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비는 현흥궁을 떠난 뒤 곧장 영화궁으로 갔다.궁녀 만추가 공손히 말했다.“영비마마,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안에서 중요한 일을 두고 의논 중이시니, 뵙기 어렵습니다.”의논?막 대혼을 치렀는데 무슨 의논할 일이 있다는 거지?대낮부터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괜찮다. 조금 뒤에 다시 오마.”만추는 말하고 싶었다. 아마 나중에 다시 와도 황후마마를 뵙긴 어려울 것 같다고 말이다.궁 밖.정자.서왕은 서신에 적힌 대로 황제로 변장하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그는 유화에게 은밀히 매복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명령했다.멀리서 보니 정자 안에 여인이 서 있었다.가까이 가니 그녀는 삼사십 대쯤 되어 보였고, 흰옷을 입은 채 수척하고 연약한 모습이었다.서왕은 정자 밖에서 멈추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네 눈이 마주쳤고, 여인은 눈물로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저는 당신이 절대 저를 다시 만나려 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서왕은 다소 의아했다.이 말을 들어보니, 이 여인과 황제는 구면인가?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상황을 살폈다.여인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며, 눈빛에는 깊은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저는 정말 큰 죄를 지었습니다.”“황자… 아니, 이제 당신은 황제가 되었군요.”“예전에 제 잘못 때문에 숙비마마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겁니다.”“저는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절 지독히 미워하고 있다는 걸요.”“이제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제 죄를 씻고 용서를 구하고 싶을 뿐입니다.”서왕은 이 말을 들으며 의문이 깊어졌다.이 여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그녀는 황제가 황자일 적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숙비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는 듯했다.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뒤에서 유화의 놀란 외침이 들렸다.“전하, 조심하십시오!”햇빛 아래, 여인의 손에 있는 물건이 반짝였고, 그것은 단검처럼 보였다.그녀는 방금까지의 연약함을 버리고 단검을 들고 눈앞의 남자에게 덤벼들었다.그 공격은 매우 빨랐고, 그녀의
어전.소욱은 서왕으로부터 모든 사건의 전말을 들은 뒤,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을 드리웠다.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눈빛이 마치 날이 선 칼날 같았다.“그 여인은 어디에 있느냐!”서왕은 황제가 그 여인을 언급할 때 눈에 가득한 증오를 눈치챘다.“옥사에 있습니다. 신이 이미 사람을 시켜 그 자를 감금해 두었습니다.”소욱은 위엄 있는 얼굴에 한기를 띠며 냉랭하게 명령했다.“천옥으로 옮겨라.”“예.”천옥.이곳에 갇힌 죄수는 많았으며, 그중에는 사건에 연루된 관리와 심지어 황실의 친척도 있었다.그들은 성가신 소리를 내며 황제에게 구걸했다.“폐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폐하, 제발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폐하, 소인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소욱은 그들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느릿느릿 앞으로 걸어갔다.그의 머릿속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가득했다. 그녀의 슬픈 모습, 고통스러운 모습, 그리고 절망에 빠져 높은 곳에서 떨어지던 모습까지…어머니는 과거의 일로 인해 항상 우울해했다. 어머니를 완전히 무너뜨린 마지막 사건은 어머니의 궁에서 선황과 간통을 벌인 궁녀 때문이었다!그는 그 궁녀를 잊지 못했다. 그녀는 항상 연약한 척하며 동정을 유도하곤 했다.그 후,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그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찾아 죽이려고 했었다!이제, 그녀가 감히 다시 나타났고, 심지어 암살을 시도했다니!“폐하, 그 여인은 저 안에 있습니다.” 서왕이 그의 생각을 끊으며 앞의 한 형방을 가리켰다.소욱은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자 즉시 옥졸이 감방 문을 열었다.그 후, 그는 큰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진한길은 그 뒤를 따르며 언제든 황제를 보호할 준비를 했다.어차피 그 여인는 본래 황제를 암살하려던 자였다!형방 안, 여인의 손발은 쇠사슬로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손바닥만 했다.그녀는 몸부림치며 소욱에게 달려들려 했고,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소욱은 그녀 앞에 서서 어두운 눈빛을 내비치며, 억누를 수 없는 폭풍
