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국 들켰어요?”
세령은 현관에 선 이도를 바라봤다.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막 들어온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검은 모자를 벗어 신발장 위에 올려두고, 신발을 벗고, 캐리어 손잡이까지 접는 동안에도 시선은 세령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게스트룸 문.
비어 있는 왼손 약지. 그리고 세령의 얼굴.“뭘.”
“둘째 형.”
대답은 너무 빨랐다.
세령의 손끝이 굳었다.
“너 알고 있었어?”
“네.”
“언제부터.”
이도가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
“형수님보다 먼저요.”
세령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도가 귀국했다는 사실보다, 자신보다 먼저 유건의 외도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 더 늦게 들어왔다.
“여자 있는 거 알고도 말 안 했어?”
“확실한 건 아니었어요. 몇 달 전부터 느낌은 있었고.”
“그래서?”
“형수님이 행복해 보이길래.”
이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말하면 행복한 사람 하나 줄어들 것 같아서.”
세령은 입술을 다물었다. 웃으면서 할 말은 아니었다.
“행복해 보이면 속아도 돼?”
그제야 이도의 입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그건 아니죠.”
“그럼 왜 가만있었는데.”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둘째 형이 알아서 정리할 줄 알았어요.”
“정리?”
세령이 헛웃음을 흘렸다.
“며칠 전에도 호텔에 갔는데?”
이도의 시선이 짧게 흔들렸다. 손가락이 캐리어 손잡이 위에서 한 번 움직였다가 멎었다.
“그건 몰랐어요.”
세령은 대답 대신 이도를 오래 봤다. 장난처럼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데.”
이도는 답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복도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유건이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나온 유건은 이도를 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너 언제 왔어.”
“방금.”
“연락도 없이?”
“내 집인데.”
이도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유건의 시선이 세령에게 옮겨갔다. 열린 게스트룸 문을 확인한 뒤 눈매가 굳었다.
“자다가 나온 거야?”
세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도가 먼저 말했다.
“형수님 여기서 자요?”
“너 방 올라가.”
“왜.”
“올라가라고.”
이도는 유건을 보다가 짧게 웃었다.
“형, 나 오자마자 쫓아내게?”
“문이도.”
“들킨 건 형인데 왜 나한테 화내.”
유건의 턱이 굳었다.
세령이 이도를 바라봤다.
“너 진짜 알고 있었네.”
“말했잖아요.”
“누군지도?”
이도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임라온.”
그 이름이 나오자 유건이 세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도는 유건을 한번 봤다가 다시 세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름은 알고 있었어요.”
유건이 성큼 다가와 이도의 팔을 잡았다.
“그만해.”
“뭘.”
“쓸데없는 소리.”
“형수님한테 지금도 숨길 게 남았어?”
유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뭘 안다고.”
이도는 잡힌 팔을 내려다봤다. 빼내려 하지도 않았다.
“형보다 많이 알 수도 있지.”
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달라졌다.
세령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또 뭐가 있는데.”
“없어.”
유건이 곧바로 잘랐다.
너무 빨리 나온 대답이었다.
이도는 아무 말 없이 입가를 문질렀다. 웃음인지 아닌지 모를 흔적만 남았다.
“정말 없어?”
“세령아, 얘 말 듣지 마. 원래 사람 긁는 거 좋아하는 놈이야.”
“그건 내가 판단해.”
유건이 한숨을 삼켰다.
“지금은 네가 예민해서—”
“그 말 하지 마.”
세령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유건이 입을 다물었다.
이도는 둘 사이를 보다가 캐리어 손잡이를 다시 세웠다.
“난 올라갈게요.”
몇 걸음 가던 그가 멈췄다.
“근데 형수님.”
세령이 돌아봤다.
이도는 이번에도 웃고 있었다.
“큰형은 봤어요?”
유건의 얼굴이 굳었다.
세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호텔에서 봤잖아요.”
“너 그걸 어떻게 알아.”
이번에는 유건이 먼저 물었다.
이도는 유건 쪽을 보지도 않았다.
“큰형이 오늘 그 호텔 간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그 시간에 형수님까지 거기 있었으면 마주쳤겠다 싶었지.”
유건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괜한 소리 하지 마.”
“왜. 큰형 얘기 나오면 안 돼?”
“올라가.”
“또 그 말.”
이도가 피식 웃었다.
세령은 둘 사이를 가만히 봤다. 유건은 호텔에서 라온을 들킨 순간보다 지금 더 날이 서 있었다.
“큰형이 뭐래요?”
이도가 다시 세령에게 물었다.
“아무 말도.”
“그래요?”
그 한마디 뒤로 이도의 시선이 세령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유건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유건이 낮게 욕을 삼켰다.
“잠깐만.”
