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
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 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아니었다.
살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겪지 못한 채로 돌아온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그는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눈을 감으면 보였다.
부모님 얼굴이 비에 젖은 도로 위, 찌그러진 차 안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왜 너만 살아 있냐고.
-우리는 왜 죽어야 했냐고.그 질문이 밤마다 가슴을 파고들었다.
건우는 그걸 밀어낼 힘이 없었다. 힘을 쓰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으니까.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건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벨 소리가 집 안을 채우다가, 이내 사라졌다. 다시 울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늘 가장 늦게 도착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젖은 손으로 두드리는 것 같았다.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 그리고,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도련님… 도련님…”
건우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윤건우… 윤건우…”
강하나.
윤신우의 아내.
이제는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여자. 그리고, 윤건우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1년 전엔 그들이 함께 미래를 그렸다.
결혼을 생각했고,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웃는 소리 하나도 아까웠다. 모든 순간이. 그런데 1년 만에 눈을 떴을 때, 하나는 이미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형 옆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왼손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고로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은 혼자 회사를 떠안게 되었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동생을 대신해서 모든 걸 감당했다고 했다.그리고 그 옆에, 하나가 있었다.
형의 아내로.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받아들이는 건 달랐다. 몸 어딘가가 납덩이처럼 가라앉는 기분. 설명은 가능했지만, 감정은 따라오지 못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우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이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현관까지 가는 게 이렇게 먼 일인 줄 몰랐다.손잡이를 잡는 순간,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문을 여는 일조차 의식처럼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는 쪽으로, 한 발 내딛는 의식.문을 열었다. 비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하나가 우산도 없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물에 젖어 검게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건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여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미 알아버릴 것 같아 숨이 막혔다.“하… 나… 아니, 형수님…”
목소리가 떨렸다.
자기 귀에도 낯선 목소리였다.“대체 무슨 일이에요.”
하나의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을 삼키는 게 보였다. 몇 번이고. 비는 그녀의 어깨를 때리며 흘러내렸고, 그 물기마저 그녀를 더 작게 보이게 만들었다.“…건우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형수님이 아니라, 예전처럼.건우의 가슴이 반응했다.
그 반응이 더 참담했다.“어떡해.”
숨이 가빴다.
“신우 씨가… 신우 씨가…”
눈이 흔들렸다.
마치 한 단어만 더 말하면 모든 게 무너질 것처럼.“죽었어.”
순간, 빗소리가 멀어졌다.
세상이 잠깐 꺼진 듯했다.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말의 의미가 머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단어는 들렸는데, 문장이 되지 않았다.“네?”
천천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누가 죽어요?”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작아서, 고개를 젓는 건지 무너지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집이 엉망이었어.”
“창문이 깨져 있었고… 거실은 난장판이었어.”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신우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배에 칼이…”
말이 끊겼다.
그 다음을 말하면, 정말로 끝이 날 것 같아서. 끝이라는 단어가 현실이 될 것 같아서.건우의 머릿속에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 침대 옆에 서 있던 그 얼굴. 말없이 물을 건네고, 말없이 창문을 닫아주던 사람.이제 가족은 형밖에 없었다.
그 형이. 오늘 밤, 죽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은 너무 자연스럽게 계속 돌아가고, 그 자연스러움이 건우를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하나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턱에 서 있었다.
마치 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 자신이 가져온 소식이 완전히 현실이 될까 봐.그녀의 눈빛이 집 안을 훑었다.
젖은 현관 매트, 어둑한 거실, 닫힌 방문들. 그리고 다시 건우에게로 돌아왔다.그 눈에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겁에 질린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미 확인한 사람의 눈빛.건우는 그게 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그날 밤, 그 집에서 죽은 건 윤신우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믿음도 함께,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경찰차의 붉은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길게 번졌다. 신우의 집 앞에는 이미 노란 통제선이 둘러쳐져 있었다.건우는 그 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이 아니라,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익숙해야 할 현관이 낯설게 보였다.“가족분이십니까?”
젊은 형사가 다가왔다.
건우는 고개만 끄덕였다.“안쪽은 현장 보존 중입니다. 여기서 확인만 하셔야 합니다.”
건우는 통제선 안쪽을 바라봤다.
거실은 불이 켜져 있었다.
바닥에는 흩어진 물건들이 보였고, 소파가 밀려 있었다. 창문 하나가 깨져 있었는데, 파손된 유리 대부분이 실내 쪽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걸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거실 중앙.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천 아래의 윤곽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건우의 목이 마른 듯 굳었다.형은 저 아래에 있다.
