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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
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 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아니었다.
살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겪지 못한 채로 돌아온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그는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눈을 감으면 보였다.
부모님 얼굴이 비에 젖은 도로 위, 찌그러진 차 안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왜 너만 살아 있냐고.
-우리는 왜 죽어야 했냐고.그 질문이 밤마다 가슴을 파고들었다.
건우는 그걸 밀어낼 힘이 없었다. 힘을 쓰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으니까.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건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벨 소리가 집 안을 채우다가, 이내 사라졌다. 다시 울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늘 가장 늦게 도착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젖은 손으로 두드리는 것 같았다.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 그리고,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도련님… 도련님…”
건우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윤건우… 윤건우…”
강하나.
윤신우의 아내.
이제는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여자. 그리고, 윤건우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1년 전엔 그들이 함께 미래를 그렸다.
결혼을 생각했고,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웃는 소리 하나도 아까웠다. 모든 순간이. 그런데 1년 만에 눈을 떴을 때, 하나는 이미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형 옆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왼손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고로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은 혼자 회사를 떠안게 되었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동생을 대신해서 모든 걸 감당했다고 했다.그리고 그 옆에, 하나가 있었다.
형의 아내로.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받아들이는 건 달랐다. 몸 어딘가가 납덩이처럼 가라앉는 기분. 설명은 가능했지만, 감정은 따라오지 못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우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이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현관까지 가는 게 이렇게 먼 일인 줄 몰랐다.손잡이를 잡는 순간,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문을 여는 일조차 의식처럼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는 쪽으로, 한 발 내딛는 의식.문을 열었다. 비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하나가 우산도 없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물에 젖어 검게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건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여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미 알아버릴 것 같아 숨이 막혔다.“하… 나… 아니, 형수님…”
목소리가 떨렸다.
자기 귀에도 낯선 목소리였다.“대체 무슨 일이에요.”
하나의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을 삼키는 게 보였다. 몇 번이고. 비는 그녀의 어깨를 때리며 흘러내렸고, 그 물기마저 그녀를 더 작게 보이게 만들었다.“…건우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형수님이 아니라, 예전처럼.건우의 가슴이 반응했다.
그 반응이 더 참담했다.“어떡해.”
숨이 가빴다.
“신우 씨가… 신우 씨가…”
눈이 흔들렸다.
마치 한 단어만 더 말하면 모든 게 무너질 것처럼.“죽었어.”
순간, 빗소리가 멀어졌다.
세상이 잠깐 꺼진 듯했다.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말의 의미가 머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단어는 들렸는데, 문장이 되지 않았다.“네?”
천천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누가 죽어요?”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작아서, 고개를 젓는 건지 무너지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집이 엉망이었어.”
“창문이 깨져 있었고… 거실은 난장판이었어.”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신우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배에 칼이…”
말이 끊겼다.
그 다음을 말하면, 정말로 끝이 날 것 같아서. 끝이라는 단어가 현실이 될 것 같아서.건우의 머릿속에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 침대 옆에 서 있던 그 얼굴. 말없이 물을 건네고, 말없이 창문을 닫아주던 사람.이제 가족은 형밖에 없었다.
그 형이. 오늘 밤, 죽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은 너무 자연스럽게 계속 돌아가고, 그 자연스러움이 건우를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하나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턱에 서 있었다.
마치 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 자신이 가져온 소식이 완전히 현실이 될까 봐.그녀의 눈빛이 집 안을 훑었다.
젖은 현관 매트, 어둑한 거실, 닫힌 방문들. 그리고 다시 건우에게로 돌아왔다.그 눈에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겁에 질린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미 확인한 사람의 눈빛.건우는 그게 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그날 밤, 그 집에서 죽은 건 윤신우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믿음도 함께,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경찰차의 붉은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길게 번졌다. 신우의 집 앞에는 이미 노란 통제선이 둘러쳐져 있었다.건우는 그 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이 아니라,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익숙해야 할 현관이 낯설게 보였다.“가족분이십니까?”
젊은 형사가 다가왔다.
건우는 고개만 끄덕였다.“안쪽은 현장 보존 중입니다. 여기서 확인만 하셔야 합니다.”
건우는 통제선 안쪽을 바라봤다.
거실은 불이 켜져 있었다.
바닥에는 흩어진 물건들이 보였고, 소파가 밀려 있었다. 창문 하나가 깨져 있었는데, 파손된 유리 대부분이 실내 쪽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걸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거실 중앙.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천 아래의 윤곽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건우의 목이 마른 듯 굳었다.형은 저 아래에 있다.
