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
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
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
저녁 7시 12분.
“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
그가 되물었다.
“네.”
“무엇을.”
유림은 잠시 침묵했다.
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
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업무 관계를요.”
건우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대표님과 저는 해외 법인 구조를 같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투자 건이 복잡했거든요.”
그녀의 손가락이 파일 위 한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
“이 법인. 대표님이 직접 설계하셨죠.”
건우는 그 이름을 읽었다.
낯선 해외 법인. 지분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형이 갑자기 정리하겠다고 했다는 겁니까.”
“갑작스럽진 않았어요.”
유림의 시선이 창밖으로 잠시 향했다가 돌아왔다.
“이미 오래 고민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미세한 금이 있었다.
건우는 고개를 들었다.
“형이 고민하던 게, 회사 문제였습니까.”
“회사만은 아니겠죠.”
짧은 대답. 회의실 공기가 조용히 식었다.
“어제 통화에서, 대표님이 그러셨습니다.”
유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정리해야 할 게 있다.”
건우의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정리라니.”
“정리.”
그녀는 같은 단어를 반복했다.
“사람도, 구조도.”
그 말이 애매하게 걸렸다.
사람.
건우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형이 누구를 정리하려 했다는 겁니까.”
유림은 처음으로 아주 옅게 웃었다.
“그건… 대표님만 아셨겠죠.”
침묵이 길어졌다.
회의실 문 밖에서 누군가 발걸음을 멈췄다가 지나갔다.
회사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대표가 죽었는데도.
“대표님은 어제… 평소와 달랐습니까.”
건우가 물었다.
서유림은 잠시 생각했다.
“조용했습니다.”
“원래도 조용하지 않았습니까.”
“어제는… 결심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 말은 묘하게 정확했다.
건우는 시선을 내렸고, 형의 얼굴이 가만히 떠올랐다.
평온했던, 너무 평온했던 얼굴.
“그 통화 이후에, 다시 연락한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단정한 대답.
“하지만.”
그녀가 덧붙였다.
“대표님이 먼저 끊었습니다.”
건우의 눈이 다시 들렸다.
“무슨 뜻이죠.”
“통화를 제가 먼저 끝내지 않았습니다. 대표님이… 중간에 끊었습니다.”
“중간에.”
“네.”
건우의 머릿속에서 시간이 겹쳤다.
저녁 7시 12분.
사망 추정 시각은 8시 전후.
“그때 대표님 목소리는 어땠습니까.”
서유림은 건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급했습니다.”
“급했다고요?”
“마치… 누군가 옆에 있는 것처럼.”
공기가 멎은 듯 고요해졌다.
“누군가라니.”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화가 끊기기 직전에,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정적.
“‘지금은 안 돼.’”
건우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지금은 안 돼.
그 문장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게 마지막입니까.”
“네.”
유림은 더 말하지 않았다.
회의실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건우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형이 회사 문제로 위협받은 적은 없습니까.”
“위협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곧장 답했다.
“하지만 압박은 있었습니다.”
“어떤 압박.”
“투자 구조를 재조정하라는 압박.”
“누가.”
유림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사회 일부.”
그 말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대표가 죽고, 이사회 일부가 압박을 넣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시점이 묘했다.
“형이 그걸 거부했다는건가요?.”
“네.”
“그리고 어제, 정리하겠다고 말했고요?”
“네.”
건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젯밤, 거실.
깨진 창문. 피. 그리고 하나의 말.
‘창문, 이상하지 않았어?’
그녀는 왜 그걸 먼저 꺼냈을까.
“대표님과 개인적인 관계는 없었습니까.”
건우가 묻자, 서유림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곧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업무 외적인 만남은 없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건우는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유림이 말을 정리했다.
“대표님의 죽음이 단순 강도 사건으로
끝나길 바라진 않습니다.”
그녀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대표님은… 그렇게 허술하게 강도한테 당할 분이 아니니까요.”
문이 닫혔다.
건우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표의 자리. 그 자리는 이제 비어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두고 여러 시선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파일을 다시 펼쳤다.
통화 기록.
저녁 7시 12분.
그리고 그 직후, 통화 없음.
건우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어젯밤 8시 27분.
하나가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던 시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비는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건우는 그날 처음으로 확신했다.
형의 죽음은, 거실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중심으로 천천히 끌려가고 있었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
건우는 신호가 바뀔 때마다 괜히 브레이크를 더 깊이 밟았다.
