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
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
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
저녁 7시 12분.
“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
그가 되물었다.
“네.”
“무엇을.”
유림은 잠시 침묵했다.
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
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업무 관계를요.”
건우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대표님과 저는 해외 법인 구조를 같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투자 건이 복잡했거든요.”
그녀의 손가락이 파일 위 한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
“이 법인. 대표님이 직접 설계하셨죠.”
건우는 그 이름을 읽었다.
낯선 해외 법인. 지분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형이 갑자기 정리하겠다고 했다는 겁니까.”
“갑작스럽진 않았어요.”
유림의 시선이 창밖으로 잠시 향했다가 돌아왔다.
“이미 오래 고민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미세한 금이 있었다.
건우는 고개를 들었다.
“형이 고민하던 게, 회사 문제였습니까.”
“회사만은 아니겠죠.”
짧은 대답. 회의실 공기가 조용히 식었다.
“어제 통화에서, 대표님이 그러셨습니다.”
유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정리해야 할 게 있다.”
건우의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정리라니.”
“정리.”
그녀는 같은 단어를 반복했다.
“사람도, 구조도.”
그 말이 애매하게 걸렸다.
사람.
건우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형이 누구를 정리하려 했다는 겁니까.”
유림은 처음으로 아주 옅게 웃었다.
“그건… 대표님만 아셨겠죠.”
침묵이 길어졌다.
회의실 문 밖에서 누군가 발걸음을 멈췄다가 지나갔다.
회사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대표가 죽었는데도.
“대표님은 어제… 평소와 달랐습니까.”
건우가 물었다.
서유림은 잠시 생각했다.
“조용했습니다.”
“원래도 조용하지 않았습니까.”
“어제는… 결심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 말은 묘하게 정확했다.
건우는 시선을 내렸고, 형의 얼굴이 가만히 떠올랐다.
평온했던, 너무 평온했던 얼굴.
“그 통화 이후에, 다시 연락한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단정한 대답.
“하지만.”
그녀가 덧붙였다.
“대표님이 먼저 끊었습니다.”
건우의 눈이 다시 들렸다.
“무슨 뜻이죠.”
“통화를 제가 먼저 끝내지 않았습니다. 대표님이… 중간에 끊었습니다.”
“중간에.”
“네.”
건우의 머릿속에서 시간이 겹쳤다.
저녁 7시 12분.
사망 추정 시각은 8시 전후.
“그때 대표님 목소리는 어땠습니까.”
서유림은 건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급했습니다.”
“급했다고요?”
“마치… 누군가 옆에 있는 것처럼.”
공기가 멎은 듯 고요해졌다.
“누군가라니.”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화가 끊기기 직전에,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정적.
“‘지금은 안 돼.’”
건우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지금은 안 돼.
그 문장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게 마지막입니까.”
“네.”
유림은 더 말하지 않았다.
회의실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건우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형이 회사 문제로 위협받은 적은 없습니까.”
“위협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곧장 답했다.
“하지만 압박은 있었습니다.”
“어떤 압박.”
“투자 구조를 재조정하라는 압박.”
“누가.”
유림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사회 일부.”
그 말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대표가 죽고, 이사회 일부가 압박을 넣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시점이 묘했다.
“형이 그걸 거부했다는건가요?.”
“네.”
“그리고 어제, 정리하겠다고 말했고요?”
“네.”
건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젯밤, 거실.
깨진 창문. 피. 그리고 하나의 말.
‘창문, 이상하지 않았어?’
그녀는 왜 그걸 먼저 꺼냈을까.
“대표님과 개인적인 관계는 없었습니까.”
건우가 묻자, 서유림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곧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업무 외적인 만남은 없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건우는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유림이 말을 정리했다.
“대표님의 죽음이 단순 강도 사건으로
끝나길 바라진 않습니다.”
그녀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대표님은… 그렇게 허술하게 강도한테 당할 분이 아니니까요.”
문이 닫혔다.
