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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작가: 잿빛은하수
정후는 순간 멍해졌다.

은하의 감정 하나 없는 눈빛과 마주하자,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들끓었다.

“그래서, 이걸로 날 협박하겠다는 거야?”

정후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석진이 6년 동안 당신이 키웠다고,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애가 당신 없으면 안 되는 걸 아니까 이 타이밍에 이혼을 들고 나선 거잖아. 대체 무슨 꿍꿍이야?”

은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진짜 웃게 되는구나.’

입가의 웃음을 억누르려 했지만, 이미 올라간 입꼬리를 막을 순 없었다.

‘지금 이 사람과는 무슨 말을 해도, 다 소용없겠구나.’

그래서 은하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맞아요. 당신 말이 다 맞아요.”

정후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정말 이혼할 거라면, 석진이 양육권은 절대 못 줘. 그리고 내 허락 없인, 다시는 석진이 못 만날 거야.”

그 말엔 위협이 섞여 있었다.

은하가 주저하고 흔들리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맘대로 해요. 석진이는 당신 아들이잖아요.”

그 말에 정후의 눈빛이 단단히 얼어붙었다.

그리고 은하의 얼굴을 한 치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그 안에서 무언가 흔들리는 낌새라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끝까지 은하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차분하고, 담담하고, 너무나도 낯설 만큼 차가웠다.

‘이 여자는... 진심으로, 아무 감정이 없는 거야...?’

정후는 알 수 없는 불쾌감에 가슴이 조여오는 듯했다.

그가 말을 더 이어가려던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채원에서 온 전화였다.

정후는 화면을 보자마자 짜증을 눌렀고, 전화를 받았다.

[형부!]

채원의 목소리는 밝고 가벼웠다.

[석진이 깼어요. 형부 보고 싶다고 해서요. 병원에 잠깐 와주실 수 있어요?]

정후는 감정을 억누르며 짧게 대답했다.

“지금 갈게.”

그렇게 말하곤, 은하를 다시 보지도 않은 채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래, 당신은 늘 그랬지.’

‘상대 눈에 어떻게 보이든, 본인 기분이 우선인 사람.’

은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조용히 들으며, 마침내 진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

석진은 급성 장염이었다. 사실 대단히 위중한 병은 아니었지만, 원래부터 위장이 약했던 석진에겐 꽤 큰 고비였다.

게다가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밤새 링거를 맞고 해열제를 복용한 뒤에야 겨우 상태가 나아졌고, 지금은 창백한 얼굴로 병원 침대에 기대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석진의 눈이 순간 반짝였지만, 들어선 사람이 정후라는 걸 보고는, 금세 그 빛이 사라졌다.

“아빠...”

석진은 힘없이 불렀다.

그리고 한참 망설이다가, 작게 물었다.

“엄마는...?”

정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빠보다 이모가 좋다더니, 아픈 순간 찾는 건 결국 엄마냐...’

지금 은하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정후는 어설픈 거짓말을 내뱉었다.

“엄마가 일이 좀 있어서... 끝나면 바로 올 거야.”

너무 뻔한 말이었다.

어린 석진조차 믿지 못했다. 금세 눈가가 붉어지더니, 목소리도 떨렸다.

“엄마... 진짜 안 오는 거야?”

정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석진은 이미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전에 아플 때... 엄마는 바빠도 꼭 왔어... 근데 아빠는 바빠지고 나서 한 번도 온 적 없었어...”

그 말에 정후는 말문이 막혔다. 무엇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고, 그저 마음 한편이 조용히 저려왔다.

그때, 채원이 옆으로 다가와 석진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말했다.

“석진아, 그런 말 하면 안 돼. 아빠가 회사에서 얼마나 바쁜지, 넌 모르잖아. 아빠가 열심히 일하니까 석진가이 좋은 거 먹고, 좋은 옷 입고, 병원도 올 수 있는 거야. 엄마는 몰라도, 아들인 너는 아빠 편을 들어야지.”

평소처럼 다정한 말투였지만, 정후는 이상하게 짜증이 올라왔다.

‘왜 이렇게 피곤하게 들리지...’

‘똑같은 말인데, 왜 이제 와서 거슬리지...’

정후는 채원의 말을 가로막았다.

“애 앞에서 그런 얘기하지 마.”

채원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형부?”

