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
“네놈이 이 마루 바닥에서 이대로 비참하게 죽어버린다면, 조정의 대신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서연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가슴을 쥐어짜는 공포를 숨기며 도리어 더욱 잔혹하게 말을 내리꽂았다.
“당신이 죽으면 내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이 지옥에서, 내 방패막이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입니다.”
“…….”“오직 내 생존을 위한 계산이었으니, 가증스러운 의미를 부여하며 내 귀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난 여전히 당신이 역겹고 소름 끼치니까.”뼈를 깎는 듯한 경멸이었다.
자신을 오직 쓸모 있는 고기 방패로만 여기고 있다는, 철저한 도구로서의 선언.일반적인 사서연은 어둠 속에서 주먹을 하얗게 쥐었다.‘또다시 나를 위해 세상을 부수겠다는 건가.’대군저에 들어온 뒤 쌓인 기억이 서늘한 파충류의 꼬리처럼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이헌이 ‘널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선택을 대신 결정하고, 법과 권력으로 도망칠 길을 막아오던 순간들.지금 이헌이 준비하는 것은 무엇일까. 노비 면천? 법전 수정? 그것이 성공한다 한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결국 조선이라는 거대한 감옥이 이헌이 설계한 더욱 정교하고 화려한 감옥으로 바뀌는 것뿐이지 않을까.이헌은 한참 동안 가림막 너머의 침묵을 지켜보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편히 쉬십시오. 밖의 시끄러운 소음은 제가 다 막아둘 테니.”그가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릴 때까지 서연은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이헌이 취선당으로 돌아가자마자 다시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밤새도록 입법 로비를 위한 협박 명단을 수정하고, 반대파들의 비리를 엮어낼 법적 그물을 촘촘히 짰다.그것은 광기 어린 헌신이자, 동시에 지독하게 계산적인 집착이었다.서연은 창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몸을 떨었다. 저 취선당의 불빛이 꺼질 때쯤이면, 이 조선 땅에 어떤 피바람이 불어닥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이라는 천민 계집 한 명을 위해 나라의 근간인 법전을 찢어발기려는 남자.서연은 이 거대한 권력 싸움의 도화선이 된 자신의 운명에 지독한 환멸을 느끼며, 다가올 폭풍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폭풍전야의 고요함이 대군저의 성벽을 타고 음산하게 흘러넘치고 있었다.한양 도성이 발칵 뒤집혔다.진안대군이 은밀히 준비 중이던 파격적인 입법안, 이른바 ‘노비 면천 특별법(奴婢 免賤 特別法)&rsqu
대군저의 집무실, 취선당(聚仙堂)의 밤은 꺼지지 않는 촛불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책상 위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비롯하여 『대명률(大明律)』, 그리고 형조의 해묵은 판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헌은 붕대가 감긴 오른손의 통증조차 잊은 채, 왼손으로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서늘한 눈빛을 번뜩였다.“자가, 벌써 사흘 밤낮을 한숨도 주무시지 않으셨사옵니다.”방구석에서 그림자처럼 대기하던 흑위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이헌의 핏발 선 눈동자와,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채 바닥에 흩어진 수많은 서신에 머물렀다.이헌은 대답 대신 붓을 들어 백지 위에 누군가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단순히 땅을 사주고, 사병을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이헌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낮고 거칠었다.“그것은 결국 내가 살아있을 때만 유효한 임시방편일 뿐이지. 내가 만약 전하의 칼날에 쓰러지거나, 조정의 간신배들에게 목이 잘린다면…… 낭자는 다시 그 지옥 같은 관아의 옥사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이헌이 붓을 멈추고 흑위대장을 쏘아보았다.“내가 원하는 건, 내가 없어도 낭자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평생을 존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방법뿐이야.”“……그것이 무엇이옵니까.”이헌의 입술이 잔인한 호선을 그리며 비틀렸다.“조선의 법, 그 자체를 고치는 것.”흑위대장의 안색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자, 자가! 그것은 불가하옵니다! 『경국대전』은 선대왕마마께서 세우신 조선의 근간이옵
“…….”“네놈이 이 마루 바닥에서 이대로 비참하게 죽어버린다면, 조정의 대신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서연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가슴을 쥐어짜는 공포를 숨기며 도리어 더욱 잔혹하게 말을 내리꽂았다.“당신이 죽으면 내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이 지옥에서, 내 방패막이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입니다.”“…….”“오직 내 생존을 위한 계산이었으니, 가증스러운 의미를 부여하며 내 귀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난 여전히 당신이 역겹고 소름 끼치니까.”뼈를 깎는 듯한 경멸이었다.자신을 오직 쓸모 있는 고기 방패로만 여기고 있다는, 철저한 도구로서의 선언.일반적인 사내라면 자존심이 찢겨나가 분노하거나 비참함에 몸서리쳐야 마땅한 모욕이었다.하지만 가림막 너머의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이헌의 반응은, 서연의 상식을 또 한 번 처참하게 부수어버렸다.“아…….”이헌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그의 얼굴에 서려 있던 절망의 빛깔이, 순식간에 기괴한 안도감과 환희로 다시금 채워지기 시작했다.“그랬던 것이옵니까…….”이헌은 자신의 다친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듯 웃었다.“아가씨께 제가…… 쓸모가 있는 것이었군요.”“……뭐?”“아가씨를 지키는 방패막이. 아가씨의 생존을 위한 계산 속에, 제 목숨의 가치가 들어가 있었던
