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유건은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세령은 그때까지도 반지를 다시 끼지 않았다.
낮 동안 몇 번이나 그 메시지를 열어봤다.
[형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읽을 때마다 뜻이 달라지는 문장이었다. 태겸에게 외도를 들키는 게 싫다는 건지, 그보다 더 숨길 게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 묻는 순간 유건이 준비한 대답만 듣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기다렸다.
유건이 돌아와 제 입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발소리가 거실까지 이어졌다.
유건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둔 채 세령을 봤다. 호텔에서 보던 셔츠도 아니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온 모양이었다.
“안 잤네.”
세령은 대답 대신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뒤집었다.
유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내려갔다. 비어 있는 약지를 확인한 순간 표정이 굳었다.
“반지는?”
“당분간 안 낄 거야.”
“세령아.”
“라온 씨랑 언제부터 만났어?”
유건은 재킷을 벗다가 멈췄다. 몇 초 뒤 소파 맞은편에 앉으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끝난 사이야.”
세령이 휴대폰 화면을 켰다.
호텔 결제 내역 하나를 띄워 밀어놓았다. 오늘이 아니었다. 며칠 전이었다.
유건의 눈이 화면에 머물렀다.
“그날은 만나서 정리하려고 했어.”
“끝난 사이였다며.”
말이 끊겼다.
세령은 더 묻지 않았다. 휴대폰을 보여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비밀번호를 확인할 생각도 없었다. 이미 한 번 거짓말한 사람에게 또 다른 거짓말이 없는지 검사하는 일이 우스웠다.
유건이 제 휴대폰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볼래?”
“됐어.”
“비밀번호 그대로야.”
“안 본다고.”
“그럼 뭘 어떻게 해야 믿을 건데.”
세령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침실로 들어가 옷장 아래칸의 작은 여행가방을 꺼냈다.
방에는 아직 두 사람의 생활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건의 시계가 협탁 위에 놓여 있었고, 세령이 아침마다 열어두던 커튼도 반쯤 걷혀 있었다. 옷장에는 유건의 셔츠와 세령의 원피스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세령은 자기 옷만 몇 벌 골라냈다.
사소한 동작인데도 선을 긋는 기분이 들었다. 유건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에도 옷걸이만 하나씩 비워냈다.
“뭐 해?”
“방 옮기려고.”
“어디 가게?”
“게스트룸.”
유건이 옷장 문을 잡았다.
“집에서까지 이럴 필요 있어?”
“같이 자는 게 더 이상해.”
“실수였어.”
세령의 손이 멈췄다.
“한 번?”
유건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세령은 다시 옷을 넣었다. 지퍼를 닫자 유건이 가방 손잡이를 먼저 잡았다.
“차라리 화를 내.”
“놔.”
“소리라도 질러. 나한테 뭐라도 하라고.”
세령은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내가 화내면 당신은 편해져?”
유건의 손끝이 굳었다.
“내가 울고 소리치면 당신이 사과하고, 내가 조금씩 풀리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 뜻 아니야.”
“그럼 비켜.”
이번에는 유건이 손을 놓았다.
세령은 가방을 끌고 복도로 나왔다. 몇 걸음 따라오던 유건이 뒤에서 물었다.
“형이 뭐라고 했어?”
세령의 발이 멈췄다.
“뭐?”
“호텔에서. 형이 너한테 뭐라고 했냐고.”
세령은 천천히 돌아봤다.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뒤에는?”
“그 뒤라니?”
“따로 연락 안 왔어?”
세령은 대답하지 않고 유건의 얼굴만 봤다.
외도 이야기를 할 때보다 표정이 더 굳어 있었다.
“왜?”
“그냥 물어보는 거야.”
“당신이 라온 씨랑 잔 것보다 그 사람이 나한테 연락했는지가 더 궁금해?”
유건의 입이 다물렸다.
세령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게스트룸 문을 열고 가방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늘부터 여기서 잘 거야.”
“언제까지?”
“몰라.”
“세령아.”
“오늘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아.”
문을 닫으려는데 유건이 손으로 막았다.
“형한테는—”
세령의 시선이 올라갔다.
유건은 잠깐 멈칫하더니 말을 바꿨다.
“아니야.”
문이 닫혔다.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나고도 한동안 발소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세령은 침대 끝에 앉았다.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태겸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없다는 걸 확인하고도 화면을 끄지 못했다.
칠 년 만에 다시 만난 사람이 남편의 형이 되어 나타났고, 정작 남편은 자신의 외도보다 그 남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더 궁금해했다.
세령은 휴대폰을 뒤집었다.