전화를 받으며 거실 쪽으로 걸어가자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복도에는 세령과 이도만 남았다.
세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큰형 얘기해.”
이도가 고개를 기울였다.
“궁금해서요.”
“뭐가.”
“형수님이 큰형 다시 본 표정.”
세령의 눈썹이 움직였다.
이도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장난스러운 입매는 그대로였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형수님.”
“왜.”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세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도가 잠깐 거실 쪽을 확인했다.
유건의 목소리는 더 멀어져 있었다.
그제야 몸을 조금 숙였다.
“근데 형수님.”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목소리가 낮아졌다.
“큰형이랑 예전에 어디까지 갔었어요?”
세령은 사진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유건의 시선이 사진에 박혔다.태겸의 지갑 안쪽에 꽂혀 있던 자신의 얼굴.“버려.”“왜?”“그걸 왜 가지고 있어.”세령은 물컵을 내려놓았다.“당신이 뭘 숨겼는지 알아보려고.”유건의 턱이 굳었다.“또 형 얘기야?”세령이 그를 봤다.“또?”“그 사람 얘기 좀 그만하라고.”“당신 참 이상해.”“뭐가.”“당신 외도했어.”유건이 입을 다물었다.“근데 지금 궁금한 게 그거야?”“…….”“내가 형이랑 무슨 말 했는지?”“세령아.”“나한테 미안하긴 해?”“미안하다고 했잖아.”“그런데 왜 형만 쳐다봐.”유건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내가 언제.”“지금도.”세령은 사진을 집어 들었다.유건의 눈이 그대로 따라왔다.“이 사진 버리면 끝나?”“뭐?”“형이 내 사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없어지고, 당신이 뭘 알고 있었는지도 없어져?”“말 이상하게 하지 마.”“이상한 건 당신이야.”세령은 사진을 접지 않은 채 주머니에 넣었다.유건은 세령의 주머니 쪽을 한 번 봤다.“그 사진 계속 가지고 있을 거야?”“응.”“왜.”“당신이 싫어하니까.”유건의 얼굴이 굳었다.“농담하지 마.”“농담 아닌데.”그날 저녁 가족 식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세령이 물을 따르려 하자 태겸이 가까이에 있던 물병을 집었다.유건의 젓가락이 멈췄다.“형.”태겸이 쳐다봤다.“내가 할게.”태겸은 말없이 물병을 내려놓았다.세령이 유건을 바라봤다.“나 손 있어.”혜란이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태겸은 그대로 식사를 이어갔다.세령에게 다시 말을 걸지도 않았다.유건은 국 한 숟갈도 뜨지 않은 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입맛 없어?”혜란이 묻자 유건이 물만 들이켰다.“괜찮아요.”태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유건의 손가락이 잔 가장자리를 몇 번 두드렸다.식사가 끝나자 세령은 방으로 올라갔다.옷장을 열어 잠옷과 화장품을 꺼냈다.책 두 권까지 가방에 넣었을 때 유건이 들어왔다.“뭐 해?”
문이 열린 뒤에도 유건은 한동안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세령의 손에 들린 폴라로이드를 본 순간, 현관문을 잡고 있던 손이 그대로 멎었다. 놀랐다는 표정이라기보다 들키고 싶지 않은 걸 먼저 본 사람에 가까웠다.이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일찍 왔네.”유건은 대꾸하지 않았다. 시선은 세령의 얼굴보다 사진에 오래 머물렀고, 신발을 벗는 동작마저 평소보다 거칠었다.“그거 어디서 났어.”세령은 대답 대신 사진을 손안으로 조금 당겼다.“왜?”“그냥 물어보는 거야.”“처음 보는 사진인데?”유건의 눈이 잠깐 이도에게 향했다.“너 또 형 방에서 뭐 찍었어?”“큰형 찍다가 같이 찍힌 건데.”이도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유건의 표정이 더 굳었다.“남의 물건을 왜 찍어.”“형은 사진 내용보다 내가 찍은 게 더 궁금한가 봐.”유건이 쏘아보자 이도는 입꼬리만 올렸다.세령은 둘 사이를 보다가 폴라로이드를 펼쳐 보였다.“이거 내 사진이야.”태겸의 지갑 안쪽에 끼워진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유건은 한 번 내려다봤을 뿐이었다.“옛날 일이잖아.”세령의 손끝이 멈췄다.아직 날짜는 말하지 않았다. 언제 찍힌 사진인지조차 설명하지 않았는데 유건은 먼저 ‘옛날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옛날 일인 건 어떻게 알아?”“사진만 봐도 알잖아.”“뒷면에 날짜 있는데.”유건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아주 짧은 침묵이었지만 충분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나왔어야 할 질문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왜 형이 동생의 약혼녀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지, 언제까지 지갑에 넣고 다녔는지, 그 사진이 정말 세령인지조차 묻지 않았다.세령은 사진을 뒤집어 날짜를 보여줬다.“우리 약혼 발표하고 난 뒤야.”숫자를 확인한 유건의 눈빛이 아주 잠깐 굳었다.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지만 세령은 이미 봤다. 그가 놀란 건 사진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날짜까지 알아버렸다는 사실처럼 느껴졌다.이도가 옆에서 유건을 흘끗 봤다.“이상하지?”“뭐가.”“큰형이 동생 약
