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 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 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 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익숙한 소리였다. 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
목소리가 차분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커피 마실래?”
“네.”“근데 건우 왜 나한테 계속 존대해?”
“....형수니까.”“내가 불편하구나. 너 편한대로 해. 나도 내가 편한대로 할테니까.”
하나는 컵을 건넸다. 손은 안정돼 있었다.
떨림도, 흔들림도 없이.“경찰에서 오늘 다시 연락 올 거야.”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출근은…”
“당분간 쉬기로 했어.”검사라는 직함이 그 말 뒤에 붙어야 할 것 같았지만,
하나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건우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살폈다.어제, 거실에서 했던 말들.
창문. 유리 조각.
‘넌 내가 이상하지 않아?’그 문장들이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어젯밤에…”
건우가 말을 꺼내자,
하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올라왔다.“왜?”
목소리 톤이 맑았다.
남편을 잃은 아내가 저렇게 맑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가“아니에요.”
말을 삼켰다.
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마셨다.“형 장례 절차는 오늘 상의해야 할 것 같아.”
현실적인 문장.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쪽에서도 연락 올 거야. 신우 씨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들,
정리해야 할 게 많거든.”그 말에 건우의 시선이 멈췄다.
“프로젝트요?”
“응. 해외 투자 건.”짧은 대답.그는 어젯밤 현장에서 들었던 감식 요원의 말을 떠올렸다.
강도 가능성. 침입 흔적.-그런데 왜 자꾸 회사 얘기가 먼저 나오는 걸까.
“형이… 요즘 많이 힘들어했어요?”
이번엔 건우가 묻지 않고는 못 견뎠다.
하나는 잠시 컵을 내려다봤다.“회사 일 때문이었겠지.”
“다른 건요.”“다른 게 뭐.”
건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주 미묘하게 고개를 기울였다.“건우야.”
“네.”“혹시 너…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그 질문은 낮의 목소리였다.
차갑지도, 도발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확인에 가까웠다.건우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 대답이 너무 빨라서, 스스로도 낯설었다.
하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나도 모르겠어.”
낮은 목소리.
“어제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장면이 아직도 안 지워져.”
그녀의 눈이 잠시 멀어졌다.
“피가 바닥에 번져 있었고…신우 씨가 나를 보고 있었어.”
건우의 심장이 잠깐 멈췄다.
“보고 있었다고요?”
“아니.”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고.”
그 말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보고 있었다와 느껴졌다 사이의 간격.“숨은…”
건우가 물었다.
“없었어.”
이번에는 단정했다.
“이미 늦었어.”
그녀의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이미 늦었다.그 문장이 건우의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점심 무렵,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비서라는 사람이었다.“대표님이 최근에 정리 중이던 자료가 있습니다.
가족분께 전달해야 할 것 같아서요.”건우는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끊자, 하나가 물었다.“회사 가?”
“네. 잠깐.”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 말은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어색했다. 회사는 생각보다 조용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모였다가 흩어졌다.윤신우의 동생.
그 수식어가 건우를 따라다녔다. 비서는 회의실로 안내했다.“대표님이 어제 오후에 수정하신 서류입니다.”
파일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해외 법인 투자 구조.
지분 변동 계획. 그리고, 최근 통화 내역 일부. 건우의 시선이 멈췄다. 모르는 번호가 반복돼 있었다.통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부분 3분, 5분.어제도 있었다.
저녁 7시 12분. 사망 추정 시각과 가까운 시간.“이 번호 아세요?”
건우가 물었다.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개인 번호인 것 같습니다.”
그때, 회의실 문이 노크 없이 열렸다.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짙지 않은 화장. 차분한 눈빛. 검은 정장.
“죄송합니다. 방해한 건가요.”
목소리가 낮고 또렷했다.
비서가 서둘러 소개했다.“전략기획팀 차장, 서유림입니다.”
건우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서유림.
그 이름은 처음 들었다.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건우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표님 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녀가 말했다.
