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
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
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
저녁 7시 12분.
“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
그가 되물었다.
“네.”
“무엇을.”
유림은 잠시 침묵했다.
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
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업무 관계를요.”
건우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대표님과 저는 해외 법인 구조를 같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투자 건이 복잡했거든요.”
그녀의 손가락이 파일 위 한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
“이 법인. 대표님이 직접 설계하셨죠.”
건우는 그 이름을 읽었다.
낯선 해외 법인. 지분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형이 갑자기 정리하겠다고 했다는 겁니까.”
“갑작스럽진 않았어요.”
유림의 시선이 창밖으로 잠시 향했다가 돌아왔다.
“이미 오래 고민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미세한 금이 있었다.
건우는 고개를 들었다.
“형이 고민하던 게, 회사 문제였습니까.”
“회사만은 아니겠죠.”
짧은 대답. 회의실 공기가 조용히 식었다.
“어제 통화에서, 대표님이 그러셨습니다.”
유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정리해야 할 게 있다.”
건우의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정리라니.”
“정리.”
그녀는 같은 단어를 반복했다.
“사람도, 구조도.”
그 말이 애매하게 걸렸다.
사람.
건우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형이 누구를 정리하려 했다는 겁니까.”
유림은 처음으로 아주 옅게 웃었다.
“그건… 대표님만 아셨겠죠.”
침묵이 길어졌다.
회의실 문 밖에서 누군가 발걸음을 멈췄다가 지나갔다.
회사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대표가 죽었는데도.
“대표님은 어제… 평소와 달랐습니까.”
건우가 물었다.
서유림은 잠시 생각했다.
“조용했습니다.”
“원래도 조용하지 않았습니까.”
“어제는… 결심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 말은 묘하게 정확했다.
건우는 시선을 내렸고, 형의 얼굴이 가만히 떠올랐다.
평온했던, 너무 평온했던 얼굴.
“그 통화 이후에, 다시 연락한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단정한 대답.
“하지만.”
그녀가 덧붙였다.
“대표님이 먼저 끊었습니다.”
건우의 눈이 다시 들렸다.
“무슨 뜻이죠.”
“통화를 제가 먼저 끝내지 않았습니다. 대표님이… 중간에 끊었습니다.”
“중간에.”
“네.”
건우의 머릿속에서 시간이 겹쳤다.
저녁 7시 12분.
사망 추정 시각은 8시 전후.
“그때 대표님 목소리는 어땠습니까.”
서유림은 건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급했습니다.”
“급했다고요?”
“마치… 누군가 옆에 있는 것처럼.”
공기가 멎은 듯 고요해졌다.
“누군가라니.”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화가 끊기기 직전에,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정적.
“‘지금은 안 돼.’”
건우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지금은 안 돼.
그 문장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게 마지막입니까.”
“네.”
유림은 더 말하지 않았다.
회의실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건우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형이 회사 문제로 위협받은 적은 없습니까.”
“위협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곧장 답했다.
“하지만 압박은 있었습니다.”
“어떤 압박.”
“투자 구조를 재조정하라는 압박.”
“누가.”
유림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사회 일부.”
그 말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대표가 죽고, 이사회 일부가 압박을 넣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시점이 묘했다.
“형이 그걸 거부했다는건가요?.”
“네.”
“그리고 어제, 정리하겠다고 말했고요?”
“네.”
건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젯밤, 거실.
깨진 창문. 피. 그리고 하나의 말.
‘창문, 이상하지 않았어?’
그녀는 왜 그걸 먼저 꺼냈을까.
“대표님과 개인적인 관계는 없었습니까.”
건우가 묻자, 서유림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곧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업무 외적인 만남은 없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건우는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유림이 말을 정리했다.
“대표님의 죽음이 단순 강도 사건으로
끝나길 바라진 않습니다.”
그녀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대표님은… 그렇게 허술하게 강도한테 당할 분이 아니니까요.”
문이 닫혔다.