요녀의 얼굴은 연약해 보였으나, 이 순간 먹구름이 드리운 듯 어두웠다.그녀는 소욱의 등을 바라보며 비웃었다.“생각지도 못했겠죠! 모두가 선황께서는 병으로 죽었다고 생각했을 테니 말입니다. 심지어 그 자신도 그렇게 믿었죠.”“하지만 사실은, 제가! 제가 독을 썼습니다!”“폐하, 제게 정말 감사해야 될 겁니다.”“선황께서는 신중한 사람이셨습니다. 허나 그 당시 저를 불쌍히 여겨 숙비마마께서 저를 궁으로 들이신 덕에, 제가 선황께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소욱의 눈빛은 냉랭했다.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을 자극하려는 것뿐이었다.그러나, 선황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그의 어머니를 마치 헌 신짝처럼 내버린 그 남자. 황제로서 별다른 잘못은 없었을지 몰라도, 아버지와 남편으로서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다!“저 여인이 살고 싶어도 못 살게 하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게 하라!”소욱은 이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요녀를 한 번 더 보는 것조차 그의 눈을 더럽히는 일처럼 느껴졌다.“예!” 천옥의 옥졸들이 공손히 답했다.그들은 죄수를 어떻게 고문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서왕은 떠나기 전 요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는 살기와 더불어 깊은 증오가 서려 있었다.그녀는 누구를 증오하는 것일까?어째서 계속해서 황제를 암살하려 한 걸까?그는 그녀의 배후에 있는 자가 반드시 남제를 위협하려는 자일 것이라 추측했다.그래서 옥졸들에게 따로 명령을 내렸다.“가능하다면 심문하라. 저 자가 하는 모든 말을 기록하라.”“예, 폐하.”황궁.봉구안은 동방세에서 온 소식을 받았다.그들이 이미 순풍을 잡았으나, 약쟁이에 관한 어떤 단서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다.그녀는 여기서 가만히 기다릴 수만은 없어, 만추에게 장서각에서 책을 여러 권 가져오게 했다. 대부분은 기문이록과 같은 것들로, 약쟁이에 대한 기록이 있을지도 몰랐다.오늘 한가한 틈에 그녀는 이미 가져온 책 세 권을
봉구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욱에게 말했다.“사모님께서 북방으로 돌아가신답니다.”소욱은 그들이 서로 아쉬워하며 이토록 우울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는 봉구안의 어깨를 감싸며 맹 부인에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구안이는 이제 제 사람입니다. 어떤 위협이나 고통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구안이가 사모님을 찾아가고 싶다면, 저는 막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사모님께서 언제든 궁에 들어와 구안이를 보셔도 좋습니다.”물론, 이 혜택은 맹 부인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맹 장군은 북방을 지키고 있어 직무를 떠날 수 없었다.맹 부인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황제 폐하, 감사드립니다. 이리 말씀해 주시니, 이제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겠습니다.”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소욱은 제안했다.“같이 저녁을 드시고 가십시오. 오늘을 사모님을 위한 환송연으로 삼겠습니다.”맹 부인은 봉구안을 한 번 바라본 뒤,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폐하와 마마께서는 신혼이지 않습니까?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맹 부인이 떠난 뒤, 궁인들은 저녁상을 차렸다.봉구안과 소욱은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식사 중에는 두 사람 모두 그 마음을 숨긴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저녁 식사 후.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폐하…”“구안아, 나…”“폐하께서 먼저 말씀하시지요.”봉구안은 막 말하려던 이야기를 삼켰다.소욱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곧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나도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먼저 말하거라.”봉구안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오늘 아침에 폐하께 말씀드린 약쟁이 무리들과 제 사형의 일 말입니다.”소욱은 그 이야기를 기억했다.그때 그는 신혼의 달콤함에 빠져 그녀에게 자세히 묻지 않았다.“그래, 기억한다. 이어서 말해보거라.”소욱은 그녀에게 유난히도 인내심이 많았다.봉구안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양연삭이 죽은 이후, 약쟁이에 관한 일은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본래 약
