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건에게서 받은 서류는 이틀 뒤 세령의 변호사에게 넘어갔다.빠진 서명은 없었다. 이전처럼 조건을 덧붙이거나 시간을 달라는 연락도 오지 않았다. 재산 정리와 필요한 절차는 대리인을 통해 오갔고, 세령이 직접 유건과 통화해야 할 일도 없었다.“이대로면 크게 지연될 건 없어요.”변호사의 말을 듣고도 세령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몇 달 전까지만 해도 유건은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다. 세령이 집을 나가도, 반지를 돌려줘도, 가족 앞에서 이혼하겠다고 말해도 서류 한 장으로 붙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그런 사람이 이제 먼저 손을 놓았다.“혹시 상대 쪽에서 다시 조건을 바꾸면요?”“현재 제출된 내용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낮습니다. 변경이 생기면 바로 알려드릴게요.”“네.”통화를 끊은 세령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 사본을 한참 내려다봤다.문유건.그 이름이 적힌 서명 아래 자신의 서명이 들어가면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도 법적으로 끝을 향한다.한때는 그 사실만 기다렸다.그런데 정작 눈앞에 오니 환호할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이혼이 끝난다고 4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유건을 사랑했던 자신까지 지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의 시간을 더는 그 결혼에 묶어둘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었다.세령은 서류를 덮고 다시 작업 자료를 펼쳤다.예전이라면 감정 하나가 흔들리면 하루가 통째로 멈췄다. 지금은 달랐다. 마음이 복잡해도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었고, 저녁이 되면 무엇을 먹을지도 자신이 정했다.그 변화가 서류보다 더 이혼에 가까운 것 같았다.같은 날 문가에서는 다음 가족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혜란은 참석자 명단을 보다가 세령의 이름이 빠진 자리를 오래 바라봤다.“태겸아.”거실을 지나던 태겸이 멈췄다.“왜요.”“세령한테 내가 한 번 연락하면 안 되겠니.”태겸의 표정이 굳었다.“안 됩니다.”혜란이 아들을 바라봤다.“사과라도 제대로 하고 싶어서 그래.”“세령이 연락하지 말라고 했어요.”“나는 너희 셋이 아니잖아.”“어머니도 포함이에요
“우리 결혼한 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나 사랑했어?”세령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유건은 재촉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답을 받아내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질문을 던진 뒤 그 결과를 감당하려는 얼굴이었다.세령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이혼서류를 떠올렸다.4년.그 시간을 전부 거짓이라고 하면 편할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유건이 태겸을 이기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거짓말까지 했으니까.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자신까지 거짓말하게 된다.“사랑했어.”유건의 눈이 흔들렸다.세령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한 번도 아니야.”유건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나 당신 많이 사랑했어.”그 말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오히려 인정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더 또렷해졌다.“아플 때 밤새 옆에 있었던 것도, 당신 퇴근 늦으면 기다렸던 것도, 당신 좋아하는 음식 배우고 가족 행사 따라다닌 것도 억지로 한 거 아니야.”유건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굳었다.“당신이 힘들다고 하면 나도 같이 힘들었고, 좋은 일 있으면 진짜 기뻤어.”“세령아.”“그래서 더 용서 안 돼.”유건이 말을 멈췄다.“내가 당신을 안 사랑했다면 차라리 덜 억울했을 거야.”세령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처음부터 속아서 결혼했고 마음도 없었다면 그냥 잘못 들어간 인생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유건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졌다.“근데 아니었어. 나는 그 결혼 안에서 당신한테 진짜 마음을 줬어.”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세령은 이제 그 사랑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했던 과거를 인정한다고 해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했던 장면을 기억한다고 해서 용서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오히려 진짜였기 때문에 배신은 더 정확한 모양을 가졌다.유건이 망친 것은 거짓으로 시작한 결혼만이 아니라, 그 거짓을 모르던 세령이 스스로 만들어낸 진심까지였다.“당신이 훔친 건 태겸 씨가 좋아하던 여자 아니야.”유건의 눈이 올라왔다.“나야.”짧은 말이 둘 사이에 떨
