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36화 알아보면 어떡해요
해경은 서진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한별 배우와 상관없는 사진.'
세린의 원피스를 보고 연락했다면서 왜 한별을 빼달라는 걸까.
방에 돌아와 사진 폴더를 열었다. 예전에 맡았던 촬영도 있었고, 배우 없이 옷만 찍은 사진도 있었다.
해경은 보내기 전에 먼저 물었다.
〈어떤 부분을 더 보고 싶으신 걸까요?〉
답은 금방 왔다.
〈특정 배우에게 잘 어울리는 것 말고, 다른 체형이나 분위기도 어떻게 잡는지 보려고요. 세린 씨 사진처럼요.〉
괜히 혼자 어려운 시험지를 받은 기분이었다.
해경은 사진 세 장에 자신이 맡은 범위를 적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도 다른 사람이 고른 옷이면 뺐다.
전송을 누르고 나서야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 위로 한별의 메시지가 떴다.
〈내일 끝나면 연락해요. 먼저 안 갈게요.〉
해경은 답을 쓰다가 지웠다.
〈옷 반납부터 하고요.〉
그가 바로 답했다.
〈옷 다음 차례로 기다릴게요.〉
'이제 제 순서도 아네.'
해경은 웃으며 화면을 껐다. 다시 켜서 알람을 맞출 때도 그 문장이 먼저 보였다.
다음 날 촬영은 해가 지기 전에 끝났다.
세린은 해경이 준비한 낮은 구두를 신고 마지막 장면을 마쳤다. 반납하면서 발이 훨씬 편했다고 말했다.
해경도 고맙다고 답했다. 오늘은 쓸데없이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옷을 다 정리하고 나자 거울 앞에서 시간이 걸렸다.
립을 바르고, 너무 진한 것 같아 휴지로 눌렀다.
'과자 사러 가는데 뭘 이렇게 해.'
결국 방금 지운 색을 조금 더 발랐다.
한별은 로비 기둥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에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옷이 오래 걸리네요.”
해경은 입술을 안으로 말려다 참았다.
“물건이 많아서요.”
한별이 그녀를 봤다. 립을 고친 걸 알아볼까 봐 먼저 걸었다.
그가 따라오며 물었다.
“아까랑 다른데.”
“뭐가요?”
“가방. 오늘은 작은 거네요.”
'누가 입술이라고 했어?'
해경은 가방 끈을 고쳐 멨다.
“퇴근했으니까요. 오늘 단추 떨어져도 안 달아드려요.”
“안 떨어뜨릴게요.”
그가 셔츠 단추를 확인하는 바람에 해경은 결국 웃었다.
시장은 저녁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과자 가게는 그제 세린과 갔던 골목 안쪽이었다. 해경이 길을 기억하고 있어 금방 찾았다.
한별은 시식을 한 번 하고 세 봉지를 샀다.
끝이었다.
해경은 그가 봉투를 받는 동안 다음 골목을 봤다. 불을 켜는 가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더 살 거 없으세요?”
“있는데요.”
“뭔데요?”
“실장님이 과자만 사자고 해서.”
한별은 봉투 손잡이를 손가락에 걸었다. 얄미울 만큼 느긋했다.
해경은 가게 옆 진열대의 머리끈을 집었다.
“저도 살 거 있어요.”
“갑자기?”
“원래 필요했어요.”
사실 가방 안에 두 개 있었다.
한별이 옆으로 와서 머리끈을 봤다. 큰 꽃 장식이 달린 분홍색이었다.
“그걸요?”
“왜요. 이상해요?”
“아뇨. 내일 하고 와요.”
못 할 줄 알고 저러는 게 분명했다.
해경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머리를 모아 묶었다. 꽃이 귀 옆에서 손바닥만 하게 피었다.
“됐어요?”
한별이 모자챙을 조금 올렸다.
대답을 기다리던 해경은 자꾸 꽃을 만지게 됐다.
'너무 큰가. 작은 걸 살걸.'
“그렇게 걸어봐요.”
“왜요?”
그가 과자 봉투를 내밀었다.
“이제 사람들이 나 말고 실장님 볼 것 같아서.”