그러나 그는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건 고작 얇은 테이프 한 줄이었지만, 그건 건너갈 수 없는 경계였다.비가 세게 내리면서 깨진 창문 틈으로 빗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현장 요원이 플라스틱 시트로 급히 막고 있었다.“사망 추정 시각은 9시 전후입니다.”
형사의 말이 들렸다.“침입 흔적은 확인됐습니다. 강도 가능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강도.
그 단어가 건우의 귓속에서 헛돌았다.
형이 강도에게 찔렸다고.그는 다시 거실을 바라봤다.
피는 이미 어둡게 말라가고 있었다.
비 냄새와 섞여 묘하게 눅진한 공기가 느껴졌다.하나는 현관 안쪽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경찰 한 명이 옆에서 진술을 받고 있었다.“귀가 시간은 정확히 언제입니까?”
“9시 반 조금 넘어서요.”목소리가 낮고 고르다. 울음이 섞여 있지 않았다.
“남편분과 최근에 다툰 일은요?”
잠시 침묵.
“없었습니다.”
짧고 단정했다.
건우는 그 대답을 들으면서도,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이 자꾸 거실 중앙으로 향했다.하얀 천 아래, 형이 누워 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았다.“유리 파손 방향은 안쪽으로 튄 흔적이 많습니다.”
현장 감식 요원이 낮게 말했다.“외부 충격인지, 내부에서 파손된 건지는 더 봐야 합니다.”
건우는 그 말을 흘려들으려 했지만,
그 문장이 머릿속 어딘가에 걸렸다.안쪽으로.
그는 천천히 시선을 창문으로 옮겼다.
비는 여전히 바깥에서 쏟아지고 있었다.“도련님.”
누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관리인이었다.“저녁에 큰 소리가 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비가 워낙 세서… 정확히는…”
말끝이 흐려졌다.
비.
모든 게 비 때문인 것처럼 정리되고 있었다.
형사가 건우에게 다가왔다.“동생분이시죠. 참고인 조사 위해서 잠시 말씀 나누셔야 합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들것이 들어왔다.하얀 천이 조심스럽게 고정됐다.
윤신우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눈은 감겨 있었다.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그 평온함이 이상했다.
마지막 순간에 겪었을 공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형은 저 얼굴로, 자신의 마지막 말을 남겼을까.건우는 묻고 싶었다.
-형, 그때 뭐라고 말했어.
하지만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시신이 통제선을 넘어 나갔다.비가 얼굴을 때렸다.
하나는 여전히 안쪽에 서 있었다. 조사를 마친 듯 형사와 몇 마디를 나누고 있었다.그녀의 눈이 잠시 건우를 향했다.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 스쳤다.아주 잠깐. 건우는 그걸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형은 죽었고, 이 집은 지금부터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 될 거라는 예감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경찰서 앞에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몸은 이미 밤새 비와 조사, 녹음 속 신우의 목소리를 지나오느라 한계에 가까웠지만, 건우는 그 피로가 오히려 지금 움직여야 한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 잠깐이라도 앉아버리면, 신우가 남긴 말과 녹음 속에서 새롭게 열린 사고의 가능성이 다시 흐려질 것 같았고, 그 흐림이 찾아오는 순간 자신은 또 한 번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나는 그 판단을 바로 알아차렸다.“병원 가려고?”건우는 택시를 부르려 휴대폰을 꺼내다가 그녀를 봤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읽힌 표정이었다.“응. 내 사고 기록부터 확인해야겠어.”하나는 잠깐 눈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말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건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신우의 녹음에서 건우의 사고가 언급된 이상, 그것을 뒤로 미루는 건 더 이상 안전이 아니라 회피에 가까웠다.“같이 갈게.”그녀가 말했다.건우는 이번에는 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어젯밤이었다면 혼자 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위험하니까, 네가 흔들리니까, 내가 먼저 확인해야 하니까. 그런 이유들은 늘 그럴듯했고, 때로는 진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식의 보호가 무엇을 남기는지 그는 너무 많이 봐버렸다. 신우가 하나를 지키겠다는 말로 숨긴 것들, 자신이 하나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미뤄둔 것들, 그리고 서하가 끝내버린 밤까지.숨김은 늘 보호의 얼굴을 하고 오지만, 남는 건 대개 더 깊은 고립이었다.“그래.”건우는 짧게 답한 뒤, 택시를 호출했다.차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경찰서 앞 처마 아래에 서 있었다. 하늘은 밝아졌지만 햇빛은 약했고, 젖은 도로는 아직 밤의 흔적을 놓지 않고 있었다. 하나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끈을 천천히 감았다 풀었다. 그 움직임이 불안에서 오는 습관이라는 걸 건우는 알았다.“네 사고가…”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정말 누군가가 만든 거라면.”건우는 그녀의 다음 말을