건우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표의 자리. 그 자리는 이제 비어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두고 여러 시선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파일을 다시 펼쳤다.
통화 기록.
저녁 7시 12분.
그리고 그 직후, 통화 없음.
건우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어젯밤 8시 27분.
하나가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던 시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비는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건우는 그날 처음으로 확신했다.
형의 죽음은, 거실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중심으로 천천히 끌려가고 있었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
건우는 신호가 바뀔 때마다 괜히 브레이크를 더 깊이 밟았다.
라디오는 켜지 않았고, 창문 밖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표실 문 앞에서 멈췄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책상은 그대로였고, 의자는 안쪽으로 밀려 있었으며,
서류는 정리된 채 흩어지지 않았다.
마치 잠깐 자리를 비운 사람처럼.
신우는 늘 그랬다.
언제든 돌아올 사람처럼 자리를 정리해두고 나가던 사람.
그런데 이번엔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은 안 돼.’
유림이 전한 마지막 통화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무엇이 안 된다는 뜻이었을까.
그 생각을 더 밀어붙이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
현관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열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클래식이었다. 숨을 낮추게 만드는 선율.
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정장을 벗고 편한 차림이었지만,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왔어?”
건우는 신발을 벗으며 짧게 대답했다.
“네.”
그녀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회사 어땠어?”
건우는 코트를 걸어두며 대답을 늦췄다.
“…그냥 뭐….”
그 이상은 덧붙이지 않았다.
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실은… 그대로였어?”
그 질문은 권력이나 자리 얘기가 아니었다.
그 사람의 흔적을 묻는 말이었다.
“네. 정리도 안 돼 있었어요.”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우 씨는 늘 그랬지. 자리를 비워도, 금방 돌아올 사람처럼.”
그 문장이 건우의 가슴을 묘하게 건드렸다.
형의 의자가 다시 떠올랐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회사에서 누굴 만났어?”
건우는 물컵을 집어 들었다.
“전략기획팀 차장이라는 사람.”
“서유림?”
“네.”
하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어땠어?”
건우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물 한 모금을 삼킨 뒤에야 말했다.
“…별거 없었어요”
“신우 씨에 대한 얘기에도?”
“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어제 마지막으로 통화했다고 하던데.”
건우는 잠깐 숨이 막혔다.
“네. 업무 정리 얘기였다고 해요.”
그는 일부러 ‘지금은 안 돼’라는 문장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그 말을 꺼내면, 대화가 더 깊어질 것 같아서.
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불편했다.
밤이 깊어지고, 음악이 꺼진 뒤에도 건우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부엌으로 나와 물을 따르던 순간, 게스트룸 문이 열렸다.
하나가 나왔다.
“안 자?”
“잠이 안 와서.”
그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하나는 식탁에 앉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
“형 얘기하는 거… 힘들지?”
건우는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 멈췄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마주 앉은 상태였다. 피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 다물고, 몇 초가 흐른 뒤에야 말했다.
“…지금은 좀.”
그 이상은 이어지지 않았다.
말이 목 안에서 멈췄다.
하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고마웠다.
잠시 후,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강도라고 했지?”
“네.”
“넌 형사의 그 말 믿어?”
건우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믿는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은…잘 모르겠어요.”
그게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하나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건 당일 그 집에 제일 먼저 들어간 건 나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장면을 제일 먼저 본 사람도 나고.”
그 말에는 도발이 없었다. 자기 확인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넌 나랑 같이 있을 수 있겠어?”
질문은 낮았다.
건우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형의 얼굴과, 젖은 거실과 지금 이 집의 고요함이 한꺼번에 겹쳤다.
“…지금은…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나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앞에서 멈췄다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문이 닫혔다.
거실에는 다시 빗소리만 남았다.
건우는 한동안 식탁에 앉아 있었다.
형은 죽었고, 진실은 모른다.
그리고 이 집 안에서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을 붙잡고 있는 건 사랑도, 의심도 아니다.
