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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ผู้เขียน: 잿빛은하수
정후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미 설명했잖아. 더 뭘 바라는 거야?”

은하는 더는 참을 필요 없다는 듯, 짧게 잘라 말했다.

“일단 이혼합의서부터 봐요. 사인 안 하면 법원 가서 법대로 처리할 거니까.”

그 말만 남기고 은하는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정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은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순간, 속이 알 수 없는 답답함으로 뒤엉켰다.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물질적으로 부족하게 한 적도 없고...’

‘친구들 앞에서도 아내 체면 세워주려고 늘 신경 썼는데... 고작 그깟 채원이 일로 이렇게까지?’

‘요 며칠 집사람이 너무 이상해. 예전엔 절대 하지 않을 말들까지 서슴없이 하고... 표정도, 말투도, 눈빛도, 너무 낯설어...’

정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도, 속은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해 은하를 다시 찾아 나섰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정후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침대는 너무나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옷장은 반쯤 열려 있었으며 그 안에서 은하의 흔적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따로 자겠다는 건가?’

그 순간, 정후의 속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쿵!

그는 입도 열지 않고, 뒤돌아서 문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그 소리에도 은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손님방에 이불을 펴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로 자존심 상한 거야? 하지만 이번엔 절대 물러서지 않아.’

...

밤이 깊었다.

은하는 겨우 잠이 들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엄마... 엄마...”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조그마한 몸을 꼭 웅크린 석진이 있었다.

창백한 얼굴,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 작게 떨리는 입술.

“엄마... 배가 너무 아파... 계속 설사했어... 너무 아파서... 잠도 못 자겠어...”

석진은 선천적으로 위장 기능이 약했다. 기름지고 짠 음식, 차갑거나 매운 음식은 물론, 조금만 자극적인 걸 먹어도 바로 탈이 났다.

그래서 석진의 식단은 늘 은하가 직접 챙겨야 했다.

은하는 아이의 위장을 위해 온갖 요리책을 뒤지고, 맛은 심심하지만 속 편한 식단을 매번 새롭게 변형해 가며 만들어냈다.

먹기 싫다고 투정 부려도, 결국은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고... 그녀는 정말 많은 신경 썼다.

하지만 어제 석진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간 채원은, 햄버거, 치킨, 감자튀김, 아이스크림까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건 전부 사줬다.

심지어 SNS에 올릴 사진까지 찍었다.

정후는? 바로 석진 옆에 있었으면서도, 단 한 마디 제지도 하지 않았다.

“엄마...”

석진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점점 작아졌다.

작은 손이 은하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다가왔지만, 은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 손을 피해버렸다.

아이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석진의 표정이 멍하니 굳었다.

‘미안해... 하지만 이젠 엄마도 더 이상, 아무것도 받아줄 수 없어.’

은하는 침착하게 119에 전화를 걸었다.

곧 구급차가 도착했고, 은하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태웠다.

구급차 안, 석진은 마지막 힘을 짜내듯 은하의 소매를 꼭 붙잡았다.

그 눈엔 두려움과 애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엄마... 같이 가주면 안 돼...?”

은하는 천천히 아이의 손을 떼어냈다. 표정은 잔잔했고, 목소리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

“이모한테 연락했어. 곧 올 거야. 석진이도 이모가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석진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다시 밀려온 복통에 고개를 떨구었다.

구급차 사이렌이 멀어져 가고, 은하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

‘이제 시작이야. 내가 이 집을 나가는 첫걸음.’

은하는 오전 10시에 이삿짐센터를 예약해 두었다.

정후가 이혼합의서에 사인하든 말든, 일단 오늘 이 집을 떠날 것이다.

Y국으로 연수를 떠날 날까지는 이제 겨우 두 달 남짓 남았다.

은하는 평소 정후의 회사에 이름만 올린 채 명목상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정후는 줄곧 말해왔다. 은하는 굳이 돈을 벌 필요 없다고, 아들만 잘 키우면 된다고.

하지만, 석진이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은하에게도 여유 시간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던 은하는 그 시간을 활용해 온라인으로 프리랜서 작업을 이어갔다.

2년 넘게 꾸준히 쌓은 경력 덕분에, 지금은 제법 실력 있는 디자이너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이번 Y국 연수 역시, 공모전에 출전해 수상한 덕분에 받은 공식 초청이었다.

‘전생엔... 이 기회, 남채원 때문에 놓쳤지.’

‘하지만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아!’

‘누구에게 기대는 인생보다, 스스로 강해지는 게 훨씬 중요하니까.’

이번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은하는 마음속 깊이 결심했다.

...

아침 7시.

은하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먼저 눈을 떴다.

주방으로 가서 평소처럼 자신을 위한 조용한 아침을 준비했다.

소화에 좋은 황태죽 대신 오늘은 부드러운 율무죽.

그녀가 막 설탕 한 조각을 넣고 불을 붙이려던 순간, 거실 쪽에서 급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세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후였다.

남자의 표정은 이미 잔뜩 굳어 있었고, 말투에는 분노가 가득 실려 있었다.

“석진이 어젯밤에 급성 장염 걸린 거 알면서, 혼자 병원에 두고 그냥 집에 온 거야?!”

은하는 말없이 죽 냄비의 뚜껑을 열어 김을 날렸다.

그 뒤 조용히 정후를 향해 돌아섰다.

“남채원한테 연락했어. 돌봐줄 사람 필요하니까.”

정후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석진이가 찾은 건 엄마였어! 애가 그렇게 아픈데, 엄마라는 사람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아이한테 화풀이해?! 그게 할 짓이야? 그게 엄마야?!”

은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담담하고 조용한 눈빛으로 정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엄마가 아니라고 쳐요. 그럼, 당신은 제대로 된 아빠예요?”

정후는 잠깐 말을 잃었다.

은하의 목소리는 날카롭지도 않았고,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진실을 하나하나 꺼내는 것뿐이었다.

“석진이 위장이 약해서 기름지고 짠 음식 먹으면 안 되는 거, 당신은 기억도 못 하죠? 그런 당신이 날 비난할 자격 있어요?”

정후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표정이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몰랐지. 그런 건... 당신이 미리 말했어야지.”

은하는 가만히 그 말을 듣다가, 차가운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말했어요. 여러 번, 여러 번 말했어요. 당신이 한 번도 안 들었을 뿐이에요.”

‘나는 늘 말했어. 다만, 당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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