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
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
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
저녁 7시 12분.
“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
그가 되물었다.
“네.”
“무엇을.”
유림은 잠시 침묵했다.
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
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업무 관계를요.”
건우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대표님과 저는 해외 법인 구조를 같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투자 건이 복잡했거든요.”
그녀의 손가락이 파일 위 한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
“이 법인. 대표님이 직접 설계하셨죠.”
건우는 그 이름을 읽었다.
낯선 해외 법인. 지분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형이 갑자기 정리하겠다고 했다는 겁니까.”
“갑작스럽진 않았어요.”
유림의 시선이 창밖으로 잠시 향했다가 돌아왔다.
“이미 오래 고민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미세한 금이 있었다.
건우는 고개를 들었다.
“형이 고민하던 게, 회사 문제였습니까.”
“회사만은 아니겠죠.”
짧은 대답. 회의실 공기가 조용히 식었다.
“어제 통화에서, 대표님이 그러셨습니다.”
유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정리해야 할 게 있다.”
건우의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정리라니.”
“정리.”
그녀는 같은 단어를 반복했다.
“사람도, 구조도.”
그 말이 애매하게 걸렸다.
사람.
건우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형이 누구를 정리하려 했다는 겁니까.”
유림은 처음으로 아주 옅게 웃었다.
“그건… 대표님만 아셨겠죠.”
침묵이 길어졌다.
회의실 문 밖에서 누군가 발걸음을 멈췄다가 지나갔다.
회사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대표가 죽었는데도.
“대표님은 어제… 평소와 달랐습니까.”
건우가 물었다.
서유림은 잠시 생각했다.
“조용했습니다.”
“원래도 조용하지 않았습니까.”
“어제는… 결심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 말은 묘하게 정확했다.
건우는 시선을 내렸고, 형의 얼굴이 가만히 떠올랐다.
평온했던, 너무 평온했던 얼굴.
“그 통화 이후에, 다시 연락한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단정한 대답.
“하지만.”
그녀가 덧붙였다.
“대표님이 먼저 끊었습니다.”
건우의 눈이 다시 들렸다.
“무슨 뜻이죠.”
“통화를 제가 먼저 끝내지 않았습니다. 대표님이… 중간에 끊었습니다.”
“중간에.”
“네.”
건우의 머릿속에서 시간이 겹쳤다.
저녁 7시 12분.
사망 추정 시각은 8시 전후.
“그때 대표님 목소리는 어땠습니까.”
서유림은 건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급했습니다.”
“급했다고요?”
“마치… 누군가 옆에 있는 것처럼.”
공기가 멎은 듯 고요해졌다.
“누군가라니.”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화가 끊기기 직전에,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정적.
“‘지금은 안 돼.’”
건우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지금은 안 돼.
그 문장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게 마지막입니까.”
“네.”
유림은 더 말하지 않았다.
회의실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건우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형이 회사 문제로 위협받은 적은 없습니까.”
“위협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곧장 답했다.
“하지만 압박은 있었습니다.”
“어떤 압박.”
“투자 구조를 재조정하라는 압박.”
“누가.”
유림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사회 일부.”
그 말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대표가 죽고, 이사회 일부가 압박을 넣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시점이 묘했다.
“형이 그걸 거부했다는건가요?.”
“네.”
“그리고 어제, 정리하겠다고 말했고요?”
“네.”
건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젯밤, 거실.
깨진 창문. 피. 그리고 하나의 말.
‘창문, 이상하지 않았어?’
그녀는 왜 그걸 먼저 꺼냈을까.
“대표님과 개인적인 관계는 없었습니까.”
건우가 묻자, 서유림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곧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업무 외적인 만남은 없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건우는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유림이 말을 정리했다.
“대표님의 죽음이 단순 강도 사건으로
끝나길 바라진 않습니다.”
그녀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대표님은… 그렇게 허술하게 강도한테 당할 분이 아니니까요.”
문이 닫혔다.
건우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표의 자리. 그 자리는 이제 비어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두고 여러 시선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파일을 다시 펼쳤다.
통화 기록.
저녁 7시 12분.
그리고 그 직후, 통화 없음.
건우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어젯밤 8시 27분.
하나가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던 시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비는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건우는 그날 처음으로 확신했다.
형의 죽음은, 거실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중심으로 천천히 끌려가고 있었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
건우는 신호가 바뀔 때마다 괜히 브레이크를 더 깊이 밟았다.
라디오는 켜지 않았고, 창문 밖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표실 문 앞에서 멈췄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책상은 그대로였고, 의자는 안쪽으로 밀려 있었으며,
서류는 정리된 채 흩어지지 않았다.
