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평화롭던 정원의 공기가 단번에 얼어붙었다.
달콤한 꽃향기와 머리칼을 간지럽히던 밤바람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그 자리에는 오직 끈적한 긴장감과 불길한 예감만이 가득 찼다.칼리안의 품에 기대어 창밖의 봄을 감상하던 엘로라는 제 어깨를 감싸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폐하!”멀리서 들려온 비명에 가까운 외침.뒤이어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거칠게 때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달려온 것은 근위대장이었다.평소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던 제국 최고의 기사였다. 그런 그의 지금 얼굴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칼리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의 눈동자는 이미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무슨 일이지.”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명백한 불쾌함과 경고가 서려 있었다.감히 이 완벽한 밤기름 먹인 장작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불길이 한 바퀴 둥글게 돌며 붉은 벽이 되었다.열기에 공기가 일렁여, 그 너머 사람들 얼굴이 물속처럼 휘었다.비명과 발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엘로라!"칼리안이 그녀를 품 안에 끌어넣었다.분수대 위, 사방이 불이었다.불의 벽 바깥에서 세드릭이 고함을 질렀다.흑장미 사병들이 물동이를 쏟아부었지만, 기름 위의 불은 물을 먹고 도리어 치솟았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이 데었다.망토 자락에 불티가 튀었다.칼리안이 그것을 맨손으로 쳐냈다.손등이 금세 벌겋게 부풀었다."손……!""가만있어."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녀의 망토 깃을 여몄다.목덜미 한 치도 드러나지 않게.데인 손가락이 그녀의 턱 밑에서 미세하게 떨렸다.계단 위에서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불길을 넘어왔다."보라! 신의 불이 마녀를 심판한다! 이십 년 전처럼!"남은 사제들이 그 말을 받아 외쳤다.외침을 먹은 듯 불이 한 길 더 솟았다.'엄마.'이 불이었다.엄마를 삼킨 불.엘로라의 무릎이 제멋대로 떨렸다.눈꺼풀 안쪽까지 뜨거워서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손바닥이 땀으로 미끄러웠다.그때 배 속이 크게 뒤채었다.두 개의 맥이 한꺼번에.배를 덮은 칼리안의 손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방금.""폐하도 느끼셨어요?"대답 대신 반지가 빛났다.은빛이었다.이어 그녀의 배에서, 보랏빛이 아닌 맑은
포고문이 붙은 지 반나절 만에 수도가 끓었다.시장 상인들이 덧문을 내렸고, 골목 어귀마다 사람들이 머리를 맞댔다.교단을 믿는 목소리와 원로원의 황후를 기억하는 목소리가 부딪쳤다.그 소란이 서쪽 별채의 창유리까지 웅웅 떨게 했다.대성당 앞 광장에는 수천이 모였다.계단 위에서 사제들이 성가를 불렀다.그 아래, 몇몇이 발치의 돌을 주워 손바닥에서 굴렸다.돌이 어디로 날아갈지는 아직 아무도 정하지 않았다.종탑에서 비둘기 떼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가, 내려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광장 위를 맴돌았다."가지 마."칼리안은 창가에 등을 기댄 채였다.엘로라는 거울 앞에서 망토 끈을 쥐고 있었다."가야 해요.""넉 달이야.""세어 주셔서 감사해요.""돌 든 놈들 안 보여?""보이니까 가는 거예요."끈이 자꾸 손가락에서 빠져나갔다.엘로라는 떨리는 손을 감추지 않고 다시 묶었다."로웰이 지하에 갇혔을 때도 광장에 나갔었어요.""알아.""그땐 아무도 안 들었죠. 반푼이 말이니까.""이번엔?""이번엔 교단이 먼저 겁을 냈잖아요. 포고문까지 붙이고."칼리안이 창에서 등을 뗐다.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에서 끈을 빼앗더니,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그러고는 제 망토를 벗어 그 위에 한 겹 더 덮었다.검은 모직에서 그의 체온과 쇠 냄새가 났다."내 옆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마.""네.""돌 날아오면 내 뒤.""네.""그리고.""
