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 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 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 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익숙한 소리였다. 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
목소리가 차분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커피 마실래?”
“네.”“근데 건우 왜 나한테 계속 존대해?”
“....형수니까.”“내가 불편하구나. 너 편한대로 해. 나도 내가 편한대로 할테니까.”
하나는 컵을 건넸다. 손은 안정돼 있었다.
떨림도, 흔들림도 없이.“경찰에서 오늘 다시 연락 올 거야.”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출근은…”
“당분간 쉬기로 했어.”검사라는 직함이 그 말 뒤에 붙어야 할 것 같았지만,
하나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건우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살폈다.어제, 거실에서 했던 말들.
창문. 유리 조각.
‘넌 내가 이상하지 않아?’그 문장들이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어젯밤에…”
건우가 말을 꺼내자,
하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올라왔다.“왜?”
목소리 톤이 맑았다.
남편을 잃은 아내가 저렇게 맑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가“아니에요.”
말을 삼켰다.
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마셨다.“형 장례 절차는 오늘 상의해야 할 것 같아.”
현실적인 문장.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쪽에서도 연락 올 거야. 신우 씨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들,
정리해야 할 게 많거든.”그 말에 건우의 시선이 멈췄다.
“프로젝트요?”
“응. 해외 투자 건.”짧은 대답.그는 어젯밤 현장에서 들었던 감식 요원의 말을 떠올렸다.
강도 가능성. 침입 흔적.-그런데 왜 자꾸 회사 얘기가 먼저 나오는 걸까.
“형이… 요즘 많이 힘들어했어요?”
이번엔 건우가 묻지 않고는 못 견뎠다.
하나는 잠시 컵을 내려다봤다.“회사 일 때문이었겠지.”
“다른 건요.”“다른 게 뭐.”
건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주 미묘하게 고개를 기울였다.“건우야.”
“네.”“혹시 너…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그 질문은 낮의 목소리였다.
차갑지도, 도발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확인에 가까웠다.건우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 대답이 너무 빨라서, 스스로도 낯설었다.
하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나도 모르겠어.”
낮은 목소리.
“어제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장면이 아직도 안 지워져.”
그녀의 눈이 잠시 멀어졌다.
“피가 바닥에 번져 있었고…신우 씨가 나를 보고 있었어.”
건우의 심장이 잠깐 멈췄다.
“보고 있었다고요?”
“아니.”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고.”
그 말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보고 있었다와 느껴졌다 사이의 간격.“숨은…”
건우가 물었다.
“없었어.”
이번에는 단정했다.
“이미 늦었어.”
그녀의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이미 늦었다.그 문장이 건우의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점심 무렵,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비서라는 사람이었다.“대표님이 최근에 정리 중이던 자료가 있습니다.
가족분께 전달해야 할 것 같아서요.”건우는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끊자, 하나가 물었다.“회사 가?”
“네. 잠깐.”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 말은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어색했다. 회사는 생각보다 조용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모였다가 흩어졌다.윤신우의 동생.
그 수식어가 건우를 따라다녔다. 비서는 회의실로 안내했다.“대표님이 어제 오후에 수정하신 서류입니다.”
파일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해외 법인 투자 구조.
지분 변동 계획. 그리고, 최근 통화 내역 일부. 건우의 시선이 멈췄다. 모르는 번호가 반복돼 있었다.통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부분 3분, 5분.어제도 있었다.
저녁 7시 12분. 사망 추정 시각과 가까운 시간.“이 번호 아세요?”
건우가 물었다.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개인 번호인 것 같습니다.”
그때, 회의실 문이 노크 없이 열렸다.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짙지 않은 화장. 차분한 눈빛. 검은 정장.
“죄송합니다. 방해한 건가요.”
목소리가 낮고 또렷했다.
비서가 서둘러 소개했다.“전략기획팀 차장, 서유림입니다.”
건우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서유림.
그 이름은 처음 들었다.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건우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표님 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녀가 말했다.
건우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유림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어제 저녁, 대표님이 저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건우의 심장이 느리게 뛰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였죠?”
유림은 잠시 건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오늘로 끝내자고 하셨습니다.”
짧은 문장. 그 의미가 바로 닿지 않았다.
