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새벽부터 정문이 소란스러웠다. 엘로라는 창밖을 내다보다 숨을 멈췄다.
며칠째 소식이 없어 애가 타던 참이었다.그레이스령까지는 말을 달려도 왕복 엿새가 걸리는 거리였다.“조사대예요.”로웰의 목소리가 떨렸다.엘로라는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뛰쳐나갔다.“폐하!”칼리안도 이미 정문에 나와 있었다.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말에서 내리는 기사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갑옷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대열 끝에는 들것에 실린 사람이 있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칼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기사대장이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폐하, 그레이스령 폐허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습니다.”“뭐라고, 매복이라니?”“누군가 저희가 갈 걸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출발 날짜와 경로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지.”칼리안의 물음에엘로라 역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벼랑 끝에 몰린 짐승처럼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그 눈동자 속에는 결코 꺾이지 않는 단단한 심지가 깃들어 있었다.“이 사람은 협박당한 피해자예요. 죄인이 아니라.”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만큼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엘로라. 뒤로 물러나 있어, 위험하니까.”칼리안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낮게 경고했다.그의 손에 쥔 검신에서 서늘한 기운이 번뜩였다.“싫어요. 로이 님을 이렇게 두고 갈 순 없어요. 저 때문에 시작된 일이에요.”로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말렸다.굵은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황녀님, 저 때문에 다치시면 안 됩니다. 부디… 제발 저를 두고 피하세요.”“조용히 하세요. 지금은 제가 정할 일이에요.”엘로라의 단호하고도 단단한 태도에, 로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의 눈빛에는 황녀를 향한 깊은 죄책감과 고마움이 뒤섞여 복잡하게 요동쳤다.“하, 하지만 저희는 후작님의 명을 받고 온 사람들입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사병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리며 주춤거렸다.그러나 칼리안은 그들의 변명을 단칼에 잘라내었다.“그 명령이 잘못됐다는 걸, 지금 이 순간 깨달아야 할 거야. 네들이 눈이 멀지 않았다면 말이다.”칼리안이 서슬 퍼런 검을 겨눈 채 한 걸음 다가섰다.발걸음 소리마다 묵직한 압박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다시 한번 묻지. 물러날 건가, 아니면 여기서 반역죄를 하나 더 추가할 건가.”사병들은 서로의 눈치를 팽팽하게 살피며 극심한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황제를 직접 상대하는 것은 명백한 반역이자 죽음으로 가는 길
서기관실 앞.그곳에는 이미 기사들이 몰려와 있었다. 소문은 빠르게 번졌다.지나가던 시녀들까지 걸음을 멈추고 웅성거리고 있었다.“무슨 일이지.”칼리안이 그리 물으면서 다가섰다.그러자 기사 하나가 낮게 보고했다.“서기관이 후작가와 내통한 정황이 발견됐습니다.”엘로라의 눈이 커졌다.“로이 님이요?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니에요?”“증거가 명확합니다, 전하. 서기관실 문서에서 유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기사의 말에 칼리안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내가 직접 만나보지.”*서기관실 문이 열리고, 창백한 얼굴의 로이가 끌려 나왔다.“폐하, 저는…”“일단 안으로.”칼리안의 명령에, 사람들이 물러났다. 좁은 방 안엔 칼리안과 엘로라, 그리고 로이까지 딱 세 사람만 남았다.“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로이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죄송합니다, 폐하.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엘로라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차근차근 말해라.”“후작이… 제 어머니를 빌미로 협박했습니다. 그레이스가 관련 기록을 넘기지 않으면, 어머니를 해치겠다고요.”엘로라의 표정이 흔들렸다.“그래서 정보를 넘긴 거예요?”“…네. 조사대의 출발 경로도, 제가 넘겼습니다.”칼리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럼 습격도 네가.”“저는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렇게까지 할 줄은…”로이의 목소리가 떨리며 갈라졌다.“믿어주십시오, 폐하. 사람이 다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엘로라가 그의 앞에 무릎을 낮춰 눈을 맞췄다.“로이 님, 왜 진작 저희한테 말씀 안 하셨어요.”“…무서웠습니다. 후작이 어머니를 진짜로 해
집무실,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부상당한 부대장을 돌보는 의원들의 발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이 증언서, 진짜라고 믿어?”칼리안이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믿고 싶지 않지만… 앞뒤가 너무 맞아떨어져요.”엘로라의 목소리가 떨렸다.“레이너드 후작이 그동안 왜 그렇게 제 신분에 집착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증거를 없애려고?”“아니면, 제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위협이었겠죠.”“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화가 나네요. 제 존재 하나가 누군가한텐 위협이라니.”칼리안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위협이 아니야. 그자들이 두려워하는 거지.”단테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폐하, 하지만 이 증언 하나만으로 후작을 몰아세우기엔 부족합니다.”“무슨 뜻이지.”“노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은 자의 증언은, 법정에서 힘을 갖기 어렵습니다.”칼리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럼 이 인장 반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그것도 정황 증거일 뿐입니다. 후작이 발뺌하면 그만입니다.”엘로라가 물었다.“그럼 대체 뭐가 있어야 확실한 증거가 되는 건데요.”“살아 있는 증인, 혹은 후작이 직접 쓴 문서 같은 것이겠지요.”단테가 답하자 엘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하아… 그런 게 남아 있을까요.”“없으면 만들어야죠. 아니, 찾아내야 합니다.”단테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뗐다.“로웰도 그날 봉인고 정리에 참여했었지.”“그렇습니다. 유모님이라면 뭔가 더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엘로라의 얼굴이 굳었다.“유모를 또 몰아붙여야 한다는 거예요?”“몰아붙이는 게 아니야. 이제는 유모도, 숨길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엘로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그럼 이 상황을 이대로
