붓을 잡는다.영수가 묻는다.“이름이 무엇이냐.”아이가 또박또박 답한다.“화진.”영수는 잠시 멈췄다.밤이면 아이 팔에 감아 둔 한이 사 왔던 그 낡은 비단 손수건을 꺼내 보았다. 이제 수놓았던 글씨도 바래서 옅어졌다. 영수는 한동안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곱게 접어 함에 다시 넣었다.영수와 화진은 손을 잡고 장터에 내려갔다.누군가 속삭였다.“저 아이가 그 집 딸이라지?”영수는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 손을 더 단단히 잡고 속으로 다짐했다.“이제는 내가 네 이름을 지킬 것이다.”멀리서 병판의 가마가 다가오다가 가마가 잠시 멈추었다.장막이 살짝 들리며 시선이 마주쳤다.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수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내 가마가 천천히 움직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영수와 화진은 한이 묻힌 동산에 함께 올랐다. 화진이 꽃 한 송이를 봉분에 조심스럽게 놓아 두었다. 영수는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았다.“어머니, 제 이름은 무슨 뜻입니까.”“빛날 화(華), 보배 진(珍). 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란다. 누구도 함부로 부르지 못할 이름이지.”“어머니, 제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네 아버지는…..”영수는 잠시 목이 메였다.“세상에서 이 어미만을 연모하신 분이었다.네가 태어나던 날… 그분이 마지막으로 웃으셨단다.”바람이 두사람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화진
“마님 승철이옵니다.”“그래 승철아, 알아낸 것이 있느냐?”“예, 마부의 집은 이미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웃의 말로는 이사한 지 한 석달 되었다 하옵니다. 아마 마부가 밀반출한 화약을 싣고 떠난 직후인 듯 하옵니다.”“그렇구나. 그래 혹시 어디로 이사를 갔다더냐?”“그건 이웃도 모른다고 하옵니다. 갑자기 소문도 없이 이사를 갔다 하옵니다. 하온데…”영수는 귀를 쫑긋 세웠다.“마님… 화약 인계를 맡았던 군관이 있었습니다. 그 자가 며칠 전 병조 좌랑으로 승진했다 합니다.”“화약이 사라졌는데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말이냐.”“오히려 공을 세웠다 하더이다. 변방 화약 유통 체계를 정비했다는 명목이라 합니다.”“그래 승철아 네가 이번에도 크게 수고를 했구나. 계속 사라진 마부 주변을 잘 감시하거라. 분명히 단서가 더 있을 것이다.”“예 마님.”‘분명 화약을 내주고 승진한 사람은 필시 뭔가가 있을 것이야. 반드시 알아내야 겠다!’영수는 다짐을 하고 짐을 꾸렸다.………………………..“병조좌랑! 자제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지?”“아닙니다 대감! 이렇게 불러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그래 술 한잔 하세나. 자 받게”“예, 대감!”“마지막 뒤처리까지 잘 부탁하네 흔적이 남으면 나중에 귀찮아 질걸세. 그날 기록은 남길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예 대감, 명심하겠사옵니다.”“자네가 내 사람이 되어 참으로 기쁘이. 자. 한 잔 더 받게”병조판서의 집에서 나온 병조좌랑은 골목에서 쓰개치마를 입고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수였다.“아이고 깜짝이냐 뭐냐! 이런.”“나으리, 어디를 다녀 오시는지요?”“넌 누구냐? 네따위가 뭐길래 어디서 왔는지 묻는 게냐? 썩 물러나라.”“나으리, 제가 병판대감 댁에서 나으리가 나오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사옵니다. 이번에 승진하셨다지요?”“넌 도대체 누구냐? 누구길래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것이냐?”다소 겁에 질린 듯한 좌랑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저는 지난 화약 밀
봉분에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아 붉은 채로 있었다.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열어라. 관에서 나왔다.”영수는 아이를 안은 채 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최나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 나섰다.문이 열리자, 푸른 도포를 입은 군관 둘과 아전 하나가 서 있었다.“이 집에 거하는 한수의 처가 누구냐.”“접니다.”영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아전이 서책을 펼쳤다.“한수는 국경 인근에서 불온한 물건을 나른 혐의가 있다.죽었다 하나,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가산과 호구를 조사할 것이다.”최나인이 분개했다.“사람이 죽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러시는 겝니까?”영수가 조용히 손을 들어 막았다.“무슨 물건이라 하셨습니까.”군관이 영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관의 화약이다.”아이를 안은 영수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증좌가 있습니까?”잠시 공기가 멈췄다.아전이 눈을 치켜올렸다.“지금 따지는 것이냐.”“따지는 것이 아닙니다.”영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억울한 자의 집을 뒤지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할 터.