그저 형의 아내를 혼자 둘 수 없다는, 그 책임감 하나뿐이었다.
밤이 지나도, 숨이 정리되지 않았다.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어젯밤의 장면이 반복됐다.닿을 듯 말 듯한 거리. 같은 얼굴, 다른 눈. 그리고 마지막에 겹쳐진 목소리.“나… 무서워.”그건 분명 하나의 목소리였다.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하의 웃음이 겹쳐졌다.건우는 이마를 짚었다.자신이 붙잡고 있는 건 누구인가.자신이 붙잡히고 있는 건 또 누구인가.아침이 왔다.하나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부엌에서 접시가 닿는 소리가 났다.건우는 한참을 침대에 앉아 있다가, 결국 밖으로 나왔다.하나는 평소보다 더 단정한 차림이었다.머리를 묶고, 정장 재킷을 입고 있었다.눈 밑이 조금 부어 있었다.“일어났어.”그녀가 먼저 말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이상은 이어지지 않았다.식탁에 마주 앉았지만, 시선은 오래 닿지 않았다.하나는 물컵을 쥔 채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어제.”그 한 단어에 건우의 심장이 잠깐 멈췄다.“나… 또 이상했어?”그 질문은 두려움이었다.확인을 원하는 게 아니라, 부정을 듣고 싶어 하는 표정.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면, 하나는 조금은 안심할 것이다.그런데.“어제는.”건우는 천천히 말했다.“네가 아니었어.”하나의 손이 멈췄다.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기억은.”“없어.”그녀가 먼저 말했다.“아침에 일어났는데… 가슴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어.”하나는 웃으려 했지만, 웃지 못했다.“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던 느낌만 남아 있었어.”건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나.”하나가 낮게 말했다.“점점 네 앞에 서는 게 무서워.”그 말이 날카롭게 와닿았다.“왜.”“네가 나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떠올릴까 봐.”건우의 숨이 흔들렸다.하나는 더는 피하지 않았다.“그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아도, 네가 느끼는 감정이 전부 나한테 향한 게 아닐까 봐.”그녀의 말은 정확했다.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침이 왔는데도 밤은 다 끝나지 않은 느낌이었다.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이 희미하게 방 안을 비추고 있었지만, 몸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어젯밤의 말들이 지워지지 않았다.“서하.”자신이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냈던 순간.그건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그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었다.변명할 여지를 하나 지워버리는 일이었다.건우는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거실로 나왔을 때, 부엌 쪽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하나였다.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는 뒷모습이 낯설 만큼 조용해 보였다.밤에 본 얼굴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건우는 문득 이상한 죄책감에 휩싸였다.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한 것처럼.“일어났어?”하나가 먼저 돌아봤다.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조금 낮고, 조금 조심스러운.“응.”건우는 짧게 답했다.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어제… 늦게까지 안 잤지.”질문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좀.”하나는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나… 요즘 이상해.”그 말이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건우는 시선을 들었다.“어떻게?”하나는 물컵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듯 섰다.“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모르는 감정이 남아 있어.”건우의 손이 미세하게 굳었다.“어제도.”하나는 천천히 말했다.“일어나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어.”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좋은 꿈을 꿨던 것도 아닌데.”건우는 대답하지 못했다.그 감정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자신은 알고 있었다.하나는 건우를 똑바로 바라봤다.“나… 혹시 너한테 실수한 적 있어?”그 질문은 불안에서 나왔다.건우는 고개를 저었다.“없어.”거짓말은 아니었다.