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누가 그렇게 전달했어요?”
한별의 물음에 직원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차량 명단에 두 분이 같이 적혀 있어서요. 제가 잘못 알았네요.”
해경은 카드키를 받으며 정정했다.
“의상팀 공용 작업실이에요. 다른 배우들도 드나들 겁니다.”
“네. 안내 다시 하겠습니다.”
연결된 방은 그대로 쓰기로 했다. 당장 옮길 곳도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한별이 말했다.
“내 전담은 싫고, 내 옆방은 괜찮아요?”
“옆방은 말을 안 하니까요.”
“벽 얇다던데.”
“그럼 배우님이 조용히 해주세요.”
해경이 먼저 내렸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따라왔다.
아까보다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잘됐네. 내일 또 까칠하게 굴면 피곤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괜히 돌아볼 뻔했다.
다음 날, 해경은 작업실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보조가 아침을 가져오는 동안 어제 접어둔 의상을 꺼냈다. 벽 가운데 있는 연결문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
한별의 첫 촬영은 아홉 시였다.
지금은 일곱 시 사십 분.
'아직 안 왔겠지.'
해경은 거울을 보고 머리를 다시 묶었다. 목덜미의 잔머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어차피 습해서 다시 흐트러질 텐데.
그때 옆방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해경은 거울에서 한 발 떨어졌다.
노크라도 할 줄 알았는데 문은 잠잠했다.
'뭐, 꼭 인사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스팀다리미를 켰다.
전원은 들어오는데 김이 나오지 않았다. 물통을 다시 끼워도 마찬가지였다.
“왜 안 나와. 어제까진 잘했잖아.”
문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나가요.”
해경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연결문이 열렸다.
한별은 셔츠 단추를 채우며 서 있었다.
“뭘 어제까지 잘해요?”
해경은 그와 다리미를 번갈아 봤다.
“얘한테 한 말인데요.”
한별의 손이 세 번째 단추에서 멎었다.
“아.”
“배우님은 어제 차도 잘못 타셨고요.”
“그건 그만하기로 합시다.”
그가 문을 닫으려 하자 해경이 불렀다.
“잠깐만요.”
한별이 다리미를 가리켰다.
“이번에도 저거예요?”
“배우님이요.”
직접 불러놓고 그가 돌아보니 이상하게 반가웠다.
해경은 다리미를 들어 보였다.
“물통이 안 빠져요. 이것만 좀 잡아주세요.”
그가 다가오자 옅은 비누 냄새가 났다. 향수와 섞인 어제의 냄새보다 가까웠다.
'방금 씻었나.'
벌어진 셔츠 깃으로 시선이 가려는 걸 겨우 다리미에 붙였다.
“전원부터 빼요.”
해경이 플러그를 뽑자 한별이 본체를 잡았다.
“이제 해봐요.”
그녀가 물통을 당겼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을 더 주려는데 그의 손이 먼저 방향을 바꿨다.
딸깍.
너무 쉽게 빠졌다.
“여기 누르는 거네요.”
“알아요.”
“알았는데 왜 당겼어요?”
“배우님이 해보라면서요.”
한별이 웃었다. 해경은 물통을 낚아채듯 받았다.
혼자였으면 설명서를 봤을 텐데. 왜 저 사람이 앞에 있으면 아는 것도 급해지는지 모르겠다.
“수리비는 아침으로 받을게요.”
“버튼 한 번 누르고요?”
“출장비도 받아야 되는데.”
“옆방에서 세 걸음 오셨잖아요.”
한별이 제 다리를 내려다봤다.
“두 걸음이네.”
뻔뻔해서 웃음이 나왔다. 해경은 수건으로 물통을 닦는 척했다.
“보조 오면 같이 드세요.”
“내 건 있어요.”
“그럼 왜 달라고 하셨어요?”
“같이 먹자고 하면 안 먹을 것 같아서.”
손에 든 수건이 멈췄다.
한별은 대수롭지 않게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 짧은 거리를 해경은 끝까지 봤다.
'그냥 같이 먹자고 하면 되지.'
