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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2-26 17:19:51

“모실 아이를 보내었는데, 어찌 저를 찾으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선 하륜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네 놈의 집에서 네 놈을 찾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

“쓸모가... 없으셨습니까.”

낮게 깔리는 하륜의 음성에는 묘한 박동이 섞여 있었다. 연호는 입술 끝을 비스듬히 올리며 답했다.

“쓸모라…, 누구든 와서 대체 할 수 있는 거라면 없다고 봐야겠지.”

하륜이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극진한 태도였으나, 연호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사냥감을 살피는 맹수처럼 예리했다.

“두통은 좀 어떠십니까.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군요. 땀도 멎으시고.”

“그러고 보니 기분이 한결 낫군.”

연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독하게 머리를 짓누르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니, 가벼워진 것은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팔의 통증조차 안개 너머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 풀떼기가 효과가 있긴 한가보군.’

조금 전 미옥이 두고 간 거친 잎사귀에서 나던 쌉싸름한 향기가 코끝에 남은 듯했다. 연호는 하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물었다.

“그 아이, 어디서 구했지?”

하륜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는 듯, 그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미옥이 말입니까. 제 양부가 북원 평정 때 데려온 아이입니다. 어미 잃은 짐승을 거두는 게 그 노인의 취미였지요.”

“북원이라… 어쩐지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더군. 황갈색 눈이라니, 타오르는 불을 가둔 것 같지 않으냐.”

연호의 시선이 하륜의 얼굴을 훑었다. 하륜은 미소를 잃지 않았으나, 소매 안으로 감춘 손가락이 단단히 말려 올라갔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미옥에 대한 감상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비천한 노비일 뿐입니다. 인물이 아깝다 한들 환관의 집에서 부리는 것 외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용이라… 글쎄. 내가 보기엔 그 아이, 이 집에 있기엔 지나치게 영민해 보이던데.”

연호가 몸을 일으켜 하륜에게 바짝 다가갔다. 부상당한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위압적인 기운이 하륜을 덮쳤다.

“하 상시, 네 놈이 어째서 그 아이를 노비로 묶어두었는지 궁금해지는군. 혹여… 남들에게 보여주기 아까워 숨겨둔 네 ‘정인’이라도 되는 건가?”

순간, 하륜의 눈에 서늘한 독기가 스쳤다. 하지만 이내 유연하게 고개를 숙이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폐하, 농이 지나치십니다. 저는 뿌리가 잘려 나간 환관입니다. 정인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랑이 사이, 이미 존재하지 않아야 할 그곳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을 억눌렀다.

“노비는 배만 채워주면 주인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곁에 둔 것뿐입니다. 폐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보다 통제하기 쉬운 게 짐승의 허기라는 것을.”

대답은 빈틈이 없었으나, 연호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미세한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침상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더 하문하실 것이 없으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부자리를 갈아줄 아이를 새로 보내지요.”

“아니. 미옥이를 다시 들여보내라.”

하륜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방금 쓸모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마음이 바뀌었다. 그 아이의 손길이 제법… 달더군.”

연호가 하륜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환궁 전까지 내 곁에 두겠다. 네 성의를 봐서, 내가 좀 써보지.”

연호의 선전포고와 같은 한마디가 허공을 갈랐다. 하륜은 대답 대신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완벽한 충복의 가면을 쓴 후였다.

별채의 육중한 문이 닫히고 하륜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마당 끝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미옥은 그의 기색에 어깨를 움츠렸다. 방금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었으나,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기운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가온 하륜의 얼굴을 본 미옥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시 들어가 보아라. 널 찾으신다.”

조금 전, 자신을 부르러 왔을 때는 당장이라도 목을 칠 것처럼 서늘하던 눈빛이 지금은 흡사 자애로운 부처와 같았다. 그 급격한 변화가 오히려 소름 끼치도록 기이했다.

“분명 절 싫어하시는 것 같았는데….”

미옥은 제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어쩐지 다시 그 방 안으로 발을 들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안에는 서슬 퍼런 칼날 같은 사내가, 밖에는 속을 알 수 없는 뱀 같은 상전이 버티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거야 네가 이부자리를 새것으로 깔지 않았기 때문이지.”

이어지는 하륜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그녀는 번쩍 눈을 떴다.

“네 할 일을 못했느니 내 질책한 것이 아니냐.”

“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미옥은 그제야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책망했다.

‘그래서 내 할 일을 다 했느냐고 물으셨던 거야. 바보같이. 귀한 손님을 모시면서 요 밑 깔 생각도 못 하다니, 장형이 아니라 목숨을 거두신대도 할 말이 없어.’

“이런 일이 죽을죄라면 이 집안에 살아남을 노비가 몇이나 되겠느냐. 내 노 씨에게 갈아입을 옷과 이불을 준비해놓으라 일렀으니 어서 가보거라. 이번엔 실수하지 말고.”

하륜이 미옥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이내 허공에서 멈추고는 이내 거두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미옥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부리나케 안채 쪽으로 달렸다.

‘처음 뵈었을 때도 이마에 땀이 흥건하셨는데, 옷 갈아입혀 드릴 생각조차 못 하다니. 노비로 태어나서 제 밥값도 못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미옥아!’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별채 근처로 돌아오니, 노 씨가 커다란 짐 보따리를 든 채 삐딱하게 서 있었다.

“어서 주세요, 아저씨.”

미옥이 숨을 헐떡이며 보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노 씨가 보따리를 뒤로 쓱 빼며 비아냥거렸다.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구나? 방금 그 눈빛 봤냐? 널 아주 잡아먹을 듯이 보시더만.”

“예? 그게 무슨….”

“너무 들뜨지 마라. 저 지체 높으신 양반이 설마 너 같은 걸 데려가겠냐? 잠깐 재미나 보려는 거지. 정 갈 곳 없으면 내가 거둬줄 테니까 너무 상심 말고….”

노 씨의 끈적한 시선이 미옥의 얼굴에 머물렀다. 비릿하고 불쾌한 욕망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불이랑 옷가지나 얼른 내주세요.”

미옥은 매몰차게 노씨의 말을 끊으며 빼앗다시피 보따리를 잡아당겼다.

“개들도 의리는 있어요.”

“뭐, 뭐야?”

노씨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너 지금 내가 개만도 못하다는 거냐?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미옥이 냉큼 방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분한 듯 씩씩거리며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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