라디오는 켜지 않았고, 창문 밖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표실 문 앞에서 멈췄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책상은 그대로였고, 의자는 안쪽으로 밀려 있었으며,
서류는 정리된 채 흩어지지 않았다.
마치 잠깐 자리를 비운 사람처럼.
신우는 늘 그랬다.
언제든 돌아올 사람처럼 자리를 정리해두고 나가던 사람.
그런데 이번엔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은 안 돼.’
유림이 전한 마지막 통화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무엇이 안 된다는 뜻이었을까.
그 생각을 더 밀어붙이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
현관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열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클래식이었다. 숨을 낮추게 만드는 선율.
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정장을 벗고 편한 차림이었지만,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왔어?”
건우는 신발을 벗으며 짧게 대답했다.
“네.”
그녀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회사 어땠어?”
건우는 코트를 걸어두며 대답을 늦췄다.
“…그냥 뭐….”
그 이상은 덧붙이지 않았다.
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실은… 그대로였어?”
그 질문은 권력이나 자리 얘기가 아니었다.
그 사람의 흔적을 묻는 말이었다.
“네. 정리도 안 돼 있었어요.”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우 씨는 늘 그랬지. 자리를 비워도, 금방 돌아올 사람처럼.”
그 문장이 건우의 가슴을 묘하게 건드렸다.
형의 의자가 다시 떠올랐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회사에서 누굴 만났어?”
건우는 물컵을 집어 들었다.
“전략기획팀 차장이라는 사람.”
“서유림?”
“네.”
하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어땠어?”
건우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물 한 모금을 삼킨 뒤에야 말했다.
“…별거 없었어요”
“신우 씨에 대한 얘기에도?”
“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어제 마지막으로 통화했다고 하던데.”
건우는 잠깐 숨이 막혔다.
“네. 업무 정리 얘기였다고 해요.”
그는 일부러 ‘지금은 안 돼’라는 문장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그 말을 꺼내면, 대화가 더 깊어질 것 같아서.
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불편했다.
밤이 깊어지고, 음악이 꺼진 뒤에도 건우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부엌으로 나와 물을 따르던 순간, 게스트룸 문이 열렸다.
하나가 나왔다.
“안 자?”
“잠이 안 와서.”
그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하나는 식탁에 앉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
“형 얘기하는 거… 힘들지?”
건우는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 멈췄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마주 앉은 상태였다. 피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 다물고, 몇 초가 흐른 뒤에야 말했다.
“…지금은 좀.”
그 이상은 이어지지 않았다.
말이 목 안에서 멈췄다.
하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고마웠다.
잠시 후,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강도라고 했지?”
“네.”
“넌 형사의 그 말 믿어?”
건우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믿는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은…잘 모르겠어요.”
그게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하나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건 당일 그 집에 제일 먼저 들어간 건 나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장면을 제일 먼저 본 사람도 나고.”
그 말에는 도발이 없었다. 자기 확인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넌 나랑 같이 있을 수 있겠어?”
질문은 낮았다.
건우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형의 얼굴과, 젖은 거실과 지금 이 집의 고요함이 한꺼번에 겹쳤다.
“…지금은…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나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앞에서 멈췄다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문이 닫혔다.
거실에는 다시 빗소리만 남았다.
건우는 한동안 식탁에 앉아 있었다.
형은 죽었고, 진실은 모른다.
그리고 이 집 안에서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을 붙잡고 있는 건 사랑도, 의심도 아니다.
그저 형의 아내를 혼자 둘 수 없다는, 그 책임감 하나뿐이었다.