그러나 그는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건 고작 얇은 테이프 한 줄이었지만, 그건 건너갈 수 없는 경계였다.비가 세게 내리면서 깨진 창문 틈으로 빗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현장 요원이 플라스틱 시트로 급히 막고 있었다.“사망 추정 시각은 9시 전후입니다.”
형사의 말이 들렸다.“침입 흔적은 확인됐습니다. 강도 가능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강도.
그 단어가 건우의 귓속에서 헛돌았다.
형이 강도에게 찔렸다고.그는 다시 거실을 바라봤다.
피는 이미 어둡게 말라가고 있었다.
비 냄새와 섞여 묘하게 눅진한 공기가 느껴졌다.하나는 현관 안쪽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경찰 한 명이 옆에서 진술을 받고 있었다.“귀가 시간은 정확히 언제입니까?”
“9시 반 조금 넘어서요.”목소리가 낮고 고르다. 울음이 섞여 있지 않았다.
“남편분과 최근에 다툰 일은요?”
잠시 침묵.
“없었습니다.”
짧고 단정했다.
건우는 그 대답을 들으면서도,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이 자꾸 거실 중앙으로 향했다.하얀 천 아래, 형이 누워 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았다.“유리 파손 방향은 안쪽으로 튄 흔적이 많습니다.”
현장 감식 요원이 낮게 말했다.“외부 충격인지, 내부에서 파손된 건지는 더 봐야 합니다.”
건우는 그 말을 흘려들으려 했지만,
그 문장이 머릿속 어딘가에 걸렸다.안쪽으로.
그는 천천히 시선을 창문으로 옮겼다.
비는 여전히 바깥에서 쏟아지고 있었다.“도련님.”
누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관리인이었다.“저녁에 큰 소리가 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비가 워낙 세서… 정확히는…”
말끝이 흐려졌다.
비.
모든 게 비 때문인 것처럼 정리되고 있었다.
형사가 건우에게 다가왔다.“동생분이시죠. 참고인 조사 위해서 잠시 말씀 나누셔야 합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들것이 들어왔다.하얀 천이 조심스럽게 고정됐다.
윤신우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눈은 감겨 있었다.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그 평온함이 이상했다.
마지막 순간에 겪었을 공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형은 저 얼굴로, 자신의 마지막 말을 남겼을까.건우는 묻고 싶었다.
-형, 그때 뭐라고 말했어.
하지만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시신이 통제선을 넘어 나갔다.비가 얼굴을 때렸다.
하나는 여전히 안쪽에 서 있었다. 조사를 마친 듯 형사와 몇 마디를 나누고 있었다.그녀의 눈이 잠시 건우를 향했다.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 스쳤다.아주 잠깐. 건우는 그걸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형은 죽었고, 이 집은 지금부터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 될 거라는 예감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건우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하나는 식탁 옆에 서 있었다. 편한 니트 차림에 머리는 느슨하게 묶여 있었고, 방금 물을 마시다 말았는지 컵 하나가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는 현관 쪽을 돌아보며 짧게 웃었다.“생각보다 늦었네.”그 말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문장이었는데, 건우는 이상하게 그 얼굴을 보자마자 방금까지 머릿속에서 굴리던 수많은 숫자와 파일명들이 전부 다른 결로 다가오는 걸 느꼈다. 자료 속에 적혀 있던 ‘정리’라는 단어와, 지금 조용히 서 있는 하나의 모습이 같은 세계 안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견디기 어려울 만큼 선명해졌다.하나는 컵을 내려놓으며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무슨 일 있었어?”건우는 대답하기 전에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일부러 동작을 천천히 했다. 너무 빨리 입을 열면,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그대로 흘러나올 것 같았다.“최준석 씨 만났어.”하나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컵을 놓는 동작은 끝났는데, 손이 곧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짧아서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는 순간이었지만, 지금의 건우는 그런 종류의 멈춤을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그래서?”하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묻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건우는 그 안쪽에 아주 얇은 긴장이 스며 있다는 걸 느꼈다.“자료 좀 더 봤어.”건우는 식탁 쪽으로 걸어가며 노트북 가방을 내려놨다.“이상한 부분이 많더라고.”하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어떤 부분이.”건우는 노트북을 꺼내지 않은 채, 그냥 식탁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지금은 자료를 바로 들이밀고 싶은 마음보다, 그녀가 어떤 얼굴로 이 말을 듣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흐름이.”하나는 눈을 깜빡였다.“흐름?”“돈 흐름, 승인 흐름, 정리되는 방식 같은 거.”건우는 잠깐 말을 골랐다가, 하나를 똑바로 바라봤다.“처음엔 다 따로따로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까 누가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여.”그