소욱은 평생 잊지 못했다. 여섯 살 되던 해, 어머니의 생일이었다.그날 밤, 선황은 그의 어머니의 처소였던 미앙궁에 왔다. 그의 어머니는 몹시 기뻐하며, 이른 저녁에 손수 국을 끓이며 선황을 기다렸다.유모가 자신을 데리고 나가며 다정히 말했다.“황자님, 오늘 밤 마님께서는 황제 폐하와 시간을 보내실 거예요. 어서 가서 푹 쉬도록 하세요.”유모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다시 사랑을 받을 것이고, 그러면 미앙궁의 날들도 편해질 것이라는 의미였다.그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가 화해하길 바랐다. 어머니가 다시는 슬퍼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그날 밤, 달빛이 참 아름다웠다.”소욱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선황께서는 몹시 지친 듯이 보였고, 침상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술에 취할까 염려하여 몸소 해장국을 끓이러 나가셨지.”“그리고 다시 대전에 돌아왔을 때, 선황께서 그 궁녀를 총애하고 계신 모습을 보셨다.”봉구안은 손을 들어 그를 감싸 안았다. 아무 말없이 그의 마음을 달래고자 했다.이 모든 것은 소욱이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비밀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였다.“그 궁녀는 그날 이후로 미인으로 승격됐다. 그런데 어머니는 며칠 지나지 않아 뼈만 남은 듯 수척해지셨어.”소욱은 말을 이어갔다.“그날 밤, 눈이 펑펑 내렸다. 꿈을 꾸다가 깨어난 나는 어머니를 찾으려 대전으로 달려갔었지. 그러나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갔다. 그 끝에서, 어머니께서 높은 곳에서 떨어지시는 모습을 보았다.”소욱의 말투는 싸늘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내가 이리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내가 그 궁녀를 불쌍히 여겨 어머니 곁에 두게 했던 내 손길이, 결국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봉구안은 그의 아픔과 후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소욱이 어째서 후궁의 암투와 간사한 여인들을 혐오했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그는 어릴 적 이미 속고, 이용당하고, 깊이 상처받았던
어전.서왕은 요녀의 자백서를 올렸다.소욱은 한눈에 대강 훑고, 시선이 ‘북연’ 두 글자에서 멈췄다.서왕의 눈은 건조하고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폐하, 요녀의 말에 따르면, 그 자는 북연의 간첩으로, 과거 선황을 암살하여 남제를 혼란에 빠뜨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그리고 지금 북연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폐하를 암살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소욱은 차갑게 자백서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네 생각에, 그 자가 한 말들 중 몇 할을 믿을 수 있겠느냐?”소욱의 목소리는 냉담했으며, 그의 눈은 티끌 하나 용납하지 않는 냉기를 품고 있었다.서왕은 솔직히 대답했다.“중형 아래에서 얻은 자백이니, 사실이 담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다만 이 자가 정말로 간첩이라면, 보통 인물이 아닐 것입니다. 신 또한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지만 선황께서 이 자의 손에 의해 피해를 입으셨다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신이 선황의 생존 당시의 맥진 기록을 다시 살펴보았는데, 그 자가 독을 쓴 시기와 병증이 딱 들어맞습니다.”소욱의 시선은 겨울의 눈처럼 차가웠다.“이미 모든 걸 자백했다면, 더 이상 살려둘 필요는 없겠구나.”서왕은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예, 폐하.”서왕은 물러날 준비를 하며 몸을 돌렸으나, 소욱이 그를 불러 세웠다.“이번에 자네가 내 모습으로 분장하여 혼자 약속 장소에 나갔다지?”서왕의 몸이 살짝 멈추었다. 황제가 오해할까 염려되어 즉각 설명을 덧붙였다.“폐하께서 혼례를 올리신 직후, 모든 크고 작은 일을 신에게 맡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간첩이 보낸 서신이 신에게 전달된 것입니다.”“신이 서신을 처음 보았을 때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숙비마마의 일을 묻히게 할 수 없었기에, 부득이하게…”말을 하던 서왕은 한숨을 내쉬고 깊이 예를 올렸다.“신이 주제넘게 행동한 듯 싶습니다.”소욱은 천천히 그에게 걸어가 직접 부축했다.“내가 너를 책망하려는 뜻은