새벽 한 시가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현관 쪽에서 전자음이 울렸다.
삑.
곧 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었다.
세령은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며 여행용 캐리어 하나가 먼저 들어왔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뒤따라 들어오다 복도에 선 세령을 발견했다.
문이도.
해외에 있다던 막내였다.
이도는 세령의 얼굴을 보고, 열린 게스트룸 문을 봤다가 마지막으로 빈 약지에 시선을 내렸다.
캐리어 손잡이를 접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형수님.”
세령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도가 한 발 안으로 들어왔다.
“결국 들켰어요?”
“저녁 먹자고 하면 거절할 거야?”세령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조금 전까지는 분명 일 얘기만 했다. 전시 동선과 조명, 벽을 어디까지 남길지 두고 의견을 주고받았고 그 시간 동안은 태겸이 남편의 형이라는 사실도, 7년 전 자신을 놓쳤던 사람이라는 사실도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그래서 더 망설여졌다.지금 저녁을 먹으면 다시 사적인 관계로 돌아가는 걸까.태겸은 기다릴 뿐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세령은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조건 있어.”“말해.”“오늘은 형수도 아니고.”태겸의 눈이 세령에게 머물렀다.“7년 전 당신 여자였던 사람도 아니야.”“응.”“그냥 한세령으로 만날 거야.”태겸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그래.”“옛날 얘기도 안 해.”“알겠어.”“유건 얘기도.”“안 할게.”세령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먹어.”둘이 간 곳은 전시장 근처의 작은 식당이었다.고급스럽지도, 누군가 알아볼까 신경 써야 할 만큼 붐비지도 않았다.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마주 앉고 나자 세령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태겸과 단둘이 밥을 먹는 게 얼마 만인지 계산하려다 그만뒀다.7년을 셀 필요는 없었다.오늘은 오늘이었다.메뉴판을 보던 태겸이 물었다.“요즘도 생선보다 고기 좋아해?”세령이 눈을 들었다.“과거 얘기 안 하기로 했지.”태겸이 메뉴판을 덮었다.“실수.”“그리고 취향 바뀌었어.”“뭐 좋아하는데.”“요즘은 생선.”“왜?”“그냥.”세령은 잠깐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예전에는 싫다고 생각했던 것도 다시 먹어보니까 괜찮은 게 있더라.”태겸은 그 말을 다른 뜻으로 받지 않았다.“그럼 생선으로 할까.”그게 마음에 들었다.무슨 말만 하면 7년 전과 지금을 연결하지 않는 것.식사가 나오기 전 태겸은 물을 따라주다가 물었다.“일 다시 하는 건 어때.”“재밌어.”세령의 대답은 빨랐다.“생각보다?”“아니. 원래 재밌었던 것 같아.”“그럼 왜 그렇게 오래 줄였어.”세령은 컵을 만지다가 어깨를 으쓱
공간 소유주 측 담당자.문태겸.세령은 회의실 입구에서 잠깐 멈췄다.태겸 역시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테이블 위 자료를 정리하던 손이 멎었지만 먼저 다가오지는 않았다.미래가 둘을 번갈아 봤다.“아는 사이야?”세령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응.”그 한마디면 충분했다.여기서 문가의 며느리였다는 설명도, 7년 전 연인이었다는 설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태겸은 자리를 빼주며 말했다.“한세령 씨가 이 프로젝트 맡는 줄 몰랐어.”“나도 담당자가 당신인 줄 몰랐고.”“불편하면 내가 빠질게.”세령이 의자를 당기던 손을 멈췄다.“왜?”“굳이 일까지 나랑 엮일 필요는 없으니까.”세령은 그를 잠시 바라봤다.예전이라면 그 말에 흔들렸을지도 몰랐다. 태겸이 자신을 배려한다는 이유만으로 자리를 피하게 놔뒀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이 프로젝트 당신이 원래 담당한 거지?”“응.”“나 때문에 맡은 것도 아니고?”“아니야.”“그럼 빠질 이유 없어.”태겸의 눈이 세령에게 머물렀다.“나도 내 일 하러 온 거야.”세령은 가져온 기획안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사생활은 사생활이고, 일은 일로 하자.”태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그걸로 대화는 끝났다.회의가 시작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세령은 전시 공간 도면을 펴고 기존 배치안부터 수정했다.“입구 정면 작품은 빼는 게 좋겠어요.”공간 실무자가 물었다.“첫 작품인데요?”“그래서요.”세령이 도면 위 동선을 짚었다.“들어오자마자 답을 보여주면 안쪽으로 들어갈 이유가 줄어요. 여기 벽을 비워두고 관객 시선을 오른쪽으로 한번 꺾었으면 해요.”태겸이 도면을 내려다봤다.“그러면 첫 구간이 비어 보이지 않을까?”“조명을 줄이면 괜찮아.”세령은 잠시 생각한 뒤 선을 하나 더 그었다.“오히려 여기까지는 건물 자체를 보여주고 싶어.”“벽면 보수 안 하고?”“최소한만.”오래된 흔적을 지우고 새것처럼 만드는 것보다 남겨두는 편이 공간과 작품 모두에