건우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유림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어제 저녁, 대표님이 저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건우의 심장이 느리게 뛰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였죠?”
유림은 잠시 건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오늘로 끝내자고 하셨습니다.”
짧은 문장. 그 의미가 바로 닿지 않았다.
“무엇을요.”
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웃었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죠.”
그녀의 시선이 파일 위 통화 기록을 스쳤다.
“번호, 궁금하시죠?”
그녀가 낮게 덧붙였다.
“제 번호입니다.”
회의실 공기가 천천히 식어갔다.
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형이 죽기 직전 통화한 사람.
그리고 지금,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여자. 밖에서는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그는 그 순간, 형의 죽음이 어젯밤 거실에서
끝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이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경찰서 앞에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몸은 이미 밤새 비와 조사, 녹음 속 신우의 목소리를 지나오느라 한계에 가까웠지만, 건우는 그 피로가 오히려 지금 움직여야 한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 잠깐이라도 앉아버리면, 신우가 남긴 말과 녹음 속에서 새롭게 열린 사고의 가능성이 다시 흐려질 것 같았고, 그 흐림이 찾아오는 순간 자신은 또 한 번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나는 그 판단을 바로 알아차렸다.“병원 가려고?”건우는 택시를 부르려 휴대폰을 꺼내다가 그녀를 봤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읽힌 표정이었다.“응. 내 사고 기록부터 확인해야겠어.”하나는 잠깐 눈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말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건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신우의 녹음에서 건우의 사고가 언급된 이상, 그것을 뒤로 미루는 건 더 이상 안전이 아니라 회피에 가까웠다.“같이 갈게.”그녀가 말했다.건우는 이번에는 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어젯밤이었다면 혼자 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위험하니까, 네가 흔들리니까, 내가 먼저 확인해야 하니까. 그런 이유들은 늘 그럴듯했고, 때로는 진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식의 보호가 무엇을 남기는지 그는 너무 많이 봐버렸다. 신우가 하나를 지키겠다는 말로 숨긴 것들, 자신이 하나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미뤄둔 것들, 그리고 서하가 끝내버린 밤까지.숨김은 늘 보호의 얼굴을 하고 오지만, 남는 건 대개 더 깊은 고립이었다.“그래.”건우는 짧게 답한 뒤, 택시를 호출했다.차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경찰서 앞 처마 아래에 서 있었다. 하늘은 밝아졌지만 햇빛은 약했고, 젖은 도로는 아직 밤의 흔적을 놓지 않고 있었다. 하나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끈을 천천히 감았다 풀었다. 그 움직임이 불안에서 오는 습관이라는 걸 건우는 알았다.“네 사고가…”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정말 누군가가 만든 거라면.”건우는 그녀의 다음 말을
건우는 입술을 다물었다. 신우의 사과는 지금 와서 아무것도 고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의미한 것도 아니었다. 죽은 사람의 말은 늘 늦게 온다. 그리고 늦게 온 말일수록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오래 남는다.“그래도 이건 말해야겠다. 하나는 몰랐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하나는 네 사고와도, 내가 쫓던 일과도 관계없다. 그 애가 아는 건 내가 보여준 것뿐이다. 내가 감춘 것 말고.”하나는 그 문장에서 결국 눈물을 떨어뜨렸다. 소리 없이, 아주 작게. 그녀는 손으로 닦지도 않았다. 눈물이 뺨을 따라 내려가 테이블 위로 떨어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신우의 숨이 녹음 속에서 길게 들렸다.“그런데 하나 안에, 내가 설명하지 못한 밤이 있다.”방 안이 완전히 멈췄다.건우의 손이 테이블 가장자리를 아주 미세하게 움켜쥐었다.하나는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무너져 있던 얼굴이 아니라, 낯선 말을 들은 사람의 얼굴이었다.“그 밤이 사람인지, 기억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늦게 본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순간의 하나는 내가 알던 하나가 아니었다. 이 말을 하면 내가 미친 사람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녹음으로 남긴다. 내가 그 애를 의심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그 애를 지키고 싶었는데, 정작 무엇으로부터 지켜야 하는지 몰랐다.”건우는 서하의 이름을 떠올렸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 이름이 방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우는 서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느꼈다. 