건우는 입술을 다물었다. 신우의 사과는 지금 와서 아무것도 고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의미한 것도 아니었다. 죽은 사람의 말은 늘 늦게 온다. 그리고 늦게 온 말일수록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오래 남는다.“그래도 이건 말해야겠다. 하나는 몰랐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하나는 네 사고와도, 내가 쫓던 일과도 관계없다. 그 애가 아는 건 내가 보여준 것뿐이다. 내가 감춘 것 말고.”하나는 그 문장에서 결국 눈물을 떨어뜨렸다. 소리 없이, 아주 작게. 그녀는 손으로 닦지도 않았다. 눈물이 뺨을 따라 내려가 테이블 위로 떨어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신우의 숨이 녹음 속에서 길게 들렸다.“그런데 하나 안에, 내가 설명하지 못한 밤이 있다.”방 안이 완전히 멈췄다.건우의 손이 테이블 가장자리를 아주 미세하게 움켜쥐었다.하나는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무너져 있던 얼굴이 아니라, 낯선 말을 들은 사람의 얼굴이었다.“그 밤이 사람인지, 기억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늦게 본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순간의 하나는 내가 알던 하나가 아니었다. 이 말을 하면 내가 미친 사람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녹음으로 남긴다. 내가 그 애를 의심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그 애를 지키고 싶었는데, 정작 무엇으로부터 지켜야 하는지 몰랐다.”건우는 서하의 이름을 떠올렸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 이름이 방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우는 서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느꼈다. 하나 안에 있는 설명되지 않는 밤. 그 밤이 신우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끝내 그를 차미령의 흔적과 연결시켰을 가능성이 있었다.녹음 속 신우는 잠시 기침을 했다. 녹음된 소리인데도, 방 안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이 진짜 차미령인지, 정미라인지, 아니면 그 이름 뒤에 숨은 사람인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게 파일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 안에 건우 네 사고와 관련된 목소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신우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평소의 목소리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건우가 기억하는 윤신우는 말끝을 쉽게 흐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감정이 올라와도 문장부터 정리한 뒤 입을 여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녹음 속의 그는 숨을 고르는 사이마다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이 공포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혹은 누군가에게 끝내 닿지 못할 말을 남기고 있다는 자각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하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두 손을 맞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 수 있는 지점을 이미 지나온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뜬 채 노트북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형사는 재생 버튼에서 손을 뗀 뒤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젊은 형사는 옆에 서서 화면의 파형을 확인하고 있었다.녹음 속 신우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강건우가 이걸 듣고 있다면, 아마 나는 네게 직접 말하지 못한 거겠지.”건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 이름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순간, 가슴 안쪽이 아주 낮게 내려앉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름은 자신을 향해 있었고, 이 방에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들었다. 더 이상 부재중 통화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신우는 자신에게 남기려 했다. 닿지 못한 통화는 결국 이 파일로 돌아왔다.“네가 전화를 안 받은 걸 원망하려고 남기는 건 아니다. 네가 받았어도, 나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 거다. 내가 쫓고 있는 게 사람인지, 돈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늦게 알아버린 죄인지, 나도 아직 다 정리하지 못했다.”하나의 숨이 짧게 흔들렸다. 건우는 그 소리를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하나를 보면, 자신도 무너질 수 있었다. 대신 그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하나에만 시선을 붙들었다.“차미령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 이름으로 살고 있지 않았다. 정미라라는 이름이 있고, 그 뒤에 또 다른 이름들이 있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카페 안에는 손님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고, 커피 머신 소리와 낮은 대화들이 공간을 채웠다. 두 사람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 하나는 컵을 양손으로 감싼 채 앉아 있었고, 건우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화면이 켜지기만을 기다렸다.기다림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다. 건우는 신우가 주방 틈에 무언가를 숨기는 장면을 상상했다. 손에 작은 저장 장치를 들고, 집 안을 한 번 둘러본 뒤,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틈새에 그것을 넣는 모습. 그리고 그가 그 뒤에 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그는 이미 자신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하나는 갑자기 말했다.“신우 씨가 마지막으로 나한테 한 말이 기억났어.”건우는 고개를 들었다.“뭐라고 했는데.”“별말 아니었어. ‘냉장고 옆에 먼지 많더라.’ 그랬어.”