“무엇을요.”
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웃었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죠.”
그녀의 시선이 파일 위 통화 기록을 스쳤다.
“번호, 궁금하시죠?”
그녀가 낮게 덧붙였다.
“제 번호입니다.”
회의실 공기가 천천히 식어갔다.
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형이 죽기 직전 통화한 사람.
그리고 지금,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여자. 밖에서는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그는 그 순간, 형의 죽음이 어젯밤 거실에서
끝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이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안쪽의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층수를 표시하는 숫자가 내려갈수록, 방금 전까지 이어지던 생각이 더 또렷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건우는 벽에 기대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음 동선이 그려지고 있었다.최준석.이름 하나가 방향을 바꿨다.김도현이 만든 흐름이 드러났다면,최준석은 그 흐름을 유지시키는 역할에 가까웠다.그 말은 곧. 지금 이 구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지하 주차장의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바닥에 길게 번지고 있었다.건우는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하나는 옆을 따라붙었다.“위치 찍혔어?”건우는 짧게 대답했다.“대략.”그의 시선이 차량 사이를 훑었다.“도시 외곽.”잠시 후.“리조트 쪽.”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사람 많지 않은 곳.”서하는 뒤에서 말했다.“숨기 좋네.”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미 알고 있었다.사람이 적은 곳은 시선이 적다.시선이 적으면. 움직임이 자유로워진다.그래서. 그곳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엔진 소리가 낮게 울렸다.차는 곧장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지상으로 올라오자, 저녁이 내려앉기 시작하고 있었다.빛이 낮아졌고, 그림자가 길어졌다. 도로 위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건우는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지금 필요한 건 빠름이 아니라 정확함이었다.하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마지막 위치.”잠시 후.“두 시간 전이야.”건우는 짧게 물었다.“이동 속도.”하나는 화면을 확인했다.“차량 기준이면.”잠시 생각했다.“지금쯤 도착했을 수도 있고.”서하는 덧붙였다.“아직 있을 수도 있고.”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둘 다 가능했다.그래서, 놓칠 수 없다.차는 도시를 벗어나고 있었다.건물들이 줄어들고, 도로가 길게
모니터를 닫자, 방 안의 공기가 다시 평소의 밀도로 돌아왔다.숫자와 기록 속에 잠겨 있던 시간이 빠져나가자, 주변의 소리가 조금씩 또렷해졌다. 누군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통화 음성, 키보드를 두드리는 리듬. 일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다.건우는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았다.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방금 정리한 흐름을 머릿속에서 한 번 더 훑었다.김도현.그리고, 최준석.이름 두 개가 같은 선 위에 놓여 있었다.하나는 조용히 말했다.“연락할 거야?”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저었다.“아니.”짧은 대답이었다.하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 대답에는 이미 방향이 담겨 있었다.건우는 말했다.“지금 연락하면.”잠시 후.“숨는다.”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아직 모른다.”짧은 설명.최준석은 지금 상황을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김도현이 흔들렸다는 것.흐름이 드러났다는 것.그 모든 것이 아직 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그 틈이 필요했다.서하는 벽에 기대며 말했다.“그럼 먼저 보러 가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위치부터.”그의 말이 이어졌다.“확인한다.”하나는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자료에 있지.”건우는 짧게 말했다.“있다.”그는 USB 안에서 열어둔 파일을 다시 불러왔다.연결된 이름 목록.그 중 하나, 최준석.이름을 클릭했다.관련 정보가 펼쳐졌다.소속.직함.연락처.그리고, 최근 동선.하나는 화면을 따라가며 말했다.“외부 감사팀.”잠시 후.“본사는 따로 있고.”건우는 이어서 말했다.“지금은.”그의 시선이 한 줄에 멈췄다.“출장 중.”짧은 정적.하나는 눈을 좁혔다.“출장?”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제부터.”그의 말이 이어졌다.“지방.”서하는 작게 웃었다.“타이밍 좋네.”그녀의 말에는 가벼움이 있었지만, 상황은 가볍지 않았다.하나는 조용히 물었다.“우연일까.”건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시선을 내려