해경은 봉투로 그의 팔을 쳤다.
조금 걷자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해경은 난간 쪽에서 머리끈을 풀었다. 머리가 당겼다.
한별이 뒤늦게 따라왔다.
“왜 풀어요?”
“무거워요.”
“잘 어울리는데.”
손에 든 꽃이 갑자기 더 커 보였다.
“아까는 사람들 쳐다본다면서요.”
“그것도 맞고.”
해경은 머리끈을 가방 안에 넣었다. 다시 묶기엔 그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바뀐 게 너무 티 날 것 같았다.
'칭찬을 꼭 늦게 해.'
계단 아래에서는 아이 둘이 비눗방울을 불고 있었다. 해경이 내려가자 커다란 방울 하나가 앞에서 터졌다.
하나는 한별의 모자챙에 붙었다.
그가 멈춰 섰다. 아이가 웃으며 더 큰 것을 불었다.
한별은 피하려다가 해경 뒤로 움직였다.
“저를 방패로 쓰세요?”
“실장님 쪽은 안 오잖아요.”
말이 끝나자마자 비눗방울이 두 사람 사이로 쏟아졌다.
해경이 웃으며 한쪽으로 피했다. 한별도 같은 쪽으로 움직여 어깨가 부딪쳤다.
그가 해경의 팔꿈치를 받쳤다.
“거긴 계단.”
해경은 발뒤꿈치를 안쪽으로 당겼다. 그제야 아래쪽 단이 보였다.
“알았어요.”
“천천히 가요. 나보다 잘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가 먼저 아래로 내려가 자리를 비켜줬다.
해경은 마지막 두 칸을 내려갔다. 손을 잡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잠깐 잡았다가, 바닥에 닿자 놓았다.
손끝에 남은 감각을 없애려 가방 끈을 쥐었다.
해변 쪽 벤치에는 관광객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여자가 한별을 보더니 옆 사람에게 무언가 말했다. 휴대폰을 들고 이쪽을 다시 봤다.
해경은 걸음을 늦췄다.
“알아보신 것 같은데요.”
“그런가 봐요.”
그는 모자챙을 내리지 않았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사진을 부탁했다.
한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 해경 뒤로 숨던 얼굴이 달라졌다.
해경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빠졌다.
사진을 찍던 일행이 해경에게도 손짓했다. 같이 서라는 뜻이었다.
“아, 저는…….”
여자가 한별을 가리키고 해경을 가리켰다.
“Girlfriend?”
해경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스태프예요.”
한국어로 답하고서야 실수한 걸 알았다. 다시 영어로 설명할 말을 찾는데 한별이 먼저 해경을 봤다.
“퇴근했다면서요.”
그녀의 가방 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별은 관광객에게 정중하게 무언가 설명했다. 사람들은 웃으며 인사하고 돌아갔다.
해경은 그들이 멀어진 다음에야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같이 놀러 나온 사람이라고요.”
그가 다시 해변 쪽으로 걸었다.
해경은 따라가려다 멈췄다.
“배우님.”
한별이 돌아봤다.
“저랑 나온 거, 누가 알아도 괜찮으세요?”
“여기서 손 잡고, 대사 끝나면 가까이 오는 거지?”세린이 대본을 짚었다. 한별은 그녀가 표시한 부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해경은 두 사람 옆에서 의상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평소 같으면 소매가 어떻게 접히는지 봤을 것이다. 오늘은 가방 안에 뭐가 빠졌는지만 자꾸 확인했다.“실장님.”한별이 불렀다.“네?”“그거 두고 가요?”탁자에 빵 봉투가 남아 있었다.“나중에 먹으려고요.”“나중에 개미가 먼저 먹겠는데.”해경은 봉투를 챙겼다.'그래. 개미랑 먹으면 되겠네.'엉뚱한 데 심술이 났다. 한별은 잘못한 게 없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해안 카페는 촬영팀이 빌린 오전 동안만 영업을 쉬었다.난간 너머로 바다가 보였고, 흰 차양 아래로 햇빛이 잘게 들었다. 어디에 카메라를 놓아도 두 사람은 그림처럼 어울렸다.해경은 세린의 원피스 허리를 정리했다.“많이 붙어요?”세린이 물었다.“네?”“옷이요. 앉으면 배 쪽이 뜨는 것 같아서.”“아. 잠깐만요.”해경은 안쪽 고정을 풀어 조금 여유를 줬다.'정신 차려. 뭐가 붙는 줄 알았는데.'세린이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며 확인했다.“이제 괜찮아요.”한별이 옆으로 다가왔다. 해경은 그의 셔츠도 확인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다 됐어요.”“난 되게 빨리 끝나네요.”