최소한,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하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건우는 시선을 피했다.“근데.”하나가 말을 이었다.“네가 나를 피하는 것 같아서.”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둘은 한동안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를 보지 않았다.하나는 설거지를 하고, 건우는 싱크대 옆에 서서 물 한 모금을 마셨다.다정함은 없었고, 적대감도 없었다.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닿으면 깨질 것 같은 투명한 거리만 있었다.“나 먼저 들어갈게.”하나가 말했다.건우는 고개만 끄덕였다.하나가 방문을 닫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건우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이 집은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해졌을까. 아니,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해야만 했을까.그는 거실 불을 끄지 못했다.불을 끄면 어둠이 오고, 어둠이 오면그 이름이, 그 발소리가, 그 눈빛이 따라올 것 같았다.그런데도.건우는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태도는, 이상하게도 언제나 가장 정직한 몸짓으로 드러났다.건우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시계는 밤 열두 시를 넘겼다.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문 쪽에서 아주 미세한 기척이 들렸다.노크는 없었다.문이 열리는 소리도 과장되지 않았다.대신, 집 안 공기의 결이 바뀌었다.같은 얼굴이 들어왔는데, 눈빛이 달랐다.서하였다.그녀는 오늘 유난히 조용했다.화장이 짙지도 않았고, 옷차림도 노골적이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더 위험해 보였다.마치 ‘유혹’이 아니라 ‘확인’을 하러 온 사람처럼.서하는 거실 불빛을 한 번 쓸어보듯 바라보다가, 건우를 보았다.“불 켜놨네.”그 말투는 낮의 하나와 달리 말끝이 단정했다.감정을 숨기려는 게 아니라, 감정이 너무 선명해서 굳이 흔들지 않는 목소리였다.건우는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조용하네.”서하는 천천히 걸어와 소파 끝에 앉지 않았다.그녀는 건우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 앉았다.어젯밤처럼 숨이 닿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몸이 서로의 온도를 느낄 만큼은 가까웠다.“조용하면 안 돼?”“너는 보통 그렇게 안 들어오잖아.”서하의 입꼬리가 아주 얕게 올라갔다.“넌 내가 들어오는 방식을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척하지.”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
그날 밤은 조용했다.너무 조용해서, 건우는 스스로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불을 끄지 않았다.서류도 펼쳐두지 않았다.그저 소파에 앉아 있었다.기다린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그래서 스스로에게 변명했다.잠이 안 와서, 그냥.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이번엔 놀라지 않았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하나의 얼굴. 그러나 시선이 달랐다.서하였다.오늘은 일부러인 듯 화장이 짙었다.머리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얇은 셔츠 단추 하나가 더 풀려 있었다.계획적이었다.그 사실을 알면서도 건우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서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기다렸어?”그녀가 묻는 방식은 가볍지 않았다.확인에 가까웠다.건우는 고개를 저었다.“아니.”“거짓말.”그녀가 웃었다.“불 안 끄고 앉아 있잖아.”그 말이 정확해서 건우는 반박하지 못했다.서하는 소파 등받이를 돌아 건우의 바로 앞에 섰다.거리는 일부러 좁혀졌다.“오늘은 도망 안 가?”그녀가 낮게 물었다.“도망친 적 없어.”“그래?”서하의 손이 소파 팔걸이를 짚었다.건우의 어깨와 거의 닿을 거리였다.“그럼 왜 어제는 고개를 돌렸어.”그 말이 바로 들어왔다.건우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넘으면 안 되는 선이었으니까.”“선.”서하가 고개를 기울였다.“그 선이 누구 거야.”건우는 말하지 않았다.“형?”그녀가 먼저 던졌다.“아니면… 하나?”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건우의 시선이 흔들렸다.서하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넌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지.”“믿는 게 아니라”“아니.”그녀가 말을 잘랐다.“확신 못 하잖아.”정확했다.그 말이 정확해서, 건우는 화를 낼 수 없었다.서하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건우와 눈높이를 맞췄다.“난 솔직해.”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지금 이 순간, 난 너한테 끌려.”건우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그건…”말이 이어지지 않았다.“하나가 아니야.”서하가 덧붙였다.“난 걔처