형이 몰랐을 리 없다.그 생각이 다시 올라왔다.아까까지만 해도 그 문장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가까웠다. 형 정도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면 이런 흐름을 아예 모를 수는 없다는 상식적인 판단.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었다. 윤신우는 이 구조를 몰랐던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흐름이 끊기지 않게 유지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그 순간 건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유지한 사람.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누군가를 직접 밀어 떨어뜨린 사람이 아니라, 떨어지도록 바닥을 닦아둔 사람.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지만,피가 어디로 흐를지는 알고 있었던 사람. 리고 그 흐름이 밖으로 새지 않게, 필요한 만큼만 열고 필요한 만큼만 막아둔 사람.건우는 고개를 들었다.앞유리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아까보다 더 두꺼워져 있었다. 와이퍼를 켜지 않은 유리창 위에서 빗물이 서로 엉기고 흩어지며 불규칙한 자국을 만들었다. 그걸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는 다시 화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엑셀 파일 하단, 승인란에 들어간 이니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YSW.윤신우.그 세 글자가 갑자기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건우는 화면을 확대했다. 서류상으로는 단순한 승인 표시였지만, 문제는 그 이니셜이 찍혀 있는 위치였다. 직접 결제나 송금이 아니라, 구조상 굳이 형이 관여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중간 단계들. 누군가 밑에서 처리하고 올리면 그냥 넘어가도 될 만한 부분들에 이상하리만치 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그건 책임감일 수도 있었다.꼼꼼함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건우 눈에는 그게 다르게 보였다.흐름을 알고 있던 사람의 표시처럼.건우는 그 파일을 저장한 뒤, 다른 폴더를 열었다. 그 안에는 계약서 초안 몇 개와 수정본, 그리고 삭제되다 만 메모 파일이 들어 있었다. 파일명은 의미를 숨기려는 것처럼 애매했고, 문장들은 중간중간 잘려 있었다. 하지만 애매하게 지운 흔적일수록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주는 법이었다.…이관 후
최준석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체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숨이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창문을 때리던 빗소리가 한층 더 거세졌다.건우는 손안의 USB를 내려다보며, 그제야 아주 또렷하게 하나의 생각을 했다.형은 정말 피해자였을까.그건 지금껏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머릿속으로조차 끝까지 밀어붙여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죽은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남겨진 사람들 안에서 너무 쉽게 피해자가 된다. 특히 그 죽음이 피로 얼룩져 있을수록,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의 얼굴보다 마지막 순간의 얼굴을 더 오래 붙잡게 된다.하지만 지금 건우는 처음으로, 형의 죽음을 슬픔이 아니라 구조로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었다.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건우는 USB를 손에 쥔 채 창밖을 바라봤다. 유리창에 번지는 도시의 불빛이 빗물 사이로 일그러져 보였다. 마치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어떤 풍경이, 이제야 비로소 형태를 드러내려는 것처럼.그날 밤, 건우는 아주 늦게서야 알았다.끝난 줄 알았던 일은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최준석과 헤어진 뒤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건우는 몇 번이나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특별한 이유가있어서라기보다, 자꾸 뭔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시각이든, 날짜든,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위치든. 방금 전까지 최준석과 마주 앉아 있었던 시간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걸, 눈에 보이는 숫자 같은 것으로라도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 같았다.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화면 위 시간은 차갑게 흘러가고 있었고, 바깥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건우 손 안에 쥔 USB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그는 시동을 걸지 않은 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앞유리 위로 빗물이 쉴 새 없이 번져내렸고, 그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은 전부 윤곽이 흐려져 있었다. 세상이 흐려진
그 말은 곧,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고, 결과도 아니고, 그저 흔적이 남지 않는 것. 누군가 다치든, 누군가 사라지든, 누군가 망가지든 겉으로만 조용하면 되는 방식.건우는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어긋나는 걸 느꼈다.“아니죠.”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최준석을 향한 말인지, 자신을 향한 말인지 건우도 분간하지 못했다.“형이 그런 식으로까지 했을 리는…”끝까지 문장을 잇지 못했다. 그럴 리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부터가 이미 그럴 리 없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형의 사고도, 형의 죽음도, 하나가 기억하지 못하는 밤도, 그리고 자기 자신이 지금 이 남자 앞에서 형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최준석은 그 미완성 문장을 굳이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건우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말을 이어갔다.“직접 손대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건우의 눈이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최준석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았다.“그런 일은 본인이 안 했어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늘 다른 사람 손을 썼습니다.”“…….”“근데 누가 움직일지, 어디까지 가야 할지는 정했죠.”그 순간 건우는,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감각을 느꼈다. 