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글줄이나 읽으며 탁상공론만 하던 네놈들보다, 이들이 조선의 실무와 회계 장부에 천 배는 더 밝다. 나는 섭정의 직권으로 이들에게 임시 벼슬을 하사하여, 네놈들이 비워둔 삼사의 모든 빈자리를 즉각 대체할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천한 중인 놈들이 어찌 대간의 자리에 앉는단 말이오!”“조선의 신분 질서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짓이오!”“신분 질서? 율법 앞에서는 신분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헌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타올랐다.
“조선의 행정은 단 하루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파업을 선동한 네놈들은 내일부터 당장 녹봉이 끊긴 실업자 신세가 되어, 한양 바닥을 전전하게 되겠지.”
완벽한 논파. 그리고 무자비한 대체 인력 투입.
현대적 의미의 직장 폐쇄(Loc그지독한 배신감과 공포가 한꺼번에 몰려오자, 만득의 정신은 완벽하게 붕괴하고 말았다.“어찌할 테냐.”이헌이 만득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어 자신의 눈앞까지 끌어올렸다.“우의정을 감싸다 이 자리에서 개죽음을 당할 텐가. 아니면 십 년 전 그 더러운 모함의 진실을 낱낱이 불고, 네놈과 네 처자식의 목숨이라도 부지할 텐가. 내가 던져주는 이 마지막 동아줄을 잡지 않는다면, 저 옆방의 살수들과 함께 의금부 아궁이에 던져버릴 것이다.”살기 어린 맹수의 속삭임.만득은 이헌의 핏발 선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살아야 했다. 우의정에게 버림받은 이상, 이 미치광이 섭정의 치맛자락이라도 붙잡아야만 가족을 살릴 수 있었다.“마, 말하겠사옵니다! 다 말하겠사옵니다!”만득은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이헌의 장화 발끝에 입을 맞추듯 엎드렸다.“십 년 전…… 나으리께서…… 아니, 서상서 대감께서는 결코 역모를 꾸미지 않으셨사옵니다!”만득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마디에, 이헌의 손아귀에 찌릿한 힘이 들어갔다.“서상서 대감께서는 평안도에 내려오신 후, 매일 밤잠을 줄여가며 관아의 장부를 살피셨사옵니다. 그러던 중, 관아의 곡식이 백성들에게 가지 않고 한양의 훈구파 대신들에게 빼돌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셨사옵니다.”만득은 숨을 헐떡이며 십 년 전의 그 참혹했던 밤을 끄집어냈다.“대감께서는 그 증거를 모아 전하께 상소를 올리려 하셨사옵니다. 그런데…… 그 상소가 올라가기 전날 밤, 우의정 김윤합의 수하들이 저를 몰래 찾아왔사옵
의금부 지하 옥사의 가장 깊고 어두운 심문실.서상서 가문의 옛 노비, 만득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차가운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그의 낡은 베적삼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초점 없는 눈동자는 극도의 공포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십 년 전, 그는 주인인 서상서가 여진족과 내통하는 서신을 보았다고 거짓 증언을 했다.그 대가로 우의정 김윤합에게 막대한 은표를 받아 챙겼고, 평안도 철산의 깊은 산골로 도망쳐 화전민 행세를 하며 쥐죽은 듯 숨어 살았다.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흑위대의 억센 손아귀에 덜미가 잡혀 다시 이 한양의 지옥으로 끌려온 것이다.끼기긱-.심문실의 무거운 쇳문이 열리며, 이헌이 어둠을 가르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그의 검은 관복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만으로도 옥사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서상서 가문의 노비, 만득이라.”이헌은 만득의 코앞에 놓인 나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그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심문실의 벽을 타고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십 년 전, 네놈의 그 더러운 혓바닥 하나 때문에 꼿꼿하던 선비의 목이 잘리고 한 가문이 몰락했다. 