“형이 잘못했다고 당신 죄가 줄어드는 건 아니야.”유건은 세령을 붙잡듯 한 걸음 따라왔다.“그래도 형도 똑같잖아.”세령의 걸음이 멈췄다.“뭐가 똑같아.”“결국 형도 자기 생각대로 널 버렸어. 한국까지 와놓고 만나지도 않았고.”“알아.”“그런데 왜 형한테는 기회를 주려고 해?”세령은 천천히 돌아봤다.“내가 태겸한테 기회 준다고 했어?”유건의 입이 멈췄다.“당신은 계속 그걸 묻네.”“뭘.”“태겸보다 내가 나쁘냐, 형도 잘못했는데 왜 나만 버리냐.”유건은 부정하지 못했다.“죄 크기 비교해서 결혼 유지하는 사람 없어.”“난 우리가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해.”“그건 당신 생각이고.”“세령아.”“태겸이 나한테 잘못한 건 태겸하고 정리할 일이야.”세령은 편지가 든 봉투를 가방 안에 넣었다.“이도 잘못은 이도하고, 어머니가 편지 안 보낸 건 어머니하고 따질 거고.”유건의 얼굴이 굳었다.“그럼 나는?”“당신이 한 일은 당신하고 끝낼 거야.”“끝낸다는 말 좀 하지 마.”“왜.”“진짜 끝날 것 같으니까.”유건의 손이 세령의 팔 쪽으로 움직이다가 멈췄다.“형도 너 버렸다는 거 알았잖아. 그럼 적어도 우리 일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니야?”세령은 그 문장을 듣고 확실히 알았다.유건은 아직도 태겸이 내려가면 자신이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형이 틀렸다는 사실이 자신의 자리를 되돌려줄 거라고.“나 이제 그 게임 안 해.”“무슨 게임.”“당신이 평생 하던 거.”세령은 태겸 쪽을 보지 않았다.“형이 하나 가지면 당신도 하나 가져야 하고, 형이 실패하면 당신이 이긴 것 같고.”유건의 눈빛이 굳었다.“나는 그 사이에서 빠질 거야.”“세령아.”“태겸이 잘못했다고 내가 당신한테 돌아갈 이유는 없어.”유건이 다시 다가왔지만 세령은 물러나지 않았다.“나 아직 사랑한다고 했잖아.”“그것도 당신 감정이야.”“넌 아무것도 안 남았어?”질문이 떨어지자 세령은 잠깐 침묵했다.4년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
“당신도 나를 두 번 버렸어. 처음엔 못 와서, 두 번째는 와놓고도 안 만나서.”태겸은 세령을 바라봤다.변명할 수도 있었다.유건이 거짓말을 했다고, 어머니가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가족 모두가 세령이 행복하다고 말했다고.그런데 태겸은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맞아.”세령의 손이 멈췄다.오히려 그 한마디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그게 끝이야?”“아니.”태겸은 잠깐 숨을 고른 뒤 다시 세령을 봤다.“끝일 리 없지. 그런데 네 말은 맞아.”세령은 차라리 아니라고 하길 바랐는지도 몰랐다.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도 속았다고, 자신 역시 피해자라고 말해주면 화를 내기 쉬웠을 것이다.하지만 태겸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았다.“유건이 한 짓도 맞고, 어머니가 편지를 안 보낸 것도 맞아.”혜란의 얼굴이 굳었다.“그래도 마지막에 너한테 직접 안 간 건 나야.”세령은 입술을 다물었다.“한국까지 왔으면서도?”“응.”“내가 정말 행복한지 확인도 안 하고?”“응.”“당신이 겁나서?”“맞아.”태겸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네가 정말 유건을 선택했다고 말할까 봐 무서웠어. 그래서 내가 상처받지 않는 쪽을 택했고, 그 선택 때문에 너까지 상처받았어.”세령은 손에 든 편지를 내려다봤다.7년 전의 태겸은 분명 자신을 사랑했다.그 사랑이 가짜였다고는 이제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사랑이 진짜였다는 사실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동시에 존재했다.세령은 이상하게도 태겸이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게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가 억울함을 내세우면 밀어낼 수 있었을 텐데, 잘못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오래 묻혀 있던 감정까지 함께 올라왔다. 아직 마음이 남아 있다는 뜻인지, 7년 전의 자신이 뒤늦게 위로받는 건지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더 선을 그어야 했다.태겸이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곧바로 용서할 수는 없었다. 유건보다 덜 잔인한 방식이었다는 이유로 그의 선택까지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세령은 이제 누군가의