형에 대한 기억이 한꺼번에 뒤집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끔찍한 건, 지금까지는 보호처럼 보였던 몇몇 장면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어릴 적, 형은 늘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먼저 움직이던 사람이었다.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 빨리 개입했고, 건우가 보기엔 늘 정리하는 쪽이었다. 그땐 그게 든든함으로 보였다. 형은 늘 한발 앞서 있었고, 집 안에서 무언가 흔들리려 하면 가장 먼저 손을 대는 사람이었다.그런데 만약 그 손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게 아니라 통제하기 위한 손이었다면. 그 순간부터 건우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장면을 다시 봐야 했다.“그 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희미하게 번지는 동안, 건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USB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은 물건 하나를 집어 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 고작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덩어리인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단순한 파일 몇 개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건 아마, 형의 죽음 이후 자신이 붙잡고 있던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준석은 건우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할 말을 다 정해두고도, 그걸 어디까지 내놓아야 할지 마지막까지 계산하고 있는 얼굴에 가까웠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는 차분해 보였지만, 그 차분함이 편안함에서 오는 건 아니라는 정도는 건우도 알 수 있었다. 무너지는 걸 겨우 버티는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움직임이 적어진다.한참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최준석 쪽이었다.“그거, 전부 아닙니다.”건우는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방 안에 오래 남는 종류의 말이었다. 건우는 대답 대신 USB 쪽으로 눈을 한 번 내렸다가 다시 최준석을 바라봤다.“전부 아니면.”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뭐가 더 남아 있는데요.”최준석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빗소리가 잠깐 더 선명해진 사이, 그는 마른 입술을 한 번 눌렀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지금까지 보신 건… 겉입니다.”그 말은 이상하게도 건우의 신경을 건드렸다. 겉이라니. 그 안에 들어 있던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지저분했다. 자금 흐름은 말할 것도 없고, 외주 계약서와 누락된 정산 내역, 서로 다른 이름으로 돌려 막은 계좌들,사고 전후 시점과 묘하게 맞물려 있는 몇 개의 승인 기록까지. 그 파일을 처음 열었을 때 건우는 솔직히 그 정도면 이미 바닥에 닿은 줄 알았다.그런데 저 남자는 지금 그게 바닥이 아니라 표면이라고 말하고 있었
차에서 내리는 순간,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도심에서 벗어난 곳의 밤은 소리가 얇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차량 소리도 희미했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이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건우는 문을 닫으며 시선을 곧장 주차장 쪽으로 옮겼다.검은 SUV.번호는 이미 확인했다.그 차량이 이곳에 있다는 건, 최준석이 아직 이 안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었다.하나는 건우의 옆에 섰다.“어디지.”건우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봤다.리조트 본관.전체 불이 켜져 있지는 않았다.일부 층, 일부 구간만 밝게 드러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 방향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저쪽.”그가 낮게 말했다.하나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2층.복도 끝 쪽.창문 하나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다른 방들은 어둡거나, 희미하게만 켜져 있었다.서하는 뒤에서 말했다.“혼자 쓰네.”건우는 짧게 대답했다.“그럴 거다.”짧은 판단.사람이 적은 곳을 고른 이유는 명확하다.마주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다.세 사람은 동시에 움직였다.리조트 입구 쪽으로 향했다.유리문이 열리자, 안쪽 공기가 조금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로비에는 직원 한 명이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깊게 머물지 않았다. 늦은 시간, 손님이 드문 시간대였다.건우는 멈추지 않고 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하나는 그 선택을 이해했다.소리.정지 시간.불필요한 변수.계단이 더 빠르고, 더 조용했다.발걸음이 한 계단씩 올라갔다.소리는 최소한으로 줄였다.건우의 시선은 위쪽에 고정되어 있었다.2층.복도.빛이 새어나오는 방.그 위치까지의 거리.모든 것이 이미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다.2층에 도착했다.복도는 조용했다.카펫이 깔려 있어 발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벽에 걸린 조명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고, 그 사이로 길게 뻗은 복도가 끝까지 이어지고 있었다.건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빛이 있는 방향으로 하나는 옆을 따라붙었다.서하는 뒤쪽을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9:129:189:37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왜.’-형은 왜 전화했는가.-위험을 알리기 위해?-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그 생각은 섬뜩했다.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기억은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