하지만 정후는 채원을 무시한 채, 석진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석진이를 절대 속이지 않아. 아빠가 직접 전화해 볼게.”

석진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럼... 나, 엄마가 끓여준 죽 먹고 싶어!”

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병실을 나와 복도에 선 정후는 핸드폰을 꺼내 은하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그는 스크롤을 내리던 중, 문득 최근 통화 내역이 눈에 들어왔다.

‘한 달 전...? 벌써 그렇게 됐나...’

‘그 사이, 단 한 통의 전화도 안 했다고?’

입술을 꾹 다문 정후는 은하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두 번의 신호음.

그 직후, 통화는 끊겼다.

‘끊은 거야?’

...

고급 주택가의 단독주택 안.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도착하자, 은하는 준비해 둔 박스들을 하나하나 분류하며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핸드폰이 두 번 울렸지만, 은하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무음으로 눌러 꺼버렸다.

‘이제 더 이상, 유정후와 할 얘긴 없어.’

‘답도 없는 사람과 시간 낭비할 필요는 더더욱 없지.’

“짐 다 실었습니다. 지금 출발할까요?”

은하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은하가 이사한 새집은 오래된 빌라였지만, 혼자 살기엔 충분히 아늑한 1.5룸 구조였다.

작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햇살 잘 드는 침실 하나.

방을 간단히 정리한 은하는 근처 마트에 들러 생필품과 식자재를 구입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에도 정후인가 싶어 무시하려던 찰나,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석진이었다.

은하는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편, 어린 석진은 통화 기능이 있는 시계형 전화기를 꼭 쥔 상태였다.

은하의 목소리가 들리자 반가운 듯 기뻐하다가도, 곧 억지로 표정을 굳혔다.

[엄마, 왜 아직도 안 와? 엄마가 끓여준 죽 먹고 싶다고 했잖아.]

은하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다른 손으로 옮기며 차분하게,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왜 가야 하는데?”

그 말에 석진은 말문이 막혔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하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말했다.

“엄마랑 아빠, 이제 이혼할 거야. 석진이는 원래 채원 이모가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이제 소원 이루어졌네. 축하해.”

‘지금쯤이면 알겠지. 사람 마음이란, 아무리 사랑해도 ‘무조건’은 아니라는 걸.’

[그렇지만... 하지만...]

석진은 간신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울먹였고, 금세 숨소리까지 흐트러졌다.

석진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이불을 꽉 움켜쥐며 소리쳤다.

[그럼 잘됐네! 나도 엄마가 나가는 거 원했어! 엄마는 아무것도 못 하고, 아빠 옆에서 짐만 되는 사람이잖아! 이모가 훨씬, 아니 백배 천배는 더 나아!]

은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들이 화났을 땐 말을 함부로 한다고...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말라고 하지만...’

‘하지만... 진짜 마음은 오히려 그럴 때 더 잘 드러나는 법이지.’

은하는 말없이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바뀌었다.

정후였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쾌감이 실려 있었다.

[지금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아직 아픈 애한테 그렇게까지 해야 해?]

정후는 참지 못하고 날을 세웠다.

계속해서 뭔가 말하려던 찰나, 전원 버튼을 누른 듯, 그저 바삐 끊긴 신호음만 귓가에 맴돌았다.

뚜... 뚜... 뚜...

정후는 멍한 얼굴로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 옆에서 여전히 울먹이며 석진이 물었다.

“아빠, 진짜 엄마랑 이혼할 거야?”

정후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이틀 사이에 무슨 일이 이렇게까지...’

‘전에는 이런 식으로 어긋난 적 없었는데...’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을 꾹 눌러 담은 채, 정후는 억지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꺼냈다.

“그런 거 아니야. 엄마가 요즘 좀 힘들어서 그래. 석진이가 조금만 참아주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괜히 엄마 속상하게 하지 말고, 착하게 있어야 해.”

석진은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이불만 꼭 쥐고 있었다.

그때,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채원이 따뜻한 보온 도시락을 손에 든 채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다.

“형부, 석진이는 누구보다 착하고 속 깊은 아이예요. 절대 엄마 속 썩이거나 그런 애 아니에요. 그렇지, 석진아?”

그 웃음 뒤에 감춰진 무언가...

정후는 문득,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왜... 지금은 저 웃음도 어딘가 불편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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