파일을 하나 더 여는 순간, 화면의 결이 달라졌다.숫자와 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점의 기록들이 층을 이루며 쌓여 있었다. 거래 내역과 메일, 승인 로그가 시간 순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비어 있는 구간이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건우는 마우스를 멈추지 않았다.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흐름을 한 번 따라가고,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같은 길을 두 번 밟으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균열이 드러난다.하나는 옆에서 조용히 물었다.“뭐 보여.”건우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비어 있는 시간.”짧은 답이었다.하나는 화면을 더 가까이 들여다봤다.“어디.”건우는 커서를 한 지점에 멈췄다.“여기.”날짜 하나가 표시됐다.특정 구간, 거래가 멈춰 있는 시간.그 전후로는 일정하게 이어지던 흐름이 그 구간만 비어 있었다.하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왜 끊겼지.”건우는 천천히 말했다.“끊은 게 아니라.”잠시 후.“숨긴 거다.”그 말은 단순했다.흐름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흐름을 가리는 사람도 있다.그리고, 그 가려진 구간은 대개 중요한 순간이다.서하는 뒤에서 화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사고 날짜.”그녀의 말이 이어졌다.“그 근처 아니야.”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다.”그의 시선이 더 깊어졌다.“사고 전후.”짧은 정적, 하나는 숨을 낮췄다.“그럼.”그녀의 말이 이어졌다.“그때 뭔가 더 있었네.”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이미 그 방향으로 생각이 이어지고 있었다.그는 다른 파일을 열었다.메일 기록, 날짜를 맞췄다.같은 시점.같은 구간.그리고, 짧은 문장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일정 변경.’그 아래.‘직접 처리.’건우의 손이 멈췄다.하나는 그 문장을 읽었다.“직접?”건우는 낮게 말했다.“평소랑 다르다.”짧은 설명이었다.보통 이런 구조에서는 역할이 나뉜다.흐름을 만드는 사람.확인하는 사람.정리하는 사람.그런데, 그 구간에서는 ‘직접 처리’
모니터에 떠오른 목록은 단순한 파일 배열이 아니었다.숫자와 날짜, 거래 코드들이 줄지어 이어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이름들은 서로를 향해 보이지 않는 선을 뻗고 있었다. 건우는 마우스를 움직이지 않은 채,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처음에는 흐름을 본다.그다음에는 끊긴 지점을 찾는다.그리고 마지막에, 그 사이를 메우는 이름이 드러난다.그 순서를 몸으로 알고 있었다.하나는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열어봐.”건우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대신 커서를 움직였다. 하나의 파일을 선택하고, 더블클릭했다.창이 열렸다.표 형태의 데이터가 화면을 채웠다.입금과 출금, 계좌 간 이동, 반복되는 패턴. 일정한 간격으로 쪼개진 금액들이 서로 다른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고, 그 경로의 끝에는 다시 같은 지점으로 모이는 구조가 숨어 있었다.하나는 화면을 따라가며 숨을 낮췄다.“이거.”그녀의 말이 이어졌다.“완전히 설계된 구조네.”건우는 천천히 말했다.“흐름이 끊기지 않는다.”짧은 설명이었다.단순히 돈을 빼돌린 게 아니라,흐름을 끊기지 않게 만들어 놓았다.그래야 추적이 늦어진다.그래야. 시간이 생긴다.서하는 뒤에서 화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혼자 한 거 아니다.”건우는 대답 대신 파일을 하나 더 열었다.다른 계좌.다른 경로.그러나 구조는 같았다.그리고, 그 끝에서. 같은 이름이 반복되고 있었다.건우의 시선이 멈췄다.하나는 그 지점을 따라갔다.“저 이름.”그녀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건우는 천천히 읽었다.“최준석.”짧은 이름이었다.하지만, 그 이름이 놓인 위치는 짧지 않았다.하나는 기억을 더듬었다.“이 사람.”그녀가 말했다.“외부 감사팀.”건우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형이.”잠시 후 덧붙였다.“마지막에 접촉하려고 했던 사람.”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가 달라졌다.단순한 공범이 아니었다.이 구조를 알고 있는 사람.혹은 이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서하는
