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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09:38:50

기분 좋은 콧노래가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 골목길에 가볍게 울려 퍼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를 걷던 하윤이 멈춰 선 것은 골목 어귀를 막 벗어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제 손에 들린 묵직한 쇼핑백을 내려다보며 배시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 집에 갔다 올 때마다 손에 뭘 쥐고 오시네요.”

그때, 텅 비어 있던 하윤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혹시 돈 대신 물건으로 받는 겁니까?”

사혁의 건조한 물음에, 하윤이 쇼핑백을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빙긋 웃었다.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야. 나는 이렇게 매일 그 사람 마음을 가져올 거야.”

사혁의 단단해 보이는 미간이 아주 살짝 구겨졌다.

‘……부자들의 허세인가.’

그런 사혁의 떫은 표정을 힐끗 쳐다본 하윤이 불쑥 물었다.

“너 말이야, 밥할 줄 알아?” “……네? 네, 뭐.” “이따가 해 봐. 제대로 하는지 봐야겠어.”

사혁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 업무에 가사일도 포함이었나? 하긴, 어째 돈을 쓸데없이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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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혹   52화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달콤하고 독한 니치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하연의 집은 널찍한 평수가 무색할 만큼 온갖 화려한 물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반짝였고, 거실 한쪽에는 사람 키만 한 한정판 아트 토이들과 명품 주얼리 박스들이 어지럽게 탑을 이루고 있었다.천만 원을 호가할 법한 화이트 부클레 소파 위에는 미처 정리하지 않은 옷가지와 파스텔톤 쿠션들이 뒤엉켜 있었고, 대리석 테이블 위에도 먹다 남은 디저트 상자와 잡동사니가 굴러다녔다.비싼 것들은 잔뜩 모아두었지만 정작 사람의 손길은 닿지 않은 공간. 연호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살짝 구겨졌다.‘집이 이렇게 넓은데도 정신이 없네. 미호는 단칸방에 살 때도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정리해 뒀었는데.’연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하연은 마냥 신이 나서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소파 위에 던져져 있던 명품 쇼핑백들을 옆으로 쓱 밀어낸 그녀가 연호를 앉히며 눈을 반짝였다.“어때요, 교수님? 우리 집 마음에 들어요?”기대감에 부푼 얼굴을 마주한 연호는 찰나간 망설이다가, 이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응, 예쁘네. 화려한 게 딱 너랑 어울리는 분위기야.”“그쵸? 아, 진짜 너무 좋아요. 이제 매일매일 교수님이랑 같이 눈뜨고 같이 잠들 수 있다니! 와, 우리 이제 학교도 같이 갈 수 있겠다!”하연이 연호의 팔짱을 덥석 끼며 어깨에 뺨을 부볐다. 학교에 같이 간다는 말에 연호는 반사적으로 거리를 두듯 어색하게 웃었다.“글쎄, 난 오전 강의 준비 때문에 너보다 훨씬 일찍 가야 할걸?”“치, 저도 일찍 일어나서 같이 가면 돼요. 카페에서 기다리지 뭐.”하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정을 부리는 순간, 정적 속에서 연호의 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꼬르륵. 민망할 정도로 선명한 소리에 연호의 얼굴이 굳어지자, 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 맞다, 아침. 제가 너무 신나서 식사 생각을 미처 못 했어요.”그 말에 연호의 눈길이 자연스레 거실 너머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모델하우스

  • 현혹   51화

    하연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최근 청담동의 랜드마크로 불리는 주상복합 이었다.압도적으로 높은 층고와 눈이 부신 대리석 로비 한가운데 선 연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아르떼 119……? 청담에서 가장 비싸다는 곳이잖아.’새삼스러운 눈으로 앞서 걷는 하연을 힐끗 쳐다본 연호의 머릿속으로 기민한 계산기가 돌아갔다. 어린 줄만 알았더니,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한 동아줄일지도 몰랐다.하연이 익숙하게 연호의 손을 이끌며 우측 복도로 향했다.“이쪽이에요. 우리 집은 고층부라서 오른쪽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거든요.”연호는 걸음을 옮기며 무심코 로비 반대편을 슬쩍 훑었다. 보안 게이트로 완전히 분리된 왼쪽 구역에, 다른 것들보다 유난히 크고 화려한 엘리베이터 한 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저쪽 엘리베이터는 뭐야?”연호의 물음에 하연이 걷던 걸음을 딱 멈췄다. 반대편 엘리베이터를 향해 팔짱을 낀 그녀의 얼굴에 묘하게 샐쭉한 승부욕이 스쳤다.“저건…… 최상층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예요. 물론 제가 돈이 없어서 못 들어간 건 아니고요. 건물 올리기도 전에 누가 이미 낙점을 해버렸더라고요. 아예 분양 시장에 나오지도 않았어요. 도대체 누가 사는지 모르겠지만…….”못내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비죽이던 하연이, 이내 연호를 향해 몸을 휙 돌렸다. 그녀가 깍쟁이처럼 생긋 웃으며 연호의 팔에 찰싹 매달렸다.“우리 결혼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저기서 살아요. 알았죠? 자, 빨리 타요, 교수님.”기다리고 있던 우측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연이 층수 버튼을 누르자, 매끄러운 금속성 문이 스르륵 닫히며 넓은 로비의 전경이 점차 좁아졌다.덜컹, 하고 연호와 하연을 태운 기체가 위를 향해 솟구쳐 오르는 바로 그 찰나.띵-.연호의 시야가 완벽하게 차단됨과 동시에, 로비 반대편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 구역에서 경쾌한 도착음이 울려 퍼졌다.스르륵. 방금 전 연호의 문이 닫힌 것과 완벽히 대칭을 이루

