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
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 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아니었다.
살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겪지 못한 채로 돌아온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그는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눈을 감으면 보였다.
부모님 얼굴이 비에 젖은 도로 위, 찌그러진 차 안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왜 너만 살아 있냐고.
-우리는 왜 죽어야 했냐고.그 질문이 밤마다 가슴을 파고들었다.
건우는 그걸 밀어낼 힘이 없었다. 힘을 쓰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으니까.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건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벨 소리가 집 안을 채우다가, 이내 사라졌다. 다시 울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늘 가장 늦게 도착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젖은 손으로 두드리는 것 같았다.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 그리고,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도련님… 도련님…”
건우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윤건우… 윤건우…”
강하나.
윤신우의 아내.
이제는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여자. 그리고, 윤건우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1년 전엔 그들이 함께 미래를 그렸다.
결혼을 생각했고,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웃는 소리 하나도 아까웠다. 모든 순간이. 그런데 1년 만에 눈을 떴을 때, 하나는 이미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형 옆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왼손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고로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은 혼자 회사를 떠안게 되었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동생을 대신해서 모든 걸 감당했다고 했다.그리고 그 옆에, 하나가 있었다.
형의 아내로.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받아들이는 건 달랐다. 몸 어딘가가 납덩이처럼 가라앉는 기분. 설명은 가능했지만, 감정은 따라오지 못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우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이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현관까지 가는 게 이렇게 먼 일인 줄 몰랐다.손잡이를 잡는 순간,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문을 여는 일조차 의식처럼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는 쪽으로, 한 발 내딛는 의식.문을 열었다. 비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하나가 우산도 없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물에 젖어 검게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건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여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미 알아버릴 것 같아 숨이 막혔다.“하… 나… 아니, 형수님…”
목소리가 떨렸다.
자기 귀에도 낯선 목소리였다.“대체 무슨 일이에요.”
하나의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을 삼키는 게 보였다. 몇 번이고. 비는 그녀의 어깨를 때리며 흘러내렸고, 그 물기마저 그녀를 더 작게 보이게 만들었다.“…건우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형수님이 아니라, 예전처럼.건우의 가슴이 반응했다.
그 반응이 더 참담했다.“어떡해.”
숨이 가빴다.
“신우 씨가… 신우 씨가…”
눈이 흔들렸다.
마치 한 단어만 더 말하면 모든 게 무너질 것처럼.“죽었어.”
순간, 빗소리가 멀어졌다.
세상이 잠깐 꺼진 듯했다.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말의 의미가 머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단어는 들렸는데, 문장이 되지 않았다.“네?”
천천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누가 죽어요?”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작아서, 고개를 젓는 건지 무너지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집이 엉망이었어.”
“창문이 깨져 있었고… 거실은 난장판이었어.”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신우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배에 칼이…”
말이 끊겼다.
그 다음을 말하면, 정말로 끝이 날 것 같아서. 끝이라는 단어가 현실이 될 것 같아서.건우의 머릿속에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 침대 옆에 서 있던 그 얼굴. 말없이 물을 건네고, 말없이 창문을 닫아주던 사람.이제 가족은 형밖에 없었다.
그 형이. 오늘 밤, 죽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은 너무 자연스럽게 계속 돌아가고, 그 자연스러움이 건우를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하나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턱에 서 있었다.
마치 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 자신이 가져온 소식이 완전히 현실이 될까 봐.그녀의 눈빛이 집 안을 훑었다.
젖은 현관 매트, 어둑한 거실, 닫힌 방문들. 그리고 다시 건우에게로 돌아왔다.그 눈에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겁에 질린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미 확인한 사람의 눈빛.건우는 그게 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그날 밤, 그 집에서 죽은 건 윤신우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믿음도 함께,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경찰차의 붉은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길게 번졌다. 신우의 집 앞에는 이미 노란 통제선이 둘러쳐져 있었다.건우는 그 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이 아니라,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익숙해야 할 현관이 낯설게 보였다.“가족분이십니까?”
젊은 형사가 다가왔다.
건우는 고개만 끄덕였다.“안쪽은 현장 보존 중입니다. 여기서 확인만 하셔야 합니다.”
건우는 통제선 안쪽을 바라봤다.
거실은 불이 켜져 있었다.
바닥에는 흩어진 물건들이 보였고, 소파가 밀려 있었다. 창문 하나가 깨져 있었는데, 파손된 유리 대부분이 실내 쪽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걸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거실 중앙.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천 아래의 윤곽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건우의 목이 마른 듯 굳었다.형은 저 아래에 있다.
그러나 그는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건 고작 얇은 테이프 한 줄이었지만, 그건 건너갈 수 없는 경계였다.비가 세게 내리면서 깨진 창문 틈으로 빗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현장 요원이 플라스틱 시트로 급히 막고 있었다.“사망 추정 시각은 9시 전후입니다.”
