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헌이 땀범벅이 된 채 얇은 명주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짐승처럼 거친 숨을 헐떡이며 과거의 끔찍한 악몽의 잔재와 처절하게 싸우는 동안.
서연은 차가운 방구석 벽에 등을 꼿꼿하게 기댄 채, 어둠 속에서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그녀의 시선은 침상 위의 이헌을 향해 날카롭게 꽂혀 있었다.그녀의 비상하고 차가운 머릿속에서는 이헌이 대군저에서 보였던 지난 모든 기괴하고 병적이었던 행동들이. 마치 누군가 잔혹한 의도를 가지고 흩뿌려놓은 완벽한 퍼즐 조각처럼, 오차 하나 없이 하나의 거대한 핏빛 그림으로 꿰맞춰지고 있었다.
“……하아.”
서연의 파란 입술 사이로, 얼음장처럼 서늘하고 날 선 헛숨이 새어 나왔다.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폐부가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는 듯 쓰라렸다.
처음, 형조의 그 차갑고 더러운 지하 옥사에서
추운 겨울이 물러가고, 유난히도 따뜻하고 공기가 맑은 어느 봄날의 늦은 밤.한양 도성의 번잡함에서 완전히 벗어난 산자락 외곽. 그곳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이헌 부부의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새 저택 위로, 눈이 시리도록 밝고 거대한 둥근 보름달이 고요하게 떠올랐다.저택의 넓은 후원 한가운데에는 수백 년은 족히 묵었을 법한 굵고 기괴한 가지를 뻗은 거대한 매화나무 한 그루가. 마치 오늘 밤을 축복이라도 하듯, 달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팝콘 같은 꽃잎을 화려하게 만개한 채 당당하게 우뚝 서 있었다.스아아아-.아주 부드럽고 따스한 봄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수만 장의 새하얀 매화 꽃잎들이 쏟아지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아, 마치 한겨울 밤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사르르 공중으로 흩날려 정자 바닥을 소복하게 덮어가고 있었다.그 흐드러진 매화나무 아래, 아주 아늑하고 단단하게 자리 잡은 소박한 아담한 나무 정자.그곳에는 과거 피로 얼룩진 흑철 갑옷과 무거운 가채를 모두 벗어 던지고, 편안하고 부드러운 옥색 평상복 치마저고리와 도포를 입은 이헌과 서연 부부가. 달콤한 꿀 약과와 향긋한 찻물이 담긴 작은 다과상 하나만을 사이에 둔 채, 아주 고요하고 평화롭게 마주 앉아 있었다.“달빛이 참으로 밝소.”이헌이 손에 쥐고 있던 따뜻한 찻잔을 다과상 위에 탁, 가볍게 내려놓으며. 별이 쏟아질 듯 맑고 투명한 까만 밤하늘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과거 전장에서 수십 번의 사선을 넘나들며 흉터가 깊게 패인 그의 거칠고 선이 굵은 잘생긴 얼굴 위로, 은은하고 눈부신 황금빛 달빛이 마치 축복처럼 사르르 부서져 내렸다.“예. 매화 향기도 오늘따라 유독 짙고 달콤하군요.”서연이 미소 지으며 이헌의 빈 찻잔에 다시 차를 채웠다.과거 수만 명의 적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와 죽음의 공포가 사라진 자리. 그곳에는 오직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와, 다정하고 간질간질한 중년 부부의 완벽한 로맨스만이 따뜻한 봄햇살처럼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주군! 아니, 대원군 대감 마마! 소장 무영이옵니다!”그날 오후.저택의 정문을 벌컥 열고, 육중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익숙한 불청객이 찾아왔다.과거 흑위대장이자, 이제는 궐 안에서 젊은 왕을 그림자처럼 보필하며 조선 최고의 무력 집단 흑위대를 이끄는 총관(摠管) 무영이었다.“오, 무영이 아니냐! 어서 오너라!”마루에 앉아 서연과 다과를 즐기던 이헌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무영은 과거의 살기를 지운 채 핏발 선 애꾸눈을 휘어 접으며 씩 사람 좋게 웃더니, 흙바닥 마루 아래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전과 다름없이 아주 깍듯하고 충성스러운 절을 올렸다.“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무영 총관. 차를 내어올 테니 이리 올라와 앉으세요.”서연이 다정하게 권하자, 무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마루 끝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궐의 일은 어찌 되어가고 있느냐. 주상께서는 강건하시고?”이헌이 차를 홀짝이며 묻자, 무영의 흉터 진 입가에 자신이 모시는 새 주군에 대한 아주 자랑스럽고 벅찬 미소가 득의양양하게 쫙 번졌다.“아이고, 말도 마시옵소서! 주상 전하의 그 매서운 치적과 결단력에, 편전의 늙은 백관들이 매일같이 오줌을 지리며 벌벌 떨고 있사옵니다!”무영이 신이 나서 궐의 소식을 봇물 터지듯 쏟아내기 시작했다.“어제는 주상 전하께서 호조의 조세 장부를 직접 검토하시더니, 지방 토호들이 숨겨둔 은닉 토지 수천 마지기를 완벽하게 적발해 내셨사옵니다!