마치 잠깐 자리를 비운 사람처럼.
신우는 늘 그랬다.
언제든 돌아올 사람처럼 자리를 정리해두고 나가던 사람.
그런데 이번엔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은 안 돼.’
유림이 전한 마지막 통화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무엇이 안 된다는 뜻이었을까.
그 생각을 더 밀어붙이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
현관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열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클래식이었다. 숨을 낮추게 만드는 선율.
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정장을 벗고 편한 차림이었지만,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왔어?”
건우는 신발을 벗으며 짧게 대답했다.
“네.”
그녀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회사 어땠어?”
건우는 코트를 걸어두며 대답을 늦췄다.
“…그냥 뭐….”
그 이상은 덧붙이지 않았다.
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실은… 그대로였어?”
그 질문은 권력이나 자리 얘기가 아니었다.
그 사람의 흔적을 묻는 말이었다.
“네. 정리도 안 돼 있었어요.”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우 씨는 늘 그랬지. 자리를 비워도, 금방 돌아올 사람처럼.”
그 문장이 건우의 가슴을 묘하게 건드렸다.
형의 의자가 다시 떠올랐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회사에서 누굴 만났어?”
건우는 물컵을 집어 들었다.
“전략기획팀 차장이라는 사람.”
“서유림?”
“네.”
하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어땠어?”
건우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물 한 모금을 삼킨 뒤에야 말했다.
“…별거 없었어요”
“신우 씨에 대한 얘기에도?”
“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어제 마지막으로 통화했다고 하던데.”
건우는 잠깐 숨이 막혔다.
“네. 업무 정리 얘기였다고 해요.”
그는 일부러 ‘지금은 안 돼’라는 문장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그 말을 꺼내면, 대화가 더 깊어질 것 같아서.
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불편했다.
밤이 깊어지고, 음악이 꺼진 뒤에도 건우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부엌으로 나와 물을 따르던 순간, 게스트룸 문이 열렸다.
하나가 나왔다.
“안 자?”
“잠이 안 와서.”
그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하나는 식탁에 앉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
“형 얘기하는 거… 힘들지?”
건우는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 멈췄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마주 앉은 상태였다. 피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 다물고, 몇 초가 흐른 뒤에야 말했다.
“…지금은 좀.”
그 이상은 이어지지 않았다.
말이 목 안에서 멈췄다.
하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고마웠다.
잠시 후,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강도라고 했지?”
“네.”
“넌 형사의 그 말 믿어?”
건우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믿는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은…잘 모르겠어요.”
그게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하나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건 당일 그 집에 제일 먼저 들어간 건 나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장면을 제일 먼저 본 사람도 나고.”
그 말에는 도발이 없었다. 자기 확인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넌 나랑 같이 있을 수 있겠어?”
질문은 낮았다.
건우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형의 얼굴과, 젖은 거실과 지금 이 집의 고요함이 한꺼번에 겹쳤다.
“…지금은…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나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앞에서 멈췄다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문이 닫혔다.
거실에는 다시 빗소리만 남았다.
건우는 한동안 식탁에 앉아 있었다.
형은 죽었고, 진실은 모른다.
그리고 이 집 안에서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을 붙잡고 있는 건 사랑도, 의심도 아니다.
그저 형의 아내를 혼자 둘 수 없다는, 그 책임감 하나뿐이었다.
