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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의심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8 14:19:52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

9:12

9:18

9:37

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

‘왜.’

-형은 왜 전화했는가.

-위험을 알리기 위해?

-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

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섬뜩했다.

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

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

기억은 흔들리고, 문은 잠겨 있었고, 통화는 조용했다.

그리고 이제 의도라는 단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은 길

비는 오지 않았지만,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건우는 오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거실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어제 적어둔 숫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9:12

9:18

9:37

그 아래, ‘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숫자는 바뀌지 않는다.

하나는 방에서 나왔다.

출근 준비를 마친 얼굴이었다.

“오늘 회사 안 가?”

“오후에 잠깐.”

건우는 짧게 답했다.

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건우야.”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시 시험 볼 생각은 없어?”

질문은 담담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건우는 고개를 들었다.

“검사.”

“응.”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는 시선을 식탁 위 숫자에 두었다.

“지금은 아니에요.”

“왜.”

짧은 질문. 건우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제가 검사가 되면… 이 사건 못 건드려요.”

하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건 네 사건이 아니야.”

그녀의 말은 논리적으로 옳았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럼.”

“제 형 사건이에요.”

말이 낮게 떨어졌다.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 말했다.

“검사가 되면… 감정 개입 금지잖아요.”

“당연하지.”

“지금은 안 돼요.”

건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 아직… 감정 정리 안 됐어요.”

그건 솔직한 말이었다.

부모, 형, 하나. 그는 아직 아무것도 놓지 못했다.

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깊었다.

오후, 건우는 형의 회사 자료를 정리하다가  한 통의 메일을 발견했다.

발신인은 외부 투자 컨설팅 회사. 제목은 간단했다.

‘9/18 일정 확정 관련’

날짜는 사건 당일 오전. 그는 메일을 열었다.

‘대표님, 오늘 저녁 9시 전후로 말씀 나누기로 한 건, 비공개로 진행하는 걸로 정리하겠습니다.’

9시 전후. 건우의 손이 멈췄다.

비공개.

그는 메일 하단의 연락처를 바라봤다.

회사명이 낯설지 않았다.

유림이 언급했던 투자자였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형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이 9시 전후라면

9시 12분 통화 종료.

9시 18분 아내에게 부재중.

그 사이. 그는 메일을 다시 읽었다.

‘비공개.’

-왜 비공개였을까.

저녁 시간, 하나는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건우는 메일을 보여주었다.

“이거… 알고 있었어요?”

하나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잠깐의 침묵.

“아니.”

짧은 대답.

“투자 얘기… 없었어요?”

“있었지. 근데 이렇게 구체적이지는 않았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비공개 일정이었네요.”

건우가 말했다.

“그래 보이네.”

“9시 전후.”

하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형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이번에는 그녀의 숨이 조금 느려졌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럼 강도는 아닐 가능성이 더 크잖아요.”

하나는 눈을 들었다.

“넌 지금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질문은 차분했다.

건우는 대답 대신 물었다.

“형이 누굴 만나기로 했는지, 확인해 본 적 있어요?”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경찰에서 추적 중이라고 했어.”

“그 결과는요.”

“아직.”

짧은 답.

건우는 한 걸음 더 들어갔다.

“혹시… 형이 형수한테 그 얘기 숨겼을 가능성은요?”

공기가 멈췄다.

하나의 시선이 건우에게 꽂혔다.

“그 말, 무슨 뜻이야.”

“아니에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능성요.”

하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넌 지금… 형보다 나를 더 보고 있어.”

그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건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졌다.

하나는 방으로 들어갔고, 문은 닫혔다.

그리고, 건우는 혼자 거실에 앉아 메일을 다시 읽었다.

9시 전후. 그 시간은 우연이 아니었다.

형은 누군가를 만나려 했고, 아내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9시 18분.

-형은 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만약 약속한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아니면 약속한 사람이 예상과 달랐다면.

건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자신이 검사가 되지 않기로 한 

이유를 다시 확인했다.

법은 절차를 따른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절차가 아니라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하라고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메일은 짧았다.

‘9시 전후로 말씀 나누기로 한 건, 비공개로 진행하겠습니다.’

건우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비공개.

형은 대외적으로는 모든 걸 투명하게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투자든, 계약이든, 숫자로 정리하고 문서로 남겼다.

그런 사람이 ‘비공개’라는 단어를 택했다.

그건 단순한 일정이 아니었다.

오전, 건우는 메일 하단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연결음 끝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컨설팅입니다.”

“윤신우 대표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짧은 침묵.

“어떤 부분이죠.”

건우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9월 18일, 밤 9시 전후 약속.”

상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일정은 취소된 걸로 압니다.”

“취소요?”

“대표님 쪽에서 연락이 와서, 보류하자고.”

건우의 손이 멈췄다.