그러면 자신이 무슨 대답을 했을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탁자 위의 옷을 치우고 의자 하나를 더 당겼다.
보조가 가져온 샌드위치는 종이봉투 안에서 전부 눌려 있었다.
“죄송해요. 차에서 제가 깔고 앉았어요.”
해경이 납작한 빵 하나를 꺼냈다.
“먹기 편하겠다. 소스도 잘 배고.”
한별이 건너편에 앉으며 봉투를 들여다봤다.
“빵이 원래 이렇게 얇아요?”
“현지 방식이에요.”
해경이 태연하게 대꾸하자 보조가 물을 마시다 기침했다.
한별은 잠깐 그녀를 보더니 자기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과일과 달걀, 멀쩡한 빵이 들어 있었다.
그가 빵을 해경 쪽으로 밀었다. 해경은 얼른 눌린 샌드위치를 들었다.
“전 이거 먹을 건데요.”
“바꾸자는 건데.”
“이걸 왜요?”
“현지 방식 궁금해서.”
보조가 이번에는 대놓고 웃었다.
해경도 웃으며 빵을 바꿨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한입 베어 무는 걸 보니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
놀릴 때는 그렇게 얄미운데, 이런 건 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준다.
“맛있어요?”
“좀 더 앉았어도 됐겠는데.”
해경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한별이 씹던 걸 멈추고 그녀를 봤다.
“왜요?”
“아뇨.”
그는 다시 빵을 먹었다. 해경은 괜히 컵을 들었다.
이번엔 자신이 웃는 동안 그가 보고 있었다는 게 신경 쓰였다.
식사를 마칠 무렵 제작팀에서 변경된 촬영표를 가져왔다.
호텔 로비 장면을 빼고 해안 카페 촬영을 앞당긴다고 했다. 재하도 현장 스틸 촬영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해경은 시간을 확인하다 장면 설명에서 멈췄다.
한별과 세린의 키스 장면.
원래 귀국 후 찍기로 했던 분량이었다.
“장소 바뀌면서 이 장면도 여기서 찍기로 했어요. 의상 연결 확인 부탁드립니다.”
“네. 확인할게요.”
목소리는 평소처럼 나왔다.
그런데 건너편의 한별을 보자 조금 전 셔츠 깃에 머물렀던 시선이 떠올랐다.
'뭐야. 내가 왜.'
해경은 촬영표를 한 장 넘겼다. 이미 마지막 장이었다.
그때 문을 두드린 세린이 들어왔다.
그녀는 한별에게 대본을 내밀었다.
“오빠, 우리 이거 먼저 맞춰볼까?”
한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경은 둘 사이에 놓인 빈 의자를 빼줬다.
방금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배우가 대본을 맞추는 건 늘 보던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남은 빵을 챙겨서 다른 데로 가고 싶었다.
해경은 반쯤 남은 빵을 봉투에 넣었다. 아까와 똑같은 맛일 텐데, 더는 손이 가지 않았다.
“여기서 손 잡고, 대사 끝나면 가까이 오는 거지?”세린이 대본을 짚었다. 한별은 그녀가 표시한 부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해경은 두 사람 옆에서 의상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평소 같으면 소매가 어떻게 접히는지 봤을 것이다. 오늘은 가방 안에 뭐가 빠졌는지만 자꾸 확인했다.“실장님.”한별이 불렀다.“네?”“그거 두고 가요?”탁자에 빵 봉투가 남아 있었다.“나중에 먹으려고요.”“나중에 개미가 먼저 먹겠는데.”해경은 봉투를 챙겼다.'그래. 개미랑 먹으면 되겠네.'엉뚱한 데 심술이 났다. 한별은 잘못한 게 없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해안 카페는 촬영팀이 빌린 오전 동안만 영업을 쉬었다.난간 너머로 바다가 보였고, 흰 차양 아래로 햇빛이 잘게 들었다. 어디에 카메라를 놓아도 두 사람은 그림처럼 어울렸다.해경은 세린의 원피스 허리를 정리했다.“많이 붙어요?”세린이 물었다.“네?”“옷이요. 앉으면 배 쪽이 뜨는 것 같아서.”“아. 잠깐만요.”해경은 안쪽 고정을 풀어 조금 여유를 줬다.'정신 차려. 뭐가 붙는 줄 알았는데.'세린이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며 확인했다.“이제 괜찮아요.”한별이 옆으로 다가왔다. 해경은 그의 셔츠도 확인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다 됐어요.”“난 되게 빨리 끝나네요.”
