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
9:12
9:18
9:37
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
‘왜.’
-형은 왜 전화했는가.
-위험을 알리기 위해?
-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
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섬뜩했다.
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
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
기억은 흔들리고, 문은 잠겨 있었고, 통화는 조용했다.
그리고 이제 의도라는 단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은 길
비는 오지 않았지만,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건우는 오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거실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어제 적어둔 숫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9:12
9:18
9:37
그 아래, ‘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숫자는 바뀌지 않는다.
하나는 방에서 나왔다.
출근 준비를 마친 얼굴이었다.
“오늘 회사 안 가?”
“오후에 잠깐.”
건우는 짧게 답했다.
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건우야.”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시 시험 볼 생각은 없어?”
질문은 담담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건우는 고개를 들었다.
“검사.”
“응.”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는 시선을 식탁 위 숫자에 두었다.
“지금은 아니에요.”
“왜.”
짧은 질문. 건우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제가 검사가 되면… 이 사건 못 건드려요.”
하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건 네 사건이 아니야.”
그녀의 말은 논리적으로 옳았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럼.”
“제 형 사건이에요.”
말이 낮게 떨어졌다.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 말했다.
“검사가 되면… 감정 개입 금지잖아요.”
“당연하지.”
“지금은 안 돼요.”
건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 아직… 감정 정리 안 됐어요.”
그건 솔직한 말이었다.
부모, 형, 하나. 그는 아직 아무것도 놓지 못했다.
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깊었다.
오후, 건우는 형의 회사 자료를 정리하다가 한 통의 메일을 발견했다.
발신인은 외부 투자 컨설팅 회사. 제목은 간단했다.
‘9/18 일정 확정 관련’
날짜는 사건 당일 오전. 그는 메일을 열었다.
‘대표님, 오늘 저녁 9시 전후로 말씀 나누기로 한 건, 비공개로 진행하는 걸로 정리하겠습니다.’
9시 전후. 건우의 손이 멈췄다.
비공개.
그는 메일 하단의 연락처를 바라봤다.
회사명이 낯설지 않았다.
유림이 언급했던 투자자였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형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이 9시 전후라면
9시 12분 통화 종료.
9시 18분 아내에게 부재중.
그 사이. 그는 메일을 다시 읽었다.
‘비공개.’
-왜 비공개였을까.
저녁 시간, 하나는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건우는 메일을 보여주었다.
“이거… 알고 있었어요?”
하나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잠깐의 침묵.
“아니.”
짧은 대답.
“투자 얘기… 없었어요?”
“있었지. 근데 이렇게 구체적이지는 않았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비공개 일정이었네요.”
건우가 말했다.
“그래 보이네.”
“9시 전후.”
하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형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이번에는 그녀의 숨이 조금 느려졌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럼 강도는 아닐 가능성이 더 크잖아요.”
하나는 눈을 들었다.
“넌 지금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질문은 차분했다.
건우는 대답 대신 물었다.
“형이 누굴 만나기로 했는지, 확인해 본 적 있어요?”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경찰에서 추적 중이라고 했어.”
“그 결과는요.”
“아직.”
짧은 답.
건우는 한 걸음 더 들어갔다.
“혹시… 형이 형수한테 그 얘기 숨겼을 가능성은요?”
공기가 멈췄다.
하나의 시선이 건우에게 꽂혔다.
“그 말, 무슨 뜻이야.”
“아니에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능성요.”
하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넌 지금… 형보다 나를 더 보고 있어.”
그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건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졌다.
하나는 방으로 들어갔고, 문은 닫혔다.
그리고, 건우는 혼자 거실에 앉아 메일을 다시 읽었다.
9시 전후. 그 시간은 우연이 아니었다.
형은 누군가를 만나려 했고, 아내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9시 18분.
-형은 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만약 약속한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아니면 약속한 사람이 예상과 달랐다면.
건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자신이 검사가 되지 않기로 한
이유를 다시 확인했다.
법은 절차를 따른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절차가 아니라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하라고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메일은 짧았다.
‘9시 전후로 말씀 나누기로 한 건, 비공개로 진행하겠습니다.’
건우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비공개.
형은 대외적으로는 모든 걸 투명하게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투자든, 계약이든, 숫자로 정리하고 문서로 남겼다.
그런 사람이 ‘비공개’라는 단어를 택했다.
그건 단순한 일정이 아니었다.
오전, 건우는 메일 하단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연결음 끝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컨설팅입니다.”
“윤신우 대표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짧은 침묵.
“어떤 부분이죠.”
건우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9월 18일, 밤 9시 전후 약속.”