차가 공터를 빠져나오자, 다시 일상의 소음이 귀에 들어왔다.멀리서 들려오는 차량 소리, 교차로를 건너는 사람들의 발걸음, 신호등이 바뀌는 짧은 울림. 방금 전까지 머물던 공간과는 전혀 다른 결의 시간이었다.건우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지 않았다.손에 쥔 USB를 잠시 내려다봤다. 작은 금속 조각 하나가 손바닥 위에 얹혀 있었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이미 알고 있었다.하나는 조수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지금 확인할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건우는 고개를 저었다.“여기서 안 본다.”짧은 대답이었다.하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이 장소는 끝이 아니라 중간 지점에 가까웠다.누군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끼어들 수도 있는 곳. 중요한 것은 안전하게 가져가는 것이지, 서둘러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건우는 USB를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그 동작이 끝나자마자, 비로소 시동을 걸었다.엔진 소리가 다시 공간을 채웠다.차는 천천히 움직였다.골목을 빠져나와 큰 도로로 합류했다.하나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이제.”그녀의 말이 이어졌다.“다 끝난 느낌이야.”건우는 시선을 도로에 둔 채 대답했다.“아직 아니다.”그의 목소리는 낮았다.“지금부터 정리해야 한다.”짧은 침묵.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자료.”건우는 말했다.“흐름.”그리고.“연결된 사람들.”그 단어들이 이어졌다.서하는 뒷좌석에서 창문에 기대 있었다.“하나로 묶어야지.”그녀가 말했다.건우는 짧게 대답했다.“응.”차는 도심 방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건물들이 다시 높아졌고, 차량 흐름이 복잡해졌다. 신호에 걸렸다가 다시 움직이고, 다시 멈추는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건우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하나는 조용히 물었다.“김도현.”그녀의 말이 이어졌다.“그대로 두는 거야?”건우는 잠시 생각했다.“도망 안 간다.”짧은 대답이었다.하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이미 움직였다.
김도현의 손이 앞으로 뻗어 나왔다.아주 느린 동작이었다. 망설임이 남아 있는 속도였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USB가 공기 위를 조용히 가르며 건우 쪽으로 가까워졌다.건우는 서두르지 않았다.손을 뻗지 않은 채, 그 움직임을 끝까지 지켜봤다. 중간에 끊어지지 않는지, 마지막 순간에 방향이 바뀌지 않는지, 그 짧은 거리를 통과하는 동안의 모든 변화를 확인하고 있었다.김도현의 손이 멈췄다.거리는 한 뼘도 되지 않았다.건우는 그제야 손을 들었다.두 사람의 손이 같은 높이에 놓였다.잠시.그 짧은 틈이 길게 늘어졌다.그리고, USB가 넘어왔다.손에서 손으로 무게는 가벼웠다.그러나. 건우의 손에 닿는 순간, 그 작은 물건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건우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한 번 더 확인하듯 손가락으로 감싸 쥐었다.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김도현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마치 그 물건이 완전히 자신의 손을 떠나는 순간을 끝까지 확인하려는 것처럼.건우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리고, 천천히 말했다.“이걸로.”짧은 문장이었다.김도현의 눈이 움직였다.건우는 이어 말했다.“끝이 아니라.”잠시 후.“시작입니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터의 공기가 다시 바뀌었다.김도현은 손을 내렸다.천천히. 그러나 힘이 빠진 동작은 아니었다.오히려 무언가를 내려놓은 뒤의 정리된 움직임에 가까웠다.그는 고개를 들어 건우를 바라봤다.“그 안에 있는 거.”그의 목소리는 낮았다.“다 가져갈 생각이냐.”건우는 USB를 내려다봤다.그리고 다시 올렸다.“가져가는 게 아니라.”짧게.“확인합니다.”김도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확인.”그는 그 단어를 반복했다.“확인으로 끝나는 일 아니야.”그 말은 경고처럼 들렸지만, 실제로는 이미 지나온 과정을 설명하는 쪽에 가까웠다.건우는 반응하지 않았다.대신 물었다.“이 안에.”그의 시선이 USB에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9:129:189:37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왜.’-형은 왜 전화했는가.-위험을 알리기 위해?-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그 생각은 섬뜩했다.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기억은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