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경애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고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리며 말했다. "세상에! 아가씨, 이 아이 말이에요. 정말 아가씨와 전 대표님의 아이처럼 생겼어요. 이 눈, 코, 입술... 정말 두 사람을 골고루 섞어놓은 것 같다니까요!"장소월은 눈을 내리뜨리고 신경 쓰지 않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에요. 이 아이가 정말 저와 닮았다면... 그건 그냥... 우연일 뿐이겠죠."장소월 역시 처음엔 너무나도 의아했다.요즘 복스럽게 살집이 오른 아이를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너와 얼마나 닮았는지 봐. 이 아이는 네 아이야."장소월은 자신이 임신할 수 없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다. 또한... 그녀는 종래로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때문에 이 아이가 아무리 그녀와 전연우를 닮았다고 해도, 그건 그저 우연일 뿐이다.세상엔 혈연관계는 없지만 외모가 비슷한 사람들은 일정 확률로 존재한다.아마도... 이 아이는 하늘이 특별히 그녀에게 내려준 선물일 것이다.그때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내려온 전연우의 귀에 그 말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노란색 돈 봉투가 은경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너무나... 너무나... 두껍다."약을 먹이는 일은 도우미한테 맡기고 넌 일단 밥부터 먹어." 전연우가 편안한 잠옷 차림으로 걸어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건넸다.은경애는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표님, 이번 달 월급은 이미 주셨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은 돈 봉투에서 떠나지 않았다."보너스예요."은경애는 곧장 봉투를 낚아챘다. "세상에, 고마워요... 대표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착한 사람은 분명 편히 호강하며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 그녀의 눈은 계산기와도 같아 단번에 봉투가 얼마나 두꺼운지, 돈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어떠한 형용사로도 이 행복한 기분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백... 백... 백만 원?!
그날 밤에도, 장소월은 전연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어둠이 내린 깊은 밤, 별장 방 안에 희미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창문에 뜨겁게 얽혀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고, 그들의 거친 숨소리는 복도를 타고 흘러나가고 있었다...부드러운 카펫 위에는 전연우가 찢어버린 실크 잠옷 조각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고, 침대에 엎드려 누운 장소월의 등 뒤에는 참혹한 흔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텅 빈 고급 와인 병이 바닥에서 뒹굴었다. 구멍에서 떨어져 내리는 마지막 한 방울의 와인이 보석같이 맑은 색조를 내뿜고 있었다...알코올과 음양이 교란된 냄새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새벽빛이 하늘가를 비추기 시작할 때에야 장소월은 비로소 잠이 들었다.깨어나 보니... 오후 세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본래 엉망이었던 방은 어느새 말끔히 청소되어 있었고, 그녀의 몸에는 깨끗한 잠옷이 입혀져 있었다. 손을 뻗어 다리 사이를 만져보니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다만 몸 전체가 쑤시고 아파 손조차 들어 올릴 수 없었다...어젯밤, 그는 정말이지 욕망에 미쳐버린 사람 같았다.장소월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침대 옆 서랍에서 흰색 병을 꺼내 약 몇 알을 입에 털어 넣은 뒤 물을 마셨다.그러고는 침대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장소월이 희미한 정신으로 반쯤 깨어있을 때, 전연우가 아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그녀가 이불을 들어 올리자, 그는 아이를 침대에 던져버렸다. "전연우, 이렇게 던지면 어떻게 해. 어린아이잖아."별이는 갓 생긴 이 두 개를 드러내고 입을 삐죽거리며 장소월 옆으로 기어왔다. 그녀는 급히 아이를 안아 들었다.전연우가 어두운 색의 캐주얼 잠옷을 벗자 남성미가 듬뿍 배어있는 근육질의 상체가 드러났다. 전연우는 평소엔 왜소하게 말라보이지만 옷을 벗으면 잔 근육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어떤 세계적인 남자 모델에도 뒤지지 않는 몸매였다.전연우는 속옷까지 깡그리 벗어 바닥에 마구 던져버리고는 알몸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순간 장소월은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때 기성은과 상의를 마친 전연우가 아래로 내려왔다.그는 장소월의 옆에 앉아 채 먹지 않은 대추 죽을 보고 말했다. "왜 그래, 맛이 없어?""왜... 네 호적에 옮기지 않고 내게 떠넘기는 거야?"전연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어? 누구의 호적에 있든 별이는 우리의 아이야!"절대로 그렇지 않다!"완전히 달라. 별이는..." 장소월은 하려던 말을 삼켜버리고 전연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아이를 은경애에게 안겨주고 전연우에게 말했다. "그만... 됐어! 나와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했잖아. 난 옷 갈아입으러 갈게.""기다려!"장소월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전연우는 성큼성큼 장소월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계단 위에서 또다시 싸우기 시작했다.은경애는 눈치껏 아이를 안고 자리를 떴다...이 두 사람의 말다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그래! 그렇게 생각했어.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고, 늘 새로운 것만 추구해. 모든 사람은 다 그래. 강만옥, 인시윤, 송시아...""전연우! 아직도 여자가 부족해?""네 아이를 키워줄 여자는 밖에 줄 서 있잖아... 왜 하필 나한테 떠안으라고 강요하는 거야?""넌 항상 내 의견 따윈 묻지 않았어. 이젠 마음대로 별이를 내 호적에까지 올렸어!""어느 날, 네가 날 차버리면, 난 혼자 아이를 떠안아야 해. 그리고... 시집은 또 어떻게 가?""어떻게 나만의 삶을 살아가라는 거야!"장소월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쾅 닫았다.그녀를 버린다고? 시집?전연우는 그녀를 다시 데려온 이후로 그녀에게서 한 발도 떨어지지 않을 거라 결심했었다!더구나 장소월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터무니없는 상상은 해본 적도 없다!그녀가 남자와 함께 있는 것, 심지어 침대에서...전연우는 생각만 해도 분노가 끓어올라 머릿속에 떠오른 그 장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그의 옆을 떠나는 것은 꿈도