상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일정은 취소된 걸로 압니다.”
“취소요?”
“대표님 쪽에서 연락이 와서, 보류하자고.”
건우의 손이 멈췄다.
“언제요.”
“오후 늦게.”
“정확한 시간 기억하십니까.”
“기록이 있습니다만… 왜 묻는 겁니까.”
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
감사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오후 늦게.
그렇다면 9시 전후 약속은 없었다.
형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9시 12분 통화,
9시 18분 부재중.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은, 약속과 무관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건우는 머릿속에서 구조를 다시 짰다.
약속 취소.
비공개 일정 무산.
그럼 형은 그 시간에 누구를 만나려 했던 게 아니다.
아니면 약속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을 가능성.
그는 그 생각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아직은 단서가 부족했다.
집에 들어섰을 때, 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메일 보낸 회사요.”
하나의 눈이 살짝 움직였다.
“왜.”
“확인하려고요.”
그는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그날 약속, 취소됐다고 하네요.”
짧은 침묵.
“취소?”
“오후 늦게.”
하나는 몇 초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집에서 혼자였겠네.”
그녀의 말은 자연스러웠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건우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형이 그 얘기… 형수한테는 안 했나요?.”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날 저녁, 통화는 안 했어요?”
“퇴근 전에 잠깐.”
“약속 취소 얘기요?”
하나는 눈을 깜박였다.
“…기억 안 나.”
짧은 대답. 건우는 그 말을 곱씹었다.
약속 취소는 오후 늦게. 하나는 퇴근 전 통화했다고 했다.
그 통화에서 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형이 그날… 평소랑 달랐어요?”
건우가 물었다.
하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조금.”
“어떻게요?”
“조금 예민해 보였어.”
그 말은 처음이었다.
건우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왜 그 얘기, 이제 해요.”
하나는 고개를 들었다.
“네가 묻지 않았잖아.”
말은 맞았다.
그런데, 기억은 계속 추가되고 있었다.
현관 앞 → 복도
한 번 → 두 번
조용했다 → 예민했다
조각들이 조금씩 바뀐다.
늦은 밤, 건우는 형의 성격을 다시 떠올렸다.
신우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예민함을 숨기지 못할 정도라면,
그건 이미 문제가 진행 중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형의 일정표.
그날 오후.
4시 회의.
6시 내부 보고.
7시 퇴근.
그 이후 공백.
건우는 손가락으로 7시 이후를 짚었다.
약속은 취소되었다.
-그럼 9시 12분 통화는 단순한 업무 정리였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와의 문제였을까.
그는 갑자기 떠올랐다.
형은 아내에게 9시 18분에 전화했다.
약속도 없고, 외부 일정도 취소된 상태에서.
그 시간에 굳이 전화를 걸 이유.
건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혹시 형은 누군가의 이름을 확인하려던 건 아닐까.
“너… 지금 어디야.”
그 질문을 하려고.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게스트룸 문은 닫혀 있었다.
건우는 그 문 앞에서 멈췄다.
형이 전화를 건 이유.
확인.
확인하려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손을 들었다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확신이 없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는 한 가지 가능성을 똑바로 바라봤다.
형이 9시 18분에 전화를 건 이유가 '위험'이 아니라 '의심'이었다면.