  • 현혹   50화

    같은 시각,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호텔.고급스러운 우디 계열의 디퓨저 향기가 은은하게 감도는 객실 안에서 연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몸을 감싼 거위 털 이불은 구름처럼 폭신했고,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림질된 순백의 베딩은 한 치의 구김도 없이 깔끔했다. 하지만 밤새 뒤척인 탓인지 목덜미와 어깨가 납작한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뻐근했다. 완벽하게 세팅된 특급 호텔의 침대였으나, 어쩐지 제 몸에 맞지 않는 남의 옷을 입은 듯 낯설고 불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래.’연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협탁 위에 놓인 미지근한 생수를 들이켜자, 속이 쓰라리게 헛헛했다. 평소 같았으면 눈을 뜨자마자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국물 냄새가 안방 문틈으로 스며들 시간이었다.먹지 않아도 늘 차려지던 아침상.그저 그 냄새가 사라졌을 뿐인데 기이하게도 입안이 까끌까끌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하, 차연호 나이 들더니 왜 이렇게 촌스러워졌냐. 국 타령이나 하고. 내려가서 커피나 마시자."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듯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대충 씻고 옷을 챙겨 입은 그는 1층 라운지로 내려갔다. 통창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 자리에 앉아 갓 추출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습관처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밤새 꺼두지도 않은 액정은 고요하기만 했다.‘바보 같은 게. 그새 겁을 집어먹고 매달리지도 못하네.’자신이 캐리어까지 끌고 나왔으니, 밤새 눈물로 지새우며 잘못했다고 빌 줄 알았는데 전화 한 통이 없었다. 얄미운 마음에 혀를 찼지만, 연호는 그것조차 미호가 제 눈치를 보느라 감히 연락하지 못하는 것이라 멋대로 해석했다.그는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놓인 호텔 로고가 선명한 커피잔과 창밖의 풍경을 구도 맞춰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자신의 SNS 계정에 사진을 업로드하며 짧은 문구를 덧붙였다.[당분간은 모든 걸 내려놓고,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누가 봐도 사연

  • 현혹   49화

    다음 날 오전, 일반적인 가정집이라기보다는 마치 귀빈 접견실처럼 서늘하고 적막한 거실에 사혁과 미호, 하윤이 함께 하고 있었다.몸이 푹 꺼질 듯 깊고 매끄러운 짙은 회색빛 가죽 소파의 끄트머리에, 미호는 엉덩이만 겨우 걸친 채 바짝 긴장해 앉아 있었다.그녀의 맞은편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서류철을 든 채 미호를 위아래로 서늘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하윤이 말했던 깐깐한 관리인, 사혁이었다.미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빈틈없이 올린 머리카락 아래로 뻗은 매서운 눈매와 꽉 다문 입매가 숨이 턱 막힐 만큼 위압적이었다. 핏이 딱 떨어지는 검은 정장 위로 근육질의 단단한 체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셔츠 소매나 목덜미 어딘가에 시퍼런 문신이라도 하나 비친다면 당장 암흑가의 조폭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살벌한 분위기였다.‘세상에, 저렇게 무섭게 생긴 사람이 관리인이라니…… 하윤이 그동안 이 집에서 지내느라 정말 힘들었겠다. 역시 내가 오길 잘했어.’미호가 남몰래 안쓰러움을 삼키는 사이, 이력서를 내려다보던 사혁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경력이…… 전문적인 식당이나 다른 저택에서 일하신 적은 없군요.” “네, 계속 가정에서만…….”기어들어 가는 미호의 대답에 사혁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이 미친 도련님이 기어코 유부녀를 집안까지 끌어들이는군. 그나저나…… 가사 도우미라니, 취향이 메이드 플레이 쪽이었나? 겉보기엔 멀쩡해 가지고는 은근히 변태 같은 구석이 있단 말이야.’사혁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밖에서 유부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불장난을 치는 것 정도야 한철 치기라 여겨 눈감아 주었지만, 아예 거처로 불러들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원래대로라면 당장 회장님께 보고해야 할 사안이지만…… 그래, 명목상 위치는 가사 도우미니까. 일단은 입맛 까다로운 도련님 식사를 챙길 도우미를 새로 고용했다는 정도로만 보고해 두자.’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가 저 통제 불