서철용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남자는 이미 의식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는 식은땀이 흥건해진 채 눈썹을 찡그리며 가슴을 움켜쥐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먼저 나가요."서철용이 간호사에게 말했다."네. 선생님."침대에 누워있는 남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너무 걱정하지 마. 고질병이 도진 것뿐이야."서철용은 그가 편히 기댈 수 있게 베개를 등 뒤에 놓아주었다.한의준이 물었다. "그 사람은 깨어났어?"서철용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깨어나는 건 시간문제예요. 아저씨, 걱정 마세요. 장해진은 얼마 살지 못할 거예요.""그 아가씨... 정말 장해진의 친딸이야?"한의준은 실은 4,5년 전부터 장소월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젊은 시절 성예진과 너무 닮아 있어 깜짝 놀랐었다. 반면 장해진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어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당연히 그렇겠죠?"당시 성예진은 한 사람의 아이만 낳았었다...장해진 그 짐승 같은 놈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한의준은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럼 움직여. 꼬리 잡힐 일은 만들지 말고.""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장소월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간호사 한 명이 규정된 시간에 들어와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간호사가 말했다. "환자분이 뇌졸중을 앓고 있습니다. 아직 상태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입원해야 합니다."장소월이 말했다. "부탁드릴게요.""별말씀을요." 장소월은 걱정어린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손에 든 꽃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오늘 병원에 온 건 아버지를 보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이 기회를 틈타 서철용에게 그 사진 속의 남자에 대해 묻기 위함이었다.전연우는 항상 그녀 옆에 붙어 있어 도저히 빈틈을 찾아낼 수가 없다.장소월은 강만옥이 뭘 할 수 있을 거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하여 떠나기 전
송시아는 확실히 장소월보다 유능하다! 그녀는 미술을 제외하고는 할 줄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비즈니스에 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저번 생에서 전연우와 송시아는 그야말로 완벽한 파트너로서 비즈니스 세계를 주름잡았다...전연우가 송시아를 사랑하게 된 것도 사실 그리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난 너와 프랑스에 가서 살 생각 없어. 내 집은 여기야. 난 아무 데도 안 가!"그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그럼 일단 가보기만 하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돌아오면 되잖아." 전연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입술에 가져갔다. "일주일 뒤에 출발할 거야. 그동안 난 이쪽 일을 다 처리해 놓을게. 그때가 되면...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곳 모두... 함께 갈 거야!"장소월은 힘껏 손을 빼내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넌 가고 싶으면 가. 난 싫어."전연우는 한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할 땐 아낌없이 무엇이든 해준다. 하지만 싫어하는 감정이 생기면... 상대가 모든 것을 다 내어줘도 절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전연우는 그런 사람이다!전생에는 그녀였고!이번 생에는 인시윤이다!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어떤 일은... 소월아, 네가 선택할 수 없는 거야."그녀는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녀가 거부하면 전연우는 그녀를 꽁꽁 묶어서라도 비행기에 태울 것이다.남원 별장.도우미가 손수건으로 소중히 감싼 무언가를 몰래 인시윤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가씨, 분부하신 물건입니다. 소월 아가씨의 머리카락은 어디에 쓰시려는 거예요?"인시윤은 손수건을 가방에 넣고 선글라스를 쓰며 말했다.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쓸데없는 일엔 관심 갖지 않는 게 좋아요."그 말에 도우미는 입을 닫았다. 이 머리카락은 평소 장소월이 사용하는 빗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 방법이 아니면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도우미는 물건을 건넨 뒤 조용히 서둘러 돌아갔다. 그녀가 몰래 나와 인시윤을 만났다는 사실을
성큼성큼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오는 남자의 모습에 인시윤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조차 할 수 없다. 인시윤은 그가 이 시간에 병원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한다. 더구나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전연우는 그녀의 손에서 검사 결과서를 빼앗고는 살기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인시윤은 반응할 틈도 없이 어느새 전연우의 경호원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전연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그녀를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떤 결과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전연우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시윤은 지금 전연우의 한계를 넘어버린 것이다.인시윤은 오늘 그의 비밀을 알아냈다. 전연우는 장소월과의 불순한 비밀을 숨기기 위해 그녀를 죽이는 것까지 불사할지도 모른다.