“누가 그렇게 전달했어요?”한별의 물음에 직원이 휴대폰을 확인했다.“차량 명단에 두 분이 같이 적혀 있어서요. 제가 잘못 알았네요.”해경은 카드키를 받으며 정정했다.“의상팀 공용 작업실이에요. 다른 배우들도 드나들 겁니다.”“네. 안내 다시 하겠습니다.”연결된 방은 그대로 쓰기로 했다. 당장 옮길 곳도 없었다.엘리베이터에 오르자 한별이 말했다.“내 전담은 싫고, 내 옆방은 괜찮아요?”“옆방은 말을 안 하니까요.”“벽 얇다던데.”“그럼 배우님이 조용히 해주세요.”해경이 먼저 내렸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따라왔다.아까보다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잘됐네. 내일 또 까칠하게 굴면 피곤하니까.'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괜히 돌아볼 뻔했다.다음 날, 해경은 작업실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보조가 아침을 가져오는 동안 어제 접어둔 의상을 꺼냈다. 벽 가운데 있는 연결문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한별의 첫 촬영은 아홉 시였다.지금은 일곱 시 사십 분.'아직 안 왔겠지.'해경은 거울을 보고 머리를 다시 묶었다. 목덜미의 잔머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어차피 습해서 다시 흐트러질 텐데.그때 옆방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해경은 거울에서 한 발 떨어졌다.노크라도 할 줄 알았는데 문은 잠잠했다.'뭐, 꼭 인사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그녀는 스팀다리미를 켰다.전원은 들어오는데 김이 나오지 않았다. 물통을 다
“아뇨. 못 들었어요.”한별이 답했다.해경은 준비실 문을 닫았다. 세린은 안쪽에서 자기 옷을 챙기고 있었다.“그럼 이제 들으셨으니까 배우님도 조심해주세요.”“승재한테 내가 얘기할게요.”“저한테 잘해주라고 하시라는 뜻 아니에요.”전화 너머에서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나 때문에 실장님한테 그런 말 한 거잖아요.”“같이 나갔는데 저만 말 들은 게 싫어요. 배우님이 먼저 나가자고 하셨고요.”말하고 나니 꼭 따라가기 싫었는데 끌려간 사람 같았다.해경은 잠깐 말을 멈췄다.“물론 저도 가고 싶어서 갔어요.”그 대목에서 목소리가 작아진 게 더 짜증 났다.한별이 물었다.“나랑요?”“지금 그게 중요해요?”“그것도 중요하죠.”해경은 휴대폰을 귀에서 잠깐 뗐다가 다시 댔다.'끝까지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지.'“다시 말씀드릴게요. 주의사항 있으면 두 사람한테 똑같이 알려주세요.”“알았어요.”“그리고 제 차는 제가 정해요.”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그건 내 마음대로 한 거 맞아요.”예상하지 못한 인정이었다. 해경은 다음 말을 준비하다 멈췄다.“짐 챙겨요. 내가 승재랑 얘기할게요.”통화가 끝났다.세린은 휴대폰에서 눈을 들지 않은 채 물었다.“저 이
“괜찮으니까 나왔죠.”한별의 대답은 빨랐다.해경은 그의 뒤로 멀어지는 관광객들을 봤다.“저분들이 사진 올리면요?”“내 사진인데요.”“같이 다닌 사람 얘기도 하실 수 있잖아요.”“그럼 같이 다녔다고 하면 되죠.”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설명하기 어려웠다.한별에게는 평소처럼 사진 한 장 찍어준 일이었다. 해경은 방금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허둥댔다.“배우님은 익숙하시겠지만 저는 처음이라서요.”그제야 한별이 걸음을 멈췄다.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승재였다.“어. 아직 근처야.”몇 마디 듣던 한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어디까지 들어왔는데?”해경도 휴대폰을 꺼냈다. 촬영팀 단체 대화방에 공지가 올라오고 있었다.〈숙소 로비에 외부 방문객이 몰리고 있습니다. 복귀 시 정문 이용을 피해주시고, 제작팀 연락을 기다려주세요.〉'벌써?'조금 전 만난 여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한별이 통화를 끝냈다.“승재가 데리러 온대요.”“저희 때문에 호텔까지 온 거예요?”“아직 몰라요. 여기서 기다려요.”그는 해변 안쪽을 가리켰다. 해경은 따라 움직이면서도 단체 대화방을 놓지 못했다.승재는 차를 세우자마자 뒷문을 열었다.승재는 한별이 타는 걸 확인하고 주변을 살폈다.“두 분 다 타세요. 숙소 바로 못 들어가요.”