새벽의 잔인한 한기가 안채의 툇마루를 하얗게 얼려가고 있었다.지독한 고열의 수렁 속에서, 이헌은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의식이 흐릿하게 돌아오는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이마 위에 얹어진 기묘한 무게감이었다.“…….”이헌은 거친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손끝에 닿은 것은 차갑게 식어버린, 축축한 물수건이었다.그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핏발 선 눈동자를 느리게 굴렸다.자신이 쓰러져 있던 자리는 가림막 바로 바깥의 차가운 마루였다.그리고 이 물수건은 분명, 안채 안쪽의 세숫대야에 담겨 있던 그녀의 물건이었다.이헌의 심장이 방금 전까지 흐르던 피를 모조리 역류시킬 것처럼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꿈이 아니었어.’간밤에 정신을 잃어가며 보았던 환각.가림막의 명주천이 조심스럽게 걷히고, 가녀린 인영이 자신에게 다가와 땀을 닦아주던 그 기적 같은 순간.자신의 오른손이 무의식중에 그녀의 소맷자락을 꽉 쥐었을 때 느껴졌던, 그 서늘하고도 애달픈 촉감.그것은 열병이 만들어낸 헛상이 아니었다.그녀가 나왔다.그녀가 이 문턱을 넘어, 자신을 더러운 괴물 보듯 피하기만 하던 그 서연이, 쓰러진 제 이마에 찬 수건을 얹어주었다.“아…… 아아…….”이헌의 입술 사이로 짐승의 억눌린 헐떡임이 터져 나왔다.그의 짓무른 눈시울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그는 무릎을 꿇은 채,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이마에 얹혀있던 물수건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마치 신이 내린 절대적인 은총의 성물을 손에 쥔 죄인처럼.
‘저 남자가…… 죽어간다.’머릿속에서 서늘한 파열음이 울렸다.이 폭군이, 이 미치광이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사경을 헤매고 있다.이대로 내버려 두면, 상처가 덧나고 고열이 심해져 정말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그렇다면, 이 감옥의 문을 열고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나를 옭아매는 이 지독한 족쇄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순간적인 해방감이 서연의 가슴을 때렸지만, 이내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끔찍한 현실 감각이 그녀의 온몸에 찬물을 끼얹었다.‘아니야.’서연의 동공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저 남자가 죽는다면, 이 대군저의 수백 명 흑위대와 자신을 죽이려 안달이 난 조정의 대신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대군의 비호가 사라지는 순간, 자신은 다시 ‘역적 가문의 사노비’로 전락하여 짐승처럼 의금부로 끌려갈 것이다.저 남자가 쳐놓은 이 끔찍한 방패가 무너지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잔혹한 고문과 처참한 참수형뿐이다.서연은 이빨을 꽉 깨물었다.입안에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살아야 한다. 나는 저 괴물이 미치도록 역겹고 소름 끼치지만, 지금 내 목숨을 연장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 또한 저 괴물뿐이다.저 남자가 이대로 허무하게 죽어버린다면, 나의 생존 계획도 완벽하게 파멸하고 만다.“하아…….”서연의 눈빛이 차갑게, 그리고 극도로 이기적으로 가라앉았다.그녀는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방 한구석에 놓인 세숫대야로 다가갔다.밤새 차갑게 식어버린 얼음장 같은 물에 수건을 적셨다.서연은 젖은 수건을 꽉 짜내며 가림막을 걷고 툇마루로 나섰다.
“들었는가? 대군 자가께서 또 편전에서 만조백관의 입을 꿰매셨다더군.”“사병을 거느린 것이 반역이라 탄핵을 받았는데, 대명률의 판례를 들먹이며 도리어 대신들을 역적으로 몰아붙이셨다지 않은가.”“참으로 신귀(神鬼) 같은 두뇌를 가지신 분이야. 대군 자가 앞에서는 그 어떤 국법도 장난감에 불과해.”서연의 파르르 떨리는 두 손이 자신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상궁들의 감탄 섞인 속삭임이, 그녀에게는 가장 끔찍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마음만 먹으면…… 흰색을 검은색으로 바꿀 수 있는 남자.’서연의 눈동자가 공포로 극심하게 요동쳤다.조금 전까지 이헌이 법과 권력으로 사람들의 퇴로를 하나씩 끊어낼 때도 그러했다.명백한 증거도 없이 횡령과 배임을 엮어냈고, 법의 맹점을 비틀어 그녀의 가문을 합법적으로 공중 분해시켰다.그리고 지금, 이 조선에서도 그는 똑같은 괴물이 되어 한 나라의 율법을 제 발밑에 두고 주무르고 있었다.서연은 숨을 헐떡이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이헌이 그녀를 위해 쌓아 올린 이 거대한 담장과 흑위대 무사들.저것을 반역이라 부르짖는 세상의 상식조차, 저 남자는 아주 가볍게 짓밟고 합법으로 만들어버렸다.만약, 아주 만약에 자신이 이 감옥에서 도망친다면.저 남자는 자신을 어떤 죄목으로 엮어 다시 이 지옥으로 끌고 올까.‘아마 나를 도망친 노비가 아니라, 국가를 배신한 대역 죄인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몰라.’세상의 모든 법이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온다.그가 죄라 명명하면 죄가 되고, 그가 합법이라 칭하면 살인도 합법이 된다.이 압도적인 절망감.자신이 율법에 기대어 저 남자에게서 벗어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