형사는 그 답을 기록하지 않고, 먼저 건우를 바라봤다. 거짓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조심스럽고,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넓은 답이었다. 건우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좁히지 않고, 열어두기 위해서.형사는 잠깐 침묵한 뒤, 캡처 사진을 한 장 더 앞으로 밀었다.“그럼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사진 속에는 더 가까운 각도로 잡힌 실루엣이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작고 어두운 물체. 우산은 아니었다.건우는 그 물체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가슴 안쪽에서 차가운 감각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칼.그 단어가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형사는 그의 반응을 보고 있었다.놓치지 않고.“뭔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건우는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아직은 없습니다.”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직은, 이라고 붙인 순간부터 그것은 완전한 부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녹음기 옆에 손을 얹은 채, 아주 낮게 말했다.“그럼 지금부터 같이 찾아보죠. 윤신우 씨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구를 집 안에 들였는지.”그 말이 끝났을 때, 건우는 처음으로 이 사건이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바깥에서 들어온 그림자, 하나가 스친 기억, 서하가 끝까지 알고 있는 밤, 그리고 자신이 외면했던 선택이 이제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표 위에 놓이려 하고 있었다.그 시간표가 완성되면, 누가 가장 먼저 무너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더 이상 모르는 척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진술실 안의 공기는 현장보다 훨씬 건조했지만, 건우는 오히려 그 건조함이 더 숨 막히게 느껴졌다. 신우의 집에서는 비 냄새와 피 냄새, 젖은 바닥의 감각이 모든 것을 덮고 있어서 생각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는데, 이곳에서는 형광등 불빛 아래 놓인 사진
하나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이해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잠시 뒤 형사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고 있었고, 수첩은 품 안에 넣어 젖지 않게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조금 내려앉아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두 분 모두 경찰서로 이동해주셔야겠습니다. 현장에서는 더 확인하기 어렵고, 시간대 정리가 필요합니다.”건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하나를 한 번 보았다. 하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건우가 대신 말했다.형사는 그 반응을 확인한 뒤, 하나에게도 시선을 옮겼다.“괜찮으시겠습니까.”하나는 “네.” 하고 대답하려다 잠깐 멈췄고, 곧 더 작고 현실적인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지는 않은데, 갈 수는 있어요.”그 대답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꾸민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사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차로 향하는 길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거리 동안, 건우는 여러 번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신우의 집은 여전히 불빛을 품고 있었고, 그 불빛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조금 전까지 자기 안에서 열렸던 그 밤의 장면은 다시 조용히 닫히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경찰서로 향하는 현실의 시간이 더 강하게 앞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차 안은 좁고 차가웠다. 하나는 뒷좌석 한쪽에 앉았고, 건우는 그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에는 손 하나 정도의 간격이 있었지만, 그 간격은 지금까지의 어떤 거리보다 멀게 느껴졌다. 경찰차가 출발하자 창밖의 빗줄기가 길게 번졌고, 골목의 불빛들이 뒤로 밀려났다.하나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건우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젖은 머리카락, 창백한 입술, 그리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눈. 그 눈을 보면서 건우는 한 가지를 분명히 느꼈다. 하나는 전부를 알고 있지 않다. 그러나 완전히
관리실을 나왔을 때,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었다. 처음보다 조금 약해진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빗줄기 자체가 줄어서라기보다 눈이 그 리듬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건우는 현관 처마 아래에서 잠깐 멈춰 섰고, 방금 모니터 안에서 지나갔던 흐릿한 실루엣을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렸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성별도 단정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존재 하나만으로 사건의 방향은 바뀌었다.형사는 그 실루엣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관리실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다른 형사에게 영상 확보를 지시했고, 입구와 엘리베이터, 건물 뒤편까지 연결되는 모든 화면을 따로 빼두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까지보다 분명한 집중이 들어 있었다. 그건 건우가 원하는 방향이기도 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방향은 아니었다. 실루엣이 생긴다는 건 외부 용의자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표가 더 촘촘해진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하나는 현관 옆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잠시 안쪽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했는지, 젖은 어깨 위에 얇은 담요 같은 것이 걸쳐져 있었지만, 그 담요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워 보였고, 얼굴은 비와 눈물의 경계가 섞인 채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건우는 그녀 쪽으로 바로 다가가지 않았다. 관리실에서 확인한 장면을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혹은 짐작하고 있는지를 먼저 읽어야 했다.하나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봤어?”그녀가 물었다.목소리는 작았지만, 일부러 낮춘 건 아니었다. 힘이 빠져 그런 것에 가까웠다.건우는 그녀 앞까지 걸어가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노란 테이프와 빗물, 그리고 조금 전 모니터 속에서 생긴 새로운 시간이 함께 놓여 있었다.“누가 있었어.”그가 말했다.“네가 오기 전에, 건물 주변에 들어온 사람이 하나 더 잡혔어.”하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반응하지