공터를 빠져나오는 순간, 공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건우는 바로 뒤를 붙지 않았다. 한 템포 늦춘 채 골목 끝에서 방향을 맞추고, 자연스럽게 도로의 흐름에 섞였다. 앞차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시야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 거리. 그 미묘한 간격이 지금 필요한 전부였다.김도현의 차량은 속도를 조금 올렸다.아까와는 달랐다. 확인하듯 멈추던 움직임이 사라지고, 목적지를 향해 곧게 뻗는 선처럼 달렸다. 망설임이 사라진 대신, 서두름이 남아 있었다.하나는 창밖을 보며 낮게 말했다.“아까보다 빠르다.”건우는 짧게 대답했다.“정리 끝났으니까.”그의 시선은 앞차의 테일램프에 고정되어 있었다.가방.작은 크기였다. 손에 쥐고 나올 수 있을 만큼 가벼워 보였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가볍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종이 몇 장일 수도 있고, 저장 장치일 수도 있었다. 어떤 형태든, 그 안에는 옮겨야 할 이유가 있었고 숨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서하는 뒷좌석에서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였다.“버리는 건 아니겠지.”건우는 고개를 저었다.“아직 아니다.”잠시 후 덧붙였다.“가치가 있으니까 들고 나온 거다.”차량은 큰 도로로 합류했다.차선이 늘어나면서 차량 흐름이 복잡해졌고,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기가 조금 더 까다로워졌다. 건우는 속도를 무리하게 맞추지 않았다. 대신 차선을 한 번 바꿔, 시야를 확보하는 쪽을 택했다.김도현의 차량이 한 차선 앞으로 빠져나갔다.건우는 그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한 박자 늦춰 같은 방향으로 진입했다. 급하게 따라붙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뒤를 잇는 것이 더 중요했다.하나는 그 흐름을 읽고 있었다.“눈치 보고 있네.”건우는 짧게 말했다.“계속 본다.”그의 시선이 백미러와 앞차 사이를 오갔다.김도현의 차량은 간헐적으로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 올렸다. 뒤차를 확인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일정하게 달리면 보이지 않던 패턴이 속도의 흔들림 속에서 드러난다.서하는 창문에 턱을 괴고 중
공터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막 들어간 사람의 흔적만 남겨 둔 채, 바람은 건물 벽을 스치며 천천히 흘렀다. 오래된 간판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아래 바닥에는 얇은 먼지가 깔려 있었다.건우는 차 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문 하나였지만,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이제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김도현이 스스로 들어간 공간.그리고. 그가 지키려는 것들이 모여 있을 장소.하나는 조용히 말했다.“바로 들어갈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선택을 묻고 있었다.건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시선은 여전히 건물 입구에 머물러 있었다.잠시 후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저었다.“아직 아니다.”짧은 말이었다.하지만 이유는 분명했다.지금 들어가는 건, 확인이 아니라 충돌이 된다.그리고 그 충돌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안에서 뭐 하는지부터 봐야겠네.”건우는 천천히 말했다.“응.”그의 시선이 공터 전체를 한 번 훑었다.차량 위치.건물 구조.주변 출입로.모든 것이 머릿속에 정리되고 있었다.“나갈 때 잡는다.”그 말은 계획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방향이었다.서하는 뒷좌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그럼.”그녀가 말했다.“안에서 뭘 하든 상관없다는 거네.”건우는 짧게 대답했다.“아니.”잠시 후 덧붙였다.“그게 중요하다.”차 안 공기가 다시 조용해졌다.건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안에서.”그의 말이 이어졌다.“자료 옮기거나.”잠시 후 덧붙였다.“숨기거나.”그의 시선이 문에 고정됐다.“그 과정이 필요하다.”하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지금 당장 들어가면, 단순히 ‘의심’ 단계에서 끝날 수 있다.하지만, 김도현이 안에서 실제로 무언가를 움직인 뒤라면. 그건 증거가 된다.하나는 조용히 물었다.“얼마나 기다려야 해.”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길지 않을 거다.”그의 대답은 단순했다.“급한 상태니까.”그 말이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 도로의 소음이 한 겹 꺼졌다.차가 드문 구간이었다. 양쪽으로 낮은 건물들이 붙어 있었고, 간판이 오래된 상가 몇 곳이 띄엄띄엄 보였다. 햇빛은 건물 사이로 잘게 쪼개져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고, 그 위로 먼지가 얇게 떠 있었다.건우는 속도를 더 낮췄다.엔진 소리가 골목 안에서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시선을 끌 필요는 없었다.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앞쪽에서 검은 세단이 멈춰 있는 모습이 보였다.김도현의 차량이었다.건우의 눈이 미묘하게 좁아졌다.“멈췄다.”그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여기서?”그녀의 말에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이곳은 특별히 눈에 띄는 장소가 아니었다.사무실도, 창고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오래된 건물들이 이어진 골목 한가운데, 굳이 차를 세울 이유가 없어 보이는 자리였다.건우는 차를 바로 붙이지 않았다.골목 입구 쪽에 가까운 위치에서 자연스럽게 차를 세웠다.엔진을 끄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여기서 내리진 않을 거다.”그가 말했다.하나는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왜.”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확인 중이다.”그의 시선이 앞차에 머물렀다.“누가 따라왔는지.”그 말이 떨어지자 차 안이 더 조용해졌다.서하는 뒷좌석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맞네.”그녀가 말했다.“한 번에 안 들어가네.”김도현의 차량은 시동이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브레이크등이 약하게 켜져 있었고, 운전석에 앉은 실루엣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건우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이 상황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도착이 아니라, 확인이었다.하나는 낮게 말했다.“눈치챘을까.”건우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완전히는 아니야.”잠시 후 덧붙였다.“근데 감은 잡았을 거다.”그 말은 지금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김도현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하지