“영차! 으랏차! 끙차!”구름 한 점 없는 눈부신 이른 아침, 한양 도성에서 한참을 벗어난 외곽의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산자락.아침 이슬을 머금은 맑은 공기를 가르며, 아주 우렁차고 활기찬 사내의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권력을 탐하는 도성 저잣거리의 매캐한 연기와, 궐 안에서 매일같이 뿜어져 나오던 그 숨 막히고 끔찍했던 피비린내가 전혀 닿지 않는 완벽하게 청정한 곳.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이 한적한 명당에는, 기와지붕을 얹었으나 궐의 전각처럼 사치스럽지 않은 아주 소박하고 단아한 형태의 새 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권력의 정점에서도 끝내 왕위를 거절하고, 십여 년간 어깨를 짓누르던 모든 국정의 무거운 짐을 젊은 아들과 신진 관료들에게 완벽하게 넘겨준 이헌 부부.그들이 피로 얼룩졌던 화려한 대군저를 완전히 미련 없이 떠나, 남은 여생을 가장 조용하고 아늑하게 보내기 위해 새롭게 터를 잡은 은밀하고도 평화로운 거처였다. 담장 너머로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완벽한 안식처였다.“어허! 이 잡초 놈들이 밤새 또 자라났단 말이냐! 내 이놈들의 뿌리를 아주 완벽하게 뽑아버릴 것이다!”저택의 넓고 아름다운 화원.그곳에는 과거 흑철 갑옷을 입고 어전에서 대신들의 목을 썰어대며 호령하던 잔혹한 폭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끙차!”거친 무명 적삼의 소매를 어깨까지 둥둥 걷어붙이고, 낡은 짚신을 신은 거대한 체구의 사내.이헌은 그 굵고 선이 굵은 얼굴과 짐승 같은 거대한 팔뚝에 시커먼 흙먼지와 끈적한 진흙을 잔뜩 묻힌 채. 과거 어전에서 사람의 목을 썰어대던 무자비하고 시퍼런 장검 대신, 농사꾼들이 쓰는 작고 투박한 쇠호미 한 자루를 뼈가 부서지도록 꽉 쥐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밭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대역죄인의 여식으로 몰려 사노비까지 전락했던 여인도 아니었고,썩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피 묻은 칼날을 휘두르며 구밀복검의 덫을 짜던 독사 같은 섭정의 안주인도 아니었다.조선 천하 만백성의 절대적인 존경과 맹목적인 칭송을 한 몸에 듬뿍 받는, 가장 고귀하고 완벽하게 맑은 진정한 국모(國母), 부대부인이 되어. 이 조선에서 그 누구도 감히 올려다보지 못할 그 찬란하고 눈부신 영광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아주 완벽하고 당당하게 우뚝 선 것이다.이헌이 그런 벅찬 감격에 겨워 가늘게 파르르 떨리는 서연의 하얀 손을, 자신의 검은 굳은살이 짐승처럼 투박하게 박인 아주 넓고 따뜻한 큰 손으로. 마치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맞잡았다.“서연아.”“예, 지아비시여.”이헌이 서연의 하얀 귓가에 자신의 거친 얼굴을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가까이 대고.십여 년 전, 훈구파의 끔찍한 무장 쿠데타를 앞두고 대군저의 피비린내 나던 어두운 지하 밀실에서 죽음의 결의를 속삭였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짐승의 살기나 피 튀기는 두려움도 전혀 묻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따뜻한 평범한 지아비의 목소리로 귓가에 아주 나직하게 속삭였다.“수십 년간 수만 명의 형제와 신하들의 피를 무자비하게 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저 차갑고 외로운 피 묻은 용상(龍床)은.”이헌의 눈동자가 인정전의 화려한 옥좌를 잠시 스쳤다가, 이내 오직 서연만을 향해 아주 깊고 다정하게 머물렀다.“나의 진정한 옥좌는 저 차가운 용상이 아니라 낭자의 곁이었소.”이헌이 눈물이 맺힌 서연의 하얀 이마에 아주 깊고, 그리고 숨이 막힐 듯 뜨겁게 입을 맞췄다.