“내가 안 보냈어.”혜란의 말이 떨어진 뒤 아무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세령은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를 내려다봤다. 7년 동안 자신에게 도착하지 않았던 이유가 너무 단순했다.보내지 않았으니까.태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왜요.”혜란의 손끝이 굳었다.“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세령이 고개를 들었다.“누구한테요?”혜란의 입이 닫혔다.“저한테 맞는 일이었어요? 태겸 씨한테요? 아니면 이 집에?”“세령아.”“저한테는 한 번도 안 물으셨잖아요.”혜란은 대답하지 않았다.유건도 처음 듣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태겸의 휴대폰을 이용해 두 사람을 끊어놓은 것과 별개로, 어머니가 편지까지 숨겼다는 사실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세령은 그를 보지 않았다.지금은 누가 더 나쁜지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태겸이 편지를 썼고, 혜란이 보내지 않았다.그런데 세령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편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고 믿었다면 태겸은 정말 그것으로 끝냈을까.세령은 태겸을 봤다.“당신은 그 뒤에 아무것도 안 했어?”태겸의 얼굴이 굳었다.그 짧은 변화만으로 충분했다.“했네.”혜란이 태겸을 바라봤고 유건도 고개를 들었다.“뭘 했어.”태겸은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네가 유건이랑 약혼하기 직전에 한국에 왔어.”세령의 손이 편지 위에서 멈췄다.“뭐?”“너 만나려고.”이번에는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나를 만나려고 한국까지 왔다고?”“응.”“그런데 왜 난 몰라.”태겸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못 만났으니까.”세령은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왜?”태겸의 턱이 굳었다.“네가 유건이랑 잘 지낸다는 말을 들었어.”“누구한테.”잠시 침묵한 뒤 답이 나왔다.“가족한테.”세령은 혜란을 봤다가 정혁에게 시선을 옮겼다.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행복하다고 했어?”“그렇게 들었어.”“그래서?”태겸은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다시 물러났어.”세령은 어이가 없어 웃음 비슷한 숨을 흘렸다.“또.”태겸의 눈빛
혜란의 손에 오래된 봉투가 들려 있었다.세령은 한동안 손을 내밀지 못했다.7년 전 자신의 이름.태겸의 글씨.받았어야 했지만 끝내 도착하지 않았던 편지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이거 맞아요?”혜란은 대답하지 않았다.세령이 봉투를 받아들었다.종이는 오래돼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했지만 봉인은 뜯기지 않은 채였다.그 사실이 더 선명했다.누군가 읽고 숨긴 것도 아니었다.애초에 보내지 않은 편지였다.“열어봐도 돼요?”묻고 나서 세령은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받는 사람이 자신인데도 허락부터 묻고 있었다.혜란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세령은 봉투를 열었다.안쪽에서 접힌 편지지 한 장이 나왔다.첫 줄부터 태겸의 글씨였다.세령아.손끝이 멈췄다.7년 전의 이름이 지금의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편지는 길지 않았다.자신이 너무 늦었다는 말.직접 묻지 않고 세령이 마음을 바꿨다고 믿은 게 잘못이었다는 말.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세령은 다음 줄에서 숨을 멈췄다.집안은 내가 설득할게.이번에는 네가 원하는 걸 직접 듣고 싶어.한 번만 만나줘.세령은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또 읽었다.7년 전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한 번만 만나달라는 말.기다리라고 하지도, 포기하라고 하지도 않았다.자기 집안은 자기가 설득하겠다고 썼다.세령의 눈앞에 결혼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태겸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포기했던 밤.유건에게 기대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혹시 태겸이 올까 생각했던 날들.만약 이 편지를 그때 받았다면.세령의 생각이 거기까지 갔다.만약 받았다면 유건과 약혼하지 않았을까.결혼을 멈췄을까.태겸을 만나러 갔을까.7년이 완전히 달라졌을까.세령은 편지를 접었다.그 생각을 더 하지 않았다.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이미 지나간 인생을 상상하는 일이 아니었다.그때의 자신은 편지를 받지 못했다.그게 사실이었다.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이미 7년을 살아왔다.없어진 시간을 되찾는 것보다 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