그 피 묻은 돈으로 평안도 산골에서 처자식과 아주 배불리 잘 살고 있더군.”“대, 대감 마나님! 살려주십시오!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십 년 전 그 일은 제가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관아에 고했을 뿐이옵니다!”만득은 이마가 찢어지도록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악을 썼다.그는 여전히 진실을 말하기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위증을 했다고 실토하는 순간, 조정의 훈구파 영수인 우의정이 자신은 물론이고 평안도에 남겨진 가족들의 숨통까지 모조리 끊어놓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lsq
“죽여라.”김윤합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그놈이 십 년 전 내가 준 은표를 들고 평안도 철산의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 화전민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흑위대보다 먼저 당도하여, 놈의 일가족을 모조리 도륙하고 집에 불을 질러라. 잿더미조차 남기지 마라.”살수 대장이 고개를 숙이고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김윤합은 화로의 불길을 노려보며 이빨을 갈았다.섭정이 법리와 증거로 자신의 숨통을 조여온다면, 이쪽은 그 증거 자체를 물리적으로 소멸시켜 버리면 그만이었다.하지만 김윤합은 이헌의 정보력과 속도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사흘 뒤, 평안도 철산의 깊은 산골.사방이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관군의 순찰조차 닿지 않는 외딴 화전민 촌.우의정이 보낸 십여 명의 살수들이 시퍼런 칼날을 번뜩이며 만득의 허름한 초가집을 빈틈없이 포위했다.“안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썰어라.”살수 대장의 수신호와 함께 살수들이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챙강-! 푹!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잠든 노비의 목덜미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흑위대 무사들의 서늘한 창검이었다.초가집 안팎에는 이미 철갑을 두른 이헌의 흑위대가 거미줄처럼 매복해 있었다.“함정이다! 퇴각…… 크억!”살수 대장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흑위대의 훈련된 창날이 그의 허벅지를 잔인하게 꿰뚫었다.순식간에 벌어진 압도적인 정보전과 살육전.살수들은 단 한 번의 저항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흑위대의 창칼 아래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처박혔다.“끌고 가라. 이놈들도 요긴한 증거가 될 터이니.&rdquo
왕과 대신들이 뻔히 지켜보는 어전 한가운데서, 수십 명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료들이 붉은 오라줄에 줄줄이 엮여 개처럼 바닥을 끌려 나갔다.“놓아라! 우의정 대감! 대감! 저희를 살려주시옵소서!”결박당한 자들이 김윤합을 향해 처절하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김윤합은 이빨을 꽉 깨문 채 그들을 외면했다.이헌이 서상서 모함의 건은 덮어두고 뇌물죄만을 들고나온 이상, 여기서 저들을 구명하려 나섰다가는 자신마저 뇌물 카르텔의 배후로 엮일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탓이었다.자신의 손발이 눈앞에서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단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는 처참한 무력감.김윤합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옥좌 아래의 이헌을 올려다보았다.이헌은 그런 김윤합을 향해, 입모양만으로 소리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다음은 네놈이다.]“……!”김윤합의 턱이 덜덜 떨렸다.이헌은 우의정을 칠 명분과 증거를 이미 다 쥐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것을 숨긴 채 삼사만을 도륙 내었다.