“새로운 국왕 전하의 위대한 즉위를 맑은 하늘과 땅에 지엄하게 고하노라! 전하 만세! 천세 만세 만만세!!”둥! 둥! 둥!전날 내린 봄비로 먼지 하나 없이,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투명한 눈부신 황금빛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져 내리는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의 거대한 앞마당.웅장하고 심장을 울리는 거대한 북소리와 함께, 궁중 악대가 연주하는 장엄하고 화려한 아악(雅樂)이 한양 도성의 맑은 하늘을 사정없이 찔렀다.수십 년간 고인 물처럼 썩어빠진 훈구파의 구체제를 율법의 칼날로 완벽하게 도려내고, 굶주린 백성을 위한 가장 맑고 새로운 성대(盛代)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위대한 섭정 진안대군 이헌.천하의 모든 권력이 그의 군화 발밑에 엎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무거운 권력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린 그의 숭고하고 위대한 뜻에 따라.오늘 마침내,그의 열세 살 난 총명하고 어린 아들이 눈부시게 시뻘건, 황금빛 용(龍)이 웅장하게 수놓아진 곤룡포(袞龍袍)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채.인정전 앞마당에 머리를 찧으며 엎드린 수만 명의 문무백관과 성균관 유생들, 그리고 십만 백성들의 열광적인 칭송과 눈물의 환호 속에. 이 맑은 조선의 새롭고 가장 완벽한 성군(聖君)인 왕으로 성대하고 웅장하게 즉위하고 있었다.“성군(聖君)이 나셨다! 조선의 새로운 태양이 나셨다!”“대군마마의 핏줄이시니, 필시 백성을 굽어살피시는 훌륭한 군주가 되실 것이옵니다!”도성 백성들의 감격에 겨운 환호성이 파도처럼 인정전을 웅장하게 뒤덮었다.소년 왕은 고작 십 대의 아주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십여 년간 그 누구보다 엄격한 부모에게 피땀 흘려 가혹하고 완벽하게 배운 제왕학의 무거운 기품을 단 한순간도, 조금도 잃지 않은 채. 오히려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 무사
이도의 죽음과 함께 조선의 옥좌는 마침내 법적으로 비었다.그러나 대군저 앞마당을 가득 메운 만조백관과 종친들의 시선은, 텅 빈 옥좌가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만 쏠려 있었다.섭정 진안대군 이헌.십여 년 동안 국정을 대신 떠맡아 훈구파의 뿌리를 뽑고, 굶주린 백성의 세금을 바로잡으며, 무너진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운 사내.왕이 죽은 지금, 그가 곤룡포를 받아 입는 것이 가장 빠르고 자연스러운 길이라고 모두가 믿고 있었다.하지만 이헌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나는 왕위에 오르지 않는다.”“전하!”도승지 최윤을 비롯한 백관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옥좌가 비었사옵니다. 새 임금을 정하지 못하면 조정의 모든 명령과 군권이 흔들릴 것이옵니다!”“그래서 오늘 당장 도망치겠다는 것이 아니다.”이헌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웅성거림을 단숨에 눌렀다.“이도의 죽음으로 내 섭정의 책무는 끝났다. 다만 새 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국정의 공백을 막을 책임은 남아 있다. 나는 그 마지막 책임까지만 다할 것이다.”그는 천천히 곁에 서 있던 열세 살 아들을 바라보았다.아이는 아직 왕이 아니었고, 정식으로 왕위를 이을 후계자로 책봉된 적도 없었다.지금까지는 그저 진안대군 이헌과 서연의 적장자일 뿐이었다.“저 아이를 내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곧장 옥좌에 앉히지는 않겠다.”이헌의 말에 백관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예조는 왕통과 종법의 절차를 다시 확인하라. 종친들은 왕실의 계보를 놓고 공개적으로 논의하라. 삼사와 백관 역시 각자의 뜻을 숨김없이 올려라. 그리고 종묘에 고한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