건우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표의 자리. 그 자리는 이제 비어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두고 여러 시선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파일을 다시 펼쳤다.
통화 기록.
저녁 7시 12분.
그리고 그 직후, 통화 없음.
건우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어젯밤 8시 27분.
하나가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던 시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비는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건우는 그날 처음으로 확신했다.
형의 죽음은, 거실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중심으로 천천히 끌려가고 있었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
건우는 신호가 바뀔 때마다 괜히 브레이크를 더 깊이 밟았다.
라디오는 켜지 않았고, 창문 밖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표실 문 앞에서 멈췄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책상은 그대로였고, 의자는 안쪽으로 밀려 있었으며,
서류는 정리된 채 흩어지지 않았다.
마치 잠깐 자리를 비운 사람처럼.
신우는 늘 그랬다.
언제든 돌아올 사람처럼 자리를 정리해두고 나가던 사람.
그런데 이번엔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은 안 돼.’
유림이 전한 마지막 통화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무엇이 안 된다는 뜻이었을까.
그 생각을 더 밀어붙이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
현관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열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클래식이었다. 숨을 낮추게 만드는 선율.
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정장을 벗고 편한 차림이었지만,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왔어?”
건우는 신발을 벗으며 짧게 대답했다.
“네.”
그녀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회사 어땠어?”
건우는 코트를 걸어두며 대답을 늦췄다.
“…그냥 뭐….”
그 이상은 덧붙이지 않았다.
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실은… 그대로였어?”
그 질문은 권력이나 자리 얘기가 아니었다.
그 사람의 흔적을 묻는 말이었다.
“네. 정리도 안 돼 있었어요.”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우 씨는 늘 그랬지. 자리를 비워도, 금방 돌아올 사람처럼.”
그 문장이 건우의 가슴을 묘하게 건드렸다.
형의 의자가 다시 떠올랐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회사에서 누굴 만났어?”
건우는 물컵을 집어 들었다.
“전략기획팀 차장이라는 사람.”
“서유림?”
“네.”
하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어땠어?”
건우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물 한 모금을 삼킨 뒤에야 말했다.
“…별거 없었어요”
“신우 씨에 대한 얘기에도?”
“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어제 마지막으로 통화했다고 하던데.”
건우는 잠깐 숨이 막혔다.
“네. 업무 정리 얘기였다고 해요.”
그는 일부러 ‘지금은 안 돼’라는 문장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그 말을 꺼내면, 대화가 더 깊어질 것 같아서.
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불편했다.
밤이 깊어지고, 음악이 꺼진 뒤에도 건우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부엌으로 나와 물을 따르던 순간, 게스트룸 문이 열렸다.
하나가 나왔다.
“안 자?”
“잠이 안 와서.”
그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하나는 식탁에 앉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
“형 얘기하는 거… 힘들지?”
건우는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 멈췄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마주 앉은 상태였다. 피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 다물고, 몇 초가 흐른 뒤에야 말했다.
“…지금은 좀.”
그 이상은 이어지지 않았다.
말이 목 안에서 멈췄다.
하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고마웠다.
잠시 후,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강도라고 했지?”
“네.”
“넌 형사의 그 말 믿어?”
건우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믿는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은…잘 모르겠어요.”
그게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하나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건 당일 그 집에 제일 먼저 들어간 건 나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장면을 제일 먼저 본 사람도 나고.”
그 말에는 도발이 없었다. 자기 확인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넌 나랑 같이 있을 수 있겠어?”
질문은 낮았다.
건우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형의 얼굴과, 젖은 거실과 지금 이 집의 고요함이 한꺼번에 겹쳤다.
“…지금은…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나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앞에서 멈췄다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문이 닫혔다.
거실에는 다시 빗소리만 남았다.
건우는 한동안 식탁에 앉아 있었다.
형은 죽었고, 진실은 모른다.
그리고 이 집 안에서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을 붙잡고 있는 건 사랑도, 의심도 아니다.