“누가 그렇게 전달했어요?”한별의 물음에 직원이 휴대폰을 확인했다.“차량 명단에 두 분이 같이 적혀 있어서요. 제가 잘못 알았네요.”해경은 카드키를 받으며 정정했다.“의상팀 공용 작업실이에요. 다른 배우들도 드나들 겁니다.”“네. 안내 다시 하겠습니다.”연결된 방은 그대로 쓰기로 했다. 당장 옮길 곳도 없었다.엘리베이터에 오르자 한별이 말했다.“내 전담은 싫고, 내 옆방은 괜찮아요?”“옆방은 말을 안 하니까요.”“벽 얇다던데.”“그럼 배우님이 조용히 해주세요.”해경이 먼저 내렸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따라왔다.아까보다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잘됐네. 내일 또 까칠하게 굴면 피곤하니까.'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괜히 돌아볼 뻔했다.다음 날, 해경은 작업실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보조가 아침을 가져오는 동안 어제 접어둔 의상을 꺼냈다. 벽 가운데 있는 연결문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한별의 첫 촬영은 아홉 시였다.지금은 일곱 시 사십 분.'아직 안 왔겠지.'해경은 거울을 보고 머리를 다시 묶었다. 목덜미의 잔머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어차피 습해서 다시 흐트러질 텐데.그때 옆방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해경은 거울에서 한 발 떨어졌다.노크라도 할 줄 알았는데 문은 잠잠했다.'뭐, 꼭 인사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그녀는 스팀다리미를 켰다.전원은 들어오는데 김이 나오지 않았다. 물통을 다
“아뇨. 못 들었어요.”한별이 답했다.해경은 준비실 문을 닫았다. 세린은 안쪽에서 자기 옷을 챙기고 있었다.“그럼 이제 들으셨으니까 배우님도 조심해주세요.”“승재한테 내가 얘기할게요.”“저한테 잘해주라고 하시라는 뜻 아니에요.”전화 너머에서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나 때문에 실장님한테 그런 말 한 거잖아요.”“같이 나갔는데 저만 말 들은 게 싫어요. 배우님이 먼저 나가자고 하셨고요.”말하고 나니 꼭 따라가기 싫었는데 끌려간 사람 같았다.해경은 잠깐 말을 멈췄다.“물론 저도 가고 싶어서 갔어요.”그 대목에서 목소리가 작아진 게 더 짜증 났다.한별이 물었다.“나랑요?”“지금 그게 중요해요?”“그것도 중요하죠.”해경은 휴대폰을 귀에서 잠깐 뗐다가 다시 댔다.'끝까지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지.'“다시 말씀드릴게요. 주의사항 있으면 두 사람한테 똑같이 알려주세요.”“알았어요.”“그리고 제 차는 제가 정해요.”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그건 내 마음대로 한 거 맞아요.”예상하지 못한 인정이었다. 해경은 다음 말을 준비하다 멈췄다.“짐 챙겨요. 내가 승재랑 얘기할게요.”통화가 끝났다.세린은 휴대폰에서 눈을 들지 않은 채 물었다.“저 이
“괜찮으니까 나왔죠.”한별의 대답은 빨랐다.해경은 그의 뒤로 멀어지는 관광객들을 봤다.“저분들이 사진 올리면요?”“내 사진인데요.”“같이 다닌 사람 얘기도 하실 수 있잖아요.”“그럼 같이 다녔다고 하면 되죠.”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설명하기 어려웠다.한별에게는 평소처럼 사진 한 장 찍어준 일이었다. 해경은 방금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허둥댔다.“배우님은 익숙하시겠지만 저는 처음이라서요.”그제야 한별이 걸음을 멈췄다.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승재였다.“어. 아직 근처야.”몇 마디 듣던 한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어디까지 들어왔는데?”해경도 휴대폰을 꺼냈다. 촬영팀 단체 대화방에 공지가 올라오고 있었다.〈숙소 로비에 외부 방문객이 몰리고 있습니다. 복귀 시 정문 이용을 피해주시고, 제작팀 연락을 기다려주세요.〉'벌써?'조금 전 만난 여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한별이 통화를 끝냈다.“승재가 데리러 온대요.”“저희 때문에 호텔까지 온 거예요?”“아직 몰라요. 여기서 기다려요.”그는 해변 안쪽을 가리켰다. 해경은 따라 움직이면서도 단체 대화방을 놓지 못했다.승재는 차를 세우자마자 뒷문을 열었다.승재는 한별이 타는 걸 확인하고 주변을 살폈다.“두 분 다 타세요. 숙소 바로 못 들어가요.”