하나 안에 있는 설명되지 않는 밤. 그 밤이 신우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끝내 그를 차미령의 흔적과 연결시켰을 가능성이 있었다.녹음 속 신우는 잠시 기침을 했다. 녹음된 소리인데도, 방 안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이 진짜 차미령인지, 정미라인지, 아니면 그 이름 뒤에 숨은 사람인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게 파일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 안에 건우 네 사고와 관련된 목소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신우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평소의 목소리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건우가 기억하는 윤신우는 말끝을 쉽게 흐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감정이 올라와도 문장부터 정리한 뒤 입을 여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녹음 속의 그는 숨을 고르는 사이마다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이 공포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혹은 누군가에게 끝내 닿지 못할 말을 남기고 있다는 자각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하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두 손을 맞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 수 있는 지점을 이미 지나온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뜬 채 노트북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형사는 재생 버튼에서 손을 뗀 뒤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젊은 형사는 옆에 서서 화면의 파형을 확인하고 있었다.녹음 속 신우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강건우가 이걸 듣고 있다면, 아마 나는 네게 직접 말하지 못한 거겠지.”건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 이름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순간, 가슴 안쪽이 아주 낮게 내려앉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름은 자신을 향해 있었고, 이 방에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들었다. 더 이상 부재중 통화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신우는 자신에게 남기려 했다. 닿지 못한 통화는 결국 이 파일로 돌아왔다.“네가 전화를 안 받은 걸 원망하려고 남기는 건 아니다. 네가 받았어도, 나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 거다. 내가 쫓고 있는 게 사람인지, 돈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늦게 알아버린 죄인지, 나도 아직 다 정리하지 못했다.”하나의 숨이 짧게 흔들렸다. 건우는 그 소리를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하나를 보면, 자신도 무너질 수 있었다. 대신 그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하나에만 시선을 붙들었다.“차미령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 이름으로 살고 있지 않았다. 정미라라는 이름이 있고, 그 뒤에 또 다른 이름들이 있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카페 안에는 손님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고, 커피 머신 소리와 낮은 대화들이 공간을 채웠다. 두 사람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 하나는 컵을 양손으로 감싼 채 앉아 있었고, 건우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화면이 켜지기만을 기다렸다.기다림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다. 건우는 신우가 주방 틈에 무언가를 숨기는 장면을 상상했다. 손에 작은 저장 장치를 들고, 집 안을 한 번 둘러본 뒤,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틈새에 그것을 넣는 모습. 그리고 그가 그 뒤에 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그는 이미 자신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하나는 갑자기 말했다.“신우 씨가 마지막으로 나한테 한 말이 기억났어.”건우는 고개를 들었다.“뭐라고 했는데.”“별말 아니었어. ‘냉장고 옆에 먼지 많더라.’ 그랬어.”하나의 눈이 젖어들기 시작했지만, 울지는 않았다.“나는 그때 그냥 또 잔소리하려는 줄 알고, 나중에 청소하겠다고 했어.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이 알려준 거였나 봐. 직접 말 못 하고, 그렇게.”건우는 커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우는 죽기 전 여러 방식으로 신호를 남기고 있었다. 전화를 걸었고, 이상한 말로 위치를 남겼고, 누군가를 추적했다. 문제는 아무도 제때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형사였다.건우는 바로 받았다.“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져 있었다.“말씀하신 위치에서 물건 하나가 나왔습니다.”건우는 하나를 봤다. 하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이미 알아차린 듯 컵을 내려놓았다.“뭡니까?”건우가 물었다.“소형 USB 저장 장치입니다. 먼지와 테이프에 감싸져 있어 현장팀이 처음에는 확인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건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안쪽이 아주 깊게 내려앉았다.“내용은요.”“지금 바로 분석팀으로 넘길 겁니다. 파일이 살아 있