그저 형의 아내를 혼자 둘 수 없다는, 그 책임감 하나뿐이었다.
이번엔 서하도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그 한 문장이 둘 사이 공기를 조금 다르게 만들었다. 지금 이 밤의 대화와 이동과 추적은 전부 하나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 위에서 성립하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말로 꺼내는 순간, 갑자기 너무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일이 되어버렸다. 건우는 자기가 지금 누구와 손잡고 누구를 구하려는 건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 건지 선명하게 자각하게 됐다.서하는 한참 뒤에야 아주 조용히 말했다.“그건 네가 제일 싫어하는 방식 아니야?”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맞았다.’하나를 지키겠다고 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선택은 늘 하나가 모르는 시간대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윤신우도 어쩌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나가 감당 못 할까 봐, 하나가 다칠까 봐, 하나가 알면 더 무너질까 봐. 그래서 혼자 알아보고, 혼자 확인하고, 혼자 결정하다가 결국 너무 늦어버렸을지도 모른다.그 생각이 스치자, 건우는 갑자기 몸 안쪽이 서늘해졌다.자기가 지금 형이 걸었던 길 위에 똑같이 발을 올리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었다.건우는 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아주 천천히 말했다.“그래도 오늘은 확인해야 해.”서하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대신 그를 오래 보다가, 아주 낮게 덧붙였다.“형이 처음 간 곳은 병원이 아니었어.”건우의 손이 문고리 위에서 멈췄다.“뭐?”서하는 창가에서 몸을 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이제 그녀의 얼굴은 다시 조금 달라져 있었다. 방금 전처럼 경계가 흐린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선명한 서하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얼굴. 마치 밤이 깊어질수록 둘 사이 경계가 아니라 둘 다 피로해지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병원 가기 전에.”그녀가 말했다.“형은 먼저 누군가를 만나러 갔어.”건우는 미간을 좁혔다.“누구.”서하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기억이 정확하진 않은데… 이름은 아니고, 직함 같은 걸 말했어.”그녀는 눈을 감고 그날의 조각을 더듬듯 천천
병원이라는 말을 먼저 꺼낸 건 건우였지만,정작 그 말을 입 밖으로 뱉고 나자마자 그는 그게 얼마나 늦은 문장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병원 가자.’너무 정상적이고, 너무 상식적이고, 그래서 더 무력한 말.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균열 앞에 서면 결국 가장 평범한 구조를 먼저 떠올린다. 진단, 치료, 상담, 입원. 이름을 붙이면 통제할 수 있을 것 같고, 병명으로 바꾸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방금 전 눈앞에서 본 건우는, 그것들이 과연 지금 이 상태를 따라잡을 수 있는 언어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서하는 창가 쪽에 선 채 더 이상 웃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건우의 손이 닿아 있던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마치 자기 몸이 자기 것인지 아닌지 잠깐 확인하는 사람처럼 손끝을 아주 천천히 접었다 폈다. 그 사소한 움직임 하나가 이상하게 더 아프게 느껴졌다. 사람이 무너지는 장면은 늘 극적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이런 식이다. 말보다 먼저 손끝이 망설이고, 시선이 한 박자 늦고, 자기 몸을 자기 것처럼 쓰지 못하는 순간들이 조용히 쌓이면서.건우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리고 한참 뒤에야 아주 낮게 물었다.“형이 병원 알아봤어?”서하는 그 질문을 듣고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인 채 건우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는 자신 안의 균열을 버티는 쪽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긴장이 눈빛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 질문이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 윤신우가 마지막에 어디까지 갔는지를 묻는 질문이라는 걸 알아들은 사람의 표정.“알아봤지.”그녀가 마침내 말했다.“그 사람, 생각보다 오래 버텼어.”건우는 그 문장에서 먼저 숨이 걸렸다.생각보다 오래 버텼다.그 말은 이상하게 위로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너무 잔인했다.윤신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우발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마지막 며칠 동안은 이 이상한 상태를 붙들고 어떻게든 해결하려 했던 사람이었다는 뜻이니까.건