“언제요.”

“오후 늦게.”

“정확한 시간 기억하십니까.”

“기록이 있습니다만… 왜 묻는 겁니까.”

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

감사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오후 늦게.

그렇다면 9시 전후 약속은 없었다.

형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9시 12분 통화,

9시 18분 부재중.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은, 약속과 무관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건우는 머릿속에서 구조를 다시 짰다.

약속 취소.

비공개 일정 무산.

그럼 형은 그 시간에 누구를 만나려 했던 게 아니다.

아니면 약속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을 가능성.

그는 그 생각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아직은 단서가 부족했다.

집에 들어섰을 때, 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메일 보낸 회사요.”

하나의 눈이 살짝 움직였다.

“왜.”

“확인하려고요.”

그는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그날 약속, 취소됐다고 하네요.”

짧은 침묵.

“취소?”

“오후 늦게.”

하나는 몇 초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집에서 혼자였겠네.”

그녀의 말은 자연스러웠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건우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형이 그 얘기… 형수한테는 안 했나요?.”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날 저녁, 통화는 안 했어요?”

“퇴근 전에 잠깐.”

“약속 취소 얘기요?”

하나는 눈을 깜박였다.

“…기억 안 나.”

짧은 대답. 건우는 그 말을 곱씹었다.

약속 취소는 오후 늦게. 하나는 퇴근 전 통화했다고 했다.

그 통화에서 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형이 그날… 평소랑 달랐어요?”

건우가 물었다.

하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조금.”

“어떻게요?”

“조금 예민해 보였어.”

그 말은 처음이었다.

건우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왜 그 얘기, 이제 해요.”

하나는 고개를 들었다.

“네가 묻지 않았잖아.”

말은 맞았다.

그런데, 기억은 계속 추가되고 있었다.

현관 앞 → 복도

한 번 → 두 번

조용했다 → 예민했다

조각들이 조금씩 바뀐다.

늦은 밤, 건우는 형의 성격을 다시 떠올렸다.

신우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예민함을 숨기지 못할 정도라면,

그건 이미 문제가 진행 중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형의 일정표.

그날 오후.

4시 회의.

6시 내부 보고.

7시 퇴근.

그 이후 공백.

건우는 손가락으로 7시 이후를 짚었다.

약속은 취소되었다.

-그럼 9시 12분 통화는 단순한 업무 정리였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와의 문제였을까.

그는 갑자기 떠올랐다.

형은 아내에게 9시 18분에 전화했다.

약속도 없고, 외부 일정도 취소된 상태에서.

그 시간에 굳이 전화를 걸 이유.

건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혹시 형은 누군가의 이름을 확인하려던 건 아닐까.

“너… 지금 어디야.”

그 질문을 하려고.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게스트룸 문은 닫혀 있었다.

건우는 그 문 앞에서 멈췄다.

형이 전화를 건 이유.

확인.

확인하려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손을 들었다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확신이 없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는 한 가지 가능성을 똑바로 바라봤다.

형이 9시 18분에 전화를 건 이유가 '위험'이 아니라 '의심'이었다면.

그 의심의 대상이 누구였는지 그는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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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낮 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던 직원들의 발걸음과 대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건우에게는 그 모든 것이 얇은 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그 안에 숨어 있는 균열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층수가 올라갈수록 숫자가 하나씩 바뀌었고, 그 단순한 변화가 오히려 긴장감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문이 열리자 복도가 나타났다.형이 매일 걸어 다니던 길이었다.건우는 잠시 그 복도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하나는 그의 옆을 따라 걸었고, 서하는 조금 뒤에서 느리게 발걸음을 맞췄다.사무실 문을 열자 직원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오셨습니까.”짧은 인사가 오갔다.건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향했다.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출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는 완전히 달랐다.자리에 앉은 건우는 노트북을 켰다.화면이 켜지는 동안, 그는 잠시 사무실 안을 훑어봤다.이곳 어딘가에서. 김도현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하나는 건우 옆에 서서 낮게 말했다.“어디서부터 시작할 거야.”건우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작게.”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확실하게.”하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모든 정보를 한 번에 드러내는 게 아니라, 상대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단서만 흘린다.그 정도면 충분했다.건우는 메일 프로그램을 열었다.수신자 목록을 잠시 훑다가 몇 명을 선택했다.재무팀, 감사팀, 그리고 몇몇 임원들.김도현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하나는 그 화면을 보며 물었다.“내용은.”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문장은 길지 않았다.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최근 일부 계좌에서 반복적인 자금 이동 패턴이 확인되었습니다.특정 개인 계좌와 연결된 흐름이 있으며,

  • 형수의 밤   1. 형이 죽었다.

    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 형수의 밤   9. 진동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 형수의 밤   8. 잠긴 문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 형수의 밤   7. 6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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