복도를 빠져나오자, 아까와 같은 사무실인데도 온도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누군가는 여전히 보고서를 정리하고, 누군가는 전화를 받으며 웃고 있었지만, 건우의 감각은 그 평온함의 표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 마주한 짧은 대화가, 이제부터 이어질 시간의 방향을 분명하게 틀어 놓았기 때문이다.건우는 곧장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복도를 끝까지 걸어가 비상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공간으로 들어서자, 발걸음 소리가 더 또렷하게 울렸다.문을 밀고 들어간 계단실은 조용했다.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와, 위층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문 여닫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하나는 뒤에서 문을 닫으며 물었다.“왜 여기로 왔어.”건우는 난간에 손을 얹은 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시간 벌려고.”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안정되어 있었다.하나는 한 발짝 다가섰다.“뭘.”건우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지금쯤.”잠시 후 덧붙였다.“움직이고 있을 거다.”그 말은 추측이 아니라, 이미 계산된 흐름에 가까웠다.김도현은 방금 건우를 만났다.메일의 내용도 확인했고, 건우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대략 짐작했을 것이다.그 상태에서 가만히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하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증거.”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지우거나.”그의 말이 이어졌다.“옮기거나.”서하는 계단 중간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사람은.”그녀가 조용히 말했다.“숨길 게 생기면 손이 먼저 움직여.”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중요한 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건우는 휴대폰을 꺼냈다.그리고 짧게 번호 하나를 눌렀다.전화는 한 번에 연결됐다.“네, 검사님.”낯익은 목소리였다.건우는 낮게 말했다.“지금 회사 내부.”잠시 후 덧붙였다.“서버 로그 확인 가능합니까.”전화
메일이 발송된 뒤, 사무실의 시간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흘러갔다.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낮은 대화가 이어졌고, 복도를 오가는 발걸음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평온함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건우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노트북 화면을 켜 둔 채, 아무 작업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선은 사무실 안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조금 전. 김도현이 사무실을 나왔다.그리고 그 순간.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하나는 건우 옆에 서 있었다.“봤지.”그녀가 낮게 말했다.건우는 짧게 대답했다.“응.”그의 시선은 복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평소보다 빠르다.”그 말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었다.김도현은 원래 움직임이 느린 사람이었다. 서두르지 않았고, 항상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방금은 달랐다. 걸음이 짧았고,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하나는 조용히 말했다.“메일 봤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하다.”잠시 후 덧붙였다.“내용도 이해했고.”그 말이 떨어지자,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이제 상황은 분명해졌다.정보는 전달됐다.그리고, 상대는 반응했다.서하는 창가에 기대 선 채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생각보다 빠르네.”그녀가 말했다.건우의 시선이 백미러 대신 창가 쪽으로 향했다.서하는 가볍게 웃었다.“급한 사람일수록.”잠시 후 덧붙였다.“첫 반응이 티 나거든.”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은 사실이었다.완전히 준비된 사람은 움직임을 숨긴다.하지만, 갑작스럽게 흔들린 사람은 움직임이 먼저 나온다.건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하나는 그를 바라봤다.“어디 가.”건우는 짧게 말했다.“확인.”그는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하나도 뒤따라 움직였다.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건우의 시선은 주변을 훑고 있었다. 직원 몇 명이 서류를 들고 지나갔고, 멀리서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지만,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낮 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던 직원들의 발걸음과 대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건우에게는 그 모든 것이 얇은 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그 안에 숨어 있는 균열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층수가 올라갈수록 숫자가 하나씩 바뀌었고, 그 단순한 변화가 오히려 긴장감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문이 열리자 복도가 나타났다.형이 매일 걸어 다니던 길이었다.건우는 잠시 그 복도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하나는 그의 옆을 따라 걸었고, 서하는 조금 뒤에서 느리게 발걸음을 맞췄다.사무실 문을 열자 직원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오셨습니까.”짧은 인사가 오갔다.건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향했다.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출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는 완전히 달랐다.자리에 앉은 건우는 노트북을 켰다.화면이 켜지는 동안, 그는 잠시 사무실 안을 훑어봤다.이곳 어딘가에서. 김도현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하나는 건우 옆에 서서 낮게 말했다.“어디서부터 시작할 거야.”건우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작게.”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확실하게.”하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모든 정보를 한 번에 드러내는 게 아니라, 상대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단서만 흘린다.그 정도면 충분했다.건우는 메일 프로그램을 열었다.수신자 목록을 잠시 훑다가 몇 명을 선택했다.재무팀, 감사팀, 그리고 몇몇 임원들.김도현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하나는 그 화면을 보며 물었다.“내용은.”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문장은 길지 않았다.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최근 일부 계좌에서 반복적인 자금 이동 패턴이 확인되었습니다.특정 개인 계좌와 연결된 흐름이 있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