그 의심의 대상이 누구였는지 그는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형사는 그 답을 기록하지 않고, 먼저 건우를 바라봤다. 거짓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조심스럽고,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넓은 답이었다. 건우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좁히지 않고, 열어두기 위해서.형사는 잠깐 침묵한 뒤, 캡처 사진을 한 장 더 앞으로 밀었다.“그럼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사진 속에는 더 가까운 각도로 잡힌 실루엣이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작고 어두운 물체. 우산은 아니었다.건우는 그 물체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가슴 안쪽에서 차가운 감각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칼.그 단어가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형사는 그의 반응을 보고 있었다.놓치지 않고.“뭔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건우는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아직은 없습니다.”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직은, 이라고 붙인 순간부터 그것은 완전한 부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녹음기 옆에 손을 얹은 채, 아주 낮게 말했다.“그럼 지금부터 같이 찾아보죠. 윤신우 씨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구를 집 안에 들였는지.”그 말이 끝났을 때, 건우는 처음으로 이 사건이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바깥에서 들어온 그림자, 하나가 스친 기억, 서하가 끝까지 알고 있는 밤, 그리고 자신이 외면했던 선택이 이제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표 위에 놓이려 하고 있었다.그 시간표가 완성되면, 누가 가장 먼저 무너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더 이상 모르는 척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진술실 안의 공기는 현장보다 훨씬 건조했지만, 건우는 오히려 그 건조함이 더 숨 막히게 느껴졌다. 신우의 집에서는 비 냄새와 피 냄새, 젖은 바닥의 감각이 모든 것을 덮고 있어서 생각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는데, 이곳에서는 형광등 불빛 아래 놓인 사진
하나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이해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잠시 뒤 형사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고 있었고, 수첩은 품 안에 넣어 젖지 않게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조금 내려앉아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두 분 모두 경찰서로 이동해주셔야겠습니다. 현장에서는 더 확인하기 어렵고, 시간대 정리가 필요합니다.”건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하나를 한 번 보았다. 하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건우가 대신 말했다.형사는 그 반응을 확인한 뒤, 하나에게도 시선을 옮겼다.“괜찮으시겠습니까.”하나는 “네.” 하고 대답하려다 잠깐 멈췄고, 곧 더 작고 현실적인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지는 않은데, 갈 수는 있어요.”그 대답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꾸민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사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차로 향하는 길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거리 동안, 건우는 여러 번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신우의 집은 여전히 불빛을 품고 있었고, 그 불빛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조금 전까지 자기 안에서 열렸던 그 밤의 장면은 다시 조용히 닫히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경찰서로 향하는 현실의 시간이 더 강하게 앞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차 안은 좁고 차가웠다. 하나는 뒷좌석 한쪽에 앉았고, 건우는 그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에는 손 하나 정도의 간격이 있었지만, 그 간격은 지금까지의 어떤 거리보다 멀게 느껴졌다. 경찰차가 출발하자 창밖의 빗줄기가 길게 번졌고, 골목의 불빛들이 뒤로 밀려났다.하나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건우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젖은 머리카락, 창백한 입술, 그리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눈. 그 눈을 보면서 건우는 한 가지를 분명히 느꼈다. 하나는 전부를 알고 있지 않다. 그러나 완전히
관리실을 나왔을 때,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었다. 처음보다 조금 약해진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빗줄기 자체가 줄어서라기보다 눈이 그 리듬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건우는 현관 처마 아래에서 잠깐 멈춰 섰고, 방금 모니터 안에서 지나갔던 흐릿한 실루엣을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렸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성별도 단정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존재 하나만으로 사건의 방향은 바뀌었다.형사는 그 실루엣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관리실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다른 형사에게 영상 확보를 지시했고, 입구와 엘리베이터, 건물 뒤편까지 연결되는 모든 화면을 따로 빼두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까지보다 분명한 집중이 들어 있었다. 그건 건우가 원하는 방향이기도 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방향은 아니었다. 실루엣이 생긴다는 건 외부 용의자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표가 더 촘촘해진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하나는 현관 옆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잠시 안쪽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했는지, 젖은 어깨 위에 얇은 담요 같은 것이 걸쳐져 있었지만, 그 담요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워 보였고, 얼굴은 비와 눈물의 경계가 섞인 채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건우는 그녀 쪽으로 바로 다가가지 않았다. 관리실에서 확인한 장면을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혹은 짐작하고 있는지를 먼저 읽어야 했다.하나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봤어?”그녀가 물었다.목소리는 작았지만, 일부러 낮춘 건 아니었다. 힘이 빠져 그런 것에 가까웠다.건우는 그녀 앞까지 걸어가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노란 테이프와 빗물, 그리고 조금 전 모니터 속에서 생긴 새로운 시간이 함께 놓여 있었다.“누가 있었어.”그가 말했다.“네가 오기 전에, 건물 주변에 들어온 사람이 하나 더 잡혔어.”하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반응하지