그것은 무지해서가 아니었다.사냥감의 숨통을 한 번에 끊는 대신, 살점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공포를 천천히 음미하게 만들려는 악마 같은 유희였다.질질 끌려가는 관료들의 비명이 편전 밖으로 멀어질 즈음, 조정에는 묘지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칼 한 번 휘두르지 않았다.오직 치밀한 회계 분석과 악마적인 법적 거래를 통해 얻어낸 자백서 한 장으로, 이헌은 조정을 쥐고 흔들던 거대 권력 삼사를 완벽한 해체 수준으로 짓밟아버렸다.서연의 가문을 물어뜯고 조롱했던 그 위선적인 사냥개들을 모조리 의금부의 가장 축축한 지하로 쑤셔 박으며, 이헌은 그녀를 향한 첫 번
이헌의 손에 들린 몇 장의 서류.그것은 대사간이 피눈물을 흘리며 써 내려간, 서상서 가문 모함 사건의 끔찍한 전말이자 우의정 김윤합의 목을 칠 수 있는 완벽한 단두대의 칼날이었다.집무실 취선당에 홀로 앉은 이헌은 그 자백서를 서안 위에 펼쳐놓고 턱을 괴었다.촛불에 비친 그의 눈동자는 깊고 서늘한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당장 내일 아침, 어전에 이 자백서를 던지고 우의정을 끌어내릴 수도 있다.’증거는 명백했고, 자백은 완벽했다.의금부 도사를 풀어 김윤합의 사가를 포위하고 그 늙은 목을 베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하지만 이헌은 서류의 가장 밑바닥, 대사간의 떨리는 지장(指章)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아니. 너무 빠르다.’자본주의 정글에서 수조 원대 기업의 사냥꾼으로 군림했던 이헌은, 사냥감을 단숨에 물어 죽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권력의 정점에 있는 적의 목통을 단번에 끊으려 들면, 상대는 죽기 살기로 저항하며 조선 전체를 피바다로 만들 반정(反正)의 빌미를 만들 수 있었다.적을 가장 완벽하게 파멸시키는 방법은, 그가 발을 딛고 있는 땅부터 하나씩 무너뜨려 스스로 벼랑 끝에 몰렸다는 공포를 뼈저리게 체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몸통을 치기 전에, 수족(手足)부터 완벽하게 말려 죽여주마.’이헌은 붓을 들어 대사간의 자백서 내용 중, 서상서 모함과 우의정의 이름이 들어간 핵심 부분에 붉은 먹줄을 죽 그어 가렸다.대신, 그 아래에 적힌 또 다른 추악한 명단에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했다.그것은 삼사(三司)의 관료들이 지난 십 년간 지방 수령들에게 뜯어낸 집단 뇌물 수수 내역과, 횡령한 국고를 나누어 먹은 수십 명의 하급 관료 명단이었다.서연의 아버지
기생의 몸에서 태어나 족보에도 오르지 못한 열 살짜리 아들놈이더군.”이헌의 목소리가 뱀의 혓바닥처럼 대사간의 귓가를 핥고 지나갔다.“네놈이 평생을 긁어모은 은표와 장부 조작으로 빼돌린 토지의 명의가, 놀랍게도 본처의 자식들이 아니라 그 사생아의 이름으로 은밀하게 신탁되어 있더군. 훈구파의 개 노릇을 하며 더러운 짓을 도맡았던 이유가, 늙은 막내아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어 양반 행세를 하게 만들려는 알량한 부정(父情)이었나.”대사간의 턱이 기괴하게 벌어지며 짐승의 단말마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그것은 육체가 찢길 때의 비명이 아니었다. 평생을 걸쳐 가장 깊고 내밀한 곳에 숨겨두었던 최후의 보루가, 이헌의 압도적인 정보력 앞에 완벽하게 발가벗겨졌을 때 느끼는 영혼의 절망이었다.“이, 이 악마 같은 놈! 내 아들은 안 된다! 그 아이는 아무 죄가 없다!”“아무 죄가 없어?”이헌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쇠창살 앞까지 바짝 다가섰다.“네놈이 서상서에게 누명을 씌워 한 가문을 멸문지화로 몰아넣었을 때.그 집안의 여식은 관노비로 끌려가 짐승처럼 짓밟혔다! 네놈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놈의 호의호식 뒤에는, 서연이라는 한 여인의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단 말이다!”이헌의 사자후가 옥사의 지하를 쩌렁쩌렁 울렸다.“현행법상 횡령과 국고 손실의 주범은 구족을 멸하고 재산을 전액 국고로 환수한다. 내가 이 장부를 사헌부에 넘기는 순간, 네 본처의 자식들은 물론이고 저 사생아 놈까지 이 의금부의 찬 바닥에 끌려와 네놈이 당한 것과 똑같은 주리틀기를 당하게 될 것이다.”“아, 안 돼! 제발! 내 아들만은…… 내 핏줄만은!&r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