“큰형 지갑에서 본 거예요.”세령은 손에 든 폴라로이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 속 태겸은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손에 든 검은 지갑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안쪽 포켓에 끼워진 작은 사진 한 장. 아무리 작게 찍혀 있어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스물넷의 자신이었다.해외 전시장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몇 번이나 다시 찍자고 했는데, 태겸은 그중 가장 자연스럽게 웃은 사진을 골랐다. 왜 이걸 가져가냐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지갑에 바로 넣었다. 세령이 장난처럼 돌려달라고 했을 때도 웃기만 했던 얼굴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그 기억이 따라오자 손끝이 굳었다.“뒷면 봐요.”이도의 말에 세령은 사진을 뒤집었다.날짜가 적혀 있었다.한 번 보고도 믿기지 않아 다시 확인했다.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다.유건과 약혼을 발표한 뒤였다.그 날짜를 보고 있자 약혼식 날의 환한 조명과 유건의 손에 끼워졌던 반지까지 한꺼번에 떠올랐다. 자신은 그날 완전히 다른 사람의 미래로 들어갔다고 믿었다.세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태겸이 자신을 버렸다고 믿고 기다리는 걸 그만둔 뒤, 유건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양가에 인사를 마쳤던 시기였다. 그 무렵 자신은 태겸도 이미 모든 걸 정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약속에 나오지 않았고, 연락도 끊겼으며, 끝내 이별 문자까지 보냈으니까.그래서 자신도 정리했다. 태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버리고, 선물도 치웠고, 번호를 지운 뒤에는 다시 저장하지 않았다. 약혼반지를 낀 날에는 정말 끝났다고 믿었다.그런데 그때도 태겸의 지갑에는 자신의 사진이 남아 있었다.세령은 무심코 사진 모서리를 문질렀다. 오래돼 표면이 조금 바래 있었고, 가장자리는 닳아 있었다. 사진 한 장만 보고 무슨 의미였는지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버리고 잊은 사람의 흔적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이거 어디서 났어.”“예전에 찍어둔 거예요.”“왜 찍었는데.”“큰형 찍다가 같이 찍힌 거죠.”세령은 이도를 올려다봤다.“그때도
[유건이 네 과거를 언제부터 알았는지, 나도 확인해볼게.]세령은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는데도 잠은 완전히 달아나 있었다.확인해보겠다는 말이 고맙기보다 먼저 화가 났다. 칠 년 전에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던 사람이, 이제 와서 자신의 결혼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하는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유건의 태도가 수상하다는 이유 하나로 태겸에게 기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랬다가는 지금까지 겨우 정리해둔 시간까지 전부 흔들릴 것 같았다.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하지 마.]잠시 뒤 답이 왔다.[왜.]세령은 짧게 숨을 뱉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두 번도 가지 않아 태겸이 받았다.“세령아.”목소리를 듣는 순간 준비해둔 말이 더 거칠어졌다.“뭘 확인하겠다는 건데.”“유건이 네 얘기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그걸 왜 당신이 확인해.”태겸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다. 말을 고르는 동안 상대가 먼저 지치게 만드는 사람. 세령은 그 침묵마저 익숙해서 더 화가 났다.“칠 년 전에는 아무것도 안 했잖아.”수화기 너머로 숨소리만 들렸다.“연락도 끊고, 약속에도 안 나오고, 내가 기다리든 말든 사라졌으면서 지금 와서 왜 끼어들어.”“……”“내가 유건이랑 어떻게 살든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이번에도 변명은 없었다. 집안 때문이었다거나 어쩔 수 없었다는 말 한마디라도 했다면 차라리 끊기 쉬웠을 텐데, 태겸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세령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해 말을 더 쏟아냈다.“당신 때문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마지막까지 연락 올 줄 알고 며칠을 휴대폰만 보고 있었어. 그런데 끝까지 아무것도 없었잖아.”“알아.”“몰라.”목소리가 흔들릴 것 같아 세령은 입술을 꾹 눌렀다.“알았으면 그렇게 못 했어.”그제야 태겸이 낮게 입을 열었다.“맞아.”세령은 순간 말을 잃었다. 변명하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 짧은 인정이 오히려 오래 묵은 화를 더 건드렸다. 사과를 들으면 조금은 시원할 줄 알았
