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당신을 깊이 연모합니다, 서방님.”
등 뒤에서 들려온 서연의 목소리는 너무도 분명했다.
바람 소리도, 풀벌레 우는 소리도 결코 아니었다. 오직 자신 한 사람만을 향해 쏟아낸, 숨 막힐 듯이 온전하고 맹목적인 사랑의 고백.“…….”
이헌의 거대한 어깨가, 아니 온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심장 부근에 푸른 향낭을 꽉 쥔 채,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리고 허공만 멍하게 응시했다.마치 자신이 지독한 외로움에 미쳐 마침내 헛것을 보고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닌지, 끔찍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 같았다. 등 뒤의 온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대군……? 아니, 서방님.”
자신의 품 안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미동조차 없는 이헌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가 깊게 내려앉은 대군저의 후원.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만이 두 사람의 걸음 사이를 고요하게 채우고 있었다.“…….”서연과 이헌은 손을 맞잡은 채 천천히 흙길을 걷고 있었다.며칠 전 밤, 서연이 건넨 향낭과 연모한다는 고백 이후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몹시도 다정하고 따뜻했다.서연은 이 평온함 속에서, 마침내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주어도 좋겠다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서방님.”서연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예. 부인. 듣고 있습니다.”이헌이 서연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늦추며, 다정하게 고개를 숙여 주었다.“오늘은 날이 참으로 맑고 바람이 시원합니다. 이리 걷고 있으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납니다.”“옛날이라 하시면…….”“제가 대군저에 오기 전. 제 가문이 몰락하기 전의 어린 시절 말입니다.”이헌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다.자신의 가문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했던 그 끔찍한 과거.그 아픈 기억을 서연의 입으로 먼저, 그것도 이리 편안한 목소리로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부인. 굳이 아픈 기억을 억지로 꺼내실 필요는 없습니다.”이헌이 걱정스러운 듯 서연의 손을 꽉 쥐었다.“아픈 기억이 아닙니다.”서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저, 제 삶에서 가장 평범하고 따뜻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서방님께도 제 지난날의 온전한 모습을 조금씩 들려드리고 싶어서요.”
“예? 제가 부인을 아프게 하여 송구하다고…….”“그전에 말입니다.”서연이 이헌의 손을 지그시 겹쳐 잡으며 똑바로 물었다.“소독…… 이라고 하셨습니까.”“……!!”이헌의 손끝이 벼락을 맞은 듯 굳어버렸다.그의 핏발 선 시선이 천천히 위로 향해, 서연의 의문 가득한 눈동자와 얽혔다.이헌의 흉곽 안에서 심장이 덜컹,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소독. 참으로 생경하고 기이한 낱말입니다.”서연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조선의 그 어떤 의서에서도, 그 어떤 어사전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입니다. 상처를 씻어낸다는 뜻으로 들리긴 합니다만…… 그것이 정확히 어느 나라의 언어입니까.”“그, 그것은…….”이헌의 목덜미로 굵은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이성을 잃고 당황한 나머지, 현대의 지식이 또다시 무의식중에 튀어나와 버렸다.전생에 지안이 종이에 손을 베였을 때, 약국으로 달려가 소독약을 사 오며 외쳤던 그 습관적인 단어가 이 비틀린 조선의 하늘 아래서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대답해 보십시오. 제가 모르는 어느 나라의 말입니까.”“서, 서역입니다!”이헌이 황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며 더듬거렸다.“예…… 명나라 사신을 통해 들어온 서역의 의학 서적에서 본 낱말입니다. 상처에 파고드는 나쁜 독기와 기운을 소멸시
대군저 안채의 일상은 평화로웠으나, 서연의 머릿속에는 최근 들어 지워지지 않는 아주 작은 물음표 하나가 맴돌고 있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완벽한 남편 이헌이 무의식중에 불쑥불쑥 내뱉는 낯선 낱말들 때문이었다.“…….”서연은 마루에 앉아 지난 며칠간의 일들을 가만히 되짚어 보았다.며칠 전, 궐에서 돌아온 이헌이 서안에 앉아 형조의 판결문을 검토할 때였다.그는 문서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었다.『이따위 정황 증거만으로는 기소할 수 없다. 확실한 물증이나 알리바이를 깨뜨릴 논리가 부족하지 않은가.』그때 서연은 차를 내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었다.기소나 물증이라는 말은 알겠으나, 그가 무의식중에 내뱉은 ‘알리바이’라는 기이한 발음의 단어.『알리…… 바이?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그녀의 물음에 이헌은 마시던 찻물을 뿜을 뻔하며 사색이 되었었다.『아, 아아! 북방의 야인들이 쓰는 은어입니다! 현장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뜻이지요. 제가 북방 정벌을 나갔을 때 주워들은 격 없는 말이니, 부인께서는 담아두지 마십시오.』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히 변명하고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그는 종종 정무에 지친 얼굴로 ‘스트레스’라느니, 대신들의 당파 싸움을 보며 ‘프레임 짜기’라느니 하는 도무지 기원조차 알 수 없는 괴상한 외래어들을 툭툭 뱉어내곤 했다.그럴 때마다 서연이 의문을 표하면, 이헌은 명나라 사신의 말이라느니, 서역 상인들의 은어라느니 하며 횡설수설 얼버무리기 일쑤였다.‘조선의 섭정이 어찌 그리 얕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잡학에 통달했단 말인가.’