감옥.완부옥은 두 손으로 감옥 문을 잡고 있었다. 평범한 죄수들과는 달리 그녀의 행동에는 요염함이 가득했다. 마치 감옥 문에 감긴 아름다운 뱀처럼 곡선미가 돋보였다. 그녀는 문 너머의 서왕을 바라보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전하, 황제 폐하를 연모하고 계십니까?”서왕의 눈동자에 어두움이 드리웠다.완부옥은 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살짝 웃었다.“제 말이 맞죠? 제가 맞춘 거죠?”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황성에 머문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이미 서왕에 대한 정보를 다 조사해 두었다.지난 몇 년 동안, 서왕의 곁에는 특별히 의심스러운 애인이 없었다. 대신 그는 자주 소욱과 함께 있었고, 두 사람은 종종 어마장에서 시간을 보냈다.그런 정황을 보니, 서왕이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은 황제 소욱이 분명했다!서왕은 그녀의 웃음소리에서 조롱 섞인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완부옥은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전하! 잠깐만요! 전하,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러세요?”“얼굴이 그렇게 얇아서야 되겠어요?”“아니면… 제가 이 사실을 폐하께 전해볼까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왕은 다시 발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감옥 문 너머로 그녀의 옷깃을 움켜잡으며 낮게 말했다.“충고하는데, 사람답게 살거라.”완부옥은 겁먹기는커녕 도리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전 전하가 겁쟁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소심하군요.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안 그러면 고생은 결국 전하의 몫이 됩니다.”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낄낄거리며 웃었다.순간 그는 모용란의 조롱섞인 표정이 떠올랐다.모용란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비밀을 쥐고 암암리에 자신을 협박했었다.서왕은 그런 완부옥의 태도를 참을 수 없었다.“그럼 대체 나더러 어찌 하란 말이냐!”완부옥도 결국은 모용란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완부옥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과하게 침착한 것은 좋지
즐거운 날들은 항상 짧기 마련이었다.대혼례를 치른 지 사흘째 되는 날, 소욱은 아침 조회에 나가야 했다.평소라면 정시에 기상하여 단 한 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으나, 이제 옆에 절세의 미인이 누워 있으니 그저 일어나기가 아쉬웠다.전날 밤은 영화궁에서 머물렀다. 소욱은 눈을 뜨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안으려 했으나, 허공만을 붙잡았다.그는 순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휘장을 걷어 올렸다.“황후는 어디 있느냐!”유사양이 외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소욱의 목소리를 듣고 급히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폐하, 황후마마께서는 동이 트기 전부터 일어나 계셨습니다. 지금은 밖에서 무예를 연마하고 계십니다.”유사양도 꽤 놀랐다. 역시 군영 출신의 황후다웠다. 황제보다 더 일찍 일어날 줄이야.소욱은 황후가 일찍 일어나 무예를 닦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이른 시각부터 일어날 줄은 몰랐다.궁전 밖.봉구안은 간소한 의복을 입고 머리를 높이 묶었다. 그녀의 머리끝이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고, 멀리서 보면 마치 젊은 낭군처럼 씩씩하고 당당해 보였다.먼저 오금희를 통해 몸을 풀고, 새로 얻은 적연검으로 몇 가지 검술을 연마했다. 이후 장창을 잡고 무예를 이어갔다.여명 속 햇살은 마치 그녀를 편애하는 듯 전부 그녀에게 몰려드는 것만 같았다.이른 아침 일을 시작한 궁인들은 그녀를 보고 발길을 멈췄다.그들은 곳곳의 구석에 모여 몰래 지켜보았다.“황후마마께서는 정말 대단하시군요!”“예전부터 듣기로는 이 맹 소장군이 창술 하나는 일품이라고 하더니, 직접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하... 뭐라고 할까, 황후마마께서는 사내들보다 더 씩씩하시다니까. 정말 영웅호걸이 따로 없구먼. 내 가슴이 다 두근두근거리네.”“크흠!” 유사양이 일부러 크게 기침하자, 회랑 처마 아래 몰려 있던 궁인들이 놀라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유사양은 소욱을 뒤따르며 몰래 그의 안색을 살폈다.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그렇듯, 여인이 지나치게 눈에 띄거나 집안일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