“왜 형이 나와?”세령의 질문이 떨어지자 유건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이혼 이야기를 붙잡고 늘어지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그의 시선은 자꾸 침대 끝에 놓인 세령의 휴대폰으로 흘렀다.“오늘 형을 봤잖아.”“그래서?”“칠 년 만이니까.”말끝이 묘하게 걸렸다. 결혼 전 유건에게 태겸 이야기를 꺼냈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오래 만났고, 많이 좋아했고,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긴 사람. 이름까지 말했을 때도 유건은 놀라지 않았다.‘첫사랑?’‘비슷해.’‘아직 좋아해?’아니라고 하자 그는 맥주캔을 들어 세령의 캔에 가볍게 부딪쳤다.‘그럼 됐네. 지나간 사람이잖아.’그때는 그 무심함이 배려처럼 느껴졌다. 과거를 캐묻지 않는 사람이라 편했고, 형과 만났다는 사실에도 괜한 질투를 하지 않아 고마웠다.지금 생각하면 이상했다.“당신,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다며.”유건의 눈이 잠깐 옆으로 비껴갔다.“뭐가.”“내가 형이랑 만났던 거.”“그땐 그랬지.”“지금은 왜 아닌데?”유건은 한 박자 늦게 숨을 내쉬었다.“상황이 달라졌으니까.”“뭐가 달라졌는데.”“너 지금 나랑 이혼 얘기하고 있잖아.”세령은 웃지 않았다. 그 말 속에서 자신보다 태겸을 먼저 의식하는 기색이 너무 선명했다.“그래서 내가 이혼하면 형한테 갈까 봐?”“그런 말 한 적 없어.”“근데 왜 계속 그 사람 얘기를 해.”유건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형이 너한테 뭐라고 했는지만 말해.”“아무 말도 안 했어.”“정말?”세령의 표정이 굳었다.“당신이 지금 누구한테 믿고 말고를 따져?”그제야 유건이 입을 다물었다. 세령은 휴대폰을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굳이 보여줄 이유가 없었다.“연락도 안 왔어.”짧게 끝낸 말인데도 유건의 눈은 꺼진 화면에서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그 반응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당신, 내가 형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기억해?”“대충.”“대충?”“네가 말했잖아. 오래 만났다고.”세령은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그것뿐이었어?”유건
“부부싸움 좀 했어.”유건의 말이 떨어지자 혜란이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정혁도 세령의 빈 약지를 한번 봤다. 이도는 젓가락 끝으로 접시를 건드렸고, 태겸만 아무 말이 없었다.세령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의자를 밀었다.“저 먼저 들어가볼게요.”“벌써?”혜란이 묻자 유건이 웃으며 대신 답했다.“아침부터 컨디션이 안 좋았어요.”세령은 고개를 돌려 유건을 봤다.아침부터.호텔에서 다른 여자와 있다 들킨 일을 그렇게 바꿔 말하는 얼굴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었다.“혼자 갈게요.”“나도 같이 가.”“당신은 식사해.”세령은 더 말하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문을 닫으려는 순간 유건이 손을 끼워 넣었다.“잠깐만.”“나중에 해.”“지금 해야 돼.”유건은 그대로 방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목소리를 낮췄다.“가족들 앞에서는 좀 참아주면 안 돼?”세령이 천천히 돌아봤다.“뭘.”“반지 빼고, 갑자기 나가겠다고 하고. 엄마 아빠까지 알게 되면 일이 커져.”“그래서?”“우리 둘이 해결하면 되잖아.”세령은 잠깐 웃었다.“우리 둘이 해결할 일이었으면 호텔에 세 사람이 있으면 안 됐지.”유건의 표정이 굳었다.“라온이랑은 정리할게.”“끝난 사이였다며.”“세령아.”“몇 번을 물어도 말이 달라지는데 뭘 믿어.”유건이 한 발 다가왔다.“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 대신 가족들 앞에서는—”“내 체면은 누가 지켜?”말이 잘렸다.유건이 입을 다물었다.“당신은 들키고 나서도 내가 왜 호텔에 왔는지부터 물었어. 집에 와서는 형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고. 지금도 내가 상처받은 것보다 부모님이 알게 되는 게 더 걱정돼.”“그런 뜻 아니야.”“그럼 무슨 뜻인데.”유건은 대답하지 못했다.세령은 침대 옆에 세워둔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오늘은 여기서 잘 거야.”“언제까지?”“몰라.”“이 일 하나로 우리 결혼까지 끝내겠다는 거야?”세령의 손이 멈췄다.“이 일 하나?”“그렇게 말한 뜻이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