하나는 경찰서 밖으로 나와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침은 완전히 시작되어 있었고, 비가 그친 하늘은 낮게 흐렸다. 젖은 나무와 도로에서 물비린내가 올라왔고, 출근길 사람들은 두 사람을 스치듯 지나갔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지만, 건우와 하나에게는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신우 씨 집에 다시 가야 해.”하나가 말했다.건우는 예상하고 있었다.“경찰이 막을 거야.”“알아. 그래도 가야 해. 집 밖에서라도.”“왜.”하나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생각난 게 있어.”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뭐가.”“신우 씨가 가끔 뭘 숨길 때, 서재에 안 뒀어. 오히려 너무 뻔하다고 했거든. 중요한 건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데 둬야 한다고.”“어디.”하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을 따라가는 눈이었다.“주방.”건우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주방?”“싱크대 아래는 아니고, 냉장고 옆에 작은 틈이 있었어. 예전에 내가 거길 막자고 했는데, 신우 씨가 그냥 두자고 했어. 먼지만 쌓인다고 했더니, 그래도 거긴 손 안 타는 자리라 좋다고 했어. 그때는 그냥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그녀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건우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신우가 녹음 파일 같은 것을 숨겼다면, 누구나 먼저 뒤질 서재나 책상이 아니라, 생활 속에 섞여 있는 작은 틈을 선택했을 수 있다.“경찰한테 말하자.”건우가 말했다.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 다시 저었다.“말해야 하는데, 말하기 전에 내가 직접 확인하고 싶어.”“그건 위험해.”“알아.”하나는 그를 똑바로 봤다.“그런데 나도 이제 계속 남이 확인한 걸 듣기만 하고 싶지는 않아.”그 말은 고집이 아니라, 아주 오래 밀려 있던 감정의 끝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건우는 그녀를 막고 싶었지만, 쉽게 막지 못했다. 신우가 죽은 뒤로 하나는 계속 ‘결과를 본 사람’으로 밀려 있었다. 집 앞에서 울고, 경찰 앞에서 진술하
문태오의 두 번째 메시지를 읽은 뒤, 건우는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 머물렀지만, 문장을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묻든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문태오는 이미 자료를 넘겼고, 이름을 던졌고, 이제는 녹음 파일을 찾으라고 말했다. 순서가 있었다. 그 순서를 따라가면 뭔가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그 길을 문태오가 먼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불편했다.하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이 사람은 왜 계속 너한테만 말하지.”그녀가 물었다.건우는 휴대폰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주머니에 넣었다.“내가 형의 마지막 통화 상대가 될 뻔했으니까.”“될 뻔한 거지, 된 건 아니잖아.”하나의 말은 낮았지만 날카로웠다. 건우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신우는 전화를 걸었고, 건우는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둘 사이에는 통화가 없었다. 그런데도 문태오는 그 실패한 연결을 마치 마지막 의사처럼 취급하고 있었다.“문태오 입장에서는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어.”건우가 말했다.“형이 마지막에 누구한테 손을 뻗으려 했는지. 실제로 닿았는지보다.”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경찰서 복도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봤고, 건우는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복도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그 소음은 이상하게 멀었다. 방금 전까지 회의실 안에서 정미라와 차미령이라는 두 이름이 사건의 중심으로 올라왔고, 이제 문태오가 던진 ‘목소리’라는 단어가 그 이름들을 다시 다른 방향으로 밀어내고 있었다.“녹음 파일이 있으면.”하나가 말했다.“신우 씨가 왜 그 사람을 쫓았는지 알 수 있겠네.”“그럴 가능성이 커.”“그런데 그 파일을 누가 갖고 있을까.”건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몇 가지였다. 신우가 이미 확보했을 수도 있고, 차미령 또는 정미라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CCTV 속 인물이 들고 있던 녹음기에 들어 있었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9:129:189:37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왜.’-형은 왜 전화했는가.-위험을 알리기 위해?-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그 생각은 섬뜩했다.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기억은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