남편은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이미 눈을 감은 자에게 죄를 더 씌우는 것이 관의 도리입니까.”군관의 눈이 가늘어졌다.“말조심하라.”“저는 조심하고 있습니다.”영수는 아이를 고쳐 안았다.“호구를 보시려거든 보십시오.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역적으로 꾸미려 하신다면… 그 일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그 말에 군관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연산의 피.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집 안을 훑던 아전이 낮게 속삭였다.“이 아이도 기록에 올려야겠군.”그 순간, 영수의 눈이 달라졌다.슬픔은 사라지고, 다른 것이 자리 잡았다.“아이의 이름은 제 입으로 올릴 것입니다.”조용했지만 물러섬이 없었다.군관은 한참을 바라보다 서책을 덮었다.“오늘은 기록만 하겠다. 그러나 다시 부를 것이다.”문이 닫혔다.잠시 후, 최나인이 속삭였다.“마님… 어찌 그리 담담하십니까.”영수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
대청 마루에는 밤마다 서늘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한은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한은 말이 없어졌고 점점 야위어 갔다. 최나인은 한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했고 영수는 소리를 내지 못한 채 가슴으로 울었다.“부인”“예, 서방님”“우리 아가를 이리 주시오. 한 번 안고 싶소.”“예”이제 제법 무거워 진 아이를 한의 품에 안겼다.“이 아비를 용서해 다오.”아이를 안고서 한참을 가만히 있자 아이는 답답한지 몸을 비틀었다. 한은 아이를 다시 영수에게 건네 주었다“서방님…?”다음 날 아침 영수가 그의 손을 흔들었다.“서방님, 제발… 눈 좀 떠 보세요.”대답은 없었다.눈은 반쯤 열린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아이는 어미 옆에서 무슨 일인지 모른채 몸을 좌우로 한들고 있었다.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한의 손을 가슴에 끌어안았다.그 손이,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 영수는 아이를 안고 동산에 올랐다.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리던 언덕이었다.혼인을 약조하던 날 강아지풀이 바람에 너풀 거리던 그곳, 길을 떠나던 날,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던 그곳, 영수에게는 추억이 많은 그 동산을 한을 묻고 난 뒤 다시 올랐다. 차가운 꽃샘바람이 가슴을 꿰뚫었다. 그렇게 영수는 한을 가슴에 묻었다.‘아가야 아버지는 널 정말 사랑했단다. 그리고 하늘에서도 늘 너를 지켜 주실 거야.’영수는 한을 목놓아 불렀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나무 숲은 빽빽하게 울창하여 낮인데도 마치 밤처럼 느껴졌다. 새 지저귐이 나무 사이에 울려 퍼져 메아리로 갈라졌다.“이제 이 숲만 빠져나가면 마지막 성문이 보일게요. 거기 지나서 강이 보이면 거기가 바로 국경이오. 거기까지만 가면 되오.”본진 마차를 모는 마부가 말고삐를 바짝 당겨 쥐었다. 한이 뒤를 바짝 따랐다. 한 식경쯤지나니 빽빽했던 숲이 조금씩 헐거워 지며 빛이 드러났다. 햇빛을 받으니 짐을 덮은 천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휘익’흑마를 탄 십여 명의 무리들이 좌측과 우측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한이 활을 쏘기엔 이미 너무 가까웠다. 한은 검을 꺼냈다. 검을 들고 경계하며 본진 마차로 접근하는 순간, 마부가 별안간 단도로 한의 옆구리를 찔렀다.‘욱’얼굴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한은 발로 마부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악’마부는 엉덩방아를 찧자마자 얼른 일어나더니 앞쪽으로 물러섰다.“살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 보아라.”“처음부터 속일 속셈이었던 게요?”한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차피 돌아가 봐야 너는 변명조차 못할 신세 아니더냐. 짐승 밥이 되지 않길 빈다. 놓아주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라.”“왜 나를 끌어 들인 것이오?”한이 물었다.“여기까지 무사히 오는 데 보호해 줄 호위무사가 필요했다. 이제 네 역할은 끝났으니 당장 꺼져라.”한은 분노가 들끓었으나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마부와 숲에서 나타난 검은 무리들이 마차 두 대를 자신들이 데려 온 말에 연결시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한은 분노를 삼키며 뒤에서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서방님! 얼굴이 대체… 서방님”영수가 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몸이 얼었다.‘퍽’영수를 보자마자 한이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얼른 안으로 모셔라 얼른!”최나인이 옆에 같이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승철이에게 소리쳤다.한은 이틀을 사경을 해맸다. ‘악 으악’식은땀을 흘리는 한은 계속 허공에 헛소리를 질러 댔다.“서방님, 정신 차리세요! 서방님!”