관리실 안 공기가 아주 조금 무거워졌다.젊은 형사가 모니터를 가까이 들여다보듯 몸을 숙였고, 경비원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건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안쪽에서는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었다. 사건이 이제부터 더 복잡해질 수 있다는 예감, 그리고 그 복잡함이 자기에게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아주 냉정하고 불편한 계산이 동시에 올라오고 있었다.“이 사람은 누굽니까.”형사가 경비원에게 물었다.경비원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입주민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안 됩니다.”형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능성이 하나 더 생긴 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가까웠다.건우는 그 순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했다. 지금 이 인물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오히려 이상할 수 있었고, 그렇다고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 사이의 균형이 중요했다.“형이 아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네요.”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시선을 모니터에 둔 채로, 생각이 입으로 흘러나온 것처럼 들리게.“문을 강제로 연 흔적이 없다는 쪽이면,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낯익은 사람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형사는 그 말을 듣고 건우를 한 번 보았다. 그 시선은 짧았지만,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그 가능성도 포함해서 보겠습니다.”동의였다. 적어도 지금은.건우는 더 보태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 지금 필요한 건 ‘가설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스스로 그 방향으로 걸어가도록 길만 열어두는 것이었다.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하나가 들어가고, 나가고,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건우와 하나가 함께 다시 현장으로 향하는 장면까지 화면에 잡혔다. 그 모든 장면이 순서대로 놓이자,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형사는 그 둘 사이의 짧은 교환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종류의 침묵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건우는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에게 시선을 오래 두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는 길은 좁고 어두웠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고, 배수구 쪽에서는 물이 넘칠 듯한 소리를 내며 고여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은 군데군데 들떠 있었고, 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불규칙하게 튀었다. 현관 앞의 밝은 불빛과는 다른 종류의 공간이었다. 그 음습한 통로를 따라 걸어가면서, 건우는 자기 발걸음이 너무 일정하다는 걸 문득 느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더 서두르거나, 반대로 더 조심스럽게 걸을 텐데, 지금 자신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마치 이미 여러 번 지나온 길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걷고 있었다.관리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는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젊은 경비원이 이미 상황을 전해 들은 듯 문을 열어주었고,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경찰들을 보자마자 비켜섰다.“CCTV 저장되는 건 다 있습니다.”그가 먼저 말했다.목소리가 작았지만, 정확하게 필요한 말만 꺼내는 방식이었다.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실은 좁았다. 모니터가 여러 대 붙어 있었고, 그 앞에 낡은 책상과 회전의자 두 개, 벽 한쪽에 걸린 달력과 쓰다 남은 볼펜들이 뒤섞여 있었다. 전형적인 공간이었지만, 지금 이 좁은 곳에서 결정될 수 있는 정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건우는 안쪽으로 한 발짝 들어선 뒤, 더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벽 쪽에 몸을 붙이듯 서서 모니터를 볼 수 있는 각도만 확보했다. 그 위치가 중요했다. 너무 가까우면 조급해 보일 수 있고, 너무 멀면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었다.“몇 시부터 보죠?”젊은 형사가 물었다.중년 형사는 수첩을 열어 시간대를 한 번 확인한 뒤, 경비원에게 말했다.
형사의 질문이 하나에게 향한 채 공기 속에 남아 있는 동안, 빗소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골목 바닥에 고인 물을 세게 두드리며 더 또렷하게 들렸고, 그 일정한 리듬이 지금 이 장면을 덮고 있는 침묵을 더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형사를 향했는데, 그 짧은 망설임이 단순한 감정의 동요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머릿속에서 어떤 순서를 붙잡으려는 데서 생긴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했다.건우는 옆에 서서 그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하나가 골목 아래까지 내려왔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밤의 바깥쪽 동선이 어디에서 갈라졌는지를 결정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섣불리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조금 전까지는 하나의 흔들림이 길어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쪽이 더 안전했지만, 이번에는 같은 방식으로 끼어드는 순간 오히려 더 큰 어긋남을 만들 수도 있었다.하나는 한 번 더 숨을 고른 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짧은 동작을 했다. 손끝이 젖어 있어 그 동작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았고, 젖은 머리카락이 다시 뺨에 달라붙었다. 그 사소한 불편함이 지금은 이상하게도 현실감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을 한 번 내려다봤다가, 고개를 들고 형사를 봤다.“집 앞까지만 왔던 것 같아요.”하나의 목소리는 낮았고, 억지로 떨림을 누르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떨림이 과장되게 들리지 않았던 건, 지금 그녀가 무언가를 꾸며내고 있다기보다, 이미 한 번 흐트러진 기억을 다시 정렬하려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형사는 그 말을 바로 받아 적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얼굴을 잠깐 더 보다가, 시선을 다시 바닥의 자국으로 내렸다. 그는 누군가를 몰아붙이는 식으로 질문을 이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애매한 지점에서는 더 말을 줄이고, 상대가 스스로 내놓는 정보와 현장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시신을 실은 차량이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건우는 비를 맞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경광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번졌다가 사라졌다.형은 그렇게 떠났다.설명도, 변명도 없이.경찰은 현장을 통제했고, 필요한 절차를 간단히 설명했다.참고인 조사 일정이 잡힐 거라고 했다.말은 또렷했지만, 건우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남은 건 한 문장뿐이었다.저녁 8시 전후.그 시간에 그는 집에 있었다.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하나는 경찰의 안내를 받아 현관을 나왔다.비는 여전히 세게 내리고 있었고,그녀의 코
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