지난번 남원 별장에서 밤새 빗속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에도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 남자는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그녀가 죽는다 해도,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이다."연우 씨... 날 놔줘요!"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인시윤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인시윤이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연우 씨,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대체 뭘 하려는 거냐고요!""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몰래 알아보는 게 아니었어요. 절대 발설하지 않을게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맹세할게요. 진짜 맹세할게요"전연우와 장소월은 정말 혈연관계였다.그들은 정말 남매였단 말이다...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전연우는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친남매임을 알면서도, 전연우는 여전히 장소월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늘이 무섭지도 않는 걸까?! 이런 감정은 절대 존재해선 안 된다! 전연우는 대체 왜...끌려가는 인시윤을 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서철용은 번쩍 눈을 떴다. 눈동자에 깃든 어둠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평소 그에게선 절대 볼 수 없는 진중함이 내비쳤다.서철용은 머릿속의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 책상 위 차 키를 들고 다급히 병원을 나섰다.그는 죽을 때까지도 가기 싫었던 그곳으로 미친듯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머릿속은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만약 장소월이 정말 장해진의 딸이 아니라면...그럼 그는...서철용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제기랄!남원 별장.한창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있던 장소월의 얼굴이 돌연 경련했다. 별이가 먹었던 분유를 토해내자 그녀는 재빨리 휴지를 꺼내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불안감이 온몸에 엄습하는 것 같았다.은경애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아가씨, 별이는 제가 볼 테니까 들어가서 쉬세요.""그래요."요즘 장소월은 매일 점심마다 낮잠을 자는 습관을 들였다.장소월이 지끈거리는 어깨를 주무르며 일어섰을 때, 도우미 한 명이 걸어왔다."아가씨, 서 선생님이 아가씨를 뵈러 오셨습니다."서철용이?장소월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철용이 왜 온 거지?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알겠어요. 지금 내려갈게요."마침 장소월 역시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장소월은 침대 밑에서 사진을 꺼내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서철용은 장소월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입을 열었다."괜찮으면 둘이서만 얘기할까요?"전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평소 서철용은 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음침하게 그녀를 바라보았었는데 말이다.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에 있는 도우미들을 모두 내보냈다.두 사람이 소파에 앉았다."생일이 언제예요?"장소월은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해졌다. "5월 20일이에요. 그건 왜 묻는 거죠?"5월 20일? 아니다, 그 날짜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럼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서철용은 손을 뻗어 다짜고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장소월은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엄마의 어린 시절 친구? 하지만... 오 아주머니는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엄마는 고아였다고, 아버지가 밖에서 주워온 사람이라고 했었다. 분명 따뜻한 거실이었지만 장소월은 전신을 타고 흐르는 한기에 부르르 떨려왔다. 그녀는 다시 서재로 들어가 분홍색 양피로 만든 노트를 폈다. 두꺼운 종잇장을 넘기니 정연하게 쓰여있는 글씨가 보였다. "1975년 1월 20일, 맑음. 오늘은 내 16번째 생일이다. 오늘 의준이가 나한테 예쁜 목걸이와 당나귀를 선물해 주었다. 앞으로 시장에 나갈 때마다 타고 다녀야지." "오늘 엄마 아빠는 무슨 생일 선물을 준비했는지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너무 기대된다!" "...1975년 1월 21일, 흐림. 어제 생일 파티가 끝난 뒤, 난 의준이가 준 당나귀를 타고 시내에 나갔다. 그러던 중 커다란 말을 타고 나타난 군화를 신은 남자 때문에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짜증 나. 그 남자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놈이 제멋대로 싸돌아다닌다며 나를 비난했다. 엄마가 선물해 준 옷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렸다.""1975년 3월 28일, 저번 그 남자가 또다시 나타났다. 그는 아빠한테 돈을 요구하러 온 것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문 앞에서 그 남자를 쳐다보았고 그 남자도 나를 보았다. 너무 흉악했다. 나는 무서워 방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그 남자가 오성을 지키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키가 정말로 컸다! 금주 언니는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그 사람의 아내가 되겠다고도 했었다.""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를 꾸짖었고, 나를 해코지했으니까!""그 사람은 나쁜 놈이다." 오성? 그게 어디지? 장소월은 그곳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장소월은 엄마가 십 대 때 기록한 일상들을 한 장씩 훑어보았다..."1976년 7월 12일, 오늘 밤에도 그는 돌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