그날 이후 조정에서는 그 누구도 영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명분을 앞세워 권력을 탐하고 숙적을 제거하는 데 능숙한 신하들은 영수가 그들의 먹이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새 알아 차렸다. 조정에서 영수의 이름은 이미 의미 없는 존재 였으나 밖에서는 달랐다. 밖의 여론은 더 느리고 집요했다. 영수가 연산의 자식이며 게다가 서자와 비밀 혼인을 한 사실이 연기처럼 서서히 퍼져 나갔다.“이보게 한수 나 좀 잠깐 보시게나.”행수가 창고에서 짐관리를 하는 한수를 불렀다.“예 행수 어른. 무슨 일이시온지요?”“자네 우리 가게에서 일한 게 얼마나 되었지?”“이제 일년 넘은 것 같사옵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음. 그게 흠흠.”행수가 뜸을 들였다.“사실 우리 숙부가 당신의 아들을 우리 상단의 호위 무사로 좀 써달라 하시네. 물론 그 아이보다 자네가 뛰어나다는 걸 잘 알지. 자네를 계속 두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세. 허나 나 세상이라는 게…. 혼자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예”“이번 달 말까지만 일해 주면 될걸세. 미안하게 되었네 자 그리고 이건 좀 챙겨 두게 내 자네 처와 자네를 생각해서 좀 더 쳐줬네.”동전 꾸러미를 한에게 거의 떠넘기듯 건네 준 행수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한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너무 괘념치 마시어요. 나으리”이 소식을 들은 최나인이 한수에게 부드럽게 위로했다.“아마도 나으리와 우리 마님과의 혼인, 그리고 우리 마님의 출생 때문에 행수 어른도 부담이 되셨나 봅니다.”“서방님, 제가 서방님 만나기 전에 유모랑 밭도 갈고 옷도 만들고 해서 생계를 유지 했습니다. 그때 처럼 살면 됩니다. 걱정마세요. 서방님.”“….고맙소 부인”영수의 양손을 다정하게 잡은 한수의 표정이 내내 어두웠다.………………… 그날 밤, 한수는 집을 나섰다.최나인과 영수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숨결이 고른 것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닫았다.골목 끝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한수.”달빛을 등진
그날 밤 영수는 꿈을 꾸었다.자신이 냇가를 건너려 하는 데 불어난 물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을 디디는 순간 미끄러져 물살에 떠내려 갈 것 같았다. 산나물을 가득 뜯은 광주리를 양손에 붙들고 어떻게 해서든 물을 건너 보려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갈 길도 없었고 거기서 밤을 지샐 수도 없었다.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한 사내가 뒤에서 오더니 말을 건넸다.‘업히시오. 얼른 업히시오. 내가 저쪽으로 낭자를 데려다 주겠소.’익숙한 목소리와 풍채, 그리고 체취, 그 사내는 한이었다. 영수는 놀라
“유모 쇠스랑의 모가지 부분이 덜렁거려 아무래도 곧 탈이 날 거 같아. 내가 오늘 장에 내려가서 새것으로 사와야겠어.”“아씨. 저는 기옥이네 김매는 밭에 품앗이 해주러 가기로 되어 있는데 어쩌죠?”“응. 나 혼자 얼른 다녀 올 수 있어. 유모 이따 봐”영수는 엽전 몇닢을 귀주머니에 넣고 채비를 했다. 웬지 장에 가는 마음이 가볍고 설렜다. …… 영수가 장에 노리개에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다.“낭자, ...영수 낭자?”영수가 사뭇 놀라 위를 올려다 보았다. 한도령이었다.“어. 도련님. 한 도련님 아니신지요?”그 이름이
악 아-악’지나가는 마차의 바퀴가 갑자기 빠져 굴러 왔다. 놀란 말이 앞발을 크게 치켜 들었다. 말 위의 사내가 다급하게 고삐를 채 보지만 이미 늦었다. 말은 그대로 영수를 향해 달려들었다.사내가 고삐를 놓으며 몸을 날렸다. 영수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굴렀다. 먼지가 일고 숨이 서로 맞닿았다. 영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싼 채 영수가 몸을 서서히 일으킬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난전의 주인인 듯한 여자가 나와 소리 질렀다.“아이고 내 물건. 아이고.”말이 발버둥을 치다 가게의 좌판을 건드려 물
정적을 가르는 것은 승덕 어멈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불이야! 안부엌에 불이 났다!"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인시의 끝자락에 모두들 깜짝 놀라 마당으로 뛰어 나왔다. 안채 뒤편에서 매캐한 연기가 솟구쳤다. 아궁이 근처에 쌓아둔 마른 짚단에 불씨가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불길은 부뚜막을 타고 올라와 나무 기둥을 핥기 시작했다. 승덕어멈은 두 손을 걷어 부치고, 당황해 멈춰 선 종들의 어깨를 거세게 밀치며 호통을 쳤다."멍하니 서서 무엇들 하시오! 어서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길어 오시오! 어서!"그녀의 서슬 퍼런 외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