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군저의 집무실, 취선당(聚仙堂)의 밤은 꺼지지 않는 촛불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비롯하여 『대명률(大明律)』, 그리고 형조의 해묵은 판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헌은 붕대가 감긴 오른손의 통증조차 잊은 채, 왼손으로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서늘한 눈빛을 번뜩였다.
“자가, 벌써 사흘 밤낮을 한숨도 주무시지 않으셨사옵니다.”
방구석에서 그림자처럼 대기하던 흑위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이헌의 핏발 선 눈동자와,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채 바닥에 흩어진 수많은 서신에 머물렀다.
이헌은 대답 대신 붓을 들어 백지 위에 누군가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단순히 땅을 사주고, 사병을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헌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낮고 거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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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력으로 저들을 모조리 썰어버릴 것이나…… 칼싸움이라는 것은 늘 변수가 있는 법이오.”이헌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자신의 목숨은 천 번 만 번 내놓을 수 있었으나, 눈앞에 있는 이 여인과 곧 태어날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큼은. 그를 미치게 만들 정도로 두려웠다.“전하.”“내 당신에게 약조하겠소.”이헌이 서연의 두 손을 꽉 쥐며, 뼈를 깎는 듯한 맹세를 토해냈다.“어떤 일이 있어도 낭자와 이 아이의 머리카락 한 올 다치게 하지 않겠소.”그것은 세상 그 어떤 지엄한 어명보다도 무겁고 처절한, 한 남자의 핏빛 맹세였다.“내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고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저 문턱을 넘어 당신에게 다가오는 칼날은 내가 모조리 이빨로라도 물어뜯어 막아낼 것이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시오.”이헌의 그 절박한 맹세.그것은 서연을 안심시키기 위함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십만 대군 없이 홀로 수천 명을 상대해야 하는 자신 내면의 마지막 두려움을 억누르기 위한 외침이기도 했다.하지만 서연은 그런 이헌의 떨림을 완벽하게 읽어내고 있었다.그녀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파란 눈동자는, 이헌보다도 더욱 단단하고 시퍼런 광채를 뿜어내며 빛나고 있었다.서연은 덜덜 떨리는 이헌에게 꽉 잡혀 있던 하얀 손을 아주 부드럽고 우아하게 빼내더니. 자신의 품속 가장 깊은 곳에서, 마치 적의 심장 피를 물들인 듯 붉고 선명한 비단 매듭 하나를 조용히 꺼내어 들었다.그녀는 무릎을 꿇은 이헌에게 가까이 다가가, 한 치의 떨림도 없는 단단하고 야무진 손길로. 이헌의
해가 서산 너머로 완전히 핏빛 자취를 감추고, 칠흑 같은 무거운 어둠이 한양 도성 전체를 숨 막히게 짓눌렀다. 평소라면 저잣거리의 백성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었을 초저녁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개 짖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끔찍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한양 도성의 심장부이자 권력의 한 축으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요새, 대군저(大君邸).평소라면 분주하게 오가는 가솔들의 발걸음 소리와, 흑위대 호위 무사들의 절도 있는 교대 소리로 적당한 활기가 맴돌았을 저택 내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장이라도 시퍼런 불꽃이 튀면 폭발할 듯한 거대한 화약고처럼, 무시무시하고 팽팽한 폭풍 전야의 적막 속에 완벽하게 휩싸여 있었다.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천둥처럼 들릴 만큼 살벌한 고요함이었다.“문빗장을 삼중으로 단단히 걸어 잠가라! 모래주머니와 수레를 끌어와 정문을 막아!”흑위대장 무영의 거친 목소리만이 대군저의 무거운 공기를 찢고 메아리쳤다.