  • 현혹   48화

    도어락이 열리고 현관에 들어선 연호의 미간이 불쾌하게 구겨졌다.집 안에는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맞춰 마중을 나오거나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기색이 전혀 없었다.구두를 거칠게 벗어 던진 연호는 성큼성큼 걸어 안방 문을 열어젖혔다. 어젯밤 자신이 박차고 나간 그대로 차갑게 식어 있는 침대. 그는 혀를 차며 복도를 지나 원래 미호가 쓰던 작은 방 문고리를 돌렸다.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삼키며 주방으로 향한 연호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병을 내려놓으며 둘러본 주방은 소름 끼치도록 깨끗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국냄비 하나 올려져 있지 않았고, 싱크대에는 물기 한 방울 없었다. 아침 내내 밥을 한 흔적조차 없는 것이다.“하, 남편이 나가서 밥을 먹고 다니는지, 어디서 자는지 관심도 없어?”빈집에 대고 뱉어낸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차갑게 메아리쳤다.순간, 호텔 방을 나서기 직전 자신의 목에 매달려 속삭이던 하연의 당돌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이혼하고 저랑 살아요. 지금 교수님이 살고 있는 집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꽤 좋은 집에 살아요.’ ‘부모님이 알면 난리 날 텐데.’ ‘저희 부모님만 생각하고 와이프는 상관없나 보네요?’정곡을 찔린 연호가 입을 다물자, 하연은 한술 더 뜨듯 반짝이는 눈으로 배시시 웃었었다.‘그렇다면 더 같이 살아야죠. 되도록 빨리 아이 갖고 싶거든요.’예상치 못한 말에 연호가 굳어버린 사이, 그녀는 귓가에 쐐기를 박듯 속삭였다.‘임신하면 부모님이 어쩌겠어요.’연호는 빈 물병을 우그러뜨리며 낮게 중얼거렸다."이혼……."솔직히 이미호와 법적으로 갈라서는 일 따위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제 이름으로 그림을 그려낼 완벽한 그림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온전히 차연호의 것이어야만 했다. 자신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결국 돌아가 누워야 할 곳은 이미호의 옆자리라는 기형적인 안도감. 하지만 지

  • 현혹   47화

    스스로를 쓸모없는 사람이라 깎아내리며 시선을 피하는 미호를 보며, 하윤의 눈동자가 깊고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가 테이블 위로 상체를 살짝 기울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그림 그리는 일 아니에요. 거창한 재주 같은 것도 필요 없고요.”“어……? 그럼 무슨 일인데?”“제가 요즘 머무는 집이 하나 있거든요. 거기 관리하시는 실장님이 워낙 깐깐해서 아직 가사 도우미를 못 구했어요.”가사 도우미.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에 미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윤은 제 턱을 매만지며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요리…… 할 줄 알죠? 다른 건 됐고, 그냥 그 집 식사만 제때 잘 챙겨주면 돼요.”“요리야 늘 하던 거지만…… 내가 가도 괜찮은 곳이야? 그런 곳은 전문으로 일하시던 분들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상관없어요. 저도 그 집에서 실장님 잔소리 들으며 눈치 보는 처지라, 편한 사람이 오는 게 좋거든요. 무엇보다 그 집 주인 입맛이 꽤 까다로운데, 아줌마 솜씨면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러니까…….”잠시 말을 멈춘 하윤의 시선이 미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얽어맸다.“아줌마가 와서 제 밥 좀 챙겨주면 안 돼요?”낮고 부드러운, 그러나 묘하게 간절함이 섞인 듯한 그 한마디에 미호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말끔한 정장을 빼입어 어른스러워 보였는데도, 그 눈빛만큼은 처음 작업실에 찾아왔던 날처럼 위태롭고 쓸쓸해 보였다. 단호하게 선을 그으려던 미호의 결심이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허물어졌다.“……그게 다야? 정말 밥만 챙겨주면 되는 거야?”조금 누그러진 미호의 목소리에 하윤의 입꼬리가 미세한 호선을 그렸다.“아, 조건이 하나 더 있긴 해요.”하윤이 짐짓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일주일에 두 번은 그쪽에서 후원하는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가야 해요. 실장님이 잡아놓은 필수 스케줄이라 저도 억지로 끌려가는 건데, 가서 애들 그림 그리는 거 봐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혼자 하기 벅찬데, 아줌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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