형사의 말이 들렸다.“침입 흔적은 확인됐습니다. 강도 가능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강도.
그 단어가 건우의 귓속에서 헛돌았다.
형이 강도에게 찔렸다고.그는 다시 거실을 바라봤다.
피는 이미 어둡게 말라가고 있었다.
비 냄새와 섞여 묘하게 눅진한 공기가 느껴졌다.하나는 현관 안쪽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경찰 한 명이 옆에서 진술을 받고 있었다.“귀가 시간은 정확히 언제입니까?”
“9시 반 조금 넘어서요.”목소리가 낮고 고르다. 울음이 섞여 있지 않았다.
“남편분과 최근에 다툰 일은요?”
잠시 침묵.
“없었습니다.”
짧고 단정했다.
건우는 그 대답을 들으면서도,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이 자꾸 거실 중앙으로 향했다.하얀 천 아래, 형이 누워 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았다.“유리 파손 방향은 안쪽으로 튄 흔적이 많습니다.”
현장 감식 요원이 낮게 말했다.“외부 충격인지, 내부에서 파손된 건지는 더 봐야 합니다.”
건우는 그 말을 흘려들으려 했지만,
그 문장이 머릿속 어딘가에 걸렸다.안쪽으로.
그는 천천히 시선을 창문으로 옮겼다.
비는 여전히 바깥에서 쏟아지고 있었다.“도련님.”
누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관리인이었다.“저녁에 큰 소리가 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비가 워낙 세서… 정확히는…”
말끝이 흐려졌다.
비.
모든 게 비 때문인 것처럼 정리되고 있었다.
형사가 건우에게 다가왔다.“동생분이시죠. 참고인 조사 위해서 잠시 말씀 나누셔야 합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들것이 들어왔다.하얀 천이 조심스럽게 고정됐다.
윤신우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눈은 감겨 있었다.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그 평온함이 이상했다.
마지막 순간에 겪었을 공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형은 저 얼굴로, 자신의 마지막 말을 남겼을까.건우는 묻고 싶었다.
-형, 그때 뭐라고 말했어.
하지만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시신이 통제선을 넘어 나갔다.비가 얼굴을 때렸다.
하나는 여전히 안쪽에 서 있었다. 조사를 마친 듯 형사와 몇 마디를 나누고 있었다.그녀의 눈이 잠시 건우를 향했다.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 스쳤다.아주 잠깐. 건우는 그걸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형은 죽었고, 이 집은 지금부터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 될 거라는 예감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둘 사이에 걸려 있던 간격은 그대로였지만, 그 간격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 힘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같은 자극을 받으면서도 반응을 따로 두기 위해, 서로의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눌러두는 쪽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그 반대로, 올라오는 걸 그대로 두면서도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 버티는 쪽에 가까워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지 상태처럼 보일지 몰라도, 안쪽에서는 서로 다른 두 흐름이 같은 순간을 향해 점점 속도를 맞춰가고 있었다.건우는 그걸 느끼고 있었다.서하의 호흡이 조금 더 짧아졌다는 것, 들이쉬는 타이밍이 아까보다 반 박자 정도 앞서 나간다는 것, 그리고 그 변화가 자기 호흡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까지, 전부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인식한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감정을 줄이지 않았기 때문에,올라오는 속도 자체는 그대로였고, 오히려 더 또렷해진 상태였다.서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녀는 건우를 보고 있었다. 단순히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태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끝까지 확인하려는 사람의 눈이었다. 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도 없었다. 이미 한 번 선택을 끝낸 뒤였고, 그 선택을 여기서 다시 바꿀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는 상태였다.“건우야.”그녀가 아주 낮게 불렀다.목소리는 얇게 떨렸지만,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었다.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시선을 더 깊게 고정했다.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그 흔들림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걸 그대로 보고 있었다.“지금… 좀 이상하지.”서하가 말을 이어갔다.“아까랑 다르게… 계속 당겨.”그 표현은 정확했다.감정이 올라오는 것과는 별개로, 그 감정을 행동으로 이어가게 만드는 방향성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의식적으로 눌러두고 있던 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건우는 그걸
여자가 문을 열었을 때, 안쪽에서 흘러나온 공기는 이전 방들과 분명히 달랐다.온도나 냄새 같은 물리적인 차이보다,그 안에 들어서면 바로 느껴지는 압력의 방향이 달랐다.밖에서는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른 채 발을 들여놓는 공간이었다면,이곳은 이미 알고 있는 걸 직접 겪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건우는 문턱을 넘으며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한 번 멈추면 다시 움직이기 어려워질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고,그 예감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동시에 따라붙었다.서하는 바로 뒤에서 따라 들어왔다.둘 사이의 간격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도,이 공간 안에서는 그 거리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없이 드러나는 종