자정이 넘은 집무실에는 등잔 기름 타는 냄새가 짙었다.책상 위에 펼친 수도 지도의 귀퉁이를 문진 넷이 눌러 두고 있었다.대성당 자리에 누군가 붉은 잉크로 동그라미를 쳐 놓았다."교단을 친다."세라피나의 고백을 다 듣기도 전이었다."대사제 목을 쳐서 대성당 첨탑에 건다.""폐하."엘로라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그럼 교단이 통째로 들고일어나요.""그래서.""백성들은 아직 교단을 믿어요. 대사제를 죽이면 폐하는 마녀한테 홀린 폭군이 돼요.""이미 폭군이야.""레이너드가 그랬던 것처럼, 그 소리로 사람을 모을 거라고요.""그럼 닷새 뒤에 기사단이 널 치는 걸 구경하라고?""막아야죠. 칼 말고요."칼리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붉은 눈 속에서 오래된 불이 타올랐다.폭군의 불이었다.다만 그녀의 손이 팔 위에 얹혀 있는 동안, 그 불은 번지지 않았다.문가에서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폐하. 교단 기사단은 삼백입니다.""우리는.""두 배입니다. 다만 교단 기사와 붙으면 칼을 내려놓는 자가 나올 겁니다. 신을 베는 일이라 여길 테니까요.""…….""하나 더 있습니다. 대사제는 원로원 의원이 아닙니다. 불체포 특권도 없지요.""그럼 잡으면 되겠네.""교단의 수장은 황제의 재판을 받지 않습니다. 교단법입니다.""법 좋아하는 놈들 많네.""저도 싫어합니다, 폐하."'또 법이야. 또 벽.'엘로라는 지도 귀퉁이를 손끝으로 눌렀다.양피지가 손톱 밑에서 바스락 구겨졌다.에반디스도 원로원의 법 뒤에 숨었다가, 그녀가 소리 내어 읽은 법과 펼친 장부에 끌려 나왔다.신의 이름이 걸린 벽이라도, 그 벽돌을 쌓은 건 사람의 손이었다."세라피나 양."엘로라가 돌아보았다.세라피나는 집무실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칼리안은 그녀를 지하로 내려보내려 했지만, 엘로라가 막았다."대사제가 보낸 편지, 아직 있어요?""……네. 다 태우라고 하셨지만, 못 태웠어요.""왜요.""언젠가 누가 물어볼 것 같아서요. 제가 왜 그랬는지."엘로라의
레이너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로라가 다시 물었다. “왜 저를 살려 두었습니까?” 긴 침묵 끝에. 레이너드가 처음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살린 것이 아닙니다.” 엘로라의 눈이 커졌다. “그럼 누가…….” 레이너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당시 황궁에 있던 단 한 사람이.” 레이너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선대 황제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엘로라는 숨을 삼켰다. 그 순간 칼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레이너드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선대 황제의 황후였습니다.” 레이너드의 말이 끝난 순간 회의장 안이 조용해졌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왜 그 이름이 왜 지금 이 자리에서 등장했는지, 엘로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황후가 저를 살렸다고요?” 레이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회의장 안의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엘로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죽이라고?’ 자신이 태어난 날, 황실이 내렸다는 명령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저를요?” 레이너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엘로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가 태어난 날, 황실은 저를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레이너드가 분명하게 대답했다. 웅성거림이 회의장 전체로 번졌다. 귀족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누군가는 칼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엘로라는 다른 누구도 바라보지 않았다. 오직 칼리안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칼리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에요?” 칼리안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엘로라는 다시 물었다. “선대 황제가 저를 죽이라고 명령했어요?” “……그 명령이 내려진 것은 사실이다.” 그 한마디에 엘로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졌다. 왜 자신을
레이너드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엘로라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상했다. 레이너드는 물러났지만 패배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확인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순간 레이너드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는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칼리안의 눈빛이 변했다. “무엇을 말이지?” 레이너드는 엘로라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 대공가가 왜 멸문했는지.” 엘로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칼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너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가문이 단순히 황실과 사이가 나빠서 사라졌다고 생각하십니까?” “…….” “아니면 폐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계신 겁니까?” 엘로라는 칼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싶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왜요?” 엘로라가 물었다. 레이너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전하?” “우리 가문이 왜 사라졌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