그 문장은 건우를 완전히 멈추게 만들었다.서하는 늘 하나보다 더 단단하고, 더 선명하고, 더 자각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그래서 건우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서하 쪽이 더 안정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자기 자신조차 자기 경계를 확신하지 못한다고.그건 지금까지 건우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상태였다.건우는 어느새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 있었다.서하는 그걸 피하지 않았다.둘 사이 거리가 숨이 닿을 만큼 좁아졌을 때, 건우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날도 이랬어?”서하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질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둘 다 알고 있었다.윤신우의 마지막 밤.엘리베이터 앞.삭제된 19분.서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건우는 오히려 답을 먼저 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은 지금보다 더 심했어.”건우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얼마나.”“하나도 불안했고, 나도 흔들렸고… 중간이 더 자주 열렸어.”그녀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건우를 봤다.“형은 그걸 본 거야.”그 문장은 너무 정확해서, 건우는 더 이상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윤신우는 단순히 낯선 얼굴을 본 게 아니었다.하나와 서하가 번갈아 드러나는 그 불안정한 경계 자체를 봤던 것이다.그리고 그걸 본 사람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건우는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윤신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피곤했을 형, 처음엔 그냥 하나라고 생각했을 형, 두 번째엔 설명되지 않는 공포 앞에서 잠깐 멈췄을 형. 그리고 결국 그 밤을 끝까지 살아서 빠져나오지 못한 형.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그런데 지금 더 견디기 힘든 건, 눈앞의 사람도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건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의 팔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다.서하는 놀라
먼저 말을 건넨 쪽은 그녀였다.목소리는 하나의 것이었지만, 그 안에 섞인 결은 단순하지 않았다. 건우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사람은 완전히 하나도, 완전히 서하도 아니었다. 그 둘 사이 경계가 얇아진 채, 아직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은 상태.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건우는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너 뭐 하고 있었어.”그녀는 잠깐 창문 쪽을 돌아봤다가, 다시 건우를 봤다.“그냥.”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잘 기억 안 나.”그 말은 지금까지 여러 번 들었던 문장이었지만, 오늘은 전혀 다르게 들렸다. 전에는 그저 불안과 공백의 언어였다면, 지금은 마치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눈치채고 있는 사람의 언어처럼 들렸다.건우는 그제야 한 발 더 다가갔다.“언제부터 여기 있었어.”그녀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모르겠어.”“방금 깬 거야?”이번엔 대답이 조금 늦었다.그 짧은 틈 안에서, 그녀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금까지 자신이 어떤 얼굴로 서 있었는지, 누구의 의식으로 이 방 안에 있었는지, 그걸 자기 자신도 붙잡지 못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시선이 건우 어깨 너머를 향했다.복도.서하가 서 있을 자리.그 눈빛이 변하는 걸 건우는 분명히 봤다.불안에서 경계로.경계에서 차가운 자각으로.그 변화는 극적이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더 섬뜩했다.그녀는 건우를 보지 않은 채, 아주 낮게 말했다.“들어왔네.”그 말은 건우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건우의 등 뒤 어딘가를 향한 말.건우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다 멈췄다. 그러는 사이, 눈앞의 그녀가 아주 천천히 다시 건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는 분명히 달랐다. 같은 얼굴인데, 사람을 보는 온도가 바뀌어 있었다. 그 미세한 차이가 너무 선명해서, 건우는 오히려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서하였다.아니, 정확히는 방금까지 하나였던 얼굴 안
이번엔 질문이라기보다 요구에 가까웠다.서하는 그걸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건우는 그 짧은 망설임에서, 이 뒤의 이야기가 단순한 설명으로는 넘어갈 수 없는 쪽에 있다는 걸 먼저 알아차렸다.“여기까지야?”건우가 낮게 물었다.서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여기까지라서가 아니라…”그녀는 말을 잇다가, 잠깐 복도 쪽을 봤다.“이건 내가 끊는 게 아니야.”건우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복도는 여전히 어두웠고, 방 문은 닫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 안 공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서하는 다시 건우를 보며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끊기는 거야.”그 말이 끝나자마자, 집 안 어딘가에서 아주 작게 소리가 났다.