이제 이곳은 더 이상 선택을 설명하는 공간이 아니라, 선을 넘으려는 사람을 확인하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여자는 돌아섰다.“이쪽으로 오시죠.”건우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서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문이 열리고, 더 안쪽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드러났다.그 복도는 아까보다 더 조용했고, 조금 더 깊었다.둘 다 알고 있었다.이건 정보를 더 얻으러 가는 게 아니라,이미 결정해버린 선택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쪽으로들어가는 길이라는 걸.복도는 길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끝이 더 멀게 느껴졌다.앞서 걸어가는
여자가 문을 열었을 때, 안쪽에서 흘러나온 공기는 이전 방들과 분명히 달랐다.온도나 냄새 같은 물리적인 차이보다,그 안에 들어서면 바로 느껴지는 압력의 방향이 달랐다.밖에서는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른 채 발을 들여놓는 공간이었다면,이곳은 이미 알고 있는 걸 직접 겪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건우는 문턱을 넘으며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한 번 멈추면 다시 움직이기 어려워질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고,그 예감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동시에 따라붙었다.서하는 바로 뒤에서 따라 들어왔다.둘 사이의 간격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도,이 공간 안에서는 그 거리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없이 드러나는 종
“다만,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이번에는 의미가 더 분명했다.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것과, 실제로 그 방향을 선택하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그녀는 이미 수없이 봐왔다는 말이었다.건우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그래서요.”그는 말을 짧게 끊지 않고 이어 붙였다.“그 끝까지 밀어붙인 경우가 있었습니까.”여자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이 질문은 단순한 정보 요청이 아니었다. 이미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전제를 깔고, 그 안에서 가능한 사례를 끄집어내려는 질문이었다. 여자는 잠깐 입을 다문 채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있었습니다.”결국 나온 대답은 짧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종류였다.건우의 눈이 아주 조금 좁혀졌다.“결과는요.”그는 바로 이어서 물었다.여자는 이번에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시선을 한 번 아래로 떨어뜨렸다가 다시 들어 올렸고, 그 사이에서 이 말을 어디까지 꺼낼지 재는 기색이 분명히 느껴졌다.“끝까지 유지된 경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은 차분했지만, 숨기지 않았다.“대부분은 중간에 포기하거나, 감당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었습니다.”그 설명은 길지 않았지만, 이미 충분했다.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서하는 그 대화를 듣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과 장치 사이를 오가다가, 다시 건우 쪽으로 돌아왔다. 아까보다 더 분명하게 긴장이 올라와 있었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려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미 선택이 끝난 사람처럼, 지금은 그 선택이 얼마나 무거운지만 확인하는 상태에 가까웠다.건우는 그걸 느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포기한 쪽이 아니라.”그는 천천히 말을 고르듯 이어갔다.“끝까지 간 쪽이요.”여자는 그 질문에 잠깐 눈을 가늘게 좁혔다.“끝까지 간다는 기준이 다릅니다.”그녀가 말했다.“어느 시점까지를 끝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건우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흔한 질문은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는 시간을 둔 뒤 입을 열었다.“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그녀는 말을 더 길게 붙이지 않았다. 설명을 늘리기보다, 결론만 남기는 쪽을 택한 느낌이었다.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국 하나가 밀려난다는 구조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였고, 차이가 있다면 속도나 방식 정도일 뿐이라는 걸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말했다.“결국 하나만 남긴다는 얘기로 들리네요.”여자는 이번에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부정하지 않는 침묵은, 때로는 긍정보다 더 분명하게 들릴 때가 있다.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서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건우야.”목소리는 낮았지만, 이전보다 조금 더 또렷했다.건우가 시선을 돌리자, 서하는 장치가 아니라 건우를 보고 있었다.“아까 했던 말, 기억하지.”그녀는 확인하듯 말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꺼낸 문장이었다.“둘 다 안 버린다고 했잖아.”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 안 공기가 다시 한 번 달라졌다.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시선이 조금 더 신중해졌다.건우는 서하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냈다.“기억해.”짧게 끊지 않고, 그대로 이어갔다.“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고.”서하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여기서도 같은 말 할 수 있어?”이 질문은 이전과 다르게 무게가 있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꺼낸 말이 아니라, 지금 보고 있는 구조 앞에서도 그 선택을 유지할 수 있느냐를 묻고 있었다.건우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여기서도 똑같아.”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상황 바뀌었다고 말 바꾸는 쪽으로는 안 간다.”서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다만 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방금 들은 말을 자기 안에서 한 번 더 굴리는 것처럼 보였다.“그럼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