그의 곁에는 십만 대군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불과 백 명 남짓한 흑위대 정예병 결사대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백 명의 눈빛은 수만의 군대보다 맹렬했다. 그들은 시퍼렇게 날이 선 무거운 대검을 꽉 움켜쥔 채, 각자의 요충지에서 당장이라도 적의 목을 물어뜯을 듯한 짐승의 살기를 맹렬하게 뿜어내고 있었다.“무영 대장. 우리도 싸우겠소.”그때, 행랑채 쪽에서 절뚝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내들이 걸어 나왔다.북방의 전장에서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눈이 먼, 수백 명의 부상병들이었다.그들은 성한 팔로 녹슨 창과 부러진 낫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절뚝거리면서도, 그들의 눈빛만큼은 흑위대 못지않게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당장 물러서시오! 당신들은 전하의 지엄한 명에 따라 안전한 방
이헌 부부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고립무원의 이 낡은 대군저 안에서,사방에서 쏟아지는 수천 개의 시퍼런 칼날과 불타는 화살을 오직 자신들의 뼈와 살로 온몸으로 짐승처럼 버텨내야만 하는 것이다.“상관없다.”하지만 이헌은 일순간의 흔들림을 완벽하게 지워버리고, 아주 차갑고 오만한 짐승의 목소리로 무거운 핏빛 침묵을 단숨에 깼다.“무영아. 넌 당장 봉화대로 가서 봉화를 올려 북방의 늑대들을 당장 불러라. 그리고.”이헌이 곁에 앉은 서연의 하얀 손을 굳게 꽉 쥐며, 지엄하고 살기 어린 핏빛 명령을 하달했다.“저잣거리에 첩보를 위해 나간 남은 흑위대를 모조리 총동원하여, 지금 이 순간부터 이 대군저를 그 어떤 쥐새끼도 감히 넘을 수 없는 완벽한 철옹성 요새(要塞)로 만들어라.대군저의 모든 담장에 날카로운 철조망을 높이고, 동서남북의 모든 문을 두꺼운 쇠사슬로 완벽하게 봉쇄하라!팔다리가 잘린 부상병들에게는 활과 투석기, 짱돌이라도 쥐여주고 지붕 위와 담장 뒤에 미친 듯이 겹겹이 매복시켜라!우리는 십만 대군이 이 도성의 문을 부수고 들어올 때까지!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이 저택에서 목숨을 건 최후의 핏빛 결사 항전(決死抗戰)을 치를 것이다!”“존명! 흑위대 백 명의 목숨을 기꺼이 화살받이 고기방패로 던져서라도, 전하와 부인 마마를 철통같이 완벽하게 지켜내겠사옵니다!”무영이 피눈물을 흘리며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쾅쾅 찧고는, 번개처럼 몸을 돌려 지하 밀실의 어둠 속으로 짐승처럼 빠져나갔다.빈방에 남은 섭정 이헌과 안주인 서연.무고한 백성을 끔찍한 내전의 참극에서 지키고 훈구파의 오만한 방심을 완벽하게 유도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장 압도적인 십만 무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도성에 헐벗은 채 들
대군저 안채의 가장 깊숙한 지하, 숨 막히는 핏빛 침묵이 뱀처럼 내려앉은 은밀한 밀실.방금 전 흑위대장 무영의 떨리는 입을 통해, 훈구파의 무장 쿠데타 모의라는 끔찍하고 살벌한 첩보를 전해 들은 섭정 이헌.그의 텅 빈 듯 차갑게 가라앉았던 두 눈동자가, 일순간 사람의 것이 아닌 피에 굶주린 짐승의 살기로 시퍼렇게, 악귀처럼 번뜩였다.그는 단 1초의 얄팍한 망설임이나 두려움도 전혀 없이.자신의 낡고 찢어진 옥색 철릭 품속으로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을 짐승처럼 깊숙이 집어넣었다.그리고 그 차가운 가슴 안쪽에서, 조선 섭정의 가장 지엄한 권위이자 북방의 십만 대군을 단숨에 호령할 수 있는 유일한 호랑이 증표.칠흑같이 검고 묵직한 호랑이 모양의 ‘비밀 병부(兵符)’를 아주 거칠게 꺼내어, 바닥에 엎드린 흑위대장 무영의 손바닥에 꽉! 뼈가 으스러지도록 쥐여주었다.“무영아.”“예, 전하! 지엄하신 핏빛 하명만 내리시옵소서!”“당장 도성 북쪽 산꼭대기의 은밀한 봉수대로 미친 듯이 짐승처럼 전속력으로 뛰어가라.그곳에서 이 비밀 병부를 지키고 있는 우리 측 은밀한 흑위대 봉수군 수장에게 보여주고. 북방을 향해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는 출정의 붉은 봉화 세 개를 잇달아 밤하늘로 무자비하게 쏘아 올리게 하라.”이헌의 목소리는 지하 밀실의 무거운 공기를 통째로 얼려버릴 듯 너무도 낮고 차가웠지만.그 깊은 심연 안에는 펄펄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살인적인 폭군의 분노가 완벽하게 똬리를 틀며 도사리고 있었다.“저 척박한 북방의 압록강 너머에서 밤낮으로 피에 굶주려 나의 호령만을 대기 중인.내 수만 명의 정예 주력군과, 야루의 그 무자비한 여진족 기병대에게 전하는 나의 지엄한 핏빛 어명이다.