그날은 이상하게 조용했다.비도 오지 않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창문은 닫혀 있었는데도, 집 안 공기가 어딘가 묵직했다.건우는 소파에 앉아 사고 기록을 펼쳐두고 있었지만,눈은 글자를 따라가지 못하고 같은 줄을 몇 번이나 되짚고 있었다.열흘 전, 서하가 처음 이름을 말했던 밤이 떠올랐다.그날 이후로 그녀는 몇 번 더 찾아왔다.노크 없이. 설명 없이. 마치 이 집의 또 다른 주인처럼.처음엔 경계했다.그다음엔 질문했고, 이제는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그게 문제였다.밤 열한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발소리가 들렸다.이번엔 망설임이 없었다.숨기지도 않았다.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하나의 얼굴. 하지만 눈빛은 하나가 아니었다.서하였다.긴 머리를 풀어 내린 채, 얇은 니트 차림이었다.화장은 거의 없었지만, 이상하게 더 또렷해 보였다.“또 보고 있어?”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건우는 서류를 덮지 않았다.“형의 죽음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그 말, 이제 지겹지 않아?”그녀가 천천히 걸어왔다.소파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의도적으로.건우는 그 움직임을 모른 척하지 못했다.숨이 가까워졌다.“넌 늘 거기서 멈춰.”“어디.”“형.”그 단어가 공기를 가볍게 베었다.건우는 고개를 들었다.“형은 죽었어.”서하의 말은 차분했지만, 감정이 비어 있었다.“그래도 넌 아직 형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해.”“무슨 뜻이야.”“형이 있으면 안전하니까.”건우의 눈이 흔들렸다.“형이 있으면, 넌 날 마음대로 보지 않아도 되잖아.”그 말이 예상보다 깊게 들어왔다.건우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너랑 하나를 구분하는 게 먼저야.”“구분?”서하가 웃었다.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었다.묘하게 서늘했다.“이 얼굴이 누구 건지 너도 알잖아.”그녀가 한 발 더 다가왔다.무릎이 스쳤다.건우는 그 순간, 피하지 않았다.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넌 지금 누구를 보고 있어.”서하의 목소리가 낮아졌
아침이 왔을 때, 건우는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상태였다.눈을 감으면 이름이 떠올랐다.서하.입 안에서 굴리듯 한 번 더 불러보면 이상하게 현실감이 생겼다.그녀는 이제 ‘그 밤의 여자’가 아니었다.이름을 가진 존재가 됐다.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하나는 늘 그렇듯 먼저 일어나 있었다.건우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일어났어?”그녀가 돌아보며 말했다.어제 밤의 눈빛은 없다.어제 밤의 톤도 없다.그저 평소의 하나.건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응.”식탁에 앉았다.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하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오늘 회사 안 나가?”“갈 거야.”건우는 컵을 들었다.“그 사람 만나려고.”“전략 쪽?”“응.”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조심해.”어제도 했던 말이다.건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이 얼굴로,이 눈으로,어젯밤엔 다른 이름을 말했다.그녀는 그 사실을 모른다.“하나야.”그가 불렀다.그녀가 시선을 들었다.“왜.”“너.”건우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멈췄다.“요즘… 이상한 느낌 들지 않아?”하나는 눈을 좁혔다.“무슨 느낌.”“기억이 끊기는 느낌.”그녀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또 그 얘기야?”“그냥 묻는 거야.”하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건우야.”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난 요즘 네가 더 낯설어.”그 말은 예상 밖이었다.“왜.”“날 볼 때.”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뭔가 확인하려는 눈빛 같아.”건우는 숨을 멈췄다.“확인?”“내가 뭘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그녀의 말은 낮았다.비난이 아니라 피곤에 가까웠다.“난 숨기는 거 없어.”그녀가 덧붙였다.그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건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서하.그 이름을 여기서 꺼낼 수는 없다.하나는 모른다.자신 안에 다른 이름이 있다는 걸.자신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도…“어젯밤.”건우가 다시 말했다.“나한테 온 적 없어?”하나는 고개를 저었다.“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