문이 나무틀에 스치는 소리 같은 것.건우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고개가 복도 쪽으로 돌아갔다. 복도 끝, 닫혀 있어야 할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불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조금 전과는 달랐다. 방금까지 아무도 그 문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서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대신 건우를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말했다.“이제 네가 직접 봐야 돼.”그 말은 이전처럼 의미심장한 경고가 아니었다. 도망칠 수 없는 자리에 사람을 세우는 말에 가까웠다. 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천천히 식탁을 돌아 복도로 걸어갔다.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고, 발바닥 아래 마룻바닥의 감각만 유난히 또렷했다.한 걸음, 또 한 걸음.문 앞에 섰을 때,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다는 건 때로 안심이 아니라 더 큰 불안을 만든다. 건우는 문고리를 잡지 않고, 손바닥으로 문을 천천히 밀었다.그리고 그 순간 건우는 처음으로, 그 경계가 실제로 무너지는 장면 앞에 서게 됐다.문이 열리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건우는 손바닥으로 문을 천천히 밀면서도, 이상하게 숨을 더 크게 쉬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
서하는 식탁 가장자리에 손끝을 가볍게 올려놓은 채,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그날 형이 본 건 한 번이 아니었어.”건우는 그대로 굳었다.“무슨 뜻이야.”“두 번 봤어.”서하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 건우는 잠깐 숨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봤다.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단순히 한 번 마주쳤다, 혹은 우연히 이상한 낌새를 봤다 수준이 아니었다.같은 밤,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마주쳤다는 건 그 안에 시간의 틈과 설명되지 않는 변화가 존재했다는 뜻이니까.건우는 손등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다시 물었다.“처음이 하나였고, 두 번째가 너였다는 거야?”서하는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엔 그냥 하나라고 생각했겠지.”그녀는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늦은 밤에 집 앞에서 마주친 아내였으니까. 피곤했고, 이상한 분위기를 느껴도 그냥 컨디션 탓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을 거야.”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려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늦게 귀가한 남자가 집 앞에서 아내를 만난다. 그건 분명 이상할 수 있지만, 아직은 설명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 그런데“두 번째는.”건우가 낮게 물었다.서하는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었다.“두 번째는 그냥 넘길 수가 없었어.”“왜.”“같은 얼굴인데, 사람이 다르니까.”그 문장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더 잔인했다.서하는 더 설명하려는 듯하다가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마치 그날의 공기를 더듬는 사람처럼 아주 느리게 말을 골랐다.“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같은 얼굴이었고, 같은 자리였어. 그런데 말투가 다르고, 반응이 다르고, 자기를 보는 눈이 다르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아.”그녀의 시선이 건우를 향했다.“뭔가 잘못됐다는 걸.”건우는 그 말이 몸 안으로 바로 들어오는 걸 느꼈다. 사랑하는 얼굴이 낯선 각도로 서 있을 때, 사람은 처음엔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엔 착각
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9:129:189:37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왜.’-형은 왜 전화했는가.-위험을 알리기 위해?-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그 생각은 섬뜩했다.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기억은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시신을 실은 차량이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건우는 비를 맞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경광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번졌다가 사라졌다.형은 그렇게 떠났다.설명도, 변명도 없이.경찰은 현장을 통제했고, 필요한 절차를 간단히 설명했다.참고인 조사 일정이 잡힐 거라고 했다.말은 또렷했지만, 건우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남은 건 한 문장뿐이었다.저녁 8시 전후.그 시간에 그는 집에 있었다.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하나는 경찰의 안내를 받아 현관을 나왔다.비는 여전히 세게 내리고 있었고,그녀의 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