도성 수비대 일부를 더러운 돈으로 완벽하게 매수하고, 당장 내일 밤 수천 명의 훈련된 사병을 몽땅 끌어모아 이 대군저를 무력으로 기습하여! 전하와 부인 마마의 목을 노리려 역모 모의를 완벽하게 끝마쳤다 하옵니다.”그 숨 막히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역모의 무장 쿠데타 징후 보고.보통의 얄팍한 권력자라면 경악하여 즉시 짐을 싸서 도망치거나, 방어 태세를 갖추느라 사색이 되어 덜덜 떨며 발악했을 그 끔찍한 위기 상황.하지만 상석에 나란히 앉아 있던 섭정 이헌은.오히려 아무런 동요나 두려움조차 전혀 없이, 자신의 허리춤에 찬 시퍼런 장검의 칼자루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짐승처럼 서늘하게 매만질 뿐이었다.스르릉.칼날이 낡은 칼집과 마찰하며 내는 서늘한 쇳소리가, 촛불이 일렁이는 지하 밀실을 아주 무겁고 끔찍하게 울렸다.이헌의 입가에 피에 굶주린 짐승 같은 살기가 짙게 덧칠된, 잔혹한 야차의 썩소가 비틀려 올라갔다.“내일 밤이라…… 참으로 뒈지기 위해 성미가 급한 늙은이들이군.”이헌이 칼자루에서 손을 떼며 곁에 앉은 서연을 윽박지르듯 바라보았다.서연 역시 맑은 찻잔을 손에 든 채, 임산부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두려움이나 당황한 기색 없이 너무도 평온하고, 오히려 악귀처럼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쥐새끼들이 드디어, 스스로 제 무덤 구덩이를 가장 깊게 파고 기어 나오는군요.”서연의 투명한 파란 눈동자가 촛불 아래서 맹독을 가득 품은 독사처럼 소름 끼치게 번뜩였다.그녀는 처음 십만 대군을 북방으로 돌려보낼 때부터, 이 모든 핏빛 상황을 뼛속까지 꿰뚫어 보고 치밀하게 예측하고 있었다.어전에서 권력을 잃고 율법의 칼날에 짓눌려 궁지에 몰린 훈구파 놈들이, 결국 그 천박한 이성을 잃고
한밤중, 도성의 가장 은밀하고 사치스러운 최고급 요정(料亭).아름다운 가야금 소리와 기생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달콤하게 새어 나오는 화려한 겉모습과는 완전히 반대로. 가장 구석진 비밀 골방 안의 공기는, 당장이라도 숨이 콱 막혀 죽을 듯한 살얼음판처럼 무겁고 차갑게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빌어먹을! 빌어먹을! 이대로 가다간 우리 훈구파 모두 섭정 부부의 손에, 아니 저 미친 최윤 놈의 혓바닥에 모가지가 모조리 날아갈 것이오!”좌의정이 들고 있던 비싼 청자 도자기 찻잔을 바닥에 산산조각 쨍그랑! 집어 던지며 짐승처럼 핏빛 사자후를 터뜨렸다.그의 늙고 탐욕스러운, 핏발 선 시뻘건 눈동자에는 극도의 공포와 살인적인 광기가 흉측하게 뒤섞여 있었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양의 모든 권력과 백성의 고혈을 쥐락펴락하며 오만의 축배를 미친 듯이 들이켰던 훈구파 수장들이었지만. 지금 그들의 몰골은, 섭정의 덫에 궁지로 완벽하게 몰려 사시나무처럼 덜덜 떠는 독 안에 든 쥐새끼 그 자체였다.“어전에서는 그 미친개 같은 최윤 놈이 매일같이 율법과 끔찍한 횡령 증거로 우리의 숨통을 사정없이 짓밟으며 조이고!궐 밖에서는 섭정의 안주인 서연 그 독사 같은 년이, 우리 부인들을 협박하여 우리 집안의 막대한 돈줄을 모조리 강탈해 가고 있소!도성의 십만 백성들은 이미 섭정에게 완벽하게 세뇌되고 선동되어, 우리가 저잣거리에 가마를 타고 나가기만 해도 낫과 도끼를 들고 돌을 던지려 으르렁거리는 폭동의 판국이란 말이오! 우리가 어찌 이리 비참하게 전락했단 말이오!”“맞소이다! 저 독기 어린 섭정 부부의 무자비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쌍끌이 통치에, 이미 비리가 까발려져 의금부로 끌려간 우리 쪽 대신과 수족이 벌써 열 명이 훌쩍 넘소이다!”우의정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며, 공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