36화 알아보면 어떡해요해경은 서진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한별 배우와 상관없는 사진.'세린의 원피스를 보고 연락했다면서 왜 한별을 빼달라는 걸까.방에 돌아와 사진 폴더를 열었다. 예전에 맡았던 촬영도 있었고, 배우 없이 옷만 찍은 사진도 있었다.해경은 보내기 전에 먼저 물었다.〈어떤 부분을 더 보고 싶으신 걸까요?〉답은 금방 왔다.〈특정 배우에게 잘 어울리는 것 말고, 다른 체형이나 분위기도 어떻게 잡는지 보려고요. 세린 씨 사진처럼요.〉괜히 혼자 어려운 시험지를 받은 기분이었다.해경은 사진 세 장에 자신이 맡은 범위를 적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도 다른 사람이 고른 옷이면 뺐다.전송을 누르고 나서야 침대에 누웠다.휴대폰 위로 한별의 메시지가 떴다.〈내일 끝나면 연락해요. 먼저 안 갈게요.〉해경은 답을 쓰다가 지웠다.〈옷 반납부터 하고요.〉그가 바로 답했다.〈옷 다음 차례로 기다릴게요.〉'이제 제 순서도 아네.'해경은 웃으며 화면을 껐다. 다시 켜서 알람을 맞출 때도 그 문장이 먼저 보였다.다음 날 촬영은 해가 지기 전에 끝났다.세린은 해경이 준비한 낮은 구두를 신고 마지막 장면을 마쳤다. 반납하면서 발이 훨씬 편했다고 말했다.해경도 고맙다고 답했다. 오늘은 쓸데없이 눈치를 보지 않았다.그런데 옷을 다 정리하고 나자 거울 앞에서 시간이 걸렸다.
“닦고 가세요.”해경은 그의 발끝을 가리켰다.“이쪽도요?”“제가 반짝이게 해드릴게요.”한별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반대쪽 신발을 벗었다. 해경은 받은 신발을 천으로 문질렀다. 구두약도 없으니 아까보다 반짝여질 리 없었다.'뭐 하는 거야, 류해경.'“그렇게 잡고 있으면 팔 아파요.”“괜찮아요.”“종일 서 있었잖아요.”그 말을 듣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배우님도 종일 서 계셨는데요.”“나는 중간에 앉았죠. 실장님이 신발 닦아주실 때.”“지금도 앉아 계시잖아요.”“그래서 미안해하는 중이에요.”한별이 의자 옆의 낮은 탁자를 밀어주었다. 해경은 그 위에 신발을 올렸다.어색했던 침묵이 조금 누그러졌다.“제가 오늘 좀 피했어요.”해경이 먼저 말했다. 한별의 무릎이 멈췄다.“왜요?”“생각할 게 있어서요. 배우님이 잘못하신 건 아니에요.”세린의 이야기를 대신 전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할 필요도 없었다.“무슨 생각인데요?”“아직 정리가 안 됐어요.”이 말은 조금 힘들었다.한별은 그녀가 내려놓는 신발을 받아 신었다.“그럼 정리하고 얘기해요.”“뭘 얘기할지도 모르시면서요.”“그러니까 들어봐야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