관리실 안 공기가 아주 조금 무거워졌다.젊은 형사가 모니터를 가까이 들여다보듯 몸을 숙였고, 경비원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건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안쪽에서는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었다. 사건이 이제부터 더 복잡해질 수 있다는 예감, 그리고 그 복잡함이 자기에게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아주 냉정하고 불편한 계산이 동시에 올라오고 있었다.“이 사람은 누굽니까.”형사가 경비원에게 물었다.경비원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입주민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안 됩니다.”형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능성이 하나 더 생긴 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가까웠다.건우는 그 순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했다. 지금 이 인물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오히려 이상할 수 있었고, 그렇다고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 사이의 균형이 중요했다.“형이 아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네요.”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시선을 모니터에 둔 채로, 생각이 입으로 흘러나온 것처럼 들리게.“문을 강제로 연 흔적이 없다는 쪽이면,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낯익은 사람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형사는 그 말을 듣고 건우를 한 번 보았다. 그 시선은 짧았지만,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그 가능성도 포함해서 보겠습니다.”동의였다. 적어도 지금은.건우는 더 보태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 지금 필요한 건 ‘가설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스스로 그 방향으로 걸어가도록 길만 열어두는 것이었다.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하나가 들어가고, 나가고,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건우와 하나가 함께 다시 현장으로 향하는 장면까지 화면에 잡혔다. 그 모든 장면이 순서대로 놓이자,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형사는 그 둘 사이의 짧은 교환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종류의 침묵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건우는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에게 시선을 오래 두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는 길은 좁고 어두웠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고, 배수구 쪽에서는 물이 넘칠 듯한 소리를 내며 고여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은 군데군데 들떠 있었고, 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불규칙하게 튀었다. 현관 앞의 밝은 불빛과는 다른 종류의 공간이었다. 그 음습한 통로를 따라 걸어가면서, 건우는 자기 발걸음이 너무 일정하다는 걸 문득 느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더 서두르거나, 반대로 더 조심스럽게 걸을 텐데, 지금 자신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마치 이미 여러 번 지나온 길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걷고 있었다.관리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는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젊은 경비원이 이미 상황을 전해 들은 듯 문을 열어주었고,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경찰들을 보자마자 비켜섰다.“CCTV 저장되는 건 다 있습니다.”그가 먼저 말했다.목소리가 작았지만, 정확하게 필요한 말만 꺼내는 방식이었다.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실은 좁았다. 모니터가 여러 대 붙어 있었고, 그 앞에 낡은 책상과 회전의자 두 개, 벽 한쪽에 걸린 달력과 쓰다 남은 볼펜들이 뒤섞여 있었다. 전형적인 공간이었지만, 지금 이 좁은 곳에서 결정될 수 있는 정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건우는 안쪽으로 한 발짝 들어선 뒤, 더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벽 쪽에 몸을 붙이듯 서서 모니터를 볼 수 있는 각도만 확보했다. 그 위치가 중요했다. 너무 가까우면 조급해 보일 수 있고, 너무 멀면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었다.“몇 시부터 보죠?”젊은 형사가 물었다.중년 형사는 수첩을 열어 시간대를 한 번 확인한 뒤, 경비원에게 말했다.
형사의 질문이 하나에게 향한 채 공기 속에 남아 있는 동안, 빗소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골목 바닥에 고인 물을 세게 두드리며 더 또렷하게 들렸고, 그 일정한 리듬이 지금 이 장면을 덮고 있는 침묵을 더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형사를 향했는데, 그 짧은 망설임이 단순한 감정의 동요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머릿속에서 어떤 순서를 붙잡으려는 데서 생긴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했다.건우는 옆에 서서 그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하나가 골목 아래까지 내려왔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밤의 바깥쪽 동선이 어디에서 갈라졌는지를 결정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섣불리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조금 전까지는 하나의 흔들림이 길어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쪽이 더 안전했지만, 이번에는 같은 방식으로 끼어드는 순간 오히려 더 큰 어긋남을 만들 수도 있었다.하나는 한 번 더 숨을 고른 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짧은 동작을 했다. 손끝이 젖어 있어 그 동작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았고, 젖은 머리카락이 다시 뺨에 달라붙었다. 그 사소한 불편함이 지금은 이상하게도 현실감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을 한 번 내려다봤다가, 고개를 들고 형사를 봤다.“집 앞까지만 왔던 것 같아요.”하나의 목소리는 낮았고, 억지로 떨림을 누르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떨림이 과장되게 들리지 않았던 건, 지금 그녀가 무언가를 꾸며내고 있다기보다, 이미 한 번 흐트러진 기억을 다시 정렬하려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형사는 그 말을 바로 받아 적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얼굴을 잠깐 더 보다가, 시선을 다시 바닥의 자국으로 내렸다. 그는 누군가를 몰아붙이는 식으로 질문을 이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애매한 지점에서는 더 말을 줄이고, 상대가 스스로 내놓는 정보와 현장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