새벽부터 정문이 소란스러웠다. 엘로라는 창밖을 내다보다 숨을 멈췄다.며칠째 소식이 없어 애가 타던 참이었다. 그레이스령까지는 말을 달려도 왕복 엿새가 걸리는 거리였다.“조사대예요.”로웰의 목소리가 떨렸다. 엘로라는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뛰쳐나갔다.“폐하!”칼리안도 이미 정문에 나와 있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말에서 내리는 기사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갑옷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대열 끝에는 들것에 실린 사람이 있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칼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기사대장이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폐하, 그레이스령 폐허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습니다.”“뭐라고, 매복이라니?”“누군가 저희가 갈 걸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출발 날짜와 경로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지.”칼리안의 물음에 기사대장이 잠시 머뭇거렸다.“…폐하와 단테 경, 그리고 서기관실을 거쳐야 했으니 서기관 몇 명 정도입니다.”“서기관실이라.”칼리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엘로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럼… 다친 분은요?”“부대장이 크게 다쳤습니다. 목숨은 붙어 있지만, 아직 의식이 없습니다.”로웰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세상에.”“당장 치료실로 옮겨. 최고의 의원을 불러.”칼리안의 명령에 기사들이 서둘러 부대장을 들것째 옮겼다. 로웰이 그 뒤를 따르며 낮게 기도를 읊조렸다.“증거는요? 가져오셨어요?”엘로라가 다급히 물었다. 기사대장이 품속에서 낡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이것만은 반드시 지켜냈습니다.”기사대장의 손이 상처투성이였다. 목숨을 걸고 지켜낸 흔적이 역력했다.“고생했다.
회의가 끝난 뒤, 후작은 핏발 선 눈을 감춘 채 굳은 얼굴로 황급히 자리를 떴다.그의 등 뒤로 가라앉은 대기 속에서, 엘로라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후작의 위태로운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폐하, 이대로 물러날 것 같지 않은데요.”단테의 낮고 무거운 말에 칼리안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아니겠지.”“하지만 이제 우리도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아.”‘이번엔 절대 끝까지 가겠어.’엘로라는 주먹을 가볍게 쥐며 다짐했다.‘전하.’로웰이 인파 속을 헤치며 다가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정말… 정말 잘하셨어요, 아가씨.”“유모.”“이제, 그 상자를 보여드릴게요.”엘로라의 눈이 크게 커졌다.“드디어요?”“네.”이제는 정말 때가 된 것 같아요.낡고 빛바랜 목조 상자가 그녀의 손에 조심스럽게 건네졌다.묵직한 상자의 뚜껑을 여는 손끝이 얇게 떨려왔다.그 어두운 안쪽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펜던트가 오랜 침묵을 깨고 조용히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이게… 제 어머니의 유품인가요?”“네, 아가씨.”이제야 비로소 돌려드리네요.로웰의 주름진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엘로라는 떨리는 손으로 그 펜던트를 집어 들어 가슴에 꼭 쥐었다.오랫동안 세상에서 지워져 있던 잃어버렸던 조각 하나를, 마침내 제자리에 되찾은 기분이었다.“유모, 그동안 저를 지켜주느라 정말 고마웠어요.”“아니에요, 아가씨. 제가 오히려 더 고맙죠. 이렇게 올곧고 강하게 자라주셔서.”칼리안이 두 사람의 애틋한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이제 진짜 시작이네.”“네, 폐하.”진짜 시작이에요.엘로라는 망설임 없이 그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가슴에 닿는 차가운 은속이 체온에 의해
“증, 증거가 있습니까?”후작이 간신히 짜낸 목소리는 아슬아슬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동안 자신만의 성역처럼 휘두르던 권력의 세 바닥이 흔들리고 있다는 공포가 그의 핏발 선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쳤다.“증거는 현재 철저하게 준비 중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진실은 어떤 말로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엘로라가 물러서는 법 없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쇳소리를 닮아 회의장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말뿐인 주장 아닙니까! 명백한 물증도 없이 이 자리에서 왕실의 권위를 흔들다니요!”후작이 목소리를 높여 반박하려 애썼지만, 이미 주변의 공기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엘로라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날카롭게 받아쳤다.“그럼 후작님은, 왜 그렇게 제 출생에 집착하셨죠? 나라의 안위가 아니라, 유독 제 존재 자체를 흠집 내려 혈안이 되어 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순간 회의장이 침묵에 잠겼다.후작은 일순 말문이 막혀 입술을 달싹였다.“단지… 제국을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핏줄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야말로…”“그런 것치고는 유독 저를 노골적으로 견제하셨잖아요. 사사건건 제 발목을 잡으려던 그 수많은 행동들이 과연 제국을 위한 충정이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한 비겁한 발악이었습니까.”대신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그동안 후작의 권세에 눌려 입을 다물고 있던 이들의 눈빛에 미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그때, 칼리안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스치듯 서며 낮게 속삭였다.“잘했어. 흔들리지 마.”‘떨려 죽겠네 정말.’엘로라가 아주 미세하게 목소리를 떨며 대답했다.“안 그래 보였어. 아주 완벽했는걸.”한 노신사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의중을 물었다.“폐하, 그럼 이 사안은 조사대가 공식적으로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