유건은 작업실 맞은편에 서 있었다.한 달 만이었다.세령은 그 얼굴보다 먼저 손에 들린 서류봉투를 봤다. 두껍지 않은 갈색 봉투였는데, 이상하게 그 안에 지난 4년이 전부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왜 왔어.”유건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이거 주려고.”그가 봉투를 내밀었다.세령은 바로 받지 않았다.“뭔데.”“이혼서류.”손끝이 굳었다.별장에서 나오던 날, 서류만 보내라고 했다. 전화도 하지 말고, 찾아오지도 말라고 했다.유건은 한 달 동안 정말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오늘 처음 나타났다.세령은 봉투를 받아 열었다.서명란부터 확인했다.문유건.이미 이름이 적혀 있었다.세령은 다음 장을 넘겼다. 합의 내용을 몇 줄 더 읽은 뒤 다시 첫 장으로 돌아왔다.“조건은?”“없어.”세령이 고개를 들었다.“재산 문제나 다른 건 변호사 통해서 정리하면 되고, 이혼 자체에는 더 조건 안 걸 거야.”“별장 주말이 마지막 조건 아니었어?”“그 약속 지키러 온 거야.”세령은 서류를 다시 내려다봤다.예전의 유건이라면 무언가를 붙였을 것이다.한 번만 만나달라거나, 형과는 만나지 말라거나, 시간을 더 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서류를 손에 쥔 채 세령에게 선택을 요구했을 사람이다.이번에는 아니었다.“정말 이걸로 끝이야?”유건의 시선이 서류 위에 머물렀다.“응.”“나중에 마음 바뀌었다고 하지 마.”“안 해.”“서류 접수 들어가도?”“응.”세령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원하던 일이었다.그렇게 오래 밀렸던 이혼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인데, 생각했던 것처럼 속이 시원하지만은 않았다.기쁘지도 않았다.그저 오래 조이고 있던 매듭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알겠어.”세령은 그제야 서류 모서리를 천천히 눌렀다.예전에는 도장 하나 찍는 일조차 유건이 허락처럼 쥐고 있었다. 자신이 이혼하겠다고 몇 번을 말해도 그는 ‘난 안 해’라는 한마디로 시간을 늘였다.그런데 지금은 그 권리를 내려놓고 있었다.늦었
세령은 꽃다발에 꽂힌 카드를 한동안 손에서 놓지 못했다.축하해.두 글자가 전부였다.보고 싶다는 말도, 기다린다는 말도 없었다. 연락해달라는 부탁도, 자신이 보냈다는 표시조차 없었다.이름은 없었지만 세령은 알았다.태겸이었다.미래가 옆에서 꽃을 내려다봤다.“누군지 알아?”“응.”“그 사람?”세령이 고개를 끄덕였다.미래는 더 묻지 않았다.“버릴 거야?”세령은 꽃다발을 다시 봤다.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렇다고 휴대전화를 꺼내지도 않았다.차단을 풀어 고맙다고 한마디 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시 오픈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자신이 다시 일을 시작한 걸 축하해준 것도 싫지 않았다.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움직였다.그래서 연락하지 않았다.좋아서 반응하는 것과 다시 관계를 시작하겠다고 결정하는 건 달랐다.세령은 꽃을 작업실 한쪽에 놓았다.카드는 꽃 사이에 다시 꽂아두었다.그날 하루에도 몇 번씩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그러면서도 태겸에게 답을 보내야 한다는 압박은 들지 않았다.그게 이상했다.예전의 태겸이라면 자신이 기다리겠다는 말을 했을지도 몰랐다.얼마가 걸려도 기다리겠다고.그 말은 다정했겠지만, 세령에게는 또 하나의 무게가 됐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시간을 멈춘 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언젠가는 답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이번에는 달랐다.꽃만 왔다.축하한다는 말만 남았다.그 뒤로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오픈 이틀째에도 태겸은 나타나지 않았다.공간 소유주 측 담당자가 바뀌어 있었고, 업무 연락 역시 다른 실무자를 통해 들어왔다. 태겸이 일부러 빠진 것인지까지 세령은 확인하지 않았다.알아내려 들면 또 의미를 만들 것 같았다.그냥 자신이 해달라고 했던 대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만 받아들였다.이도에게서도 연락은 없었다.처음 며칠은 의외였다.예전의 이도라면 차단됐어도 다른 번호를 쓰거나, 미래를 통해서라도 소식을 알아냈을 사람이다. 꽃 하나를 보냈다가 들켜도 능청스럽게 웃었을 것이