하나의 눈이 젖어들기 시작했지만, 울지는 않았다.“나는 그때 그냥 또 잔소리하려는 줄 알고, 나중에 청소하겠다고 했어.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이 알려준 거였나 봐. 직접 말 못 하고, 그렇게.”건우는 커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우는 죽기 전 여러 방식으로 신호를 남기고 있었다. 전화를 걸었고, 이상한 말로 위치를 남겼고, 누군가를 추적했다. 문제는 아무도 제때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형사였다.건우는 바로 받았다.“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져 있었다.“말씀하신 위치에서 물건 하나가 나왔습니다.”건우는 하나를 봤다. 하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이미 알아차린 듯 컵을 내려놓았다.“뭡니까?”건우가 물었다.“소형 USB 저장 장치입니다. 먼지와 테이프에 감싸져 있어 현장팀이 처음에는 확인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건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안쪽이 아주 깊게 내려앉았다.“내용은요.”“지금 바로 분석팀으로 넘길 겁니다. 파일이 살아 있
하나는 경찰서 밖으로 나와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침은 완전히 시작되어 있었고, 비가 그친 하늘은 낮게 흐렸다. 젖은 나무와 도로에서 물비린내가 올라왔고, 출근길 사람들은 두 사람을 스치듯 지나갔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지만, 건우와 하나에게는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신우 씨 집에 다시 가야 해.”하나가 말했다.건우는 예상하고 있었다.“경찰이 막을 거야.”“알아. 그래도 가야 해. 집 밖에서라도.”“왜.”하나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생각난 게 있어.”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뭐가.”“신우 씨가 가끔 뭘 숨길 때, 서재에 안 뒀어. 오히려 너무 뻔하다고 했거든. 중요한 건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데 둬야 한다고.”“어디.”하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을 따라가는 눈이었다.“주방.”건우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주방?”“싱크대 아래는 아니고, 냉장고 옆에 작은 틈이 있었어. 예전에 내가 거길 막자고 했는데, 신우 씨가 그냥 두자고 했어. 먼지만 쌓인다고 했더니, 그래도 거긴 손 안 타는 자리라 좋다고 했어. 그때는 그냥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그녀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건우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신우가 녹음 파일 같은 것을 숨겼다면, 누구나 먼저 뒤질 서재나 책상이 아니라, 생활 속에 섞여 있는 작은 틈을 선택했을 수 있다.“경찰한테 말하자.”건우가 말했다.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 다시 저었다.“말해야 하는데, 말하기 전에 내가 직접 확인하고 싶어.”“그건 위험해.”“알아.”하나는 그를 똑바로 봤다.“그런데 나도 이제 계속 남이 확인한 걸 듣기만 하고 싶지는 않아.”그 말은 고집이 아니라, 아주 오래 밀려 있던 감정의 끝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건우는 그녀를 막고 싶었지만, 쉽게 막지 못했다. 신우가 죽은 뒤로 하나는 계속 ‘결과를 본 사람’으로 밀려 있었다. 집 앞에서 울고, 경찰 앞에서 진술하
문태오의 두 번째 메시지를 읽은 뒤, 건우는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 머물렀지만, 문장을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묻든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문태오는 이미 자료를 넘겼고, 이름을 던졌고, 이제는 녹음 파일을 찾으라고 말했다. 순서가 있었다. 그 순서를 따라가면 뭔가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그 길을 문태오가 먼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불편했다.하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이 사람은 왜 계속 너한테만 말하지.”그녀가 물었다.건우는 휴대폰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주머니에 넣었다.“내가 형의 마지막 통화 상대가 될 뻔했으니까.”“될 뻔한 거지, 된 건 아니잖아.”하나의 말은 낮았지만 날카로웠다. 건우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신우는 전화를 걸었고, 건우는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둘 사이에는 통화가 없었다. 그런데도 문태오는 그 실패한 연결을 마치 마지막 의사처럼 취급하고 있었다.“문태오 입장에서는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어.”건우가 말했다.“형이 마지막에 누구한테 손을 뻗으려 했는지. 실제로 닿았는지보다.”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경찰서 복도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봤고, 건우는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복도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그 소음은 이상하게 멀었다. 방금 전까지 회의실 안에서 정미라와 차미령이라는 두 이름이 사건의 중심으로 올라왔고, 이제 문태오가 던진 ‘목소리’라는 단어가 그 이름들을 다시 다른 방향으로 밀어내고 있었다.“녹음 파일이 있으면.”하나가 말했다.“신우 씨가 왜 그 사람을 쫓았는지 알 수 있겠네.”“그럴 가능성이 커.”“그런데 그 파일을 누가 갖고 있을까.”건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몇 가지였다. 신우가 이미 확보했을 수도 있고, 차미령 또는 정미라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CCTV 속 인물이 들고 있던 녹음기에 들어 있었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