그의핏발 선 동공이 미친 듯이 팽창하며, 얼굴에서 붉은 핏기가 썰물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심장이 흉곽을 찢고 터져나갈 듯이 요동치며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지안아…….’서연이 낯선 기계를 들여다보는 사소한 모습 하나에도, 이헌은 오래전 송지안의 얼굴을 억지로 겹쳐 보았다.실제로 닮은 행동인지조차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그저 닮았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이헌의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공포가 온몸을 집어삼켰다.자신이 그녀를 기쁘게 해주려 건넨 서역의 낯선 물건들을 보며. 자신이 또다시 송지안의 흔적을 서연에게 억지로 덧씌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자신이 송지안의 가문을 짓밟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더럽고 잔혹한 과거의 기억마저 함께 떠오르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서방님?”오르골 선율에 흠뻑 빠져 있던 서연이, 갑자기 곁에서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이헌의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대군. 어디 편찮으신 겝니까? 갑자기 안색이 백지장처럼 시퍼렇게 하얗습니다. 이마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지 않습니까.”서연이 놀라 다급하게 다가와, 이헌의 땀에 젖은 거친 뺨을 두 손으로 걱정스레 감싸 쥐려 했다.“아, 아닙니다! 제게 오지 마십시오!”“……!”이헌은 자신도 모르게 짐승처럼 흠칫 놀라며, 그녀의 하얀 손을 불에 덴 듯 피해 뒤로 크게 물러섰다.마치 가장 끔찍한 죄를 지어 곧 참수를 당할 사형수처럼, 극도의 공포와 당혹감이 그의 얼굴을 끔찍하고 기괴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서, 서방님&
대군저 안채로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들이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조선 제일의 권력을 쥔 섭정 이헌이, 오직 자신의 부인 서연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전국 팔도의 내로라하는 장인들을 닦달하여 밤낮없이 만들어낸,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이한 물건들이었다.“부인, 이쪽을 한 번 보시지요. 제가 부인을 위해 특별히 며칠을 고심하여 준비한 것입니다.”이헌이 만면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며, 검은 융단으로 조심스럽게 덮여 있던 커다란 물건의 천을 휙 걷어내었다. 꼬리를 세차게 흔드는 커다란 짐승 같았다.“……!”서연의 맑은 두 눈이 경악으로 동그랗게 커졌다.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조선의 여인들이 흔히 쓰는 탁하고 누런 청동 거울과는 차원이 완벽하게 다른 기이한 물건이었다.성인 여성의 전신을 온전히 비출 만큼 사람 키만 하게 거대하고, 티 없이 맑고 투명한 표면을 가진 서양식 은도금 유리 거울이었다. 햇살을 반사하는 거울의 빛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어떠하십니까. 기존의 낡은 청동 거울은 부인의 그 눈부신 용모를 오롯이 담아내기엔 색이 너무 탁하고 천하여. 제가 장인들에게 직접 도면을 그려 특별히 명하여, 서역의 기술을 응용해 간신히 주조해 낸 유리 거울입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지요.”서연은 홀린 듯 맑은 거울 앞으로 아주 천천히 다가갔다.머리카락 한 올, 뺨의 미세한 솜털 하나까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고 생생하게 비치는 자신의 낯선 모습.조선의 그 어떤 웅장한 궁궐에서도, 심지어 왕비의 처소에서도 결코 본 적 없는 기이하고도 투명한 물건이었다.하지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던 서연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이상
자신이 쥔 이 완벽하고 찬란한 행복이,자신의 그 추악한 본질 때문에 언제 산산조각 무너져 내릴지 몰라 극도로 두려워하는, 공포에 완벽히 질린 짐승의 서늘한 눈빛이었다.서연의 손끝이 이헌의 뺨에 닿은 채 아주 작게, 돌처럼 굳어졌다.‘무엇이지? 방금 그 눈빛은…….’가슴 한가운데로 한겨울의 찬물이 끼얹어지듯 서늘한 기운이 훅 밀려왔다.방금 전까지 온몸을 휘감았던 완벽한 평온함의 장막에, 머리카락보다 얇고 불길한 미세한 균열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대군?”서연이 조심스럽게,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다시 불렀다.“예. 부인. 말씀하십시오.”이헌이 번쩍 눈을 뜨며 다정하게 대답했다.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다시 그녀를 향한 맹목적인 애정과 따뜻한 다정함으로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었다.방금 전 그녀가 찰나에 보았던 그 지독한 슬픔과 죄책감의 파편은, 마치 그녀가 헛것을 본 환각이었던 것처럼 온데간데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서연은 속으로 작게 마른침을 삼켰다.‘내가 잠결에 헛것을 본 것이겠지. 그래, 그럴 것이다.’그녀는 애써 방금 전 느꼈던 서늘한 위화감을 억지로 지워내려 노력했다.자신을 위해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며 편전에서 망설임 없이 칼을 빼 들었던 사내다.어제도 자신을 정실로 올리기 위해 피바람을 예고했던, 명분과 무력으로 조선을 꽉 움켜쥐고 있는 고독한 섭정.그가 짊어진 그 거대한 권력의 무거운 무게와, 매일 정적들을 상대하며 겹겹이 쌓인 정치적인 극도의 피로와 압박감이 그의 눈빛에 무의식적인 무거운 그늘을 만들었을 것이라. 서연은 그리 억지로 짐작하고 합리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