별장을 나온 뒤 한 달 동안 세령은 문가 사람들과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처음 며칠은 이상할 만큼 휴대전화를 자주 확인했다.진동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화면을 켰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습관처럼 부재중 전화부터 살폈다. 문유건도, 문태겸도, 문이도도 차단된 상태였는데 몸은 아직 그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미래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차단해놓고 왜 계속 봐?”세령은 휴대전화를 뒤집었다.“나도 모르겠어.”누군가에게 보고할 일이 없는 하루가 생각보다 낯설었다.늦게 끝나도 어디냐는 연락이 없었고, 주말 일정을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와 밥을 먹었는지, 몇 시에 들어갈 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는 사람도 없었다.처음에는 그 조용함이 허전했다.아침에 눈을 뜨면 잠깐 유건과 살던 집이 떠올랐고, 전시장에 가면 태겸이 먼저 와 있을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 편의점 앞에서 이도가 좋아하던 음료를 보고 걸음을 멈춘 적도 있었다.그럴 때마다 세령은 억지로 지우지 않았다.생각나는 건 생각나는 대로 두었다.보고 싶다는 감정과 돌아가고 싶다는 결정은 같은 게 아니었다.그걸 구분하는 데 거의 한 달이 걸렸다.차단 목록을 열어본 적도 있었다.세 이름이 나란히 있는 화면을 한참 보다가 그대로 닫았다. 풀어야 할 이유가 생긴 건 아니었다. 단지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결혼하고 나서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완전히 혼자인 적이 거의 없었다. 유건의 일정이 머릿속에 있었고, 문가의 식사 약속이 달력에 박혀 있었으며, 태겸이 돌아온 뒤에는 그 사람의 존재까지 하루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이도는 예고 없이 나타나 마음을 흔들었다.지금 달력에는 전시 일정만 있었다.월요일 작품 반입.수요일 조명 테스트.금요일 인쇄물 확인.세령은 그 단순한 목록이 좋았다.누구의 기분도 적혀 있지 않았고, 누구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빈칸도 없었다.한 번은 현장 일을 마치고 혼자 늦은 저녁을 먹었다. 식당
“됐어요. 이제 누구 말도 더 안 들을래요.”세령은 가방을 들었다.혜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세령아, 잠깐만.”“아니요.”“오늘 여기 온 것도 제 선택 아니었어요. 유건 씨랑 둘이 정리하러 오는 줄 알았는데, 또 가족이 먼저 판을 만들었잖아요.”혜란의 발이 멈췄다.“아버님도 이제 그만하세요.”“네가 이렇게 나가면 해결되는 게 없다.”“해결하려고 나가는 거 아니에요.”세령은 정혁을 바라봤다.“이제 저를 빼고 여러분끼리 해결하세요. 원래 그 집 문제였으니까.”아무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세령은 가장 먼저 유건을 봤다.유건의 얼굴에는 충격과 죄책감이 뒤엉켜 있었다.“당신.”유건이 고개를 들었다.“응.”“주말 끝나면 이혼 서류 보내기로 한 약속, 그것만 지켜.”“세령아.”“다른 말 필요 없어.”유건의 입술이 굳었다.“나도 오늘 처음 알았잖아. 우리 부모가—”“알아.”“그럼 조금만 생각해주면 안 돼?”세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부모님한테 이용당한 건 안타까울 수 있어.”유건의 눈빛이 흔들렸다.“하지만 그게 내가 당신한테 돌아갈 이유는 아니야.”“나는 처음부터 다 알고 그런 게 아니었어.”“그래도 당신이 한 건 당신 선택이야.”세령은 말을 이었다.“서류만 보내. 전화도, 메시지도 하지 말고.”유건의 손이 식탁 위에서 움켜쥐어졌다.“그게 마지막이야?”“응.”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세령은 다음으로 태겸을 봤다.태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세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따라가고 싶을 것이다.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태겸 씨.”“응.”“기다리지 마.”태겸의 얼굴이 굳었다.“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세령은 숨을 한번 고르고 말했다.“내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리지 말라고.”태겸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연락도 하지 마.”“알겠어.”“그리고 내가 정리되면 당신한테 갈 거라고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