36화 알아보면 어떡해요해경은 서진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한별 배우와 상관없는 사진.'세린의 원피스를 보고 연락했다면서 왜 한별을 빼달라는 걸까.방에 돌아와 사진 폴더를 열었다. 예전에 맡았던 촬영도 있었고, 배우 없이 옷만 찍은 사진도 있었다.해경은 보내기 전에 먼저 물었다.〈어떤 부분을 더 보고 싶으신 걸까요?〉답은 금방 왔다.〈특정 배우에게 잘 어울리는 것 말고, 다른 체형이나 분위기도 어떻게 잡는지 보려고요. 세린 씨 사진처럼요.〉괜히 혼자 어려운 시험지를 받은 기분이었다.해경은 사진 세 장에 자신이 맡은 범위를 적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도 다른 사람이 고른 옷이면 뺐다.전송을 누르고 나서야 침대에 누웠다.휴대폰 위로 한별의 메시지가 떴다.〈내일 끝나면 연락해요. 먼저 안 갈게요.〉해경은 답을 쓰다가 지웠다.〈옷 반납부터 하고요.〉그가 바로 답했다.〈옷 다음 차례로 기다릴게요.〉'이제 제 순서도 아네.'해경은 웃으며 화면을 껐다. 다시 켜서 알람을 맞출 때도 그 문장이 먼저 보였다.다음 날 촬영은 해가 지기 전에 끝났다.세린은 해경이 준비한 낮은 구두를 신고 마지막 장면을 마쳤다. 반납하면서 발이 훨씬 편했다고 말했다.해경도 고맙다고 답했다. 오늘은 쓸데없이 눈치를 보지 않았다.그런데 옷을 다 정리하고 나자 거울 앞에서 시간이 걸렸다.
“닦고 가세요.”해경은 그의 발끝을 가리켰다.“이쪽도요?”“제가 반짝이게 해드릴게요.”한별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반대쪽 신발을 벗었다. 해경은 받은 신발을 천으로 문질렀다. 구두약도 없으니 아까보다 반짝여질 리 없었다.'뭐 하는 거야, 류해경.'“그렇게 잡고 있으면 팔 아파요.”“괜찮아요.”“종일 서 있었잖아요.”그 말을 듣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배우님도 종일 서 계셨는데요.”“나는 중간에 앉았죠. 실장님이 신발 닦아주실 때.”“지금도 앉아 계시잖아요.”“그래서 미안해하는 중이에요.”한별이 의자 옆의 낮은 탁자를 밀어주었다. 해경은 그 위에 신발을 올렸다.어색했던 침묵이 조금 누그러졌다.“제가 오늘 좀 피했어요.”해경이 먼저 말했다. 한별의 무릎이 멈췄다.“왜요?”“생각할 게 있어서요. 배우님이 잘못하신 건 아니에요.”세린의 이야기를 대신 전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할 필요도 없었다.“무슨 생각인데요?”“아직 정리가 안 됐어요.”이 말은 조금 힘들었다.한별은 그녀가 내려놓는 신발을 받아 신었다.“그럼 정리하고 얘기해요.”“뭘 얘기할지도 모르시면서요.”“그러니까 들어봐야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